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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도량 소식....♧ 스크랩 봉정사(경북 안동)
길상정(포항11기) 추천 2 조회 1,175 13.08.22 13:21 댓글 24
게시글 본문내용

가장 오래된 건물이 있는 신라시대의 고찰 봉정

2013. 8. 22.

 

 

2013. 8. 19. 07:00   "한국불교대학 大관음사 포항도량"에서 경북 안동의 봉정사와  봉화의 각화사. 그리고 축서사로 가기 위하여 관광 버스를 타고 우리절에서 출발한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아침 법회를 하며 안동으로 향한다.

 

대포고속도로를 달려 중부고속도로 경유해 동명휴게소에서 잠시 휴식 후 경치좋고 맑은 물과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인심좋은 안동을 들어서서 봉정사에

도착하니 따가운 햇살과 무더위가  우리를 맞아준다...

 

 

 

 

 

? 봉정사를 향해...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에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스님께서 창건하신 사찰로 천등산은 원래 대망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능인대사가 젊었을 때 대망산 바위굴에서 도를 닦고 있던 중 스님의 도력에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하늘에서 등불을 내려 굴안을 환하게 밝혀주어 천등산이라 칭하게 됐다고 한다

 

 

 

 

 

 

주차장에 내리자 벤치 옆에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배경이 되었음을 나타내는 표석이 있었다.

 

 

 

 

주차장에서 절을 향해 오르막길을 들어서면 '천등산 봉정사' 라는 표지석이 반긴다.

 

 

 

 

입장료를 받는 곳에서 걸어 5분 남짓 올라가면 일주문에 들어서게 된다.

 

 

 

 

 

 

절로 올라가는 길은 약간 오르막 길이다.

 

 

 

 

 

봉정사 일주문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번째 문이다.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데서 유래 되었지만 일심 (一心)을 뜻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연석을 가지고 허튼층쌓기로 마무리 한 기단 위에 둥근 기둥을 나란히 일직선상에 세우고 그 위에 공포를 짜서 결구하고 도리를 걸친 다음 서까래를 걸어 완성시켰다.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를 하고 측면에 풍판을 설치한 구조이다. 공포의 구조는 다포양식을 사용하였고 1990년 현 위치에 신축 하였다.

 

 

 

 

봉정사 (鳳停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천등산 기슭에 있는 봉정사는 672년(문무왕 12) 의상대사가 창건 하였다 한다. 부석사를 세운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종이로 봉황새를 만들어 날려 보냈는데, 그 새가 내려앉은 자리에 절을 짓고 봉정사라 이름지었다는 전설이 전하여 온다.

 

경내에는 대웅전·  극락전·  고금당(古今堂)·  화엄강당(華嚴講堂)·  해회당(海會堂)·  공덕당·  객료(客寮)·만세루 등의 중요 건축물과 고려시대의 대표적 석탑인 3층석탑이 있다

 

 

 

 

일주문을 지나 약간 오르막의 참나무 길을 걸어 봉정사로 들어간다.

 

신라시대 고승 의상대사가 부석사에서 접어 보낸 종이봉황이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다 날개를 접고 쉬고 있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천년고찰 안동 봉정사.

 

역사가 오래되고 가람배치가 아름다운 봉정사는 지난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방문해 우리 불교문화의 일단을 살펴보고 간 이후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기도 한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천년을 이어온 수행의 시간과 수행 공간의 숨결을 바로 봉정사에서 함께 했다.

 

 

 

 

 

 

일주문과 참나무 숲 길을 지나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면 훌쩍 큰 키의 참나무 숲에 둘러싸인 절이 모습을 드러낸다.  청정하고 단아하고 호젓한 분위기가 정감어린 모습으로 다가온다.

 

 

 

 

 

 

 

약간 넓은 마당이 나오고 왼쪽으로는 절을 소개하는 전각 안내도가 서있다.

 

 

 

 

 

 

경내에 들어서면 보호수로 지정된 소나무가 힘겨이 자리를 지키고...순례객을 반긴다.

 

 

 

 

 

길가의 해묵은 고목들은 이곳이 고찰(古刹)임을 증명하듯 하나같이 꾸부정한 모습들이다.  숲을 지났더니 하늘이 활짝 열리었고,  그 널따란 공간 저 멀리 봉정사 만세루가 투박한 질감으로 파란 하늘을 이고 서 있었다.

 

 

 

 

 

 

 

 

? 봉정사 만세루

 

 

누문은 대부분 이층으로 건축되며 아래층은 사찰의 중정으로 통하는 통로로서의 기능을 하며,  윗층은 산사의 전망을 감상해야 하거나 목어(木魚),  운판(雲版),  범종(梵鐘),  법고(法鼓)등을 걸 수 있는 종루(鐘樓)나 고루(鼓樓)의 기능을 겸하기도 한다.

 

 

 

 

 

 

오래된 소나무가 길 옆으로 펼쳐져 있고   잡초들이 듬성듬성 비집고 나온 돌계단을 오르면 낡은 문루이나 위엄을 갖춘 만세루를 지나 대웅전과 마주하게 된다.

 

만세루로 가는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올라 가다보면 대웅전 부처님의 형상이 조금식 조금씩 보이는 모습에 나를 되돌아 보며 나만이 느끼는 순간을 접할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시간이다.

 

 

 

 

 

 

사찰 주변을 계곡물이 빙둘러 흐르도록 하고 대웅전과 극락전이 있는 상계와 만세루가 있는 중계 그리고 중생들이 머무르는 하계로 구분하여 배치한 계단식 가람배치가 인상적이다.

 

 

 

 

 

 

옛모습 그대로의 오름길 계단과 치장을 전혀 하지 않은 만세루를 들어서면 봉정사 가람을 만난다

 

만세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을 달아 가구의 노출을 방지하고 비나 바람으로부터 보호 받도록 했다.   건물의 구조는 이층 누각식 건물로 일층인 아랫부분은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우하주는 누상주에서 사용한 것보다 더 굵은 부재를 사용하여 견고하도록 보이며 사찰의 중정으로 오르는 통로의 구실을 한다.

 

 

 

 

 

가끔 형식으로만 존재하는 다른 절들의 누와는 달리,   봉정사 만세루는 분명 루(樓)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극락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었으며, 극락과 속세를 분명하고 확연하게 구분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천둥산 봉정사 현판 - 동농노어서/東農老漁書 (東農 金嘉鎭, 1846∼1922)

 

 

 

 

만세루

 

자연환경에 조화롭게 순응하며 구릉이나 사찰의 높이의 차를 자연스럽게 이용하여 건축한 문루는 사찰의 중심 공간의 본당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서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곧  '속세를 떠나 온갖 번뇌와 망상을 벗어 버리고 오로지 부처님의 세계로 귀의 한다'는 성장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굵직한 나무 기둥은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본당을 들어서기 전에 좌측 울타리를 보니 옛스러움이 묻어난다.

 

 

 

 

 

 

만세루 돌계단이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고 대웅전으로 이르는 문지방 역할을 하고 있다.

 

 

 

 

 

 

만세루 누각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올라서면 대웅전 전면으로 부처님이 보인다

 

 

 

 

 

 

만세루 누각 아래서 바라본 대웅전

 

 

 

 

 

 

만세루를 통해 바라본 대웅전의 모습이 웅장하다 못해 신성하기까지 했던 것은?..........

 

 

 

 

 

만세루, 대부분의 사찰 대웅전에 이르려면 이런 루의 마루 아래를 지나야 한다.  부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고개숙이는 겸손함을 갖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세루 밑으로 바라본 봉정사 대웅전의 모습

 

만세루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 맞닥뜨린 대웅전.  우선 만세루와 마찬가지로 있는 듯 없는 듯,  세월에 빛바랜 단청이 눈에 띤다.

내소사의 대웅보전이나 선암사의 그것들과 마찬가지로 봉정사의 대웅전 단청은 희미한 것이 자연스러움 그 자체였으며 그것이 고찰의 위엄을 더 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사찰들의 갓 칠한 단청들보다 자연스럽게 퇴색한 색감을 좋아하는 때문일 것이다.

사찰을  하나의 문화유적으로 인식하는 이상,  그 안에서 천 년이란 무상한 시간을 느끼고 싶은 욕심이랄까...

 

 

 

 

 

 

 

 

 

만세루 누각을 들어서서 바라본 만세루 

 

 

 

 

 

 

만세루의 창방으로 자연을 담아 내는 멋스러움

 

 

 

 

 

 

만세루에 앉아서 바깥을 본 풍경이다.

똑같은 풍경을 바라 보면서도 보는 색깔들은 다 다르다.  보는이의 포커스에 따라 사물의 색깔도 심상도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만세루는 드라마 '황진이'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진이가 서화담과 담론을 나누는 장면의 배경이다.

 

 

 

 

 

 

 

 

 

 

 

만세루 후면 편액 (金 石 ?)

 

 

 

 

 

 

만세루.... 불전 사물인 운판 , 목어, 법고가 안치되어 있다.   법고는 땅위의 짐승을, 목어는 물 속의 중생을, 운판은 날짐승을 소리로 구제한다.

 

 만세루는 우물마루 바닥에 평난간으로 둘러져 있으며 법고와 목어 판이 놓여져 있어 예불을 알리는 골고루로서의 기능을 한다.

 

 

 

 

 

 

만세루 누마루

 

 

 

 

 

 

만세루의 법고와 목어

 

 

 

 

 

 

   만세루 내부에 붙어 있는 덕휘루 편액(金嘉鎭)

누에는 '덕휘루(德輝樓)'라는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어 이 누문의 이름이 덕휘루였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만세루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만세루 누마루에서 바라본 대웅전

 

 

 

 

 

 

만세루는 편안히 걸터 앉아 쉬어 가는 영역....

이렇게 앉아서 대웅전을 마주 하노라면 ..봉정사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한다.

 

 

 

 

 

 

대웅전서 바라본 만세루

 

 

 

 

발걸음을 뒤로하여 아까 올라왔던 만세루를 보았다. 건축 양식이 조선후기라 한다. 아주 단조롭지만 실속있는 표현이란 생각이 든다.   거친 손맛이 서민적인 느낌이다.

 

 

 

 

 

측면 난간은 사라지고 없을 정도... 이처럼 만세루는 편안한 휴식처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난간정도는 수리를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만세루에 오르면 천등산의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봉정사 건축물의 구조 및 특징은 봉정사의 영역은 2부분으로 나뉜다.  대웅전-화엄강당-요사채의 영역과, 극락전-고금당, 화엄강당의 영역이다.

두 영역은 동서로 나란히 놓인 병렬축형(?列軸型)을 이룬다.   전각 배치가 참으로 경이롭다.

 

 

 

 

 

 

? 봉정사 대웅전

 

 

 

 

 

 

봉황의 날개처럼 활짝 펼쳐진 대웅전 (국보 311호)

 

대웅전의 건립 연대는 자세한 자료가 없어서 정확한 연대를 알지 못하나 건축 양식과 1962년 12월 건물의 일부를 해체하여 수리 할때 일부분의 묵서명이 발견 되어 추정이 가능 하다고 할수 있다.

1290년 고려 충렬왕 16년으로 이미 다포계의 법식이 고려에 알려져 있던 시기이다.

봉정사 대웅전은 현존 하는 다포계 건물로는 최고의 건물이다.

자연석의 막돌허튼층 쌓기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건물이다.

겹처마팔작지붕에 다포양식을 한 이 건물은 산 중턱에 세워진 건물이면서도 평야를 끼고 있는 지역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으며,  원기둥 위에 창방(唱彷)과  평방 (平彷)을 돌리고 그 위에 공포를 올려 놓았으며,  주간이 넓고 오포작(五包作)이라서 포벽 (包壁)이 넓게 보이는 반면 기둥은 짧게 보여 매우 안정감을 준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형은 교두형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포의 짜임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외부쪽으로는 쇠서형이며 내부족은 교두형(翹頭形)으로 짜여 그 수법이 고려말 ~ 조선초의 양식을 잘 보여준다.

 

 

 

봉정사 대웅전에서는 팔작지붕 다포집의 웅장한 힘과 멋이 넘쳐난다.

지붕은 팔작으로 비교적 처마 깊이가 깊고, 처마는 겹처마로서 네 귀의 추녀끝에는 활주를 받쳐 추녀마루를 지탱하고 있다.

 

 

 

 

 

아래로는 통풍구가 반달 형태로 군데군데 있으며,  특이하게 법당앞에 툇마루가 있는데 이러한 예는 툇간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어 참으로 특이한 경우로 느껴진다.

 

일반 가옥처럼 툇마루라...가운데 기준으로 측면 기둥쪽이 약간 높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직선이면서도 양쪽 끝을 살짝 추켜 올린 맛이 단아하다.

 

 

 

 

 

툇마루가 있고 걸쇠로 걸어둘 수 있는 문들이 있다.

전면 3칸은 전부 개방하고 문비를 설치하였는데 궁판 받친 띠살무늬의 사분함(四分閤)이다. 이 문작은 앞의 쪽마루와 동시에 후대의 구조물이다.

 

 

 

 

 

 

 내부의 바닥은 널마루를 전면에 깔고 내부 고주(高柱)를 이용하여 후불벽(後佛壁)을 만들었고 고주 앞에는 불단을 짜서 불상을 안치하였다.

 

불단은 150cm정도의 높이로 만들고 청판에는 연화문을 조각하여 장엄했다. 불단 위에 연화좌를 놓고 삼존불을 봉안했다.

 

 

 

 

 

주불과 후불탱화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좌우 보처로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을 협시로 모셨다.

 

 

 

 

 

 

불상 머리 위를 화려하게 치장한 보개(寶蓋)와 그 주위에 설치된 용과 봉황의 조각도 일품이다.

 

 

 

 

 

 

전각 내부도 화려한 가운데 경건하다.

가장오래된 목조건물이라 그런지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다.....

 

 

 

 

 

 

 

 

 

 

 

불단 위쪽은 아름다운 소란반자를 설비하고 그 중심에 따로 닫집을 대신하여 보계를 구성하여 장엄미를 추구했다.  보개의 천장에는 구름이 둥실 떠 있는 하늘을 두 마리의 황룡과 백룡이 날아가는 모습을 그려 하늘의 신비함과 권능을 표현했던 것이다.  보개 아래의 본존상 뒷벽에는 불벽(佛壁)을 조성했다.  대량(大樑)에 세운 간주(間柱)를 의지하여 벽체를 구성한다.  간주에는 아래 위로 주의(柱衣)를 입히고 그 사이에 기둥을 감싸안으며 상승하는 용을 장엄하게 그렸다.

 

 

 

 

 

 

 

 

 

 

 

 

불벽의 앞쪽에는 후불탱화인 영산회산도(靈山會相圖)를 걸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을 중요한 위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10대 제자 사천왕 등을 배치한다.

후불탱화인 영산회상도는 강희(康熙) 52년(1713) 윤(潤) 5월 1일 제작한 것으로 크겨나게 되는 가로 380cm,  세로 360cm이다.   후불탱화를 보수하기 위하여 불사를 하게 될때에 희귀한 벽화 형태의 후불탱화가 하나 더 발견된 이 탱화는 수미단과 보개를 연결해야 하는 주불 뒷벽에 채색으로 그려진 가로 세로 약 417cm 크기이다.  석가불이 영취산에서 관무량수경을 설하게 되는 장면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그림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 러나 고려 변상도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꽃비의 표현을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고려 변상도의 상단부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구도,  벽화 테두리의 연화 당초문의 색상과 기법이 건물 내부 단청과 유사한 점,  벽화가 훼손되어서 1712년에 새로이 후불탱화를 제작하여 봉안한 사실 등으로 미루어 대웅전 초창 때 그려진 것만은 틀림없어 보이는것 같다.  지금까지 남아있게 되는 조선초기 불화자료가 희귀하고,  조선 전기 이전의 후불벽화도 1476년에 그려진 전남 강진의 무위사 극락보전 아미타 3존도가 유일한 것임을 감안해 버릴때,   봉정사 대웅전 후불벽화는 우리 나라 불화의 도상과 양식 연구 뿐 아니라 회화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봉정사 대웅전 후불탱화는 건축 뒷 벽면에 그려진 것으로 수리를 하던중 1997년  발견된 것으로 연대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한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로  강진 무위사 극락전것 보다 40여년이 앞선다 한다.

 

 

 

 

 

 

국내서 가장 오래된 ‘후불벽화  봉정사 대웅전 ‘영산회상도’

 

 

 

 

 

 

 

 대웅전 신중탱

 

 

 

 

 

 봉정사 대웅전 아미타설법도 ( 阿彌陀說法圖) - 보물 제1643호

 

 

 

 

 

 

 

 

 

 

 

이 건물의 가장 큰 재산이 있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단청을 옛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것...그래서 인지 희미하게나마 단청이 보인다. 단청이 아무리 희미해져도  보수를 할 수 없는 이유가 그러하다는것. 고대미술사의 큰재산이라 한다.

 

 

 

 

 

 

대웅전 삼존불을 모신 수미단

 

 

 

 

 

 

 

 

 

 

대웅전 앞인데, 마루를 설치한 것이 특이하다

 

 

 

 

대웅전의 자연스러운 단청

 

오래된 단청은 사람을 닮았다.   화려한 시절을 지니고 나면 깊고 그윽한 삶의 연륜이 묻어나는 인간사..

그것은 추녀를 표현하는 단청의 이미지다.

 

 

 

 

 

화려한 양식이지만 고풍스러움은 그대로인 듯...

 

 

 

 

 

 

측면에서 본 대웅전

 

 

 

 

 

 

 

 

 

 

 

 

 

 

 

 

 

대웅전 앞 괘불대

 

 

 

 

 

? 안정사 석조여래좌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44호)

 

 

 

 

 

 

 

 

 

 

 

 

 

 

 

 

안동댐의 건설로 안정사가 수몰되면서 이곳에 안치되었다.   9세기경 축조된 것으로 불상은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참으로 인자하신 풍미의 석가여래좌상의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9세기의 것으로 보인단다.

 

 

 

 

 

 

 

 

 

?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 15호)

 

 

극락전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의 교주이시며,  중생들의 왕생극락을 인도하시는 아미타부처님을 주불로 하는 법당으로,  미타삼부경에서 유래한다. 

정토신앙 계통의 종파나 화엄종 등 사찰에서 주불전이 될 때는 무량수전(無量壽殿),  수광전이라고도 하며, 주불전이 아닌 경우에는 미타전 또는 아미타전(阿彌陀殿)이라 한다.

 

 

 

 

고금당 (보물 제449호) 과 극락전은 같은 영역 안에서 삼층석탑을 바라보고 있다.

 

 

 

 

극락전 (국보 제 15호)

 

극락전은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목조건물 중 최고의 건물이다.

 

가공석 및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4칸의 맞배지붕과 주심포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물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내포하고 있어 더욱 주목되고 있다.

 

 

3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갑석을 올리고 크기가 다른 자연석 주춧돌을 사용하였으며 정면 3칸, 측면 4칸의 구조이며 이 건물은 감실 형으로 주벽이 토벽으로 밀페되고 따로 낸 문얼굴에 널 빤지 2장을 사용한 문짝을 달았고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주삼포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가구는 9량가인데 그 구성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고주 2본이 뒤쪽에 있다.

그러나 평주상의 대량과 퇴량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 높이로 만들어진 특색을 보인다.

다른 법당에서는 보기 드문 구조다.

 

 

 

 

 

 

건축양식을 꼼꼼하게 살펴보았다.   참으로 간결하고 단아한 맛이 일품이다.   필요한 만큼만 튀어나오고 경사면을 깍아내어도 곡선미를 살렸으며,  끼워맞춤 틈새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다.   그러한 점들이 천년을 버티게 하였나보다.

 

 

 

 

 

단아한 맛이 일품이다. 

어찌보면 초라할 수도 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건축물로 다시 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린다고 많은 생각을 하게한 봉정사 여행이었다.

건축에는 문외한이지만 보고 들은 풍월과  감각만으로 봉정사를 찾았으나 사전지식을 더욱 쌓은 뒤 다시금 찾아 보리라 ...........

 

 

 

 

 

 

 

 

 

 

 

법당 좌측 안쪽의 모습이다. 겉모습과 달리 안쪽의 기둥이나 받침은 바깥과는 사뭇 다르다. 복잡하다할

정도로 얽기설기 얽혀있다.

국내 유일하게 발견되는 양식으로 복화반...연꽃을 엎어 놓은 듯한 받침...삼국시대의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만 발견된 양식이라 하니 고대건축양식 그대로인것이다.

 

 

 

 

 

이것이 복화반...

 

상부의 하중을 넓게 분포시키는 역활을 하게끔 하면서 한껏 멋을 부려 놓았다

정면과 측면을 함께보니 특이한 점도 있는 것이 정면이 더 음에도 불구하고 정면보다 측면의 기둥이 더 많다.   안쪽의 측면모습처럼 바깥면도 똑같이 얽혀있다. 장혀도 길게 뽑아져 나와 있어 측면 지붕이 넓다.

 

아마도 시소처럼 양면 기둥을 중심으로 무게중심을 측면쪽으로 이동시켜 대들보에 걸리는 과도한 하중을 보완해 주는 의미가 아닐까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러한 많은 점들이 지금의 극락전을 있게한 이유가 될까한다.

공포와 대들보,  대들보와 주심도리로 이어지는 각각의 부재들이 마치 기계가공을 한듯이 틈새없이 한몸처럼 엮어놓음이 앞으로도 천년은 족히 버텨 줄만하다

 

 

 

 

 

 

건물 안쪽 가운데에는 불상을 모셔놓고 그 위로 불상을 더욱 엄숙하게 꾸미는 화려한 닫집을 만들었다. 또한 불상을 모신 불단의 옆면에는 고려 중기 도자기 무늬와 같은 덩굴무늬를 새겨 놓았다.

 

 

 

 

 

 

 

 

 

 

아미타불을 전각의 가운데에 이동식 불단을 설치하여 그 위에 봉안하고 있고 좌 우 협시보살은 모셔져 있지 않다.   단지 불단에는 높이 100cm정도인 아미타불만 모시고 있지만 불단의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본존불인 아미타불과 좌 우 협시보살인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그린 삼존도형식을 취하고 있다.

 

 

 

 

 

 

극락전의 우측쪽인데,  우측 기둥은 네모지고  좌측 기둥은 둥근 모양이다.  음양의 조화를 기했다나...

 

 

 

 

 

 

써가래도 둥근 것에다가 부연한 것,  즉 며느리 써가래는 네모지다.  역시 음양의 조화.....

 

 

 

 

 

 

극락전의 우편 창문 그 우측에는 성수만세(聖壽萬歲)라고 새겨두었다.

 

 

 

 

 

 

극락전의 우편 창문 그 좌측에는 주상전하(主上殿下)라고 새기고,

 

 

 

 

 

 

기둥은 배흘림 형태이며,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기둥위에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극락전의 좌우 협칸에는 살이 각 11개가 달린 광창이 있다

 

 

 

 

 

 

단청중에 백룡이 보인다.

 

 

 

 

 

 

 

 

 

 

 

정면의 3칸에는 각각 청룡,  백룡,  그리고 적룡이 있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문을 달고, 양 옆칸에는 창문을 내었다.

 

 

 

 

 

 

극락전도 대웅전처럼 법당앞 툇마루와 문을 그대로 간직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극락전  우측면인데 우측 기둥은 네모지고,  좌측 기둥은 둥근 모양이다.  음양의 조화를 기했다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 봉정사 고금당 (보물제 449호)

 

 

 

 

 

 

고금당(보물제 449호)

 

고금당은 극락전의 앞 서쪽에 세워져 있다.

이 건물은 동쪽에 있는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같은 목수에 의하여 건축되어 조선시대 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의 간격이 좁고 기등의 키가 높은 구조를 하고 있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공포는 익공에 가까운 주심포계이며 가구는 고주가 없는 7량가이다.

정면 3칸에는 칸마다 2짝으로 된 띠살문을 달았다.

도리와 장혀를 길게 밖으로 빼내어서 축면 지붕에 깊이감을 주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화엄강당에는 대들보와 마루보 사이에 조그만 살창을 두고 있지만 고금당에는 없다.

이것은 화엄강당이 판고 등으로 쓰이던 건물이어서 측벽에 살대를 꽂은 통풍창이 있는데 반하여 고금당은 선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살창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좌측면에는 아궁이를 내어 난방을 할 수 있도록 꾸몄다.  내부는 3칸 통으로 공간 활용을 넓게 하였다.

 

 

 

 

 

 

 

 

 

 

 

 

 

 

 

 

 

 

 

 

 

 

 

 

 

 

 

 

 

 

 

 

 

 

 

 

 

 

 

 

 

 

 

 

 

 

 

 

 

 

 

 

 

 

 

 

 

 

 

 

 

 

 

 

 

 

 

 

 

 

 

 

 

 

 

 

 

 

 

 

 

 

 

 

 

 

 

 

 

 

 

공포는 기둥 위에만 배치된 주심포(柱心包)집 계통의 구성인데,  기둥 윗부분에 꽂은 홑첨차와 그 위로 주두(柱枓)에서 나온 살미첨차가 겹친 위에 행공(行工)첨차를 가로 놓고 외목도리(外目道里)를 받쳐 놓았다. 주두(柱枓)에서 좌우로 벽면(壁面)에 배치된 첨차는 포벽(包壁) 속으로 가리워져서 보이지 않으며,  창방(昌枋)도 역시 그러하다. 그  러나 건물 뒷면에서는 모두가 원래의 상태대로 나타나 있다.

 

공포(공包)를 구성하는 첨차의 형태는 이미 조선(朝鮮)초기의 특색을 잃고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건립연대가 중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 봉정사 화엄강당 (보물 448호)

 

 

 

 

 

 

스님들이 공부하는 강당으로  불교의 기초 교학을 배우는 곳이며 종무소도 겸하고 있다.

화엄강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인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이다.

자연석을 쌓은 축대 위에 장대석으로 낮은 기단을 만들고 주춧돌을 놓았다.

정면 왼쪽 1칸은 방으로 교살창을 달았고 나머지 2칸은 마루로 궁판이 있는 띠살문을 사분합으로 만들어 달았다.

 

 

 

 

 

 

이 건물의 공포는 주심포계에서 익공계로 변화해가는 초기 절충형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기둥간격 간걱이 넓은 반면 기둥은 굵고 짧으며 공포의 부재도 높고 굵어서 벽면대 지붕의 비율이 1:1에 가깝다.

강당앞에서 바라보면 전체적인 분위기가 차분하고 안정되어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이는 지붕이 맞배지붕이며 기둥 간격이 넓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건물로 주심포계 이익공 공포형식이다. 마구리가 새날개모양처럼 휘어있는 살미를 익공이라고 한다.

 

 

 

 

 

 

 

 

 

 

 

 

 

 

 

 

 

 

 

 

 

 

 

 

 

 

 

 

 

 

 

 

 

 

 

 

 

 

 

 

 

 

 

 

 

 

 

 

 

 

 

 

 

 

 

 

 

 

 

 

 

 

 

 

 

 

 

 

 

 

 

 

 

 

 

 

 

 

 

 

 

 

 

 

 

 

 

 

 

 

 

 

 

 

 

 

건물의 측면에는 중앙에 방주(方柱)를 세워 대들보를 받쳤으며,  대량(大樑)과 그 위의 종량(宗樑)과의 사이에는 살창(窓)을 하나 달았고,  종량 위의 마루대공(臺工) 좌우에는 소슬합장(合掌)이 보인다.   박공(??) 머리에 나와 있는 도리 밑을 받친 첨차(?遮)들은 그 전부가 다포집 계통의 첨차들이다.

 

 

 

 

 

 

 

 

 

 

 

 

 

 

화엄강당은 익공계의 공포가 어떻게 생성되기 시작하였는가에 대한 의문을 풀어 주는 것으로 이 건물의 가치도 경내의 극락전과 대웅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귀중한 건축물이다.

 

 

 

 

 

 

 

 

 

? 봉정사 삼층석탑 (경북 유형문화재 제 182호)

 

 

 

 

 

 

삼층석탑(경북 유형문화재 제 182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은 탑의 형태로 보아 고려시대 중엽에 만들어진 탑으로  이중 기단의 방형석탑으로 탑신부의 폭이 기단에 비해 현저히 좁으며 상륜부에는 머리장식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1층 탑신에는 자물쇠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이중기단의 방형 석탑으로서 기단부에 비해 탑신부의 폭이 좁으며 각층 높이의 체감이 적당한 반면 폭의 체감율이 적고 옥개석도 높이에 비해 폭이 좁아 처마의 반전이 약하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약간 둔한 느낌을 준다.

상륜부 일부는 남아 있지 않다.    답의 총 높이는 318cm이다.

 

 

 

 

 

 

 

 

 

 

 

 

 

 

? 봉정사 삼성각

 

 

 

 

 

 

칠해진 단청으로 조금은 볼썽사나웠던 봉정사 극락전을 지나 사찰의 가람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삼성각에 올라섰다.

 

 

 

 

 

 

삼성각 앞의 고목나무가 삼성각을 수호하듯 오랜 세월을 그렇게 그자리에 서 있었다....

 

 

 

 

 

 

 산신(山神) . 칠성(七聖) . 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당우(堂宇)이다.   삼성은 각각 재물과 수명과 복을 관장하는 존재로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과의 습합현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산신은 원래 불교와 관계가 없는 토착신이나 불교가 전래된 후 일반 대중에게 포교하기 위한 방편으로 재래신앙에 대한 수용력에 의하여 먼저 호법신중이 되었다가 후대에 원래의 성격을 불교 안에서 되찾게 된 것이다.

 

산신은 가람수호신으로서의 기증과 함께 산속생활의 평온을 비는 외호신으로 받들어지며 자식과 재물을 관장하는 신이다.

칠성은 북두칠성을 가리키는데 별나라의 주군으로 인간의 복과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독성은 나반존자(那般尊者)라고도 불리며 십이인연(十二因緣)의 이치를 홀로 깨달아서 성인의 위치에 올라 말세 중생에게 복을 내린다고 한다.

 

삼성은 모두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들로서 일반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의 토착신앙인 삼신신앙을 불교와 습합함으로서 중생 구도의 목적을 띠고 있다.   따라서 건물의 이름을 전(殿)이라 하지 않고 한 단계 격을 낮추어 각(閣)이라 일컫는다.

 

 

 

 

 

 

밑에서 볼 때는 산도 아닌 것 같더니,  그래도 역시 산사는 산사였다.  절이 있는 곳이 곳 명당이라더니 그곳에서 바라보는 전경과 사찰의 한옥 지붕들은 8월의 신록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고 있었다.

 

 

 

 

 

 

 

 

 

 

? 봉정사 범종각

 

 

 

 

 

 

 

 

 

 

 

? 봉정사 무량해회

 

 

 

 

 

 

대반야경,   화엄경에서,   해회(海會)라 함은 수없이 많은 법문의 자리(會相)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다.

통현장자는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 제9권에서 세주묘엄을 설명하면서,  或言無量以嚴海會故言世主妙嚴(혹은 한량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바다와 같은 회상을 장엄하기 때문에 세주묘엄이라고 말한다.)라고 무량해회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무량해회 주련

 

自從今身至佛身 자종금신지불신     지금 이 몸이 불신이 되기까지(성불할 때까지)

 

堅持禁戒不毁犯 견지금계부훼범    계율을 굳게 지켜 추호도 범하지 아니할 것이니

 

唯願諸佛作證明 유원제불작증명    바라옵건대 모든 부처님께서는 증명하시옵소서.

 

寧捨身命終不退 영사신명종불퇴    차라리 목숨을 버릴지언정 끝까지 물러나지 아니하겠습니다.

 

 

 

 

 

 

 

 

 

 

 

 

 

무량해회 요사의 협문인 진여문이다.

 

 

 

 

 

 

 

 

 

 

 

 

? 봉정사 공덕당

 

 

 

 

 

공덕당은 공양하는 곳이다....

 

 

 

 

 

 

 

 

 

 

 

 

 

 

 

공양간과 공양간 뒤의 김치독

 

 

 

 

 

 

 

 

 

? 봉정사 성보전(聖寶殿)

 

 

 

 

 

 

 

 

 

 

? 봉정사 소각장

 

 

 

 

 

 

 

 

 

 

 

 

 

 

? 봉정사 전경

 

 

 

 

 화엄강당과 만세루

 

 

 

 

 

 

화엄강당과 대웅전

 

 

 

 

 

 

오래된 단청이 남루하거나 우중충하게 느껴지지 않고 은근한 연륜으로 다가오는 것은 절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격조 있는 분위기 때문이리라.

 

 

 

 

 

 

늘 입어 편한 옷처럼 수수하고 익숙한 매무새의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안목을 준비한 사람이면 쉽게 발을 뗄 수 없는 사찰이다.

 

 

 

 

 

 

 

 

 

 

 

 

대웅전을 뺀 대게 건물이 간결한 구조의 맞배지붕으로 단순 소박의 멋이 상쾌하고 한국적 마당의 정취도 한 맛이다.

그러나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은 옛적 어느 때 높지도 않은 벼슬에서 물러나 이젠 고향으로 돌아 온 늙은 선비가 시름없이 먼 산 바라기 하던 그 마당을 닮았고, 극락전 앞마당은 속내 정갈한 별당 아씨가 티 못 내고 님 그리던 그 뜰을 닮았다. 거기 흙봉당 막돌에 걸터앉으면 한시름 털기에 너끈하니, 이 맛을 어찌 함부로 하랴.

 

 

 

 

 

봉정사는 중요건물 대부분이 국보거나 보물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봉정사의 맛은 편안함이다.   전체로 보면 산과 절이 모두 편하다.   산에 절이 있다기보다 절이 있어 산이 편하고,   산이 있어 절이 편해지는 느낌이다.

 

 

 

 

 

 

 

시골 부잣집 분위기 같이 아늑한 평안함에는   봉정사를 따를 수  있는 사찰이 별로 없다.   아래서 보나 위에서 보나 봉정사는 그저 편하다.

 

 

 

 

 

 

 

 

 

 

 

 

 

 

 

 

 

 

 

 

 

 

봉정사의 멋진 모습을 뒤로 하고  대웅전과 공덕당 옆 사립문을 지나서 봉정사 동쪽 약 1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영산암으로 향한다.

 

 

 

 

 

? 봉정사 영산암

 

 

암자다운 암자를 즐기려면 영산암이다.

고즈넉함 속의 여유,   정돈된 조화 속의 자유,   영산암은 한국적 정원의 멋과 맛이 제대로 살아 있는  암자라기보다는  풍류 깊은 어느 선비의 옛 집을 닮았다.

 

 

 

 

 

 

 

 

산사의 암자는 또 다른 느낌이다.   외딴집 숲속의 사람을 생각하니까......

 

멀리 인가와 떨어진 곳에서의 적막감과 고독감!!!

산사의 암자는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오롯이 욕망과 명예를 잠재우고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또다른 문은 아닐까.

 

봉정사 영산암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촬영지다.

동자승이 노스님의 시중을 들고 해소기침 그르응 거리며 문을 열고 자신의 생이 얼마나 남았나 하고 고민하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어딘가 많이 본 듯한 그 기억속에 있던 풍경은 바로 영산암이다.

아직도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알 수가 없다..............

 

 

 

영산암은 스님들의 참선 수행 처라 공식적으로는 출입금지다.

 

 

 

 

 

 

 

 

 

 

 

 

 

 

 영화촬영지로 오히려 유명해진 영산암으로 오르는 계단

 

 

 

 

이제 봉정사 부속암자인 영산암으로 가는 길이다. 

 

돌 계단이 마음을 쏙 빼앗을 만큼 아름답다.

 

 

 

 

 

 

 

 

 

 

 

 

 

 

 

 

 

 

 

 

 

 

 

 

대웅전을 지나 항상 열려있던 사립문을 지나 100m 즈음에 연초록의 숲 속에 영산암이 있다.  개울건너 조용하던 암자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영화의 배경으로 나오며 유명한 곳이 되었다.

 

영화에 밝은 사람들은 알 것이다.   1989년 로카르노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배용균 감독의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에서 늙은 스님이 문을 열고 해진을 부르는 곳이 이 영선암의 법당인 응진전이다.   이 영화 이후로 이곳은 명소가 되었다.   그 결과 몰려드는 방문객을 편히 맞기 위해 영선암과 봉정사 사이에 흐르는 계곡에다 널찍한 다리를 놓는 바람에 이 암자를 찾아 돌아 오르는 고즈넉한 맛이 사라져 버린 것은 참 아쉬운 일이다.

본래 봉정사와 영산암 사이에는 그다지 깊지 않은 계곡이 있어서 영산암까지 가는 길은 개울을 건너는 운치 있는 길이었다..............

 

 

 

 

 

 

여유를 가진 사람만이 접할 수 있다는 영산암이다

어느 절이나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암자를 올라야 한다는 것이 나의 경험적 결론이었고,  봉정사 영산암은 원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영산암이 스님들의 참선도장인지라 누가 일러주는 경우도 없거니와 본 찰에서 저만치 떨어진 곳에 싸리나무로 담장을 치고 사립문을 쳐 놓아 대개 무엇에 쫓긴 듯 급하게 하산을 재촉하여 이곳까지 접근하지 못하고 돌아서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에 동화되며 산사의 고즈넉함을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사립문을 지나 요사채 뒤쪽 산자락에 자리 잡은 영산암에 이른다 하였다.

 

 

 

 

 

먼저 만나는 우화루는 극락전 앞에 있던 것을 옮겨 왔다고 한다.

입구의 우화루(雨花樓)를 극락전에서 옮겨 놓은 것이 조금의 손색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정사 영산암(靈山庵)은 전통건축에서 마당이 지닌 미학을 환상적으로 구현한 곳이지만 겨우(?)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6호에 불과하다.  

 

 

 

영산암은 봉정사의 동쪽에 있는 부속암자로 응진전·  염화실·  송암당·  삼성각·  우화루·  관심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의 구체적인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봉정사영산암향로전창건기'와 '봉정사영산전중수기' 등의 사료로 보아 19세기 말로 추정된다.

 

 

 

 

 

영산암의 문루에는 초서로 '우화루(雨花樓)'라고 씌어진 현판이 걸려 있다.

 

 

 

 

 

 

영산암은 몇 해 전(1989)에 "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촬영한 장소가 되어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비상한 주목을 받은 곳이다.

 

 이 영화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소외된 삶의 추한 모습들과 세속에 맞부?치면서 처절하리만치 좌절해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여지없이 들어내면서도 참된 삶의 실체는 시대 상황의 다양한 변수에도 불구하고 역시 불교의 고전적인 해답에 그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뛰어난 영상미로 암시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낡고 퇴락한 암자와 빼어난 자연경관의 조화 속에 노승의 초췌하리만치 비장한 불도의 엄숙함과 진실성을 빼어난 영상미와 절제된 언어로 관객들에게 전달하여 도대체 어느 장소에서 찍었기에 저토록 훌륭한 영상미를 살려냈을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낸 바 있었는데 그 영화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이 영산암이다.

 

 

 

 

 

 

 

우화루(雨花樓)라는 이름은 석가모니가 영취산에서 득도한 후 법화경을 처음 설법하셨을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영산암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만세루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우화루를 지나 영산암 마당에 들어서는 순간,  탄성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신묘한 매력이 있는 곳이었다.

 

 

 

 

 

 

 

석가모니께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는 데서 따온 우화루를 지나고..

 

우화루(雨花樓) 현판이 걸린 길다란 누마루가 긴 세월의 무게를 담으며 휘어져서 앞을 가로막은 모습을 보면 이 건축이 쉽사리 바깥 사람에게 그 내부를 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출입을 위한 누마루 밑의 문과 그 높이는 불과 다섯 자 남짓하여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들어갈 수가 없게 하였다.   따라서 우리 시선은 누마루 밑을 통과할 때까지 자연 아래로 향하고 댓 단의 돌계단 앞에 와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면 한 길 높이 위에 햇살 가득한 마당이 있다.   머리를 조아려야 오를 수 있는 마당이라….

 

 

 

 

 

 

 가로놓인 우화루 문을 통과하면 아주 폐쇄적인 공간으로 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곳은 답답한 느낌보다는 마음을 안락하게 감싸주었다. 마당에는 배룡나무와 분재같은 소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다.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방향을 바꾸니 꽃비는 내게 쏟아져 내렸다.

 

 

 

'쉿 ' 이라고 써놓은 문구를 보며 마당에 오르면 볼품없는 암자의 모습에 많은 사람들은 이내 실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영선암의 건축 하나 하나는 별 볼품이 없다.   쓴 부재도 시시하고 그 결구방법도 그저 그렇다.   공간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괜한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엉성한 건물들이 집합하여 만드는 공간의 구성은,  공간을 볼 수 있는 이에게는 형언키 어려운 감정을 자아내게 하고 드디어는 한없는 명상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영산암 영역은 작지만 작은 영역 안에 응진전, 산신각, 관심당, 송암당, 염화실 ...등 툇마루, 누마루,넓은 정자마루 등...영산암은 감정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으로 한옥의 에센스인 마당에 많은 것을 담아내는 듯하다.

 

영산암의 마당은 복잡하면서 다양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건축학적으로도 주목받는 곳이기도 하다.

 

 

 

 

유홍준  교수 역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봉정사 영산암의 매력을 언급하고 있었다.

어쨌든 유홍준 교수의 말을 빌자면 이렇다.

"영산암은 안에 들어가지 않고 낮은 돌담 너머로 안마당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뜻 깊은 답사가 될 수 있다.....뭔가 부산스럽고 분주하면서 그런 가운데 질서와 묘미를 찾으려고 한 흔적이 역연하다.   사실 나는 이렇게 감정의 표정을 많이 담은 마당은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이것이 요사스럽거나 번잡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니 그것이 참으로 이상스러울 뿐이다."  라고....

 

 

 

 

정면에는 막돌로 쌓았지만 정갈한 기단 위에 법당이 있고, 양쪽에 요사채가 있어 전체로 ㅁ자 공간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인 응진전 옆으로 삼성각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마당과 법당이 들어오기전에 두그루의 나무가 먼저 마음에 담겼다.  어쩌면 이렇게 예쁠수가 있을까!!!!!!     보고 또 보고 마음에 하나가득 그림같은 풍경이 담아진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봉정사보다도 영산암이 훨씬 더 아름다.

건축적인 식견,  역사적인 지식이 전혀 없긴 하지만.  봉정사가 그 파란만장하던 시대를 거슬러 당당히 지켜진 훌륭한 건축물이라면 영산암은 그 곁에서 단아하고 정감있게 지내 준 친구 같달까....

 

 

 

 

 

 

 

무릇 뛰어난 예인의 손이라 해도 인공이 자연보다 아름답기는 어렵다.

그러나 영산암에서는 인공이 오히려 자연을 가르친다.

게으른 머슴이 대충 다듬은 듯 한 가산(假山)이며, 옮겨 온 것이 분명한데도 원래인 듯 한 나무들이 오래 된 건물들과 어울려 조화미라는 용어마저 미안하게 한다.

 

 

 

 

 

 

영선암은 여섯 채의 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개의 불사 건축은 법당을 정면에 두고 반듯한 마당을 구성하는 단아한 건축이 좌ㆍ우측과 앞쪽에 놓여지게 마련일 것이다.   여기서는 마당을 가운데 두고 남쪽의 우화루와 마당을 마주하는 법당인 응진전과 그 옆의 삼성각 그리고 마당의 좌ㆍ우측에 승방과 주지실,  노전채 등이 참으로 엉성하게 집합되어 있다.

 

마당은 법당 앞에서 단이 높아 그 사이를 바위와 소나무가 심어져 법당과 삼성각 사이의 공간을 적당히 둘러싼다. 그  러나 바로 이 공간이 누마루 밑에서 오른 입구와 대각선을 이루어 시선을 늘어뜨리면서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주지실은 툇마루 모퉁이가 누마루와 붙어 있다.  마치 떨어지는 님의 치마 한쪽을 슬며시 당기는 듯 자못 애처롭다.   그러고보면 마당을 둘러싼 툇마루들은 모두가 같은 레벨로 되어 서로 애절한 동위성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 사이 사이로는 끊임없이 외부의 풍경이 드나든다.   그 속에서 어느새 이 건축이 만든 무대 위에서 끊임없이 사유하는 나를 만나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하다.   완벽하지 않은 영선암의 개별 건축군의 구성은 마치 무대 위의 배경이다.   마당은 비워진 무대이고 나의 행위는 자연에 의해 관망되는 연기였다.   물론 누구든 여기선 독백하는 모노드라마의 주역이며 집단행위의 출연자가 된다.   그렇다. 영선암은 그 마당에 담기는 사건에 의해 건축이 완성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나서 누대에 올라 바깥과 영선암의 마당 사이의 경계에 걸터앉아 쏟아지는 햇살 속에 몸을 맡기면,   사바세계와 극락의 경계에서 그 불안정하고 불확정적인 우리네 삶을 관조하고 있다는 것을,   이윽고 깨닫게 된다.    그것은 축복이며 신비이다.

 

 

 

 

 

 

 

 

 

 

 

햇살 고운 마당에 서거나   흙 봉당에 걸터앉아 무심해 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한 느낌 진하게 소름 돋는 곳,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우리 옛집의 멋을 완성한다.

 

 

 

 

 

우화루에서 바라본 영산암이다.   비워진 무대 ‘마당’,   바위위에 서 있는 소나무,  우린 어쩌면 저 소나무를 닮았는지 모른다.   암벽위에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소망처럼..........

 

 

각각의 건물들이 툇마루와 누마루 등으로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져 전체적으로 ㅁ자의 한옥을 만들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자리한 공간인 마당은 멋들어진 소나무가 자리하고 있음에도 결코 좁아 보이지 않는, 그런 고즈넉함이 묻어 있었다. 각각의 건물들은 그 자연스러움이 결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나는 밀려드는 감동에 툇마루에 걸터앉아 한동안 그렇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문득 몇 년전에 와 본 영산암이 전혀 변함없는 그대로여서 다행해 하며  ‘너무 좋다’를 연발해 본다.

 

 

 

 

 

 

바위 틈새로 분재처럼 자란 소나무와 배롱나무도 조화롭다.

 

우화루의 아래를 통하여 영산암에 들어서면 지형의 고저차를 이용하여 마당을 3단으로 구획하였다.   상단에는 주불전인 응진전과 서쪽으로 삼성각 .염화실이 배치되어 있고,  그 앞에 동산을 만들었다.    중단에는 관심당과 송암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하단에는 우화루가 놓여 있다.

 

건물들은 전체적으로 '口' 자를 이루어 폐쇄적인 형태로 보이지만,  우화루의 벽체를 없애고 송암당을 누마루로 처리하여 개방적인 요소를 많이 채택하였다 .

 

 

 

 

 

 

 우화루는 창(窓) 아닌 창이 되어 속세와의 소통을 돕고 있었다.

 

 

 

 

 

 

우화루의 창(窓) 아닌 창(窓)

 

 

 

 

 

 

우화루의 누마루 부재들은 휘어진대로 멋스럽다.

 

 

 

 

영산암의 우화루 좁은복도를 연결한걸 아슬아슬하게 지나가 우화루 이층 강당에 갈수 있는곳이다. 참으로 오묘한 느낌인 뛰여난 건축물에 몇번 놀랬다.

 

 

 

 

 

상단의 주불전인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가로 지었으며   맞배집이면서도 총량을 대량에 걸어 놓아 팔작지붕의 가구수법을 보인다.

 

 

 

 

 

빛바랜 응진전 현판과 단청이 오래된 세월의 흐름을 이야기 한다.

 

 

 

 

 

 

 

응진전 내부

 

 

 

 

 

 

 

 

응진전 내부 벽화

 

 

 

 

 

 

 

 

응진전 건물  산신각쪽 벽면의 박공판(맞배지붕 끝머리에 붙인 널판) 아래로는 사슴처럼 보이는 상서로운 짐승과 정겹게 보이는 호랑도 그려져 있어,  마치 조선 후기의 민화를 보는 듯하다.

 

 

 

 

 

 

 

 

 

 

 

 

응진전 전각 뒤로 도아보니 자연석에  기둥을 올렸고 아래 부분에 환기구도 있었다...

 

 

 

 

 

 

 

응진전 건물  동쪽의 벽면의 민화같은 벽화

 

 

 

 

 

 

 

영산암의 굴뚝이 유난히 낮은데 그 이유는 연기가 마당에 낮게 깔리면서 소독과 정화작용을 해주기 위함이고..또한 경계가 따로 없음을 뜻하기 위함이고...

 

 

 

 

 

 

 

 

 

 

 

 

 

 

 

산신각도 단칸 건물로 응진전 좌측에 자리잡고 있다.

 

 

 

 

 

 

 

 

 

 

 

 

 

 

 

 

 

 

우화루와 연결된 서편의 송암당이다..  

 

 

 

 

절 서편 송암당이다..   이 건물과 우화루는 좁은 복도로 연결되어 오고 갈 수 있는데,   그   아슬아슬한 연결 또한 매우 흥미롭다.   영산암의 건물들은 공간 전체가 짜임새를 지니면서 이처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송암당은  우화루 들어서며 왼쪽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 반으로 마루 1칸, 방 3칸, 그리고 방의 전면에 툇마루로 구성된다.

 

 

 

 

서쪽 건물로 요사채인데도 빛바랜 단청이 칠해져 있다.   들여다보면 문인방(문 위를 가로지르는 문틀)에 도깨비,용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송암당 단청그림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송암당 뒷편에는 불을 넣을 수 있는 아궁이와 낮은 굴뚝이 있고....

 

 

 

 

관심당은 우화루 들어서며  오른쪽 건물로 우화루와 연결된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송암당과 함께 요사로 쓰이는 건물이다.

 

 

 

 

 

우화루 오른쪽 발이 처진 곳이 관심당이다...절 동편 전각이다...

 

 

 

 

 

 

 

 

? 봉정사를 내려가며... 

 

 

 

 

 

 

암자라기보다 풍류 깊은 어느 선비의 옛 집을 닮은 영산암을 뒤로하고 우화루를 지나 길을 나선다...

 

 

 

 

 

산사의 해우소는 보기만 해도 철학적이다.

시멘트 냄새가 풍기는 꽉 막힌 공간이 아닌 문만 열면 하늘의 별이 반짝이고 아래는 또 다른 생명이 진을 치고 있으니까.. .

 

영산암을 나와 이만 봉정사를 내려온다.

 

 

 

 

영산암을 나와 이쁜 돌계단을 내려서니......

 

여염집 입구엔 항상 열려있던 사립문,  이제는 산사에서나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련한 추억품이다.

바람이 드나들고  정이 넘나들었던 살갑고 편안한 문, 산사의 사립문은 세상살이에 찌든 모든 먼지를 걸러주는 또다른 체의 기능까지 겸하는 듯 하다.

 

사립문을 뒤로하고....

 

 

 

 

스님의 요사인 무량해회의 협무인 진여문도 지나고..........

 

 

 

 

휘어진 길을 따라 내려온다

 

 

 

 

 

 

 

 

휘어진 길을 따라 내려오며 바라본 만세루

 

 

 

 

보호수 소나무는 세월을 느끼게 하는데..비탈길을 비스듬히 누워 .. 강인한 생명력을 ~

 

 

 

 

 

 

 

 

 

천 년의 시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늙수레한 봉정사의 그 소박함이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천 년을 저렇게 서 있었듯이 봉정사는 또 천 년을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

 

 

 

 

약간 내리막의 싱그러운 참나무 길을 걸어가니 봉정사 일주문이 보인다...

 

 

 

 

일주문  현판은   은초 (隱樵 鄭命壽, 1909~2001)의 글씨다.  아쉬운 듯 일주문을 되돌아보며..

 

 

 

있는 듯 없는 듯   이어진 툇마루들과  흙 봉당이 빗어내는 향취,   빈곳과 채워진 곳,   들고남의 자연스러움,   차면 비었고,   비었으면 가득한 자연의 마음이며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그득한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리하여 봉정사는 들고난다는 의식이 없다.

처음 봤어도 늘 보던 것처럼 익숙하여 요란한 설레임이 일지 않는다. 그러하니 돌아서는 마음도 당연한 듯 편하다.

이웃동리 친구 집 툇마루에 걸터 앉아 지나는 바람에 땀 식히고 정 기득한 약수 한 사발 마시고 일어서는 느낌이다.

끌어안고 볼 부비는 정겨운 만남 아니니 시린 이별도 없고, 이별 없으니 아쉬움도 없다.

다만 정겨움만 그득하다.

절 순례하면서 함께한 도반들이 많아도 내 여행길은 늘 혼자다.   홀로 여행은 묵언수행이다. 

입을 닫아야 가슴이 열린다.  그래서 나는 또 혼자다.  기도보다는 사찰에 궁금증이 더 많아서 인지도 모른다

온전한 느낌을 얻으려면 역시 혼자가 좋다.  고적하지만 그 또한 여행의 맛이다.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금 시원한 차량으로 이동해 봉화 축서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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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8.22 21:54

    첫댓글 폭염속에 옷이 다젖도록 뛰어 다니시더니 구석구석 잘담아 주셨네요.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 13.08.23 10:13

    관세음보살 ()()()
    기장님 노고에 비하면 보잘것 없습니다...

  • 13.08.23 13:53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3 05:06

    길상정 법우님의 덕분으로 다시 가보는 봉정사!!
    정말 상세한 설명과 가보지 못한 영산암까지 볼 수 있어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사랑합니다()()()...

  • 작성자 13.08.23 10:13

    관세음보살 ()()()

  • 13.08.23 13:53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3 06:20

    관세음보살 ~()()()

  • 작성자 13.08.23 10:13

    관세음보살 ()()()

  • 13.08.23 13:52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3 09:49

    관세음보살 ()()()

  • 작성자 13.08.23 10:13

    관세음보살 ()()()

  • 13.08.23 13:52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6 10:27

    ()()()

  • 13.08.23 10:12

    감사합니다^^
    참말로 대단하신 길상정도반님~~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_()_
    섬세한 관찰과 해설은 포항도량을 넘어서 사찰전문답사가의 우아한 기록물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록을 볼 수 있는 대관음사 우리절 포항도량의 자랑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천년을 저렇게 서있듯이 봉정사는 또 그렇게 천년을 서있을 것이다" 가슴 시큰해옵니다---
    가을향기가 함께하는 참 좋은 오늘도 멋진 하루되세요~~
    관세음보살()()()

  • 작성자 13.08.23 10:15

    너무 부끄러워 몸불바를 모르겟습니다.
    그냥 조금 미흡하더라도 격려 주심에 힘이 됩니다...
    관세음보살 ()()()

  • 13.08.23 13:52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3 10:40

    순례에 동참은 못했지만. 길상정님 덕분에 봉정사.에서 영산암까지 구석구석 자세한 안내까지.
    동참한 이상으로 많은 공부를 하고갑니다..
    수고하셨고..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13.08.23 13:52

    참 좋은 인연입니다()()()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작성자 13.08.23 14:35

    관세음보살 ()()()

  • 13.08.23 13:52

    자세한 설명과 멋진사진..감사합니다...()꼭 가보고 싶어요,,,사진 뽑아서,,ㅎㅎ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

  • 작성자 13.08.23 14:35

    관세음보살 ()()()

  • 관세음보살_()_

  • 작성자 13.09.09 20:14

    관세음보살 ()()()

  • 감사합니다.관세음보살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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