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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사랑아, 너는 복이 될지라! (2)
- 조태성
[2. 복의 근원이 되려면 고향을 떠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어디로 가야 좋을지 말씀도 안하셨으면서 (죄송한 표현이지만) 너무도 뻔뻔하게, 당연하다는 듯이 고향을 떠나라고 하신다. 이게 말인가, 방구인가? 이게 말이 되는가? 고향은 어떤 곳인가? 우리에게 고향이란 안정감을 주는 곳이다. 친숙하고 익숙한 곳이다. 고향을 잠시 떠난 사람에게는 늘 그리운 곳이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다. 우리의 추억과 희로애락이 머물러 있는 곳이다. 친구들과 친척들이 있는 곳이다.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 온 우리 가문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고향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면서 조금도 아브라함을 위로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허풍에 가까운 큰 소리만 잔뜩 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신이 나타났고 만나주셨으며 감히 선택해주셨다. 얼마나 초자연적인 감동과 감격이 온 몸과 영혼을 뒤흔들고 있었을까? 나름 뭔가 거창한 축복의 약속도 받았다. 정신 차리기 어려울 만큼 좋긴 하다.
그러나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자. 정든 고향을 떠나서 어딘지 모를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것도 꿈과 비전, 열정이 가득한 청년 아브람이 아니다. 70살이 넘은 아브람 할아버지다. 과연 진짜 하나님을 만난 건지, 이상한 영을 만난 건지 의심해봐야 한다. 이 문제도 넘어서서 자기 확신이 있어도 문제다.
나 혼자 고향을 등진다고 생각해도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아브람에게는 아내가 있다. 아브람과 사래의 나이 즈음 되면 호르몬이 균형을 찾아도 벌써 찾았다. 남자나 여자나 갱년기가 지나갔을 시기라는 거다. 호르몬 흐름이 바뀐다. 여성들은 여성 호르몬이 줄어들고 남성 호르몬이 나오기 시작한다. 목소리가 커진다. 남성들은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고 여성 호르몬이 증가한다. 목소리가 작아진다. 감수성이 커진다. 드라마 보다가 운다.
남녀가 갱년기를 거치면서 특히, 여성분들은 억눌렸던 감정들을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남편 분들께 소리 지른다. 못 참는다. 아니, 안 참는다. 집에서 단 둘이 있을 때만이 아니다. 거리에서, 식당에서, 마트에서, 교회 모임에서조차 목에 핏대를 세우고 ‘버럭’ 소리 지른다. 감수성이 충만한 남편들은 조용히 운다. 삐쳐서 거리를 배회한다. 어떤 여성(음...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는...^^;;)이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나한테 잘해~. 나중에 내 목소리 커진다. 나 소리 지른다! 그러면 당신 운다아~!!!”
이렇게 갱년기가 지난 상황에서 아브람이 아내 사래님께 눈치 보며 말씀드린다.
“여보, 우리 고향을 떠나야 할 것 같아요...”
사래는 아브람에게 무슨 소리를 할까? 드라마 대사 중에 이런 대사가 있더라.
“이 망할 영감탱이가 노망이 날려면 곱게 나야지.”
아브람이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혼자라면 가겠는데 아내를 데리고 가야하니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이다.
우리가 교회개척의 확증을 여러 가지로 받았음을 앞의 글에서 잠시 나누었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성령님께서는 교회개척이 하나님의 계획이심을 인정하게 하셨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 씨름하는 동안 교회개척에 대한 말도 안 되는 기대감과 흥분이, 마음의 소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배운 대로 더 큰 확증을 구했다. 개척은 가족 모두에게 영향을 주기에 그렇다.
당시에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다. 아내가 첫째 한별이를 임신했을 때, 우리 4식구가 예배를 드릴 때 조심스레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회개척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면 우리 식구들이 함께 확증을 받아야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개척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기도해 주시고요. 하나님의 뜻이라면 동일한 교회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해주세요. 한 달 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음성듣기에서 가족들이 함께 확증을 받을 때 중요한 점검방법을 기억하실 것이다. 동일한 응답을 받거나, 다른 사람이 인도하심을 나눌 때 인정되고 수긍이 간다. 그대로 따르는 순종 혹은 동의를 하게 된다. 이런 부분들은 빌립보서 2장 13절과 14절을 통해 나누며 함께 배웠다. 결정을 할 경우 그 결정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함께 응답과 인도하심을 확증처럼 받아야 한다. 인도하심이 있으실 때 성경적인 음성 듣기와 관련하여 포스팅을 하려고 한다.)
드디어 한 달 후 가정예배 시간에 서로 확증 받은 부분을 나누게 되었다. 아내와 내가 동일한 이름을 확증 받았다. 어머니께서는 “평안한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인 것 같다.”며 말씀하신다.
다시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떠올려보자. 아브람의 이야기를 노망 난 노친내의 이야기로 들었다면 반드시 말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함께 고향을 떠났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사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알 수 없는 소망과 확신을 가졌던 거다.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순종을 선택한다. 그 결과 아브람과 사래는 복의 근원이 되었다.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통로로 쓰임 받게 된 것이다.
아브람의 고향은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상들이 득실득실한 귀신 소굴이었다. 즉, 상징적인 의미에서나 장소적인 의미에서나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장소가 아니라는 의미다. 귀신들이 사람들의 생각가운데 작용한다. 자신의 힘과 자신의 노력과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게 만든다.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어 힘겹게 아등바등 살아가게 만드는 곳이 우상들의 소굴이었던 아브람의 고향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나와 여러분에게 떠나야 할 고향은 어디인가? 우리가 영적으로 떠나야 할 마음의 고향은 어디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방해하면서, 나 자신을 의지하고, 나 자신만을 위해 살도록 만드는 떠나야 할 고향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주일 오전 한 번이면 충분해.”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셔.”
“성경을 몰라도 나는 구원받았으니 괜찮아.”
“나 자신도 돌보기 벅찬데 전도는 부담스러워.”
“우리 교회는 돈이 많으니까 나는 헌금 하고 싶지 않아.”
어떤 사람에게는 예배에 대한 게으르고 안일한 생각이 떠나야 할 고향이다. 직장에서 일이 많고 바쁜 성도님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시간이 있는데 예배를 가볍게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면서 예배는 경홀히 생각한다. 자기가 예배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여 준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 결정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에 대한 게으름이 떠나야 할 고향이다. 누군가에게는 말씀에 대한 게으름, 말씀을 가볍게 대하는 태도가 떠나야 할 고향이다. 누군가에게는 재정이, 봉사가, 전도에 대한 게으름이 떠나야 할 고향이다. 누군가에게는 사랑 없음이, 분노가, 인색함이 떠나야 할 고향이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회자가 여자 가수와 대화를 한다.
“제가 정말 친한 언니가 있는데요. 거리가 멀어서 가 보진 못했어요.”
그때 사회자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의미심장한 멘트를 한다.
“안 가봤으면 안 친한 거야.”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맞다. 안 친한 거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믿음은 행함이라고 했다.
행함이 없다면 하나님과 안 친한 거다.
그런 믿음 없는 모습의 영적 고향에서 떠나야 한다.
그런 행함 없는 모습의 영적 고향에서 떠나야 한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마음의 중심, 숨겨진 동기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신다.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죄에 대해서는 얼음 같은 차가운 시선으로, 엄격한 잣대로 바라보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함께 보라고 선언하시는 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바 되리라(롬 11:22; 개역한글)
지금 우리 안에 떠나야 할 고향이 무엇인가? 성령님께서 양심의 가책으로, 성령님의 감화와 감동으로 잠잠히 알려주시는 떠나야 할 고향이 무엇인가? 무엇이 되었든지 떠나야 할 고향을 떠나야만 나도 여러분도 복 자체답게 살 수 있다. 순종할 때 하나님께 쓰임 받는 복 된 인생이 될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 덕분에 우리 모두는 공평하신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쓰임 받는 것은 좀 다른 문제다. 공평하게 사랑받고 있지만 쓰임 받는 것은 순종의 문제다. 아브람과 사래처럼 “고향을 떠나라.”는 부르심에 “아멘.”으로 순종하셔서 예비하신 복 된 삶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성령님과 함께 샬롬입니다.^^
첫댓글 아멘 ^^
샬롬♧ 축복의 통로로 더욱 쓰임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그 여성이 저라고 말해도 괜찮은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