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아, 승헌 오빠네, 이쁜 여자친구랑 왔네~ 뭐 시키시겠어요?”
“아, 해물 스파게티랑…”
드르륵-
혼란스러운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승헌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두 팔로 테이블을 짚은 채 한동안 서 있었다.
주문을 하려다 갑작스레 저지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세라는 무슨 일이냐는 듯 승헌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승헌은 말도 없이 레스토랑을 나가 버렸다.
“이게 무슨…”
종업원과 아는 사이인 것 같길래 종업원인 혜림을 바라보니, 그녀 역시 안타깝고 슬픈 눈빛으로 승헌이 나간 곳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메뉴를 고쳐 잡으며 세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주문 하시겠어요?”
“주문은 된 것 같네요. 그리고 그런 눈으로 주문 받지 말아요. 주문할 맛 안 나거든.”
“…네?”
“그렇게 안타까운 눈빛으로 손님을 보지 말란 얘기야 종업원 아가씨. 그냥 가 볼께요.”
어쩌면 혜림을 질투하는 듯한 말투로 말한 것 같다고 생각한 세라는 약간 불쾌한 마음으로 레스토랑을 나와 승헌을 찾았다.
이번에 승헌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는 바로 몇 발자국 거리의 벤치에 고개를 무릎에 묻고 앉아 있었으니까.
“갑자기 나와 버리면 어떡해? 나랑 저녁 먹기로 약속 했잖아.”
“……지금은 나 좀 내버려 둬….”
“오늘만 나 등진 지 두 번째야! 너무하다는 생각 들지 않아?!”
승헌은 벤치에 고개를 묻고 앉아있는 내내, 세라의 화난 목소리가 짜증스럽게만 들려왔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웠는데,
혜수와 너무나도 똑 같은 쌍둥이 동생 혜림을 보자, 그 혼란이 극에 치달았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화난 세라의 음성은, 잠자기 전에 귀찮게 귓가에서 앵앵거리는 모기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그만 해….”
“뭘 그만하라는 거야! 승헌이 잘못한 거잔-”
“그만 하라고 했잖아!!”
저녁이라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상점과 식당가의 벤치에서, 승헌은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세라에게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말았다.
“현세라씨가 도대체 나에게 뭐길래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지? 그저 남남일 뿐이야!
내가 언제까지 현세라씨 응석을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지금 승헌이 잘했다는 거야?!”
혼란스러움이 가증된 데다가, 화까지 올라온 터라, 평소처럼 감정제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승헌은, 금방 소리를 질러 놓고도
길거리 한복판에서 좋지 못한 꼴을 보였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지만, 무슨 목청대결이라도 하는 마냥 소리를 되받아 쳐 지르는 세라 때문에
두통만 늘어갈 뿐이었다. 게다가 어느 샌가 둘을 빙 둘러싼 구경꾼들의 수군거림은 승헌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관두자. 현세라씨랑 나, 어차피 현태가 묶어놓은 억지 인연이었으니까. 끝이다. 이것으로.”
“…가…감히 내 앞에서 등 돌리지 마!!!!!!!!!!!!!!!!!!!!!!!!”
승헌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으로 돌아서서 세라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멀어지던 것이,
몇 미터가 되고, 승헌의 모습은 점점 세라에게서 희미해져만 갔다. 그러면 그럴수록 악에 받친 세라의 고함은
정말 목에 핏대가 여실히 드러날 정도로 세져 갔을 뿐만 아니라, 가면 갈수록 울음소리도 더 많이 섞여 들어갔다.
“왜 다들 내 앞에서 등을 돌리는 거야!!!!!! 흐으으… 당장 이리 안와?!!!!!!!!!!! 허어어엉-!!
하지만 승헌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그 많은 사람들 사이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고, 곧 그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세라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라는 목이 쉬어 목소리가 안 나올 때까지 통곡을 하다가, 기억의 조각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세라는 유독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기 싫어했다.
그 이유가 단지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자라서만은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걸어가면, 그 순간 자신의 존재성이 없어지는 것 같달까.
어쩌면 영국 왕족인 신분에, 어렸을 때 왕자들이랑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은 영향도 없다고는 말 할 수 없겠다.
눈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눈을 뜨려고 하면, 위에 돌덩이를 올려 놓은 듯, 눈꺼풀을 들어올리기가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눈을 뜨면 쉴새 없이 느껴지는 따가움에 다시 눈을 감고 말았다.
“일어났으면, 눈을 뜨도록 노력해봐. 계속 감고 있을 순 없잖아?”
자신의 기억은 분명 식당가 거리에서가 끝인데, 어느 새 자신은 오피스텔의 푹신한 침대에 누워서, 곁에서 들려오는 현태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집에 왔지? 보다는, 현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에 울컥한 세라는, 눈 뜨기도 전에 눈물부터 흘려 보내고 말았다.
“이런 이런, 눈을 뜨라고 했더니 또 눈물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말은 퉁명스럽게 하면서도 흘러내린 눈물을 휴지로 닦아주는 현태.
세라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의 통증이 마치 바늘로 찔러오는 것처럼 따끔거려서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너, 혜림이가 나한테 전화해 줘서 안거야. 너 가게로 먼저 옮기고, 니 핸드폰으로 나한테 전화 건 거지. 너 데리고 병원 가랴,
집에 오랴, 이래저래 난 펑크만 낸다. 연예인 그만두면 니가 책임질 테냐 이 자식~”
장난스럽게 말하는 현태였지만, 세라는 얼마나 현태가 걱정을 하며 있었는지 짐작할 수는 있었다. 괜시리 미안해졌다.
자신이 한국에 오고 나서 뭔가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느낌 뿐이었을까. 현태의 직업에도 자신이 민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나이에 맞지 않게 응석만 부리고 자라서, 영국에서의 부유한 생활이, 세라의 독립성에 가장 큰 독이 되고 말았다.
“말은 하고 싶어도 당분간 안 하는 게 좋을 거라고 의사가 그러더라. 너 성대가 무리했단다. 그러니까 답답해도 참도록 해봐. 빨리 낫는 지름길이니까.”
세라는 모든 것이 짐이라는 냥, 무거운 한숨을 뼛속부터 깊게 내쉬고는, 오랫동안 침대에 누워있어 찌뿌둥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에 기대 앉았다. 그리고는 침대 옆, 협탁에 있던 메모지와 펜을 집어 들고, 엉성한 글씨체와 느린 속도로 한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라가 무슨 말을 하려나, 하고 글자가 한자 한자 새겨질 때마다 주의 깊게 보던 현태는, 세라가 마지막 글자에서 펜을 떼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 나 영국으로 돌아갈래. ]
“미쳤어?! 아니, 미친 건 아니고, 갑자기 왜?”
[ 그동안, 너무 철없이 산 것 같아. 이제 나도 내 나이에 맞게 살아야지. ]
“난 지금도 너 괜찮다고 생각해. 왜, 부모님이 돌아오래?”
[ 난 민폐 끼치기 싫어.]
“누가 니가 민폐 끼친다고 그랬는데?! 야! 너 배신, 우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 다른 이유도 있어. 나 갈래. ]
계속해서 영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글만 써서 보여주는 세라를, 현태는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았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설득을 해도, 영국으로 가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이다.
“휴.. 그래 가라 가. 내가 널 어떻게 말리냐.”
[ 항상 고맙게 생각했어. 내가 영국 간다고, 현태 잊는 거 아니야. 알잖아. ]
“잊으면 배신이지 그게! 2년 동안 금이야 옥이야 키워놨더니. 쳇.”
[ 제발 오버하는 성격은 고쳐. 비행기 티켓 필요 없으니까 오늘 내일 갈지도 몰라. ]
“너네 자가용 비행기 부를 거냐?”
[ 응 ]
뭐 될 대로 되라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세라를 응시하던 현태는, 서운한 듯, 정말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침대 가만 멍하니 응시하다가 손장난을 칠 뿐이었다.
그 날은 서먹하게 세라의 포옹 한번으로 현태가 배웅을 받고 갔다.
그리고 세라는, 빨리 떠나면 떠날수록 좋다는 듯이, 바로 이틀 후, 자신의 짐을 챙겨 고향인 영국으로 그렇게 가 버렸다.
시간은 빠르게도 흘러갔다.
세라가 쫓기듯이 한국을 떠나버린 지도 2년 가까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 현태는 세라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갑자기 휑하고 가버렸다는 것에 엄청난 서운함을 느껴, 세라가 처음 전화를 했을 때는
전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었다.
승헌은 마지막으로 세라를 보던 날, 혼란스러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모진 말을 하고 등을 돌린 것에 대해
일말의 자책감을 가지고 있던 차에, 세라가 떠났다는 말을 들었다.
오히려 잘 됐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데, 왠지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세라는, 지난 2년간, 철부지 같던 모습을 지우고, 26살의 성숙한 여인으로 자라갔다. 좀더 사려 깊고, 이해심도 넓히고….
쉽지는 않았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이제야 어른의 모습을 되찾은 것 같은 세라.
세라는 자신만의 적성을 찾아, London에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는 데에 이제 막 성공한 신예작가였다.
부모님의 배경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Sarah Dianne Windsor (세라의 본명) 자체만으로 이뤄낸 직업이었고,
자신이 좋아하던 분야였기 때문에, 세라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배우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해 나갔다.
“Sarah- Mr. Thomson is scheduled to meet a Korean Entertainment executive director next week. He wants you to go with him. What do you think?
(세라씨, Mr. Thomson이 다음주에 한국인 엔터테인먼트 이사를 만나시는데 세라씨랑 같이 가고 싶으시대. 자기 생각은 어때?) ”
"I think I will go with him. It would be a good chance for me to expand! Actually I have a Korean actor among my friends, and I think good of Korean actors
in general, so, why not?
(같이 가죠 뭐. 경험을 늘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 같은데요? 사실 친구 중에 한국배우가 있거든요. 한국 배우들 전체적으로 좋더라고요. 안 갈 이유가있나요?)”
Mr. Thomson은, 영국의 모든 탑 스타를 키워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세라는 영국에서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자 마자, 조금은 어렵사리 그의 전속 팀의 멤버가 될 수 있었다.
이때는 뭐.. 부모님 배경이 살~짝 작용하기도 했더랬다.
세라에게 이 소식을 전해준 같은 팀의 PD는 그럼 그렇게 하라며 웃고는 자신의 업무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사님, 다음 주에 Thomson 엔터테인먼트 이사님과, 그의 전속 정예 팀에 속한 드라마 작가와 함께 런던에서 미팅이 있습니다.”
“이번 기회는 한국 배우들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릴 수 있는 첫 걸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2년간, 더 발전한 실력으로 회사 내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굳힌 승헌은, 간부급 미팅의 상석에 앉아, 여러 간부급 사원들을 둘러 보면서,
최 비서가 옆에서 읊어주는 스케줄을 들었다. 스케줄을 다 들은 승헌이 조용히 운을 떼자, 회의장은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해외 파와 결합해서 만드는 드라마가 얼마나 성공할 확률이 저조한지를 우려한 목소리였다.
“이사님, 다른 드라마의 예를 보십시오. 해외 파와 결합해서 만든 드라마야 봤자, 2부작 시리즈 정도가 다였습니다.
이번처럼 장기 방송될 예정에 있는 드라마를 해외파랑 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최고와 손을 잡는 겁니다. 손해 볼 거라고 생각했으면, 시작도 안 했겠지요. 상대는 영국의 거물급 스타를 키워 낸 Thomson 사입니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엔터테인먼트 계에 있는 회사라면 Thomson 사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만큼 Thomson 엔터테인먼트는 다국적으로 강대한 회사이며,
거물들을 배출하기로 유명한 곳이었으니까. 그랬기에, 간부급 사원들의 술렁거림은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멈췄다.
승헌은 작은 비웃음을, 사원들이 눈치채기 못하게 피식- 흘렸다.
‘능력도 없어서 그 나이까지 그 자리에 있으면서, 무조건 최고만을 원하는 속물들이란….’
영국에 있는 Thomson 사나, 한국에 있는 승헌의 방송국 엔터테인먼트나, 서로 약속이 잡힌 일주일 간은 분주하게 준비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승헌의 쪽은 영국으로 떠날 준비랑 수속을 마치고, 세라가 있는 쪽은, 자기들 쪽에서 손님을 맞는 입장이라, 부족한 것이 없나 체크하느라 바빴으니까.
그리고,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승헌은 영국 Thomson 사 빌딩에 발을 들이면서, 약속 상대에게 눈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저는 Mr. Thomson 을 보좌할 드라마 작가 Sarah Dianne Windsor 입니다.”
승헌이 반듯하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캐주얼 한 느낌이 흐르는 정장을 갖춰 입고, 뒤에서 따라오는 최 비서와 빌딩에 들어섰을 때는,
로비에서 서서 자신들을 맞이하는 50대 중반의 온화한 느낌의 사내와 그 옆에 있는 웨이브 진 흑발의 여자가 있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Mr. Thomson 을 보좌할 드라마 작가 Sarah Dianne Windsor 입니다.”
여자는 발음이 아직 부정확한 한국어로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승헌은 여자의 모습과 이름이 낯익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Mr. Thomson 이라는 사내와 악수를 주고 받았다.
승헌은 대수롭지 않게 넘긴 듯 해도, 세라는 그렇지 못했다.
이런 경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번 미팅을 할 상대가 한국인인 것은 알았지만, 왜 4천 8백만 한국인 중에 그 상대가 승헌이 되어야 했는지. 괜히 하늘이 원망스럽다.
처음에는 멀리서 다가오느라 얼굴을 또렷이 보지 못했지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니, 겨우 5 발자국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다
Thomson 과 악수를 나누는 사람이 승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세라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얼마나 넋을 빼 놓았을까,
“Sarah, are we going to make visitors stand here?
(Sarah, 이렇게 손님을 세워 둘 참인가?)”
부드러운 Thomson 의 목소리가 세라의 귓전을 때리자, 세라는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뒤, Thomson 에게 양해를 구했다.
Thomson 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세라를 다독였다.
“Maybe you were bit nervous in meeting your motherland people
(고향 쪽 사람들을 만나는 데 긴장했나 보구만.)”
명백히 손님을 맞는데 실수를 했음에도, 자신을 혼내지 않고 다독여주는 Thomson 의 아버지 같은 배려에,
세라는 웃음으로 보답하며, 잠시 실례하겠다고 하고 근처 화장실로 몸을 돌렸다.
화장실 한 칸에 들어가서 미끄러지듯 주르륵 내려앉은 세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한 달도 안되었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새 많은 인상을 심어주고, 조금이라도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남자를.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 자신에게 등을 돌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던 냉정한 남자를.
비단 세라만이 승헌을 알아본 게 아니었다.
승헌은 세라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승헌의 비서는 세라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본적은 두어 번 뿐이지만, 인상이 강했다고나 할까. 최 비서의 눈썰미도 한 몫을 했지만 말이다.
“이사님…?”
“Excuse me. 무슨 일이죠 최 비서?”
세라가 올 때까지 로비의 소파에 앉아서 얘기나 나누자는 Thomson의 제안에 이것저것 주제를 돌려가며 얘기를 나누던 승헌은,
최 비서의 부름에 양해를 구하고 그녀를 돌아 보았다.
최 비서는 아까 그 드라마 작가가, 2년 전 철부지 없고 자존심만 셌던 현세라 라는 것을 말해주려 했지만,
정말 타이밍 더럽게 세라가 화장실에서 나와 로비로 걸어오는 통에 그냥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 없다면, 이런 식의 방해는 곤란합니다 최 비서.”
회의는 별 탈 없이 흘러갔다.
사람 좋지만, 일에 대해서는 정말 냉정하고 엄격한 Thomson 과 거의 같은 성격을 지닌 승헌이 만났으니,
회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을 말 할 필요도 없었다.
둘 다 만족한 성과를 거두고, 이번에 만들 드라마의 작가가 세라 라는 것을 Thomson 이 말해주고 난 후,
네 사람은 저녁이나 함께 할까 하고 근처의 레스토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승헌과 Thomson 이 좀 앞서 걷고, 세라와 최 비서가 좀 뒤쳐져서 따라갔다.
그 와중에 최 비서는 세라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안면도 적은 데다, 잘못하면 어색해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답답한 마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새, 세라는 자신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는데, 전화를 받는 목소리에 Thomson 과 이런저런 gossip을 다루던 승헌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 보았다
“Hello, Sarah Windsor speaking- 어? 현태네?.. 됐네요 내 맘이야~ 잘 지내? 응.. 응.. 뭐어?! 야 야 끊어!! 미쳤어?
얼른 끊고 녹화나 해! 그래- 그래 나도 I love you 야. 알았어~ 응 응~ Bye~”
웨이브 진 여자의 능숙한 한국어 구사.
현태 라는 이름과 그의 특성인 녹화 중에 전화하기.
승헌은 그 두 가지가 자신의 귀에 들어오자, 전화를 끊은 여자를 눈 여겨 다시 살펴봤다.
“Seung Heon- You listening?
(승헌, 자네 듣고 있나?)”
“… Ah.. I’m sorry Mr. Thomson. What were you saying?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너무 여자를 살피기에 집중한 탓일까, 곁에서 계속 말하던 Thomson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던 승헌은,
옆에서 Thomson 이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걸어오자, 미안하다는 듯, 난색을 표했다. Thomson 은 승헌이 눈길을 주고 있던 쪽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으며 승헌에게 재치 있게 윙크해 보였다.
“You were looking at Sarah? Well, I guess, people tend to have more attention to their country people.
(세라를 보고 있었나? 흠…. 아무래도 사람들은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더 관심이 가나보군)”
“… What does that mean? You mean to say, that she is Korean?
(무슨 말씀이신지? 그러면 저 여자분이 한국 사람이라는 말이십니까?)”
“Yeah, She is more like British though.
(그렇지. 한국인 보다는 더 영국인 같지만 말일세.)”
Thomson의 말을 듣는 순간, 승헌은 마치 무거운 쇠망치가 자신의 뒤통수를 가격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Thomson의 전속 드라마 작가이며, 지금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는 검은 웨이브 머리의 여인이 세라 라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기 때문이다.
승헌은 세라가 한국에 있었을 2년 전에도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는데, 그간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 2년 전, 세라와의 마지막 만남 후 –
혜림을 뜻하지 않게 레스토랑에서 마주치고, 혼란스러웠던 승헌.
그런 상태에서, 세라의 기분은 헤아려주지 못한 채, 그저 앞에서 자신에게 뭐라고 해대던 세라가 너무 거슬려서,
승헌은 욱하던 기분을 참지 못하고, 세라에게 화를 내고, 세라에게 등을 진 채 자신의 오피스텔로 와 버렸다.
속이 답답한 마음에,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를 꺼내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하아……………….”
아직도 혜수를 잊지 못한 걸까….
…혜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아닌 듯 싶었다. 근래 혜수를 머리 속에 떠올린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혜수와 판박이인 혜림이를 마주쳐서 순간 그런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이 그렇게 버려두고 온 세라 때문일까….
세라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커녕, 호감도도 별로 없는 상태다.
당연한 일이다. 정말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사람을 만난 지 한 달 만에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확률적으로도 굉장히 낮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세라에게 신경을 썼던 것은 사실이었다.
복잡하다.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 짜증이 터질 것만 같은 날이다.
승헌은 모든 것을 잊고 싶다는 듯, 마시던 캔맥주도 싱크대에 아무렇게나 던져 넣은 채, 침대로 뛰어 들어 무작정 잠을 청했다.
“세라…. 영국으로 갔어요 형.”
“…아, 그래….”
그 날이 있던지 이틀 후, 풀 죽은 표정으로 자신의 사무실에 찾아 온 현태로부터 말을 전해들은 승헌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통보에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다. 혜수를 사랑하는 자신으로서는 타인이 자신에게서 멀어졌다는 것이 당연해야 할 일인데,
그 순간은 왠지 뭔가 턱- 틀어 막힌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삐- 이사님,
“…누…가 왔다고?”
“내가 불렀어요 형.”
요 근래, 하늘은 자신을 피 말려 죽이려고 그런 것일까.
혜수의 동생이 왔다는 비서의 통보. 자신을 다부지게 바라보며 자신이 불렀다고 한 현태.
골이 부서질 듯 조여오는 느낌을 받아 모든 걸 뿌리치고 싶었지만, 와서 기다리는 사람을 무작정 세워 둘 수는 없는 터.
승헌은 지친 목소리로 혜림을 들여보내라고 비서에게 말했다.
혜림은 밝아 보였다. 혜수가 그랬듯이.
쌍둥이라 그런지 너무 똑 같은 그 모습에, 승헌은 죽은 혜수를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혜림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의자에 앉았을 때, 현태는 태도를 바꾸지 않은 채, 얼굴을 굳히고 승헌에게 말했다.
“형, 혜수가 죽은 지 2년이 흘렀어요. 언제까지 죽은 사람 붙들고 살 거에요?”
“… 니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아니, 난 관여 해야겠어. 내가 세라를 데리고 형을 찾은 건, 세라의 국어도 문제였지만, 더 크게는 형한테서 혜수의 잔재를 지우고 싶었어.”
현태는 자신이 평소 승헌에게 쓰던 가벼운 경어조차도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혜수도 내 절친한 친구였고, 앞으로도 그럴 꺼야. 그건 혜림이 너도 알아줬으면 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세라가 왜 떠났는지 감도 못 잡아? 늦지만 한국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애가, 지 하고 싶은 건 다 하는 애가, 갑자기 떠난 이유를 모르겠어?”
“… 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관둬. 억지 인연이었다. 그것도 니가 억지로 엮은.”
혜림은 앉아서 조용히 현태와 승헌의 대화를 들었고, 승헌의 마지막 말을 들은 현태는, 짜증난다는 듯이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세라에게 상처를 준 건 형이야. 산 사람 앞에 놓고, 죽은 사람 잔영에 흔들려서 여린 애 상처 준 사람은 형이란 말이야!
걔, 형이랑 헤어진 날 그렇게 악쓰다가 쓰러졌어. 그렇게 성대가 상하도록 악 쓰다가 쓰러진 걸 혜림이가 우리 집으로 데려왔고!!
세라는 하루 종일 울기만 하다가 갔어. 그게… 바보 같은 형 잘못이 아니란 거야?! 그래?! 사랑하는 사람이면, 죽었어도 그 사람이 최선이야 형은?!
난 아니야! 난 산 사람이 먼저라고 생각해.”
말을 하다 보니 열이 받쳤는지, 현태는 말을 마치고 승헌을 노려보다가 한 마디만 남기고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도 덤으로 함께.
“죽은 사람 잔영에 흔들려서 사는 형은… 아무리 똑똑하고 잘났어도, 최악이야.”
현태가 나가고, 두통이 극심해짐을 느낀 승헌은, 데스크를 떠나, 소파에 무너지듯 앉았다.
혜림은 닫힌 문을 보고, 피곤한 표정의 승헌을 한 번 보고는 입을 열었다.
“승헌 오빠….”
“………………….”
“오빠가 우리 언니, 아직도 너무 사랑해 주는 거 정말 고마워. 언니도 고마워 하겠지.”
“………………….”
“하지만, 그로 인해서 오빠가 이렇게 피곤하게 지내는 거, 언닌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래서….”
“죽은 사람은 마음 속에 묻는다잖아…. 이제 우리 언니 좀 놓고 살아줘.”
“…그게 내 마음대로 됐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 거다.”
“할 수 있잖아…. 오빠는 언니의 죽음이 오빠 탓이라고 생각하잖아. 오빠 탓이 아니야. 아무도 오빠를 탓하지 않잖아. 언니를 사랑해 줘.
그렇지만 그 사랑은 가슴에만 묻어두고, 오빠가 예쁜 사랑을 시작하길 바래. 언니도 그걸 원할 거야.”
혜림은 말을 마치고 조용히 웃으며 일어났다.
“그때 레스토랑 같이 온 사람. 오빠도 그 사람 신경 쓰이잖아. 오빠랑 잘 어울리더라.”
그 한마디를 남기고 간 혜림 덕분에, 사무실에는 조용히 승헌만 남았다.
그 후, 어렵지만 승헌은 혜수를 가슴에만 묻어두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오고 나니, 이제는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세라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맨 처음,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신의 눈치를 봐가며 책을 읽었던,
울면서 떼를 쓰며 현태를 찾았던,
김밥과 오뎅국물과 떡볶이가 맛있다고 함박 웃음을 짓던,
철인처럼 한국어를 일주일 만에 마스터 해와, 결국에는 무리해서 쓰러졌던,
놀이공원에서 울며 소리지르던,
그리고 식당 가에서 자신에게 화를 내고 속상해하던 세라의 모습들이 자꾸만 어른거려서
미친 듯이 더 일에 매달리고 살았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지금 통화를 마치고 다시 조용해진 세라를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
“Seung Heon, are you ok? (승헌, 자네 괜찮은가?)”
“……Yes……. Do you mind if I take her for a few minutes to discuss about our drama?
(…예… 저, 저희 드라마에 대해 논의하고 싶은데, 세라씨를 잠시 데려가도 될까요?)”
No Problem 이라고 웃는 Thomson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승헌은 세라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 놀라는 그녀의 표정도 무시한 채,
그녀의 손목을 세게 잡고는 어디론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What are you doing? What, do you even know me? Let go!!!
(뭐 하는 짓이야? 너 나 알기나 하니? 이거 놔!!!)”
“시끄러워.”
그렇게 막무가내로 세라를 끌고 온지 3분여 만에, 승헌은 나무가 울창한 한적한 공원에, 자그맣고 예쁜 분수대 앞에 멈추고는 세라의 손을 놓아주었다.
“What are you doing? Is this some kind of joke?!
(뭐 하는 거야? 지금 이거 나 가지고 장난하는 거야?!)”
“나한테 말할 때는, 한국어로 해.”
여전히 명령조인 그의 말투.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승헌은 변한 것조차 없어 보였다.
기가 막힌 세라가 다시 반박을 하려던 차에,
화악-
승헌은 세라를 잡아당겨 자신의 품에 가두었다.
어처구니 없는 세라가 그의 품에서 빠져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승헌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현세라 당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여자야.”
“What the-”
“당신 정말 나이에 안 맞게 어리고, 자존심 세고 제 멋대로지만”
“….”
“나보다 훨씬 어리고 살아온 방식도 전혀 다르고, 만난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
“당신이 신경 쓰여 미치는 줄 알았어.”
“무슨 말이-”
“…Will you give me a chance for us to blend, Sarah? (내게 우리가 서로에게 섞일 기회를 주겠어?)”
승헌과 세라가 사귀고 난 후, 첫 데이트 날이다.
여느 여자가 그렇듯, 세라도 남자친구인 승헌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래도 명색이 사귀고 난 후 첫 데이트인데.
그렇게 생각해서 약속시간 한 시간 전부터 열심히 준비하고 데이트 장소에 나온 세라인데, 결과는….
“당장 갈아입고 와.”
라는 승헌의 무뚝뚝한 말 한마디였다.
“왜- 이게 어때서? 여름 옷 치고는 수수하고 당연한 거 아니야?”
때는 한창 여름인지라, 목에 끈을 묶도록 되어있는 등이 조금 깊게 파인 나시를 입고,
핫팬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머리띠처럼 머리에 올리고 온 세라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승헌에게 되물었다.
“갈아 입고 오라면 와라 좀.”
“싫어- 집에 다시 들어가기 귀찮단 말야. 괜찮은데 이대로 가자- 응?”
승헌은 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세라야 어떻게 되었든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갔을 뿐.
세라는 못 말려라는 표정을 짓고, 빠른 걸음으로 승헌을 따라 잡고는 팔짱을 꼈다.
“승헌- 화 났어?”
승헌은 화난 듯 보였지만, 세라의 팔짱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1분도 안돼서 멈춰서는 승헌.
그리고 또 잠시 후에는, 승헌의 얇은 재킷을 입은 세라가 베시시 웃으며 그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질투 나면 질투 난다고 말을 하라구~ 승헌 바보- 풋’
나시를 입고, 핫팬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세라는 젊고 혼혈아 특유의 매력을 풍겨서,
남자들이 가다가 돌아볼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기에, 승헌은 그런 차림으로 데이트를 나온 세라가 내심 못 마땅했던 것이다.
세라가 더위를 싫어하는 걸 알기 때문에, 두꺼운 옷으로 칭칭 감고 싶은 것, 얇은 재킷으로 대신했다.
세라도 여름에 굳이 거치적거리는 얇은 재킷을 입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싫은 내색 없이 승헌의 팔짱을 끼고 걸을 뿐이다.
그다지 생각했던 것보다 얇은 재킷은 귀찮지 않았다고나 할까.
이 날 하루도, 다른 문화를 가진 두 남녀는, 서로를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색다른 하루를 보낸다.
류승헌과 현세라의 Blending, 여기서 The End.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ㅡ^
첫댓글 완결 축하드립니다.^ㅁ^!!!!!!!!!!축하축하축하~
감사합니다 ^ㅡ^
축하드려요^-^재미있게읽고갑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ㅡ^
벌써다 본것인가....... 에고고고고 좀더 싸웠다가<<<<< ;; 재미있었습니다!! ㅋ
제가 생각해도 조금 모자란 완결이었습니다. 그래도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ㅡ^
재밌어요!!!!!! 완결 축하드려요.....(뒷북)
감사합니다 ^^ 댓글도 완전뒷북이에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