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사람 <행11:19-26>
5만원 권이 발행되기 오래 전의 일입니다. - 약 6천 명에 달하는 흑인빈민들의 집단부락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마자까네오에서 있었던 일로 -서울의 모 교회 목사님이 그곳 선교사님의 초청으로 -예배를 인도하시게 되었습니다.
조그마한 예배당에 – 입추의 여지도 없이 모여든 흑인 빈민들과 - 몸을 밀착하고 앉아 드리는 주일예배는 -참으로 은혜로웠고 -예배가 끝난 후 -그들과 함께 나눈 점심식사 시간 역시 - 새로운 경험이었답니다.
그리고 그 날은 마침 -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가 보낸 -헌옷을 나누어주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 교회 사무실에 잔뜩 쌓여 있는 - 헌옷 박스를 풀었을 때, - 그 속에서 나온 옷들은 - 대부분 헌옷들이 아니라 - 몇 번 입지도 않은 것 같은
새 옷들이었답니다.
어느 정도 새 옷인가 하면 -그 목사님이 입고 간 옷이 헌옷으로 보일 정도였답니다.
놀라워하는 목사님을 향해 선교사님이 - 서울 강남에서 보내는 옷들은 – 대부분
새 옷들이거나 – 새옷과 마찬가지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 대, - 한국에서도 미국 교인들이 수거해 보낸 구호물자 중 - 옷 꾸러미를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헌옷들 - 이를테면, - 입을 만큼 입은 뒤에 - 정성을 다해
깨끗하게 손질하여 보낸 -헌 옷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멀쩡한 새 옷이 헌옷으로 분류되어 -흑인 빈민촌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 - 그것이 과연 -한국 크리스천들의 넘치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이며, - 경쟁적인 사치를 뜻하는 것인지, - 참으로 혼란스러웠답니다.
더욱이 선교사님에 의하면 -서울 강남 교인들이 보낸 옷들의 주머니에서 한국동전은 말할 것도 없고 -만 원권 지폐에서부터 -10만 원권 수표, -심지어는 여자의 귀걸이 같은 귀금속까지도 - 심심찮게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도 - 그 날 나누어줄 옷들의 주머니를 미리 점검하던 청년들에 의해- 그 즉석에서 발견된 돈만도 - 2만원에 달했답니다.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 물질에 대해 얼마나 청지기 의식이 결여되어 있는 지를
보여주는 좋은 반증이었습니다. -드디어 흑인들에게 -옷을 나누어주는 시간이 되자, - 교회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순서대로 - 한 사람 당 - 옷 세 벌씩이란 원칙이 정해져 있었건만, -
좀 더 좋은 옷을, - 좀 더 많은 옷을 가지고 싶은 -인간의 욕망 앞에 - 그 원칙은
무용지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아우성을 치며 서로 싸우는 그들의 얼굴은 -더 이상 예배드릴 때의 경건한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 점심식사 때의 순박한 표정도 아니었답니다.
한편으로는 험악하고, -또 한편으로는 보기조차 민망할 만큼 -추한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 예배를 드리고 -함께 식사를 나누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
처럼 보였답니다.
옷 나누기가 끝나자 -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 그리고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언제 원수처럼 싸웠느냐는 듯, - 서로 옷맵시를 뽐내거나 혹은 둘러앉아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이 볼 때 -그들은 불과 몇 시간 동안 -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각각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이어서 - 어느 것이 그들의 진짜 모습인지 -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니 그 모두가 - 실은 그들의 참 모습이었습니다.
예배드릴 때엔 정말 경건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고, -무료 급식을 받을 땐 서로 순박한 이웃이다가, - 일단 이해관계가 엇갈리면 - 순식간에 살벌한 원수지간으로 돌변하고, - 상황이 종결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 서로 시치미를 떼고 있는
그 모든 모습이 한데 어우러져 - 그들이란 존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이야기 속에서 -그들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 속에서 지금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을 보았습니다. - 그들은 곧 우리 자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고, -함께 순박하게 식사를 나누던 사람들이, -갑자기 산더미 같이 쌓인 옷을 앞에 두고 -서로 원수지간이 되었던 까닭은 - 먼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에겐, - 그들 곁에 있는 사람보다도 -눈앞에 있는 옷이 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생전 처음 보는 멋진 옷들보다도 - 곁에 있는 사람이 - 더 크게 보였던들, -
그 옷더미 앞에서도 -그들은 예배드릴 때의 경건함과 -식사를 나눌 때의 순박함을 상실치도 않았을 것이고 -삽시간에 추한 싸움꾼으로 - 돌변치도 않았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사람보다 - 사람 이외의 것을 더 크게 여기는 한, - 그들이 매주일
함께 예배드리며 -더불어 식사를 나눈다고 할지라도, -그들 사이에 진정한 사랑의 교류는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사람보다 – 물건이 더 커 보이는 것이 대두되는 순간, - 그로 인해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즉시, - 그들의 관계는 순식간에 -뒤틀리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은 실은 우리 자신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물질이나 직책 혹은 명예를 사람보다 더 크게 여기는 한, - 우리는 진정으로 -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때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란 - 내가 어떻게 든 이겨야할 경쟁자이거나, -아니면 이용해야 할 - 도구 이상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경우 - 우리가 사람을 위해 행하는 모든 선행이란 - 진정한 의미에서의 선행이 아니라, - 자기 이기심의 충족을 위한 - 이기적 행위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참된 선행은 보상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선행이란 사랑의 행위요, -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보상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선행의 사람은 - 누구에겐가 선행을 행하고서도 - 그 당사자로부터 아무런 보답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조금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가 사랑하고 크게 여기는 것은 -상대로부터의 보상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자체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 사람 이외의 것을 더 크게 여기는 자는 - 자신의 기분을 위해 얼마든지 인심을 쓸 수 있지만, -당사자로부터 기대한 보답이나 보상이 주어지지 않을 경우, 곧 그 사람을 부정해버리고 말기에 - 그것은 선행일 수가 없습니다.
그가 사랑한 것은 사람자체가 아니라, - 그 사람으로부터 되돌려 받기를 기대했던 그 무엇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더 크게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지 않는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길이란 -달리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 누군가가 망가트렸을 경우, - 사람과 물건 중 어느 쪽을
더 크게 여기느냐에 따라 -순간적인 대응이 달라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 가정이나 사회의 평안은 -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무엇보다도 사람을 가장 귀히 여기는 사람을 통해 -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 하나님께서 이 세상 무엇보다도 - 사람을 더 크게 여기시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께서도 -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시기에, - 우리 같은 죄인 역시 - 그분의 은총
속에서 이 자리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천이란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자이어야만 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고 해서 –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미워하는 것 아닙니다. - 그 누군가는 –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좋아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를 좋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 모두를 사랑해야 합니다. - 그렇지 않고 -내 기준을 절대시하면서 – 내 기준대로 행하는 삶을 산다면 - 그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툼이 그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즉각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송하여 - 안디옥교회를 돌보게 하였습니다.
현장에 도착하여 -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쁨으로 확인한 바나바는, - 그곳
교인들에게 -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 짧은 한 구절이야말로 -안디옥 교인들을 위한 바나바 목회의 핵심이었음은 이미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 오늘 본문 24절은 그 결과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를 목회하기 시작한 뒤 -더 큰 무리가 주님께로 나아왔던 것은, 바나바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임을 -본문이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바나바가 어느 정도로 착한 사람이었는지는 –사도행전 11장 25절-26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1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안디옥에 당도한 바나바는 -자기 홀로 안디옥 교회를 목회하기엔 -역부족임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겐 동역자가 필요했고, - 그때 그가 생각한 사람이 후에 위대한 사도바울이 되는 사울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이미 사울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사울이 - 예루살렘으로 사도를 만나러 갔을 때, -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그의 전력을 아는 그곳의 제자들이 - 그를 꺼려했습니다.
그때 사도들에게 사울의 신원을 보증해주었던 사람이 =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
그 정도로 바나바는 - 사울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바나바 자기보다 얼마나 더 큰 그릇인지 -당대 유대교의 대석학 가멜리엘의 문하생이었던 사울이 - 자신보다 얼마나 높은 학식의 소유자인지, - 회심하기 전
크리스천을 핍박하는 일에 우두머리가 될 정도로 - 그가 얼마나 뛰어난 지도력을 지니고 있는 지, - 사울에 대해바나바는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 모든 면에서 자기보다 탁월한 사울을 동역자로 불러 올 경우, - 안디옥에서 자기의 영향력이 감퇴될 것을 예상치 못할 정도로 - 바나바는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그럼에도 바나바는 사울을 동역자로 삼았습니다.
그 이유는 - 그가 진정으로 안디옥교회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 그리고 사울은 주님께서 이방인을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주님의 그릇이었습니다.
교회로 몰려드는 안디옥의 이방인들을 보면서, - 바나바가 이방인을 위한 주님의
도구인 사울을 생각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사울을 불러올 경우 사울의 그늘에 자신이 가려지고 말 것이란 우려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가장 큰 것은 -안디옥의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안디옥의 이방인들이 그에게 가장 컸기에, -그는 그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자기보다 월등히 큰그릇인 사울을 -동역자 삼는 데에 -아무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때 사울은 - 고향 다소에 낙향해 있었습니다. - 하는 일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 그러므로 사람을 보내어 안디옥으로 부르기만 해도 -사울은 감사한 마음으로 달려올 판이었습니다. - 그러나 바나바는 직접 다소까지 찾아갔습니다.
다소는 안디옥의 옆 동네가 아닙니다. -안디옥에서 무려 175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도보로 찾아가기에는 -머나먼 곳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욱이 안디옥에서 다소로 가기 위해서는 - 해발 2천m의 아마노스산을 넘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안개나 구름 속에 쌓여 있는 - 그 높고 험한 산을 – 바나바는 도보로 사울을 찾아갔습니다. -이유는 하나 - 안디옥의 사람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까닭이었습니다. - 그에겐 주님 안에서 안디옥 사람보다 더 큰 것이 없었습니다.
안디옥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175Km 거리에 있는 다소도 -2천m 높이의 아마노스 산도 -자신보다 더 출중한 사울의 역량도 - 전혀 장애물일 수가 없었습니다. - 바로 이와 같은 바나바를 통해 -주님의 역사가 그곳에 일어난 것은 사필귀정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바나바를 가리켜 착하다고 표현한 단어 -'아가도스 άϒαθός'는 선하는 뜻입니다. - 그렇다면 - 오늘 본문을 통해서도 - 우리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 사람을 더 크게 여기는 자만 - 진정으로 착하고 선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중심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돈을 가장 크게 여기는 자가 -사랑하는 돈을 위해 -돈 이외의 것을 기꺼이 희생시키고, -권력을 가장 크게 여기는 자가 -사랑하는 권력으로 인해 - 사람들의 지탄마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 비리를 저지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은 -바나바를 가리켜 -착한 사람인 동시에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착하고 선하다는 것과, -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 불가분의 관계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면서도 -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뒤틀려 있다면 -그는 진정으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다는 것은 -반드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다시말해 사람을 관용하고 - 포용하고 - 사랑하는 삶 속에서만 증명됩니다.-
믿음의 본질은 - 자기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 주님 안에서 자기부인을 통한
더불어서의 삶을 심화시켜 가는 데에 있습니다. - 그러므로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 동시에 착하고 선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 무엇보다도 사람을 더 크게 여기기에, -사람에게 나쁜 짓을 행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인격의 영역에 속한 일이요, - 인격이란 의지의 산물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지식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 세상이 점점
더 혼돈스러워 가는 것은, -선에 대한 의지의 훈련 - 즉 이 세상 무엇보다도 -
인간을 더 크게 여기는 - 인격의 훈련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격이란 곧 '사람의 격'을 의미합니다. - 사람이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길 때에만 - 그 사람의 격이 사람다워지고 - 그 결과, 인격적인 선행이 수반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 아닌 비인격적인 것을 사람보다 더 중시하고서는 - 그 사람의 격이 결코 인격적이 될 수 없기에, - 비인격적인 그의 삶 속에 - 인격적인 선행이 담길 리가 없게 됩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소위 인본주의가 풍미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의 실상은 실은 - 둘 중의 하나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대한 경제논리의 톱니 속에서 -철저하게 비 인간화된 도구로 전락한 인간이든지, 아니면 자기만을 가장 중시하는 - 이기주의자(egoist)로서의 인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 아닌 타인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크게 여기는 인격적인 크리스천은 흔치 않습니다. - 그러니 이 세상 어디에선들 다툼과 분란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인격을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인격 아니고는 사람을 사랑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 -착함과 선을 지향하는 의지의 훈련, -말씀 안에서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인격의 훈련을 시작하십시다. - 사람 주위의 것들보다도 -사람자체를 가장 크게 여기는 인격적인 눈, - 인격적인 귀, - 인격적인 마음을 - 의지를 다해 그리스도 안에서 키워 가는 자들이 되십시다.
이 의지의 훈련 없이는 -타인은 고사하고, -한 지붕아래에서 날마다 함께 사는 가족마저 제대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 인격의 훈련이 결여되고서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 주님 안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면, - 그것은 말씀 안에서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인격과 -의지의 훈련으로부터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의지의 원동력과 동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를 가장 크게 여기시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가장 크게 여겨주시는 인격적 사랑을 베풀어주셨기에, - 우리 또한 그분 안에서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인격적인 삶을 추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 3408 - 사명 [주님이 홀로가신 그길 ...]
==================={ 기 도 }
오늘 우리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여러 얼굴들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얼굴, - 이해관계가 없을 때 순박해 보이는 얼굴, - 내가 크게 여기는 것으로 인해 - 조금 전까지 친했던 사람과 아귀다툼을 벌리는 얼굴, - 그리고서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 시치미를 떼고 있는 얼굴- 그렇기에 우리의 삶이 주님
보시기에 위선의 삶일 수밖에 없었음을 주님 앞에 회개 드립니다.
이제부터 정녕 단 하나의 얼굴-크리스천의 얼굴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가장 크게 여기셨기에 -날 위해 돌아가신 주님의 말씀 안에서, -사람을 가장
크게 여기는 의지와 인격의 훈련을 게을리 말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람으로 만드셨음에, -사람다운 사람의 격을, 의지를 다해 길러 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착하고 선한 크리스천이 되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께로부터 사람을 위해 쓰임 받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이 시대의 인격적인 크리스천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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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착하고 선한 크리스천이 되기를 소망하는 주님의
백성들과 비전교회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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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복음 비전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얼짱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