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향기] 송강(松江)정철(鄭澈)의 장. 진. 주. 사
소동파는 술은 시를 낚는 낚시요 근심을 쓸어내는 빗자루라 했고
이규보는 시와 술은 동전의 앞, 뒷면이라 했다.
-재너머 성권농(成勸農) 집에 술 익단 말 어제 듣고 누운 소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줄타고 아해야
네 권농 계시냐 정좌수(鄭座首) 왔다 하여라
-성권농의 성은 성씨이고 권농은 농사를 장려하는 직책을 말한다. 우계 성혼을(1535~1598)가리킨다.
박차는 발길로 냅차다, 지줄타고는 눌러타다라는 뜻, 좌수는 지방향청의 우두머리 정철을 말한다.
-산 너머 성권농 집에 술 익었다는 말을 어제 듣고 누운 소를 발로 걷어차고 안장도 얹지 않고 깔개만
깔고 눌러 타고 갔다. 성권농 집 앞에 정좌수 왔다고 일러라 하고 아이를 불러 재켰다. 술은 다급했고
친구도 무척 보고 싶었나보다. 생동감과 박진감 넘치는 상황전개, 솔직한 품성, 소탈한 인간미
자유분방한 성격 문장에도 막힘이 없다. 호방한 기질에다 술까지 좋아했으니 송광은 스스로를
광생(狂生)으로 자처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술꾼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일뎡 백년산들 긔아니 초초(草草)한가
초초한 부생(浮生)에 므사 일 하랴 하야.
내 자비 권하는 잔을 덜 먹으려 하는다.
일생 백년을 산들 그 아니고 되고 수고로운 일이 아닌가.
그런 뜬 구름 같은 인생에 무슨 다른 일을 하려고
잔 잡아 권하는 술을 덜 먹으려 하느냐
험난한 세상살이 술로써 온갖 근심을 잊고 지내는 것도
평생의 즐거움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이정도 술이라면 시선(詩仙)이백(李白)(이태백) 못지않다. 그는 술꾼만이 아니라 진정
풍류운사(風流韻士)이다. 풍유에 술이 빠질 리 있겠는가. (풍류운사: 시가 따위를 지어서 즐김)
※남산 뫼 어느메만 고학사 초당지어
곳 두고 달 두고 바회두고 물 둔난이
술조차 둔난 양하여 날을 오라 하거니!
-이쯤 되면 할 말을 잊는다. 남산 어느메쯤 고학사가 초당을 지어 꽃 두고 달 두고 바위 두고 연못 두더니
술조차 두는 듯 하고서 나를 오라 나를 오라 하옵네. 여기서 고학사는 친절한 벗(고경명인 듯하다.) 화조
월석에 술이 없을 리 만무하다. 초, 중, 장은 하나의 장면이다. 종장의 술이 풍류를 완성시켰다. 재기
넘치는 풍류운사는 이를 두고 말이리라. 소동파는 술은 시를 낚는 낚시요 근심을 쓸어내는 빗자루라
했고 이규보는 술이 없으면 시조에 묘미가 없고 시가 없으면 술 맛도 시들하다고 했으니 이래저래 시와
술은 동전의 앞, 뒷면이 아닐 수 없다. 정철의 장진주사(將進酒辭)에 이르러선 숙연하기까지 하다.
(장진주사: 인생은 덧없는 것이니 술이나 마시자는 권주가 이백의 장진주에서 영향을 받았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꺽어 산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주리
혀 매어 가나 유소 보장에 만인이 울어 예나 어욱새.
속새 덥기나무 백양 숲에 가기 곳
가면 누른해 흰달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제
뉘 한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파람불제 뉘우친들 어쩌리!
-생각해보면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한잔 먹고 또 한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술잔을 세며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개 위에 거적 덮어 줄로 꽁꽁 매어가나 곱게 꾸민 상여를
만인이 울며 따라 오거나 억새풀, 속새(풀이름), 떡갈나무 백양 숲에 들어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소소리 바람 불 때 누가 한잔 먹자고 할 것인가!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가
휘파람 불 때 그때야 뉘우친들 어쩔 것인가. 처연한 정서가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향락주의적인 권주가 이기는 하나 술과 노래와 풍류가 있어 정철의 술을 좋아하는 깊은 사유를
읽을 수 있었다. 장진주사야 말로 고금의 술의 대명사요 아름다운 슬픔이라 송강이 아니고는 누가
이렇게 술과 인생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정철(1536중종 31-1593년 선조26) 본관은 연일 호는 송강이며 서울 왕실과 인척 관계에 있어 자주
궁궐을 출입했다. 같은 나이인 경원대군 명종과 친했다. 정철은 아버지의 유배지를 따라 다녔다.
1551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풀려나자 담양 창평으로 이주했다.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 송순, 기대승 같은 당대의 석학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이, 성혼, 송익필 같은
유학자들과도 친교를 맺었다.
-27세 때 과거에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에 이이와 함께
사가 독서했다. 40세에 벼슬을 버리고 창평으로 낙향했다. 그 뒤 몇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43세 때 장악원정을 배수하고 조정에 나왔다. 45세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그 유명한
“관동별곡”과 「훈민가」 16수를 지었다. 그 후 정치적인 부침을 거듭하다 50세에 창평으로 네 번째
낙향을 했다. 이때 「사미인곡」등의 기사와 시조, 한시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놓았다.
-54세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 되었다. 서인의 영수로 동인의 주요 인물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숙청된 인사가 1000여명이 이르렀다. 이를 기축옥사라 한다. 호남지역 사류들이 이
옥사에 많이 연좌되어 이때부터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됐다.
-56세에 세자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고 명천으로
유배되었다. 진주와 강제로 이배되었다. 57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귀양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왕을 맞이하고 의주까지 호송했다. 경기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다음 해에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원도 송춘에 우거했으나 생계조차 어려워
58세 일기로 죽었다.
-정철의 큰 누이는 인종의 숙의(淑儀)이고 막내 누이는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다. 술을 그렇게
좋아했던 풍운아 정치의 숱한 질곡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술에 의지해 잊으려고 했다. 죽어서도 관직이
삭탈되고 회복이 되었다. 만은 정적을 만들고 천고의 간흉이라는 소리도 했으나 유려한 필치로 풀어낸
주옥같은 시문들은 영원히 남아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