언제 다시 만나랴 / 한국수필 6월호

[서동근]

언제 다시 만나랴

서동근

밤새 잠을 뒤척이다 한밤중에 깨어났다. 악몽이라 하기엔 석연찮고 무언가 짓눌리는 듯한 중압감에 비몽사몽 잠을 설칠 때가 많다. 계절 탓일까? 바뀌는 계절에 몸이 적응하기 위한 몸살이려니 생각했다. 요즘은 그런 날이 무척 잦다.

상당산성에 올랐다. 몸과 마음이 찌뿌둥할 때마다 자주 찾다 보니 이제 습관이 되어 버렸다. 산성 초입에 계신 부모님 산소에 들러 문안 인사를 드리고 성곽을 천천히 걸었다. 봄비가 내린다. 메마른 대지에 단비임엔 분명하나 올해는 유난히 봄비가 잦다. 남쪽 통문 위에 올라섰다. 청주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가슴에 늘 답답한 응어리가 혈전처럼 찐득찐득 달라 붙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일상의 찌든 때를 벗겨 내듯 폐 속의 묵은 찌꺼기를 토해냈다. 희뿌연 안개 속에 내리는 비가 마치 뒤돌아서 소리죽여 우는 여인의 눈물 같았다.

평소 같으면 사람들로 북적일 주말 산행길이 한적하다. 받쳐 든 우산에 튕겨진 물방울이 얼굴을 때린다. 촉감이 부드럽고 시원하다. 뜸성뜸성 걷는 사람들 틈에 호젓이 나만의 시간에 빠져 들었다.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새순이 올라왔다. 저마다 여린 잎사귀에 맺힌 물방울을 작은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제힘에 부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보는 내가 안쓰럽다. 물은 모여 시냇물을 따라 흐르다 강을 만나 바다에 이른다. 자연의 순리다. 수천 년 수만 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상당산성은 백두대간의 줄기에 속한다. 속리산 천왕봉에서 안성 칠현산에 이르는 한남금북정맥 줄기의 일부다. 약 2,4km의 석축으로 이루어진 성곽과 성안에 작은 마을이 있다. 주말마다 시민들 나들이 쉼터로 북새통을 이룬다. 공남문으로 올라 서북쪽의 미호문에 이르렀다. 일부 성곽을 보수했는지 새로 짜 맞춘 듯, 반듯한 대리석들이 수백 년을 버티고 지켜온 성돌과의 조화가 왠지 부자연스럽다.

빗방울이 갑자기 굵어졌다. 하늘은 잿빛으로 습기를 잔뜩 머금은 채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바람에 우산이 휘청하더니 빗방울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얼른 미호문 난간 밑으로 숨어들었다. 하늘을 쳐다본다. 수직으로 내려치는 빗방울들이 일순간 미호문 지붕에 부딪쳐 산산이 부서진다. 한참을 그렇게 내리는 비를 넋을 놓고 지켜봤다.

미호문은 상당산성 4대문중 하나다. 서북쪽 능선에 위치한 문으로 서쪽으로 옥산 국사봉을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보은 피반령으로 향해있다. 지붕 용마루가 방향을 경계하듯 동서를 정확하게 가르고 있다. 자세히 보니 떨어지는 큰 물방울이 지붕선 용마루에 부딪친 후 어떤 방울은 동쪽으로 튀고 또 어떤 방울은 서쪽으로 튀어 기왓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 몸으로 내려오다 어느 순간 갈라진다. 동쪽의 물은 낭성천을 따라 충주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서쪽 물방울은 무심천을 따라 금강에 이르게 된다. 하나였다가 순간 운명이 바뀌고 각기 다른 장소와 환경에 순응하다가 결국에는 바다에 안착한다.

아들을 떠나보낸 지 15년이 흘렀다. 무심한 듯 무심하지 못한 시간이었다. 흔히들 시간이 약이라고 한다. 한번 가슴에 상처로 박힌 옹이는 무시로 나를 들쑤신다. 만나고 헤어짐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새봄에 땅을 비집고 돋아나는 새싹도 가을이면 으스러지고 천만년 굳었던 바위덩이도 엔젠가는 깨지고 부서져 먼지가 될 것이다. 하물며 나약한 인간임에야 어찌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겠는가.

요즘 부쩍 주변에서 자녀들 결혼 소식이 들려온다. 예전에 비하면 결혼적령기도 많이 늦어지고 독신을 고집하는 사람도 많아졌지만 결혼은 인륜지대사다. 젊은이들이야 어찌 생각하든 부모로서는 남녀가 짝을 찾아 가정을 이루는 것이 당연한 바람이다. 하나밖에 없는 딸아이도 어느덧 삼십 줄이 넘었다. 아들을 보내고 딸에게 집착하는 내 모습을 본다. 사람 마음은 참 얄궂다. 허한 마음이 집착으로 변할 줄 나도 몰랐다.

잠시 산행을 멈추고 한동안 성문 벽에 기대어 상념에 빠져 든다. 처음 하나의 온전했던 물체가 갈라져 전혀 다른 세상을 맞이한다. 의지나 의사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상황을 맞는다. 어떤 빗물은 흘러 바다에 이를 테고 또 어떤 빗물은 땅속에 소리 없이 스며들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초목의 목마른 갈증을 적셔주기도 하겠지. 어떻든 물의 본질은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굴곡지거나 거침이 없는 사방이 탁 트인 바다, 하늘과 맞닿은 무한한 공간, 그곳은 안식이고 평화이고 쉼의 정점이다. 삼라만상 모든 인연의 집합체이다. 아버지 어머니가 계시고 아들이 있다. 출렁이는 물속에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고래가 날아다닌다. 고통과 번뇌도 없다. 구분 없는 웃음이 합창을 한다.

갑자기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사위가 시끄럽다. 여러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온다. 어느덧 빗줄기가 약해졌다. 하늘도 조금씩 구름을 벗고 있다. 무거웠던 내 마음도 어느새 가벼워졌다. 여전히 작은 빗방울들이 산성 미호문 지붕 용마루에 내려앉는다. 마치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망서리듯이

서동근 sdk2008@hanmail.net

한국수필 등단(2023),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수필작가회, 무심수필문학회 회원

[이근형]

"출렁이는 물속에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고래가 날아다닌다. 고통과 번뇌도 없다. 구분 없는 웃음이 합창을 한다."

비가 오는 상당 산성에서 비에 젖어 서성이는 서동근 선생님이 보입니다.

[綠雲 김정옥]

비가 내리는 날 상당 산성을 걸으며

비의 순환과
만나고 헤어짐의 진리와 치환하며
마음의 치유를 얻는 의미 깊은 이야기에 공감합니다.

무심 7호 주제 수필 '청주 순례, 그 여정에서 나를 만나다'에 내도 될듯 ㅎ

[이호윤]

잘 읽었습니다. 자연의 순리도 거스를수 없는 운명도 한낱 사람에 불과한 우리에겐 막막한 태허로 느껴질 뿐 인것 같습니다. 드러내지않은 단장지애는 더욱 먹먹한데 무심한 듯 담담한 글이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