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숨는 건지는 나도 몰랐다.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꼴등이 되는 건 평소 내 방식이 아니지 않은가.
스피커가 나를 포기한 걸 | 최소한 10분은 그랬다 | 확인할 때까지 난 계속 숨어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계속 비행할 마음이 도통 내키지 않았다.
슝 하고 비행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 슈퍼컨스텔레이션, 그건 내가 익히 아는 소리다! | 들릴 때까지 난 잠긴 문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 다음 창백한 얼굴이 눈에 띌까 봐 얼굴을 문질렀다.
보통 사람들처럼 화장실 칸에서 나온 뒤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홀에서 모종의 신문을 샀다.
이 텍사스 주 휴스턴이라는 데에서 뭘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상했다. 갑자기 내가 없어지다니!
스피커에서 방송이 나올 때마다 매번 귀를 쫑긋하다 몇 가지 일을 처리하러 웨스턴 유니언 공항 우체국으로 갔다.
나 없이 멕시코시티로 날아갈 수하물과 관련해 전보를 보내야 했고, 우리의 조립이 24시간 연기되어야 한다고 카라카스에 전보를 치고 뉴욕으로도 전보를 보내야 했다.
내가 막 볼펜을 다시 집어넣는 순간, 한 손에 승객 명단을 든 우리 스튜어디스가 내 팔꿈치를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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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숙명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않는다.
엔지니어로서 난 개연성의 방정식으로 예측하는 데 익숙하다.
대체 왜 숙명이라는 것인가?
타마울 리파스에 비상 착륙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건 인정한다.
이 헹케라는 젊은 친구를 알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한나에 관한 소식을 다시 듣지도 않았을 것
이다. 또 내가 아버지라는 걸 오늘 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타마울리파스에 비상 착륙하지 않았더라면, 그 모든 게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마도 자베트가 죽지는 않았을 거다.
모든 일이 그리된 게 우연 이상이었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우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숙명이란 말인가?
개연성 없는 일을 경험 가능한 사실로 간주하느라고 신비주의 따위가 필요하지는 않다.
수학이면 충분하다.
수학적으로 풀이해 보면 이렇다.
개연성(정사각형 주사위를 60억 번 던졌을 때 숫자 10 나올 확률은 10억 번가량 된다)과 비개연성(같은 주사위로 여섯 번 던졌을 때 숫자 1이 나올 확률은 1이다)은 본질에 따라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빈도 수에 따라 나누어지고, 이 경우 원천적으로 빈도수가 더 높은 것이 더 믿을 만하다. 하지만 비개연적인 일이 한 번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더 고차원적인 일도 아니요, 문외한이 믿고 싶어 하는 대로 기적이나 그 비슷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개연성에 대해 말할 때는 물론 비개연성을 가능성의 한계 상황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비개연성이 발생하더라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경탄하거나 경악하거나, 신비주의에 빠질 하등의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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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야 족속만 봐도, 바퀴는 모르면서 피라미드를 만들고, 전부 이끼 끼고 습기로 부스러지는 원시림에다 사원을 짓다니, 대체 왜?
솔직히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일주일 전에는 카라카스에 있었고, 오늘은 (늦어도) 다시 뉴욕에 도착했어야 했다.
그런데 한때 내 여자 친구였던 여자와 결혼한 젊은 시절 친구를 만나 안부 인사를 나누기 위해 여기 처박혀 있다니.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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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순전히 우연일 뿐 다른 게 아니었다.
작은 기계 안에는 나일론실이 하나 들어 있었다.
어쨌든 CGT에서 전화가 왔을 때 우리가 아직 집을 나가지 않은 건 우연이었다.
추측건대 내가 한 시간 전에 벨 소리를 들었지만 받을 수 없었던 그 전화였을 거다.
하여간 그 단호한 전화의 내용은 유럽으로 가는 나의 선박 예약이 내가 지금 당장, 늦어도 저녁 열 시까지 여권을 지참하고 와야 유효하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작은 기계를 분해하지 않았으면 전화를 받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크루즈 여행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자베트가 탄 그 배를 타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는 세상에서 결코 서로 마주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내 딸과 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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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크루즈 여행이란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만드는 법이다.
차 없이 5일 동안 지내다니! 나는 일을 하거나 내 차를 운전하는 데 익숙하다.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으면 그건 내게 휴식이 아닐뿐더러, 익숙하지 않은 것엔 그게 뭐든 어차피 신경이 예민해진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배는 항해를 계속하고, 엔진은 밤이고 낮이고 돌아간다.
엔진 소리를 듣고 느끼며 쉼 없이 나아가지만 움직이는 건 해와 달뿐이다.
어쩌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도 환영일지 모른다.
우리 배가 아래 위로 피칭하면 파도가 갈라진다.
끝없는 수평선. 사람들은 원반 가운데 마치 고정된 것처럼 보이고 물결만 미끄러질 뿐이다.
시속 몇 노트로 주행하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상당히 빠른 속도일 텐데, 바뀌는 건 하나도 없다. 나이만 먹어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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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냥 침묵하고 있을 수는 없어서 난 다시 뱀에 물렸을 때의 치사율 내지는 통계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다.
한나는 귀머거리라도 된 것 같았다.
내가 자베트를 품었단 걸, 내 앞에 앉아 있는 한나가 그 애의 엄마란 걸, 내 연인의 엄마가 내 옛 연인이란 걸 단 1초라도 (더 길게는 생각 할 수도 없지만) 생각하면 감히 그녀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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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순간 바다에서 첫 빛 줄기가 올라온다.
볏단 같다, 창 같다, 유리가 균열되는 것 같다, 성체현시대 같다, 전자 조명을 쏘아 올린 사진 같다. 하지만 매 게임 1점만 쳐 준다. 대여섯 개의 비유를 말해 봐야 소용없다.
그 직후 벌써 해가 눈부시게 솟아오른다.
“용광로 속에 찔러 넣는 첫 삽질 같아!"라고 내가 말하는 동안 자베트는 아무 말 없이 1점을 잃는 다.....
그 애가 눈을 감은 채 바위에 앉아 있는 모습, 묵묵히 햇살을 받고 있는 모습, 난 그 모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행복하다고 그 애가 말한다.
난 결코 잊지 못할 거다.
완연히 짙어진 바다, 보랏빛으로 물드는 파란 바다, 코린트의 바다와 다른 것들, 아티카해와 붉 은 전답들, 녹청색 올리브나무와 붉은 대지 위에 기다랗게 드리워진 그 아침 그림자, 처음으로 전해 오는 온기, 바다와 태양 그 모든 것을 내가 선물이라도 한 양 나를 안아 준 자베트, 이 모든 걸 잊지 못할 거다.
그리고 자베트가 노래하는 모습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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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한 번 결혼했었잖아, 발터. 사실이 그래! 내 몸에 손대지 마."
그런 다음 차로 돌아왔다.
한나 말이 옳았다. 난 항상 무언가를 잊고 산다.
그녀가 그걸 상기시켜 주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아테네로 이사하거나 이주하기 위해 사표를 쓰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우리가 같이 살지는 이 순간 나 자신도 알 수 없지만.
끝내 해결책을 찾는 데 난 익숙하다.......한나가 내게 운전대를 맡겼다.
한 번도 오펠 올림피아를 몰아 본 적이 없지만 한 나도 밤새 잠을 못 잔 터였다.
그녀는 이제 잠든 척했다.
아테네에서 우리는 꽃을 샀다.
오후 세 시 직전이었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기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우리는 상황이 어떤지 전혀 모르고 있다. 한나가 꽃다발을 푼다.
그 순간 나타난 간호사의 얼굴이란!
어제처럼 한나가 창가에 서 있고 우리 둘 중 누구도 말이 없다.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
곧 엘레우테로풀로스 박사가 왔다.
모두 그리스어로 말하지만 난 모든 걸 알아듣는다.
두 시 직전에 아이가 죽었다.
…다음 순간 그 애 침대 앞에 한나와 내가 있다.
도무지 믿기지 않지만 눈을 감은 우리 아이는 잠잘 때와 똑같다.
하지만 석고처럼 새하 얗고 기다란 몸은 아마포 천으로 덮여 있다.
양손은 허리 옆에 있고 가슴에 우리 꽃이 놓여 있다.
위로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 애는 잠들어 있다!
오늘날까지도 난 믿을 수가 없다.
"애가 자네!" 내가 말 한다.
한나에게 한 말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한나가 내게 소리치며 작은 두 주먹을 움켜쥐고 내 앞에 있
다. 난 그녀를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하고 저항하지도 않는다.
그녀가 주먹으로 내 이마를 쳐도 난 감각이 없다.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랴!
기진맥진할 때까지 한나는 울부짖으며 내 얼굴을 때린다.
내내 난 손으로 눈을 가리고만 있었다.
오늘날 확인된 바로, 우리 딸의 사인은 뱀독이 아니었다.
독은 면역 혈청 주사로 성공적으로 해독되었다.
그 애의 죽음은 작은 언덕 위로 넘어질 때 손상된, 하지만 미처 진단받지 못한 두개반 골절, 즉 뇌진탕의 결과였다.
뇌동맥 손상, 소위 뇌혈관 파열로, (사람들 말에 의하면) 당장 외과 수술을 받았더라면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다.
6월 21일에서 7월 8일까지 카라카스에서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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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진지하게 토론을 하다니!
(한나에 따르면) 기술은 우리가 세계를 체험할 필요 없도록 세계를 정리하는 술책이다.
기술자는 자연의 창조물을 파트너로 여기지도 않고 그 의미에 대해서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광기를 부린다.
기술은 세계로부터 저항으로서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술책이다.
예컨대 우리가 세계를 체험할 필요 없도록 속도를 통해 세상을 희석시키는 방법이 있다
(한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난 모르겠다).
기술자들은 세계와의 직접적인 관련성을 상실한다
(한나의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난 모르겠다).
한나는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내가 자베트에게 그렇게 행동한 걸 이해하지 못 하는 건 아니다.
(한나 말은) 내가 모르고 있었던 일종의 관계를 체험한 건데, 사랑에 빠진 거라고 반박하면서 내가 그 관계를 곡해했다는거다.
그건 우연한 오류가 아니라 내 직업이나 그 밖의 내 삶이 그렇듯 나다운(?) 오류라고 한다.
나의 오류는 우리 기술자들이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는 거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넌 삶을 형상이 아니라 단순한 덧셈으로 다룬다"는 거다.
그러니 죽음에 대한 관계도 설정하지 못하고, 그 결과 시간에 대한 관계도 없다.
삶이란 시간 속의 형상이라는 거다.
자기가 아는 것을 잘 설명할 수 없다고 한나도 인정한다.
삶은 기술로 정복할 수 있는 질료가 아니라고 한다.
자베트와 관련한 나의 오류란 반복이다.
다시 말해, 나이가 중요하지 않은 듯이, 그리하여 자연에 역행해서 내가 행동했다는 거다.
계속 더하기하면서, 말하자면 우리 자식과 결혼하면서 우리 나이를 지양할 수는 없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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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도르프가 어떤 모습인지 지금도 모른다.
난 뒤셀도르프의 정체 구간을 지나 걸었다.
신호등도 보지 않고, 마치 장님처럼 걸어갔다.
창구로 가서 차표를 사고는 다음 기차를 탔다.
지금 식당 칸에 앉아 진을 마시며 창밖을 보고 있다.
운 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어디에도 존재 하고 싶지 않다.
창밖은 왜 보는 걸까?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아이의 두 손, 아이가 머리카락을 목덜미로 넘기거나 빗질할 때의 몸짓, 치아, 입술, 눈, 이마, 어디에도 없다.
어디서 그 애를 찾을까?
그냥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취리히로는 왜 가는 걸까?
아테네로는 왜? 식당 칸에 앉아 생각한다.
왜 이 포크 두 개를 주먹으로 움켜쥐고 얼굴을 가격해 눈알을 뽑아 버리지 못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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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그 불행한 일이 있고 나서 한나가 무엇을 했는지 여행하는 내내 난 전혀 몰랐다.
한나에게서 편지 한 장 받지 못했으니!
오늘날까지도 모른다. 내가 물으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라고만 한다.
난 더 이상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어떻게 한나가 나란 사람을 견뎌 낼 수 있는 걸까?
그녀는 가기 위해 오고, 다시 오고, 내가 원하는 걸 가져다주며 내 말에 귀 기울인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녀의 흰 머리가 늘었다.
그녀는 왜 내가 자기 삶을 망가뜨렸다고 말하지 않는 걸까?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그녀의 삶을 난 상상할 수가 없다.
그 당시 죽은 애의 침상에서 두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을 때 딱 한 번 그녀를 이해했었다.
그때 이후로는 그녀를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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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는 아이를 버릇없게 키우지 않았다.
한나가 며칠 전부터 자기는 여하간 바보천치라고 하지만, 그 점에서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라고 난 생각한다.
“그때 왜 그렇게 말한 거야?" 한나가 몇 번이나 거듭거듭 묻는다.
"그 당시, 왜 우리 아이라 하지 않고 네 아이라고 한 거야?”
비난하는 말일까, 아니면 단지 비겁한 말일까?
난 그녀의 질문을 이 해할 수 없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했느냐고?
"넌 암탉처럼 굴고 있어!”
최근에 이 말은 또 왜 한 건지.
한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알고 나서는 이 말을 몇 번이나 취소하고, 아니라고 했지만, 한나는 그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기를 용서할 수 있느냐고! 한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간호사가 들어올 수 있는데 무릎을 꿇고 내 손에 키스한다.
그 순간 그녀는 내가 아는 한나가 전혀 아니다.
내가 이해하는 건, 한나가 그 모든 일이 있고 나서 아테네를, 우리 아이의 무덤을 다시는 떠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거다. 우리 둘은 여기 남게 되리라.
한나가 빈방만 남은 자기 집을 처분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겨우 6개월이긴 했지만 아이를 혼자 여행하도록 하는 게 한나에게는 충분히 힘든 일이었다. 아이가 언젠가 떠나리라는 걸 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베트가 이 여행에서 하필이면 모든 걸 파멸시킬 친아버지를 우연히 만날 거라고는 예감조차 하지 못했다.
8시 5분.
사람들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