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은식의 유교구신론과 양명학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의 진영(眞影) 박은식(백암 白巖, 1859-1925)은 이항로(李恒老) 문하의 화서(華西) 학파 도학자인 평북 태천(泰川)의 박문일(朴文一) · 박문오(朴文五) 형제에게서 수학하였으나 1898년 40세 때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에서 활동하면서 애국계몽사상가로 전환하였다. 그는 『황성신문』 주필(1898), 『대한매일신보』 주필(1905)로서, 혹은 1908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면서 당시 애국계몽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장지연 등과 대동교를 창립하여 유교개혁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는 당시 사회의 당면 과제 가운데서 종교 문제를 긴급하고 절실한 것이라 강조하며, 또한 ‘교’(종교)를 “성인이 하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정립하심으로써 만민을 깨우쳐 주는 것이다.”라 정의하여 유교적 종교개념을 제시한다. 이와 더불어 그는 유교의 종교적 근거를 마음의 인식에 두고, 마음을 중심으로 우주의 통일된 질서를 제시하는 심학-양명학 위에 유교의 종교적 인식을 제시하였다. 1911년 중국에 망명한 이후로 『한국통사(韓國痛史)』(1915) · 『대한독립운동지혈사(大韓獨立運動之血史)』(1919)를 저술하여 일제침략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서술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1925년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종교를 부식(扶植)시키는 과제의 시급함과 공자의 도를 나라 안에 떨쳐 일으키고 백성의 마음 속에 젖어들게 할 것을 요구하며, 이에 따라 유교를 종교적으로 진작시키기 위한 구체적 과제를 3조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곧 종교의 사무를 정비하여 밝히기 위해서는 태학(성균관)의 관장과 교수가 학부(교육부)에 예속되지 않고 독립성을 요구하며, 지방에서도 사림들이 학행이 있는 선비로 향교의 교수를 맡게 하여 학도를 교육하게 할 것을 요구한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유교조직의 전통적 교육기능을 계승하지만 정부로부터 분리된 유림의 자립과 지식층 중심에서 벗어나 대중 속의 확산이라는 두 과제로 집약될 수 있다.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에 수록된 글로서 동포에게 선조의 업적을 추모할 것을 호소하고 있다(글씨는 광개토왕비에서 집자). 박은식은 「학규신론(學規新論)」(1900)에서 먼저 “우리 나라의 종교는 공자의 도이다.” 라고 선언하여 유교를 국가종교로서 재확인하며, 유교가 쇠퇴한 현실을 진단하면서, “종교에 이르면 겨우 명목만 남으니 국가의 원기도 이로 말미암아 위축되었다.”고 하여 유교의 종교적 쇠퇴가 국가의 쇠퇴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제시한다. 그는 「유교구신론(儒敎求新論)」(1909)에서 유교가 개혁(개량구신, 改良求新)하지 않으면 결국 멸망할 것임을 경고하면서, “차라리 여러 선배에게 죄를 받고 유림파에 노여움을 얻을지언정 차마 공자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을 참을 수는 없다.”고 하여 유교개혁을 위한 자신의 신념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유교개혁론을 3조목으로 집약하였다. 그것은 ① ‘유림파가 임금을 지향하고 인민사회에 보급하려는 정신이 부족함’이다. 그는 인민에게 보급할 정신으로서 공자의 대동 의리와 맹자의 중민(重民) 이론을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② ‘여러 나라를 두루 다니면서 천하를 바꾸려는 신념을 강구하지 않는 비활동적이고 소극적 태도’이다. 그는 조헌(趙憲)이 여행길의 숙소에서도 길손들에게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독서하도록 권하였던 것처럼 혈성(血誠)과 활법(活法)으로 적극적 전파를 할 것을 요구한다. ③ ‘우리 나라 유교가 간이직절(簡易直截)한 방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 지리한만(支離汗漫)한 공부를 숭상하여 학풍과 학문방법의 어긋남’이다. 그는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 맹자의 ‘선입호대자(先立乎大者)’ 등을 들어 주자학의 산만한 방법이 아니라 양명학의 간단하고 절실한 방법을 쓰도록 요구한다. 「유교구신론」의 3대 문제는 군주 중심을 벗어나 인민 중심에로의 전환, 소극적 폐쇄성을 벗어나 적극적 전파활동, 산만한 주자학의 학풍을 벗어나 간단하고 절실한 양명학의 학풍을 추구한다. 곧 민주적 사회의식과 행동적 선교방법, 그리고 주체적 신념의 교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는 20세기 초에서 19 · 20세기를 서양문명이 발달하는 시기라 인정하면서도 “21 · 22세기는 동양문명이 크게 발달할 시기요, 공자의 도가 끝내 땅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장차 전세계에 그 빛을 크게 드러낼 시기가 있을 것이다.”라 예견하여 유교의 장래에 대한 강렬한 희망적 확신을 제시하였다. 또한 그는 「유교구신론」이 루터의 종교개혁에 상응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양명학적 유교개혁론을 제시하였다. 그는 「일본양명학회주간(日本陽明學會主幹)에게 보낸 편지」(1909)에서 자신이 주자학에서 갑자기 양명학을 주창하게 된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① 철학에 종사하여 인도의 근본을 수립하는 자에게 간이직절한 방법은 노력하는 시간을 덜어 준다. ② 성리학이 보수적이고 활발성을 잃어 사기가 왕성하지 못하고 인문(人文)이 떨치지 못하기에, 변혁하여 새롭게 하지 않을 수 없다. ③ 양명학의 주창은 쇠퇴하는 정신에 빛이 되고 무너져 가는 인심을 구제할 수 있게 한다. ④ 물질문명의 경쟁적 발달에 따라 도덕과 평화가 쇠퇴하는 현실에서 백성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양지(良知)의 학설이 불빛이 될 것이다. 또한 그는 왕양명을 ‘공자와 맹자를 활용하는 학자’라 하고, 명치유신의 주요 인물들은 ‘왕양명(王陽明)을 활용한 학자’라 하여 공 · 맹의 정신은 왕양명을 거쳐 일본 유학자들에 계승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나아가 그는 “일본이 서양의 물질로 국력을 크게 떨치고, 동아시아의 철학으로 백성의 도덕을 배양하여 문명사업의 완비를 도모할 수 있었다.”고 하여 자신의 계몽운동과 양명학 추구의 모범으로 일본을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그는 서양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나 칸트 및 버클리의 학설은 왕양명의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부합하는 점이 있음을 주목하는 등 서양문명과 양명학의 공통성을 인식함으로써 양명학에서 현대 서양문명의 계발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박은식은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1910)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왕양명의 ‘양지’ 개념을 매우 중시하여 인간에 양지가 있는 것을 하늘에 태양이 있는 것에 비유하며, 천리(天理)를 본체로 하는 ‘양지’와 공적(空寂)을 본체로 삼는 선불교의 ‘정지(靜智)’ 개념을 구별한다. 또한 그는 깨달음의 세 가지 방법으로서 언어상의 개념적 깨달음인 ‘해오(解悟)’ · 의식 내면의 관념적 깨달음인 ‘증오(證悟)’ · 현실에서 일을 통해 연마하여 얻는 깨달음인 ‘철오(徹悟)’를 구별한다. 여기서 특히 구체적 일에서 연마하는 사상마련(事上磨練)의 ‘철오(徹悟)’에서는 지(知)와 행(行)이 일치하고 본체와 공부가 하나가 되어, 관념(공, 空)이나 대상(물, 物)에 사로잡히지 않는 주재자의 자리를 지키게 되는 것이라 본다. 2) 장지연의 유교개혁사상과 유교종조국(儒敎宗祖國)의식 장지연(張志淵, 위암 韋菴, 1864-1920)은 영남의 도학을 계승하였으나 이익과 정약용의 실학사상에 접하면서 한 번 변하여 마침내 애국계몽사상가로 변신하게 되었다. 1899년 『시사총보(時事叢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의 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였으며, 1900년 광문사(廣文社)의 편집위원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를 간행하며, 정약용의 『강역고(疆域考)』를 보완하여 『증보대한강역고(增補大韓疆域考)』(1903)를 편찬하여 민족문화와 국학의 기반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논설을 썼다가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고, 1906년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1906)를 저술하고,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며, 휘문의숙(徽文義塾)의 장(長)으로 또는 평양 일신학교(日新學校) 교장으로 교육활동에도 종사하였다. 1908년 잠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해조신문(海潮新聞)』의 주필이 되었으나 이듬해 진주의 『경남일보(慶南日報)』 주필로 돌아왔고, 1910년 황현(黃玹)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실었다가 정간당하기도 하였다. 그는 언론인이요 국학자요 교육자로서 강인한 민족의식을 굽힐 줄 몰랐던 인물이다. 그가 한국유교사에 관한 최초의 통사적 서술인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1922刊)을 저술한 것도 유교를 통한 민족문화의 전통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그는 여기서 도학과 실학의 양면을 모두 긍정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했던 관서와 관북 지방의 유학자들에까지 관심을 넓히고 있다. 그는 유교의 기본성격을 『주례』(태재지직, 太宰之職)를 인용하여 “도를 밝혀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 정의함으로써 근원적 도와 현실사회의 민을 유교의 두 축으로 확인하여 유교가 세상을 구제하고 나라를 경영하는 도리라는 사회적 효용성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그는 근세의 산림 도학자들에 대해 “명성을 낚고 벼슬을 교묘하게 하는 마음과 당파를 수립하고 사사로움을 경영하는 계책을 가진 무리”라 하여 허세와 위선에 빠진 당파적 도학자들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을 밝힘으로써 유교개혁론의 근거를 확인한다. 장지연은 종교를 “국민의 뇌질(腦質)을 주조(鑄造)하는 원료요 한 나라의 강약과 흥망이 종교에 걸려 있다.”고 하여 종교가 국민정신의 중추가 되며 국가의 성쇠가 종교의 강건한 이상과 사회적 통합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처럼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전제로 유교를 종교로서 각성하고 있다. 곧 그는 공자를 유교의 종조(宗祖)라 함으로써 유교를 종교로 이해하고 공자를 종교의 교조로 본다. 유교적 인격의 주체인 선비에게는 궁색할 때의 도리와 지위를 얻었을 때의 사업이 있음을 분별하여 인격을 닦고 말씀을 제시하여 선각자로서 후각자를 깨우치는 것이 궁색할 때의 도리이고, 자신을 세상에 내세워 도리를 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은택을 끼치는 것이 지위를 얻었을 때의 사업이라 밝힌다. 이러한 전통적 선비관을 통해 역사의 위기 속에서도 선비로서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유교의 종교적 각성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강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시조를 단군의 신교(神敎)라 보고, 기자(箕子)를 한국유교의 종조(宗祖)라 하고, 따라서 우리 나라를 ‘유교 종조의 나라’(조선, 유교종조지방, 朝鮮, 儒敎宗祖之邦)라 하여 우리가 유교를 수용한 나라가 아니라 유교의 종주국으로 확인한다. 또한 우리의 종교사를 불교우세시대와 유교 · 불교의 병행시대, 유교의 우세시대로 변천되어 왔음을 제시하며, 당시를 신앙의 자유와 종파적 다원화의 시대로서 민족통일의 관념이 결핍되는 것으로 지적한다. 그의 유교개혁론은 민족운동이 기본이며 유교개혁사상이 민족의식에 깊이 뿌리 박고 있다. 3) 박은식 · 장지연의 대동교 박은식과 장지연 등은 1909년 9월 11일 ‘대동교(大同敎)’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하여 창건함으로써 당시 친일유교단체인 ‘대동학회(大同學會)’(뒤에 공자교로 개칭)에 저항하여 민족정신을 기초로 유교를 조직화하는 민족적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은식은 1909년 10월 10일(음력 8월 27일) 대동교회 종교부장의 직책으로 「공부자탄신기념회강연(孔夫子誕辰紀念會講演)」에서 대동교의 배경과 종지 및 발전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대동교’의 명칭은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나오는 ‘대동(大同) · 소강(小康)’의 개념에서 나왔으며, 그 의리는 『춘추』에 있다 하여, ‘공양삼세설(公羊三世說)’의 ‘거난세(據亂世)-승평세(升平世)-태평세(太平世)’로 역사발전론을 제시하는 강유위(康有爲)의 대동(大同)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 그는 대동교의 종지로서 먼저 천지와 만물을 일체로 삼는 어진 덕을 미루어 천하에 가르침을 세우며, 동시에 사람마다 고유한 밝은 본심에 근거하여 열어 주고 이끌어 내어 자신의 신체의 사사로움과 물욕의 은폐를 다스리며, 나아가 마음의 본체가 같음을 회복하는 것이요, 이에 따라 천하의 사람이 어진 덕에 함께 돌아가서 태평의 복락을 함께 누리게 하는 것이라 제시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致良知’의 교리요 동시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원리를 최고의 방법으로 강조한다. 또한 대동교(大同敎)의 발전방책으로는 ‘개도국민(開導國民)’으로서 서민대중의 계몽을 위해 국문으로 번역하여 일반 남녀 동포가 모두 이해하고 신앙하게 하여 대동의 교화를 이룰 것을 강조하며, ‘세계선포(世界宣布)’로서 세계에 선포하기 위해 퇴계(退溪) · 율곡(栗谷) 등 우리 선현들의 저술과 대동교회의 새 저술을 한문과 영어로 번역하여 중국과 일본에 전파하고 서양학계에 전파시킬 것을 의도하고 있다. 박은식의 대동교운동은 양명학과 강유위의 대동사상을 종합하여 우리의 현실에서 독특하게 계발한 유교개혁사상이다.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우리의 민족의식과 새로운 서구문물의 수용을 조화시키고, 양명학을 주창하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성리학적 전통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전통에 대한 존중의식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유교의 종교적 각성을 통해 대중적 확산과 세계에로의 성장을 추구하고, 다음 시대에서 서양의 압도적 영향력을 극복하여 유교의 주도적 지위를 회복할 것이라는 인류의 정신사에 대한 전망의 확고한 신념을 밝혀 주고 있다는 점에서 종교운동가로서의 뚜렷한 위치를 드러내고 있음을 본다. 장지연은 공자의 탄일(誕日)의례와 문묘(文廟)의 석전(釋奠)의례 및 제천(祭天)의례를 비롯한 황제의 의례(황례, 皇禮) 등 유교의례의 체계적 재구성을 추구하고, 나아가 의관제도의 개혁방법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의례의 재정립을 통한 유교적 실천의 활성화를 추구하는 것은 유교개혁운동의 중요한 과제로 인식될 수 있다. 여기서 ‘대동교’는 유교의 새로운 이념을 담고 있는 이름으로서 강유위의 대동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대동교의 입장에서 유교의 기본성격을 진화주의(進化主義) · 평등주의(平等主義) · 겸선주의(兼善主義) · 강립주의(强立主義) · 박포주의(博包主義) · 지성주의(至誠主義)라는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유교개혁사상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민족적인 의식을 지닌 혁신적인 것으로서 애국계몽사상의 이론과 더불어 강유위와 초기 양계초의 영향에 깊이 젖어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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