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주) 2015년3월13일 백의종군로고증연구보고회(순천향대)에 참석했습니다. 이 글은 고증연구가 중요하고 의미 있음을 시사하는 글이라는 생각에서 올립니다.
1. 충무공이 상여를 따르며 통곡한 길
아들, 순신이 서울로 잡혀 간지 한 달이 지나자 여수 고음내(곰내, 웅천)에서 애끓던 어머니(82세)는 노구를 배에 실었다. 16세기말, 돛배를 타고 파도를 헤치는 열흘간의 바닷길은 험난했다. 한편 충무공은 사형을 면하고 국문 받은 몸으로 아산에 당도했다. 이때의 일기를 보자:
4월 12일 맑다. 종 태문이 안흥량에서 돌아와 편지를 전하는데 ”초아흐레에 어머니와 위아래 모든 사람이 무사히 안흥량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4월13일 맑다.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 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했다. 곧 게바위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애통함을 다 적을 수 없다(뒷날에 적다)
4월16일 궂은 비 오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오며 마을을 바라보니 찢어지는 듯 아픈 마음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집에 와서 빈소를 차렸다. 비는 퍼붓고 남쪽으로 갈 날은 다가오니, 호곡하며 다만 어서 죽었으면 할 따름이다.(뒷날에 적다)
나는 이 길을 제일 먼저 가 보고 싶었다. 도대체 중방포가 어디이고 게바위는 어디일까? 충무공이 집에서 그곳까지 버선발로라도 뛰어가고 싶은 애통한 심정이 느껴졌다. 실제로 충무공은 부고를 접하자마자 뛰어 갔고, 다음날에도 갔다. 2011년8월에 혼자서 가 본 그 길을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기로 했다. 나는 동창회게시판에 아래와 같이 순례를 안내했다:
백의종군하던 죄인 이순신은 궂은 비 맞으며 모친의 상여를 뒤따르며 통곡했습니다. 저는 난중일기 정유년 4월의 이 기사를 읽다가 복받치는 느낌을 받고 이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함께 걸어봅시다.
1. 일시 및 집합장소: 2012년11월14일(수) 10시 온양온천역 1번 출구 집합
2. 전철 시간표: 배차간격 35분. 다음열차 타면 23분 지각이니 앞 열차 타십시오. 급행 없음.
서울역-->온양 2시간12분(7:30-->9:49) 다음열차 35분 후
3. 준비물: 방한복장, 식수, 중식, 행동 간식
4. 일정: 18km 5시간
온양온천역(10:00)>아산대교>곡교들과 곡교천둑방길>중방리>중식(12:30-13:00)
>해암리(게바위: 묵상의 시간 14:30-15:00)>624 지방도로(버스로 이동)>온양온천역(16:00)>뒤풀이(16:00)>해산(18:00)
5. 기타: 참고자료 제공. 발생되는 경비는 각자 부담
대동여지도를 보면 곡교천, 아산 영인산, 온양행궁, 견포(犬浦)가 보인다. 견포는 혹 갯바위, 개바위, 게바위, 해암(蟹岩)이 아닐까? 도로명지도와 스카이뷰 지도를 비교해 보면 대체로 찾기에는 스카이뷰(위성뷰) 지도가 좋음을 알 수 있다. 지형이 보이므로 걷기 좋은 길인지 아닌지 예상하는데 편리하다.
이순신은 8세 전후에 아산의 외가댁(지금의 현충사) 마을로 이사했다. 그 곳은 당시의 아산 현에 속한 땅인데, 온양 및 천안의 접경이다.
2. 현수막과 깃발 준비
사람들은 높은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백의종군하겠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백의종군’이 사람들에게 긍정적 메시지를 전달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백의종군이 지도자 아닌 민초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충무공의 백의종군 사실을 안다. 그러나 충무공의 백의종군 행적을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만일 그 행적을 잘 안다면 백의종군이 주는 가르침을 보다 잘 마음에 새길 것이다. 그리고 충무공을 본받는 삶을 살려는 생각을 좀 더 할 것이다.
나는 백의종군이 주는 의미를 마음에 잘 새기게 하는 방안으로 충무공이 간 길을 순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이런 취지를 알리려면 홍보를 해야 한다. 홍보를 어찌하면 좋을까? 나는 자기가 먼저 백의종군로를 걸어 본 후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길을 걸으면서 과연 충무공의 삶을 묵상하고 마음에 새기게 되는지 실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년 동안에 백의종군로를 순례하기 위해 자료를 찾고 실제로 걸어본 다음에 내린 결론은 이러하다:
1. 옛길은 대체로 신작로, 국도, 고속화도로가 되었고 백의종군로도 그러하여 걷기에 불편한 곳이 많다.
2. 경상남도는 백의종군로를 처음으로 개발했고 전라남도도 홍보하고 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도 이를 본받아 길을 안내하면 좋겠다.)
3. 차도를 피하여 농로, 산길 등, 차가 아닌 사람이 다니는 길을 찾아서 걷는 것이 좋다.
4. 길을 걸으면 국토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지방의 민속을 체험하므로 즐겁다.
5. 길을 걸으면 긍정적 생각을 많이 하며 건강에 좋다.
6. 백의종군로 순례는 충무공의 삶을 마음에 새기는 좋은 방법이다.
7. 백의종군로를 걷도록 안내하는 책은 별로 없다.
8. 백의종군로 홍보는 중요하며 개인이라도 홍보에 나서는 것이 가치 있다.
나는 걷기 시작한지 1년이 지난 후에 동료들에게 순례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동료들의 요청도 있었기에 현수막과 깃발을 제작하기로 했다. 나는 파워포인트로 현수막과 깃발을 설계하여 일러스트레이터 파일로 만들어 현수막 제작회사에 보냈다. 북가좌동에 있는 현수막 제작소의 직원이 디자인 파일의 오류를 지적해 주어 수정했다. 출력된 현수막의 한쪽 끝 부분을 잘라 깃발로 만들었다.
3. 전철을 이용한 이동
서울에서 온양까지는 전철로 이동하는 것이 좋다. 2시간 정도 걸리지만 전철역까지 접근이 편하다. 나는 전철 시간표를 안내해야 하므로 서울메트로 사이트에서 각역의 전철 시간표를 검색했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특정 열차가 언제 어떤 역에 도착하는지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었다. 그래서 각 역의 열차 출발 시간표를 보고 추정하여 어떤 열차를 타면 온양에 10시에 도착할지 추정했다. 이렇게 만든 탑승 시간 정보를 게시판에 올리고 문자로 알려 주었다.
노 작가는 은평구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하고 전철을 탔다. 시간표를 전달받았으나 훨씬 먼저의 전동차를 탔기에 신도림역에 40여분 일찍 도착했다. 온양 가는 전철은 30분 간격으로 배차한다. 노 작가는 안내한 차보다 앞 열차를 탔다.
“일찍 서두르는 것이 나의 버릇이여요. 여행을 많이 하다 보니 이런 버릇이 생겼나 봐요. 출발지에서 늑장부리는 것 보다 도착지에 빨리 내려 그곳을 더 많이 보는 것이 좋아요.”
노 작가는 세계의 곳곳을 찾아다녔고 간 곳도 여러 차례 다니면서 60여 편의 동영상을 인터넷에 공개하고 있다. 그녀는 여러 사람들이 찍는 사진은 찍지 않는다.
“한강에서 불꽃놀이를 하는데 수 만 명의 사람들이 그 장면을 찍어요. 내가 왜 또 한사람의 사진사가 될 이유가 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찍어서 알려 줄 터인데...”
그녀의 사진은 이래서 독특하다. 그녀의 사진에서 우리는 히말라야의 멋진 풍광이 아니라 그곳에 사는 불쌍한 어린이의 눈빛을 볼 수 있다.
성산은 분당에서 버스로 수원까지 갔다. 그도 서둘렀기에 알려준 전철보다 앞 열차를 타게 되었다.
“천안까지만 가는 열차라도 타는 것이 낳아. 기다리기 지루하잖아. 천안에서 신창행을 갈아타면 돼.”
이것이 금오랑이 박사장에게 준 메시지다.
김 여사는 간석역에서 출발하여 구로역에서 갈아타도 되는데 한 구간 더 간 신도림역에서 환승했다. 구로역 승차시간을 전달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오랑이 구로역을 누락한 이유는 신도림역과 가산 디지털역의 출발시간을 감안해 그 중간 시간에 타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검암은 금정역 환승을 선호한다. 청담에서 7호선을 타면 국철 환승 방법이 2가지다. 이수에서 4호선 환승 후 금정에서 국철로 갈아타든가, 가산디지털역에서 국철로 환승하는 것이다. 후자가 환승을 한번만 하니 좋을 것 같지만 검암은 전자를 선호한다. 이유는 한 번 더 갈아타도 5역이 가깝다는 것이다.
4. 후배와의 인연
백의종군로 순례와 제고 19회 후배는 인연이 많다. 서울-과천 구간에는 제고19회 문 총무, 수원-오산 구간에는 19회 이 법무사, 그리고 이번 온양-게바위 구간에는 19회 송 후배가 참석했다. 다른 기수의 동문이 참석한 사례가 없다. 송 후배는 온양에 살고 있다. 그는 1년 전 내가 올린 순례기를 읽고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것을 기억하고 그를 찾았다. 문 총무가 전화번호를 알려 주어 그에게 문자로 참가를 권유하니 흔쾌히 참석한 것이다. 그는 온양지역의 동문 20여명에게도 문자를 보내 동참을 권고 했으나 평일이라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송 후배는 아침에 막걸리 안주를 직접 만들었다. 두부를 기름에 약간 지지고 독특한 소스를 얹었다. 그는 장수막걸리를 3병 샀는데 포장이 단단한 것이다. 19회 동기 문 총무가 알려준 품목인데 탄산가스를 함유한 것이라 병이 단단해 등산 등 이동할 때 좋다는 것이다. 그는 선배들이 7명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란도 16개 삶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14일은 온양의 장날이다. 4나 9로 끝나는 날자가 장날이다. 노 작가는 30분 일찍 도착했기에 역전의 장터를 둘러보았다. 날씨가 쌀쌀해져 상인들이 불을 피워 놓았다. 노작가는 여기저기 기웃하다가 너무 추워 불을 쬐었다. 그런데 바람에 날린 불길이 등산복 바지의 무릎 부분에 옮겨 붙었다.
“불붙었어요.”
노 작가는 상인의 말을 듣고 불이 붙은 줄 알았다. 그녀는 얼떨결에 불을 껐으나 바지는 이미 10센티미터쯤 구멍이 났다. 상인이 청 테이프를 잘라 십자형으로 붙여서 구멍을 막아 주었다.
“흉하지만 이렇게라도 하는 게 바람 막는데 좋을 거유우.”
5. 곡교천 제방의 기원
순례자들은 온양온천역 앞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출발 사진을 찍었다. 이 후배가 앞장서서 온양의 중심부에 있는 전통문화의 거리를 안내했다. 그들은 아산 대교를 건너 곡교천변으로 내려가 서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곡교천 서쪽 둔치에는 아직 자전거 도로 등이 없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순례자는 이런 둑길을 가야한다. 뚝 넘어 북편은 넓은 평야로서 사각형으로 곧게 정비된 논이다.
“저 평야는 이 둑을 만들어서 농지가 된 거야.”
검암이 설명을 시작했다. 그곳에 원래 약간의 논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천수답이고 비가 좀 오면 홍수로 작물이 못쓰게 되는 땅이었다. 삽교천을 막기 전에는 태풍에 바닷물도 넘쳐들어 오던 곳이었다.
“사실 이 뚝은 동양척식회사가 그들의 자본을 투입하여 만든 것일 수도 있어. 대부분의 우리나라 제방이 그렇게 해서 생겼지. 일제는 일본 내의 쌀 생산이 부족하여 식민지에 농토를 만들기 위해 척식회사를 설립했어. 대부분의 하천부지는 논이 아니었으므로 제방을 쌓고 논을 만들어 자기네 것으로 한 것이지.”
긴 제방을 한 시간 가까이 걸으니 아침을 거르고 일찍 서두른 노 작가가 건의를 했다.
“어디 앉아 뭐 좀 먹고 가죠.”
금오랑은 몇몇 순례자들이 100미터 앞서 가므로 그들을 정지시킬 수 없었다.
“제가 김밥 여러 개 준비했어요. 우선 이걸로 요기라도...”
“걸으면서 해결하기에는 김밥이 좋군요.”
6. 논 가운데가 포구?
나는 게바위 가는 길을 안내하기 위해 5일 전에 사전답사를 했다. 온양에서 버스로 해암2리까지 가서 게바위를 찾았다. 그곳에서 온양까지 걸으면서 길 안내를 구상했다. 1년 전에 중방포까지 걸었으나 당시에 게바위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순례자들은 나의 안내로 중방리까지 갔다.
“여기가 이순신 장군이 모친의 상여를 따르기 시작한 중방포일 겁니다.”
“이런 논 가운데가 옛날의 포구였다고?”
“그렇지. 아까 검암이 설명했잖아. 둑을 막아 생긴 논이라고...”
순례자들은 버스정류장 옆에 있는 ‘중방리’라는 표지석에서 인증사진을 박았다.
12시가 지나자 시장한 순례자들의 불만이 나왔다.
“이렇게 바람이 심해서 어디 앉아 점심을 먹지?”
“이순신 장군이 상여를 따르며 곡하는 모습을 상기해 봐라. 뭐가 그리 춥고 배고프냐?”
그들은 이런 대화를 했지만 곧 바람을 막아 줄 건물을 발견했다. 그것은 논 가운데 있는 사료공장이었다.
이 후배가 막걸리를 돌렸다. 그는 손수 만들어 온 두부지짐이 안주를 권했다. 순례자들은 각자 준비해 온 김밥, 떡, 과일, 빵, 과자를 나누었다.
7. 이 길이 아닌 가 벼
금오랑은 스카이뷰 지도를 확대해서 지참했다. 그가 순례자들에게 나누어 준 지도보다 축적이 세밀한 것이다. 순례에 참고하기에는 도로지도보다 스카이뷰가 좋다. 지형이 잘 나타나 있어 길 찾기에 더 유용하다.
“저 앞에 섬 같은 것 두개 보이지? 여기 지도에도 나와 있잖아.”
이렇게 자신 있게 안내하던 금오랑이 갈래 길을 만났다. 그곳은 내를 건너는 다리 공사장으로 이동 화장실도 있었다. 공사는 끝나지 않았지만 다리는 건널 수 있었다.
“이 개울은 곡교천의 지류이니 이 다리를 건너갑니다.”
금오랑의 안내로 순례자들은 개통도 안 한 다리를 건넜다.
“미하, 아무래도 이상해. 우리가 곡교천을 건넌 것 같다.”
검암이 금오랑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지류가 아닐 거야. 이렇게 넓은 지류는 없어. 가는 방향도 남쪽이라서 이상하고...”
검암은 오던 길을 뒤돌아서 가기 시작했다. 금오랑은 그의 의견을 좇아 순례자들을 뒤돌아서게 했다.
“여기가 아닌가 벼.”
“그래욧? 금부도사가 뭐하는 관리예요? 죄인을 제대로 호송해야 할 것 아녜요?”
“제가 지난 주 목요일에 사전 답사했는데요, 그때는 저쪽 제방을 걸었거든요. 그 길이 지루해서 오늘은 새로운 길로 안내한다는 것이 그만...”
금오랑이 김 여사에게 해명했다.
“흥, 금오랑을 바꿔야겠어요. 여러분, 우리 금오랑 갈아 치웁시다.”
김 여사는 여기까지 힘들여 왔는데 1킬로미터쯤을 헛걸음한 것을 소재로 분위기를 띄운 것이다.
“금오랑은 투표로 뽑는 직책이 아닙니다. 어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김 여사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제가 어명을 받았어요. 충무공이 덕수 이씨라면서요? 이성계의 전주 이씨가 왕족이잖아요. 전주 이씨 남편에게 물었더니 제게 금부도사 임명권한을 위임했어요.”
8. 밭 가운데의 게바위
게바위는 해암(蟹巖)이다. 갯바위일 수도 있고 개바위일 수도 있는 지명이다. 대동여지도에는 건너편 지역에 개바위를 의미하는 견포(犬浦)가 있다. 앞장을 선 검암은 한참을 더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4시30분에 온양 가는 버스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4시 이전에 게바위를 찾아야 하므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게바위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야, 이게 뭔가? 아산군수가 세운 표지석이라.”
그는 20미터 쯤 아래 있는 게바위 표지석도 발견했다. 순례자들은 안내 표지석 내용을 읽고 게바위로 내려갔다. 그들은 지금까지 바람을 맞으며 5시간 걸어온 보람을 느꼈다.
이순신 장군이 모친의 시신을 붙들고 울었을 그 게바위에서 순례자들은 잠깐 그런 역사를 잊었다. 그냥 힘들게 걸었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즐거웠다.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금오랑이 현수막을 펼치게 하고 사진을 찍었다.
순례자들은 바람을 피해 바로 옆의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행동 간식을 먹으려 했다. 마침 농부가 일을 하고 있기에 허락을 받았다.
“추워도 그냥 밖에서 잠깐 앉읍시다. 이 좋은 공기, 이 넓은 벌판을 보면서 앉는 게 어때요?”
순례자들은 노 작가의 권유를 따랐다. 그들은 춥지만 송 후배가 권하는 막걸리를 비우고 일어섰다.
9. 귀로
“아저씨,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여기를 답사할 거예요. 그때가 되면 이 비닐하우스에서 좌판 놓고 막걸리 파세요.”
노 작가가 앞날을 예언했다.
해암2리 버스 정거장은 5분 거리에 있다. 이곳에서 온양 가는 버스의 배차 간격은 1시간이다. 금오랑이 5일전 사전 답사 시 알아 본 정보이다.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으니 매시 30분에 도착한다면서 25분쯤 나와 있으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의 설명대로 버스는 31분에 도착했다.
“버스는 마땅히 30분 지나서 와야 해. 일찍 지나가면 약속 위반이야.”
“여기 정류소 어디에도 30분 도착이란 안내가 없어. 그러니 늘 30분 지나서 오다가 오늘만 특별히 25분에 지나가도 약속위반이라 항의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시골의 버스는 한번 놓치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하니 도시 생활에 익숙한 순례자들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어휴 춥다.”
“그러면 이 겉옷을 걸쳐.”
“아냐, 나도 있어. 꺼내기 싫어서 참고 있었던 거야.”
인송은 배낭에서 다운 자켓을 꺼내 보였다.
“엇 그제 딸이 생일이라고 준 것이야. 한 번도 안 입어 봤어.”
“아니, 그렇게 따뜻한 옷이 있으면서...어서 입어라.”
“점퍼 겉에 입어도 될까? 속옷이 보이잖아.”
“그럼, 품이 넉넉하면 겉에 입어도 돼.”
그들은 버스가 도착하자 카드를 찍고 탑승했다.
10. 뒤풀이
온양온천역 1번 출구로 나와 큰길 건너지 말고 좌회전하면 버스 정류장이 있다. 그곳 안내판을 보면 해암리 가는 버스가 620, 621, 622 세편인데 각각의 배차가 3시간이지만 놀라지 말아야 한다. 세 버스가 교대로 도착, 출발하니 승객은 1시간만 기다리면 된다. 안내판에는 해암1리만 있지만 1리에서 온양 쪽으로 해암2리 정류소가 분명히 있고 해암2리에 있는 정류소 표지판은 그냥 해암리다.
버스는 순례자가 5시간 걸은 거리를 30분 만에 원점으로 복귀시켰다. 18킬로의 거리면 버스로 20분이면 충분하지만 시내구간에서 정체되었던 것이다. 금오랑은 미리 보아둔 아구·복 식당(041-533-2989, 010-8812-8024)으로 안내했다. 온양온천역 광장에서 보면 북동쪽 불록에 있다. 금오랑은 복탕을 주문하고 막걸리를 시켰다.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박 사장은 송 후배와 함께 두렁 콩을 사러 역 앞 장터로 갔다. 논두렁에서 난다하여 두렁 콩이다. 그러나 장이 파하여 허탕을 쳤다.
“오래 걷고 나면 수분이 부족하고 영양도 보충해야 하니 막걸리를 시킵시다.”
순례자들은 시원한 복지리 국물로 먼 길의 피로를 맛있게 해소했다.
“아우님을 빼고 1인당 만원씩입니다.”
금오랑은 게시한 대로 뒤풀이를 각자 부담토록 했다.
온양에는 왕이 온천을 하러 온 행궁이 있음을 대동여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송과 성산은 온천을 함께 했다. 전철 시간을 알아보고 서둘러 나가는 통에 송 후배와의 작별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전철은 18시 20분에 출발했는데 순례자들은 모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11. 순례와 학업의 상관관계
“선배님, 오랜 시간 국토를 걷는 것이 학업이 힘든 젊은이에게 좋다는 것이 증명되었나요?”
“지난번 삼남길을 걸으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금오랑이 전철에서 들려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삼남길을 개척하는 일행이 학교에서 소위 문제아라는 학생들을 5, 6명과 며칠 동안 함께 걸었다. 어차피 학교에 가도 공부 안할 것이니 걷기도 체험학습이라 그거나 시켜보자는 부모의 동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학생들의 학교 성적이 전 과목에서 현저히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들의 학업에서 받는 정신적 고통과 걸으며 느끼는 육체적 고통을 비교하기도 하고, 인생의 선배들과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며 내면을 털어 놓기도 하면서, 저절로 멘토링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사실 19세기말부터 유럽에서 이런 운동이 있었어요. 독일의 반더포겔(Wandervogel)운동이 효시에요. 반더포겔은 철새라는 독일어인데요, 학생들에게 국토를 사랑하고 어려움을 견디며 강한 정신력을 길러주기 위해 국토순례를 시켰어요. 처음에는 시골에 숙박 시설이 없어 학교 교실에 학생들을 재웠는데 나중에 이 운동의 결과로 유스호스텔 운동이 전 세계로 파급된 것이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런 운동을 전개해요. 우선 인터넷에 카페를 개설 하면 어때요?”
김 여사가 금오랑에게 건의했다.
“좋아요. 카페 만드세요. 그런데 난 운영할 자신이 없네요.”
“제가 운영자 하렵니다. 선배님은 카페지기를 맡으세요.”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갑자기 카페를 설립하게 되었다. 지금은 초창기 카페라서 회원이 몇 안 된다. 향후, 백의종군로 순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카페에 올린 글과 사진이 충실하게 되면 더 많은 회원이 가입할 것으로 기대한다. 카페의 명칭과 주소는: 백의종군로순례 http://cafe.daum.net/roadofhearts) 이다.
12. 에필로그
며칠 후 나는 결혼식에서 만나 친구와 백의종군로 순례 이야기를 하니 사범대학을 나온 김 원장이 경험담을 말했다. 그는 고교 담임을 맡은 적이 있는데 하루는 담당 반 학생들이 전부 야외로 도망갔다. 그가 찾아낸 학생들은 학교 뒷산에서 소주병을 감추고 어디론가 숨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과 대화하려면 어찌할 것인가?
“미하, 자네 금오랑 맡아서 좋은 일을 추진하는데 교육은 장난이 아냐. 정말로 힘든 분야야. 학생들을 선도하려면 그들과 통해야 하고 그 학생의 어머니가 감동을 받아야 해.”
“그런 사업을 시작하려면 수익 모델이 분명해야 해.”
지금도 자기 사업을 열심히 하는 김 사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수익사업을 하는 것이 아냐. 그냥 많은 사람들이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좋겠다는 거야. 사업이 아니라 운동이라고나 할까?”
다음날 김사장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네가 그런 운동을 하려면 사단법인을 만들어야 할 거다. 그런데 교육부는 골치 아픈 부서이니 문화관광부 같은데 소속하는 사단법인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아직도 걸을 일이 많기만 한데 친구들은 그보다 한참을 앞서 멀리 나가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노고가 크시었사옵니다!
서울에서 합천까지 백의종군로 탐방 언제 달성할까! 마음뿐이네
저도 2012년그 시기에 처음으로 우리카페 아산님이 안내해주어 처음알게 되어 그뒤 몇번 가보았읍니다.
제가 이 카페를 알았다면 함께 갈 수 있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백의종군로 각 지부별로 가까운 곳부터 순례하면 좋겠습니다. 각 지부에서 공지하면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가까운 곳(대략 150km이내, 대중 교통 2시간 거리)은 당일에 갔다 올 수 있습니다. 한달에 한두번 정도 주말이나 휴일에 시간을 낸다면 학생, 직장인, 주부 등 바쁜 분들도 순례할 수 있습니다. 먼 곳은 1박2일하면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1년내지 2년이면 전 구간을 마칠수 있을 것입니다. 고증연구가 완료되었으므로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열정, 노고 대단하십니다.
존경스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