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김백겸 시인이 그간 상재한 8권의 시집과 최근 발표한 시 중에서 남기고 싶은 시들을 모아 시선집 『커피와 사약』을 냈다.
이번 시선집은 시인이 걸어온 40년 시적 성과를 집약했다는 점에서 자못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등단 이후 줄곧 기호와 꿈,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의 그리움과 슬픔과 웃음, 인간 문명의 철학과 유기적인 관계를 통찰하며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시선집을 펼치면 스스로를 ‘몽상 학인’이라 부르는 시인을 만난다. “붉은 뺨으로 아름답던 몽상 학인의 청춘”(「무궁화 생각」)과 “이 세상의 조용한 풍경 한가운데… 시간의 구두 뒤축에서 향기로운 꿈으로”(「가을 생각」) 흔들리는 저문 욕망의 시간이 다층적으로 펼쳐진다. “남보다 한 발짝 늦게 가라고 속삭”이는 마음의 「북소리」와 “탄생과 죽음의 이상한 수수께끼 속에서 아름다움이 가리키는 존재의 신비-그 부적(付籍)을”(「개망초꽃」)을 찾아가는 감각이 웅숭깊다.
이번 시선집의 매력은 시인에게 중요한 키워드인 ‘비밀’이라는 상징을 다시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시 「비밀정원」에서는 황금사과가 빛나는 “정원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이정표를 들여다보았던가”와 “나는 그 앞을 그냥 지나쳤다”는 진술이 충돌하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시 「비밀 방」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의 관심과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세계를 응시한다.
김백겸 시인은 “40년 결산이 시집 한권 분량이라니 성적표가 초라하다. 재사(才士)는 시집 한권으로 문학사에 이름을 남기는데 범사(凡士)는 각고의 시행착오 끝에 시집 한권을 남기는 비애.”(시인의 말) 라고 토로하고 있지만 이번 시선집 발간은 시인의 시세계를 한눈에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뜨거울 수밖에 없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저자
김백겸시인
198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기상예보」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가슴에 앉힌 산 하나』 『북소리』 『비밀 방』 『비밀 정원』 『기호의 고고학』 『거울아 거울아』 『지질 시간』이 있고, 평론집으로 『시적 환상과 표현의 불꽃에 갇힌 시인들』 『시를 읽는 천 개의 스펙트럼』 『시의 시뮬라크르와 실재(實在)라는 광원』 등을 냈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목차
1. 기상예보/ 비를 주제로 한 서정별곡/ 네거리에서
2. 가을 생각
3. 페르소나‐갑옷/ 호두의 안과 밖/ 북소리/ 무궁화 생각/ 벌레
4. 비밀 방/ 횃불/ 산수화/ 가을 예언/ 스카이 라이프/ 음악치료/ 프로의 고통/ 봄비/ 낙화유수落花流水/ 사중창四重唱/ 기쁜 달/ 원자력병원의 새벽/ 주식회사 별/ 고속도로/ 안개‐꿈/ 시간의 눈물
6. 고양이 눈 속의 고양이/ 채송화/ 불안과 행복 사이/ 견본담채絹本淡彩‐서울/ 여미지 식물원/ 시 숲/ 아름다움을 위한 병고病苦/ 진홍빛 폐허/ 제주올레길/ 생명나무와 뱀/ 기호의 고고학/ 세포 도시/ Demeter‐대지의 열락悅樂/ 마법 피리‐만파식적萬波息笛/ 거미 신화
7. 푸른 장미‐이데아/ 개망초꽃‐부적符籍/ 컬럼비아산 커피/ 교차로에서‐산책가의 방황/ 매트릭스matrix‐창세기/ 거울아, 거울아/ 출판 공장‐책의 광택/ 불 꺼진 마을‐소비 사회/ 대전시 중구 대흥동 326번지/ 신데렐라, 신데렐라
8. 지질 시간 rewriting/ 홍루몽紅樓夢과 out of africa/ 창백한 달‐포세이돈의 인장印章/ 코스모스‐태양의 딸들/ 길고양이는 유령처럼 길 한가운데 앉아 있다/ 밤하늘 눈썹에는 눈물 같은 별들/ 붓 천 자루에 벼루 백 개/ 동창東窓과 동창凍瘡 사이/ 목포의 눈물/ 이집트 환상/ 로미오의 꿈‐칼리 여신을 사랑함
정원의 입구가 드러났다 입구 안에는 황금사과가 새벽의 어둠 속에서 빛났다 곧 사라질 신비를 향해 심장이 두근거렸고 발걸음을 멈춘 내 발길을 늙은 역사가 호기심으로 쳐다보았다 늙은 역사가 내 뒤를 따르면 비밀은 새 이름을 지울 것이 분명했다 정원의 입구를 그냥 지나쳤다
정원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이정표를 들여다보았던가 정원에 대한 소문과 단서를 찾아 도서관과 밀렵꾼들의 시장을 돌아다닌 구두의 낡음은 무엇으로 보상할 것인가 왕궁과 부자들의 울타리에서부터 은자들의 고졸古拙한 뜰에 이르기까지 정원의 설계도를 들여다 본 눈의 피로는 또 얼마인가
그 정원의 입구가 내 앞에 순간적으로 드러났다 나는 그 앞을 그냥 지나쳤다 황금사과에의 유혹이 여신을 향한 욕망처럼 갈증을 불러일으켰다 입구는 안개처럼 왔다가 안개처럼 스러지는 새 이름이었는데 늙은 역사가 담배를 피우며 죽음의 냄새를 풍겼으므로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정원의 입구를 지나쳤다
그 정원의 아름다움 비늘구름이 노을을 받아 거대한 붕새의 날개로 불타오르는 변신이나 들판의 잡초였던 풀이 구절초의 꽃을 피워 올리는 둔갑의 순간에서 잠깐 동안 모습을 드러내었던 비밀정원을 놓쳐버렸다 지식과 경험의 울타리에서 문지기로 사는 늙은 역사의 간섭 때문에 내 심장이 황금사과처럼 빛이 나는 피안을 질투한 죽음의 훼방 때문에 - 「비밀정원」 전문
하늘 흐리고 안개 낀 숲엔 우울이 내려와 있음 구름에 갇힌 빛살들 허공에 날개 자국을 긋고 가는 멧새 모두 표정을 남기고 있지 아니함 길 잃은 고아처럼 서서 플라타너스는 적막을 날리고 풀씨로 흩어진 슬픔은 북북동에서 북북서로 방향을 바꿈 폐부로 흘러드는 저기압의 음모 백마일 밖 한랭전선은 풀잎들의 잠 뿌리 뽑을 폭풍을 몰고 오는 중임
지금은 모든 사랑이 위험함 외투를 걸친 우리의 꿈 방독면을 쓴 채 큰길로만 다님 골목마다 비수를 품고 매복한 어둠 시간들의 휘파람 대꼬챙이로 눈 찔러 오는 저녁 지금은 모든 생각이 위험함 문 닫고 굳게 빗장을 지른 거리의 불빛들 창틈을 엿보는 소문과 함께 얼굴 까맣게 죽는 지금은 모든 그리움이 위험함
찬비가 내림 우산을 들고 사람들은 사람을 비껴감 낯선 총을 멘 겨울의 척후병들이 요소요소 서 있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시베리아 삼림을 막 빠져나온 러시아의 절망도 보임 공중엔 바람의 채찍 가득해 두려움에 야윈 나목들의 어깨 더욱 가늘고 겨울잠에 젖어 봄날을 꿈꾸는 개나리 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