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8군 사령관 리지웨이는 1.4후퇴로 평택-삼척선까지 밀려난 전선을 38선 인근으로 다시 올리기로 결심했는데, 인천항 일대에 교두보를 다시 확보한다면 차후 반격 시에 상당히 유리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1950년 9월 15일에 있었던 거대한 상륙작전까지는 필요 없고 강력한 제해권을 발판삼아 단지 인천항을 확보할 수 있는 소규모의 작전을 지시했습니다.
[1.4후퇴 이후 반전을 이끈 명장 리지웨이]
(우측은 통역을 하는 언더우드가문의 원재한 선생)
이에 따라 한국 해군과 해병대가 작전주체로 선정되었는데, 인천 앞바다와 도서는 아군의 통제권 하에 있었고 인천항 주둔 공산군도 그리 강력한 것으로 판단되지 않아 충분히 가능한 작전으로 분석되었습니다. 작전을 총괄한 미 제95기동부대의 사령관 스미스(Allan Edward Smith) 소장은 YMS-510 강경함의 함장인 함덕창 대위에게 인천항 현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의 수집을 지시하면서 작전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었습니다.
[스미스제독과 작전을 숙의 중인 손원일제독]
1월 27일 07시 만조 때, 인천항 북쪽 인천기계제작소(현 만석부두 인근)앞에 침투한 강경함은 적 1개 소대가 경비하던 방어진지에 포격을 가하여 적을 격멸시킴과 동시에 4명의 특공대가 기습 상륙하여 정보 획득을 위한 2명의 포로를 생포하여 귀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날의 전과로 적의 방어 형태를 파악한 아군은 본격 상륙작전을 2월초로 예정하고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작전의 주역인 YMS-510 강경함]
수립된 계획에 따라 인천에 상륙하기로 예정된 부대는 덕적도에 주둔하고 있던 김종기 해군 소령 지휘하의 해병대 1개 중대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노명호 소령이 지휘하는 PC-701 백두산함이 2월 2일 덕적도에 도착했습니다. 수차례의 기만작전을 통하여 면밀히 분석을 마친 아군은 37도선에 정렬한 아군이 다시 북진을 개시하는 것(이른바 Thunderbolt작전)과 발맞추어 2월 10일 18시 만조 시간을 D-Day로 잡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에 참여한 PC-701 백두산함]
아군 함대가 포격을 가하여 탄막을 만드는 동안 100여 명의 해병대가 상륙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여야 하는데 바로 그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날씨가 갑자기 나빠져 덕적도에 주둔한 해병대의 탑승이 지연되어 예정 만조시간에 상륙이 불가능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같은 급보를 접한 노명호 함장과 김종기 소령은 인천 외항에 집결한 각 함정의 수병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총 37명의 특공대로 구성된 상륙 부대를 긴급 편성하였습니다.
[6·25전쟁 당시의 국군 해병대]
드디어 D데이 H아워에 지원사격이 시작되어 포탄의 불벼락이 공산군 진지에 정확히 떨어지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자 이틈을 이용하여 김종기 소령이 지휘하는 특공대가 인천기계제작소 앞 부두에 안전하게 상륙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교두보를 확보한 후, 김종기 소령은 전 대원에게 각자 담당한 목표를 제압한 후 21시까지 기상대고지(현 제물포 고등학교 인근)에 집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음은 전사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상륙 직전 인천 도심의 모습]
“이제 우리들은 적지에 있다…(중략)…너희들은 돌아가려해도 보다시피 우리를 싣고 온 함은 이미 이안하고 없다. 나를 믿고 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중략)…지시한 대로 인천시 기상대고지에 집합하라. 21시까지 집합하지 않는 사람은 사망자로 확정한다.”
[작전을 준비하는 한국 해군의 모습]
탄막이 걷히자 아군 특공대원은 함성을 지르며 각자 목표한 지점을 확보하기 위해 달려 나갔습니다. 당시 인천항은 적 1개 중대 규모가 방어하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아군의 진격에 놀라 뒤도 돌아보지 못한 체 도망가기에 급급했습니다. 당시 아군은 소수의 특공대가 아니라 대부대가 상륙한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제1대대 돌격 앞으로, 제2대대 돌격 앞으로” 하는 식으로 크게 소리 지르며 적을 기만하였고 적은 이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상륙 후 점거한 해안포대의 모습]
21시, 아군 특공대는 계획대로 기상대고지를 완전히 점령하여 인천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23시에는 시청(현재 중구청)까지 진출하였습니다. 전의를 상실한 적은 방어를 포기하고 시 외곽으로 도주하였고, 악천후로 덕적도에 대기하고 있던 해병대 본진이 다음날 07시에 상륙하여 점령지를 특공대로부터 인수인계 받음으로써 성공적으로 인천항 확보작전이 종료되었습니다.
[기상대고지를 점령한 특공대]
이처럼 소수의 자원 특공대원들에 의해 1.4후퇴 이후 한 달 만에 인천은 다시 탈환되었습니다. 전사에는 이를 제2차 인천상륙작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비록 1951년 2월의 작전은 5개월 전에 있었던 인천상륙작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도 않지만, 엄연히 적진 속으로 강습하여 거점을 안전하게 확보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유엔군이 북진작전을 개시하자 공산군은 더 이상 한강이북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1.4후퇴 한 달 만에 아군은 다시 서울부근까지 다다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데는 적의 측면에 비수를 들이대는 위치인 인천을 확보한 해군 특공대도 커다란 역할을 하였습니다. 제2차 인천상륙작전은 그 규모와 상관없이 전술적으로도 그리고 전략적으로 길이 빛날 위대한 작전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