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베를 꿈꾸다 / 박동조
1.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중이었다. 몇 계단 앞에는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올라가고 있었다.
“돈 벌어 엘베 있는 아파트로 이사 갈 거야”
남자는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남자의 결연한 말투 때문이었을까? 다른 말은 날아가 버리고 그 말만 콕 귀에 박혔다. 마음 안에 출렁이는 희망의 파장이 얼마나 컸으면 어쩌다 들은 내게까지 충격파가 전해 졌을까! 그 말이 깊고 깊은 잠의 세계로 밀어 넣고 살았던 한 기억을 흔들어 깨웠다.
2.내가 사는 집은 엘리베이터가 보편화되지 않을 때 지은 6층짜리 아파트다. 뭐가 씌었을 때가 있다. 이 집을 살 때 내가 그랬다. 지인의 소개로 집을 둘러보러 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 안까지 파고든 환한 햇볕이었다. 앞 베란다에서는 멀리 첩첩이 두른 산이 보이고, 뒤 베란다에서는 연둣빛 뒷산이 정원처럼 가까웠다. 아침저녁으로 그런 풍광들을 마주하고 산다면 엘리베이터가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았다.
3.그 자리서 계약서를 썼다. 그 무렵, 이 도시에서도 엘리베이터를 장착한 고층아파트가 우후죽순처럼 솟아올랐다. 다가오는 시대는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가 주거 문명의 대세가 될 거라는 예측 같은 건 내 머리에 없었다.
4.이사 오고 얼마 지 않아 나의 이상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무거운 짐을 꼭대기 층까지 올리려면 무릎이 시큰거리고, 심장이 발작하듯 요동쳤다. 문제는 나이였다. 세월이 한 켜 한 켜 쌓일수록 몸의 기운은 반비례로 쇠락해 간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젊을 때의 삶은 예측이 불가하나 생활 전선에서 물러난 노년의 삶은 불 보듯 짐작이 가능한 것을, 왜 그것을 간과했는지 자신이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나이가 들수록 병원이 가까운 곳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게 후회되었다.
5.거기다 나를 홀린 풍광은 눈에 익는 순간부터 아무런 정서적 작용을 못 했다. 뒷산에 진달래가 피고, 벚꽃이 만발해도 “어머나, 꽃이 폈네!” 한 번 감탄하면 그만이었다. 반면 엘리베이터 있는 집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졌다.
6.‘세상에 집은 많다, 마음과 주머니 사정이 맞아떨어지는 때가 오면 해결될 일’이라고 마음을 편하게 가질 즈음, 남편이 백혈병에 걸리는 시련이 닥쳤다. 크나큰 근심은 작은 근심을 잠재운다. 어떤 걱정도 경각에 달린 가장의 목숨 앞에서는 먼지와 같았다. 앞날의 안위를 보장하는 돈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을 마련하려는 꿈도 목숨을 살리는 조건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를 살릴 수 있다면 움막 같은 집에 세입자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가장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이라는 말을 뼛속 깊이 새기는 순간이었다.
7.일곱 달의 입원 생활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날은 하늘도 청명했다. 아파트에 도착해서 꼭대기 집인 6층까지 난간대를 붙들고 여든세 개 계단을 겨우겨우 올라가는 그의 뒤를 일곱 달 동안 간이침대에서 잠자며 간호한 내가 그를 받치는 자세를 하고 뒤따랐다. 그때처럼 엘리베이터가 절실했던 적이 없었다.
8. 치료와 투약 기간, 그리고 관리 기간을 합쳐 다섯 해가 지났을 때, 그는 말기 암으로 분류되는 백혈병을 거뜬히 이겨내고 완치판정을 받았다. 그렇다고 일할 수 있는 건강 상태는 아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은 차라리 체념하는 게 낫다. 그가 병마를 맞는 순간 내 머리에서는 엘리베이터를 갖춘 집에 대한 꿈이 미련 없이 사라졌다.
9.나는 적응력이 남다르다는 소리를 듣는다. 이 말은 합리화하는 재주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연연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건 어리석다.
10.엘리베이터가 없어 수시로 짜증을 부추기던 집이 꿈을 체념하고부터 하나둘 장점이 보였다. 평수가 좁은 것도 체력이 고갈된 나이에 청소하기 수월해서 좋다고 쾌재를 부르게 했다. 서민 아파트라 잘난 척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마음을 편하게 했다. 계단 오르내리면서 단련이 되어서일까? 이사 오기 전부터 불편했던 무릎관절이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멀쩡해졌다. 날씨가 궂어 공원 걷기가 어려운 날은 계단 오르기로 운동을 대신한다.
11.나도 신혼 때는 앞서가는 저 젊은 부부처럼 결연한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길은 마음먹은 대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느닷없는 행로의 이탈로 예측하지 못한 늪에다 데려다 놓기도 했다.
12.월급 모두를 저축해도 십여 년의 세월이 걸려야 엘리베이터 있는 아파트의 주민이 될 수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앞서가는 남자의 꿈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젊다는 말은 뭐든 꿈꿀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닌가. 저 부부가 엘베 있는 아파트의 주인이 되는 꿈을 이루기까지 큰길만 이어지기를 기도하면서, 저토록 갈망이 크다면 젊은이의 꿈은 이루어질 거라고 응원을 보낸다.
13.인생이 잠깐이라더니 꿈꾸고 모색하던 젊은 나는 어디로 가고 체념과 합리화의 달인이 된 노인이 남았다. 요즘 들어 그러구러 인생 다 살았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서운하기도 하고 홀가분하기도 하다.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시간은 엘베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생 종착역에 데려다 줄 것이다.
14.아파트 나이가 서른일곱 살이다. 아파트 외벽에는 재개발을 위한 현수막이 붙어 있다. 재개발이 이루어지면 덤으로 값도 오를 것이다. 당연히 엘리베이터 있는 고층아파트로 거듭나겠지. 현수막의 문구가 이루어지기까지는 십 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다고들 한다. 나도 십 년만 더 살면 엘리베이터를 장착한 아파트 주민으로 거듭날지 두고 볼 일이다.
첫댓글 선생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시는 날이 더 빨리 오면 좋겠습니다.
그날이 오면, 제가 키우는 벤쿠버제라늄 분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