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맺음 말
한국의 서(書) 예술에 있어서도 ‘자유(自由)’란 서양의 ‘자유(自由)’의 개념과 일맥상통하듯 일치된 개념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외부적 간섭 없는 내적 자유의 개념인 서양의 ‘freedom’과 한국의 ‘자유분방성’ 내지 ‘자연미’와는 상호 동어적(同語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정치적 ․ 법률적 자유의 개념인 'liberty'의 해석문제나 동양 특히 중국철학에서 말하는 장자철학의 ‘소유요(逍遙遊)’, ‘자연(自然)’, ‘무위(無爲)’, ‘도(道)’와 공자철학에 말하는 자유의 개념과 일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즉 한국인의 미의식에서의 ‘자유’는 그런 정치적 ․ 법률적 자유도 아니고, 장자나 공자철학에서 말하는 소위 인간의 절대적 사유와 이상적 경지에서 깨닫고 느끼는 자유개념도 아니다. 우리 민족의 미의식에 담겨있는 자유는 ‘멀리는 거칠고 황량한 초원을 이동하며 살아야했던 생활환경에서, 험절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삶의 터전을 이루는 자연 속에서 형성된 현실순응의 자세와 부족한 삶을 통해 지녀야하는 긍적적 사고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즉흥성과 소박성, 간결성과 해학성이 배어있는데 이를 통 털어 ‘자유분방함’ 또는 ‘형편 속에서의 편안함’을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정신은 삼국통일 이전 금석문에 쓰여 진 서(書) 예술에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고구려는 북방의 민족의 거칠고 투박한 특성을 나타내듯 준엄하고 웅강하게, 신라는 한반도 동쪽에 고립된 지형적 특성에서인지 향취(鄕趣)의 소박한 원시미, 예측불가능성 그래서 오는 긴장미를, 백제는 역사적 대외관계에서 보여주었든 남북조 모두와 교류한 흔적이 서예에서도 나타나 북조의 굳센 방경(方勁)한 맛과 남조의 유려한 맛이 혼융된 세련미를 보여주며 약간씩 다른 특징을 보여주었지만, 그것들을 결국 함축하면 부정형과 자유분방이라는 일치된 특성으로 귀결될 것이다.
* 참고문헌
<단행본> 가노 나오키 著, 오인환 譯, 『중국철학사』, 을유문화사, 1986. 김기승, 『한국서예사』, 대성문화사, 1966. 김달진 역해, 『장자』, 고려원, 1989. 김용옥, 『도올논어』, 통나무, 2000. 김원룡, 『한국 고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한국미술소사』, 삼성문화재단, 1973. 김학주, 『중국문학사』, 신아사, 1999. 김학주, 『논어』,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문정자, 『옥동과 원교의 동국진체 탐구』, 2001. 백기수, 『예술의 사색』, 서울대학교출판부, 1985. 송하경, 『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 다운샘, 2004. 안휘준, 『한국회화사』, 일지사, 1996. 앙드레 베르제즈/드니 위스망 著, 이재형 옮김, 『철학강의』, 청하, 1987. 오세창, 『근묵』, 성균관대학교박물관, 1981. 『국역 근역서화징』, 시공사, 2007. 이기석 역해, 『신역 논어』, 홍신문화사, 1994. 이상우, 『동양미학론』, 시공사, 2003. 임영방, 『현대미술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1999. 장기근 ․ 이석호 譯, 『노자/장자』, 삼성출판사, 1990. 정태희, 『중국서예의 이해』, 원광대학교출판국, 1996. 조동원, 『한국금석문대계』, 원광대학교출판국, 1983. 최병식, 『동양미술사학』, 예서원, 1993. 쿠로트 프리틀라인 著, 강영계 옮김, 『서양철학사』, 서광사, 1985. 『한국서예이천년』, 예술의전당, 2000. 『한국의 미 서예』, 중앙일보사, 1981. 『옛 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역사』, 예술의 전당, 1988.
<논문> 김수천, 「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삼국금석문 서예의 창조성」 「미술사와 관련지어본 한국서예의 독창성」 송종관, 「한국 서예미학 탐구」(월간서예 2008.1월호) 심우정, 「광개토대왕비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 채용복, 「금석문을 통해 본 書에 대한 조형의식」 최완수, 「우리나라 고대 ․ 중세서예사의 흐름과 특질」
<인터넷자료>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스템 http://gsm.nricp.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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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완수 선생은 『한국서예이천년』서문에서, “우리나라는 중국에서도 그 글자꼴이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전한시대에 이 상형문자를 받아들였다. 전한 무제(武帝, 서기전 140-서기전87 재위)가 원봉(元封) 3년(서기전 108)에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 낙랑(樂浪)을 비롯한 4군(四郡)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이다. 이로부터 이 상형문자는 한자(漢字)라는 이름으로 우리 문자화하기 시작하여 2천년이 넘게 사용되며 우리말을 표기해 왔다.”고 하였다.
2) 그의 서실(書室) 송설재(松雪齋)에서 유래.
3) 문정자(2001), 『옥동과 원교의 동국진체의 탐구』(다운샘), p.444.
4) 『논어』 위정편,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5) 『장자』 제물론. 장자에서 말하는 ‘자유의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경지’ 내지 ‘해탈의 경지’와도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6) 한국미술의 특징에 대해 자유분방성, 자연성, 부정형성, 비균제성 등을 말한다. 이에 대해 김원룡(1980),『한국 고미술의 이해』(서울대학교출판부), 최병식(1993), 『동양미술사학-한국미술사』(예서원), 최준식(2000), 『한국미, 그 자유분방함의 미학』(효형출판), 김수천 논문「한국미술의 독창성과 삼국 금석문 서예의 창조성」을 참조할 것.
7) 최병식 선생은 그의 저서 『동양미술사학』에서 한국미술의 특징가운데 한(恨)과 비애미(悲哀美)를 거론하면서 “恨의 샤머니즘으로 드러나는 여러 무속적 형식에서는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즉 외세의 침략이나 지리적 조건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된 한의 내용보다도, 한의 가장 솔직한 민중적 표현방식인 각종 굿의 형식에서는 죽은 영혼을 위한 오구굿, 풍년, 안전을 위한 별신굿을 막론하고 대다수가 죽은 자와 자연에 대한 축원, 기원의 뜻을 담고 있다.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앞에서 열거한 여러 요소들과 만나게 되며 다시 그 근원은 자연이 갖는 절대영혼, 생명의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8) 이상우는 그의 저서『동양미학론』22쪽에서, “동북아 삼국의 문화와 전통이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교 ․도교․불교가 한국․중국․일본의 전통사상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국의 것을 연구하든 이본의 것을 연구하든 유교․도교․불교의 바탕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한국․중국․일본의 미학과 철학이 똑같은 모양으로 구성될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현재 진행되고 있고 또 앞으로 구성되어야 할 것으로서의 한국․중국․일본의 미학과 철학은 각국의 문화특성과 입장을 반영하여 당연히 조금씩 다른 모양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유가와 도가를 동양사상의 원천으로 규정하고, 주로 공자와 노자 그리고 장자의 사상을 근거로 ‘경계’라는 개념의 맥락에서 필자가 의도하는 이론을 구성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고전에 대한 새로운 각도의 해석이 제시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9) 송하경(2003), 『서예미학과 신서예정신』(다운샘). p.144.
10) 김수천, 「미술사와 관련지어 본 한국서예의 독창성」.
11) 논자는 2009년 3월 ‘우송서숙’에서 「광개토대왕비의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라는 제목의 논고를 발표함에 있어, 광개토대왕비의 서체는 중국의 어떤 특정의 서체가 아닌 우리북방민족만의 가지는 질박하고, 순진하며, 즉흥적이고 변화무쌍한 성격을 나타낸 독창적 서체라는 것을 밝힌바 있다.
12) <광개토대왕비>서체에 대하여는 졸고 「광개토대왕비 서체의 독창성과 한국서예사적 가치」참조.
13) 북위 영평4년(511)에 새긴 것으로 정도소(鄭道昭)의 정서(正書), 자작시라고 한다. 산동(山東) 액현(掖縣) 운봉산에 있는 마애비이다. (정태희(1996), 『중국 서예의 이해』, (원광대학교출판국), p. 210.
14) 김수천, 「미술사와 관련지어 본 한국서예의 독창성」.
15) 김수천, 상게서
16) 김수천, 상게서
17) <예학명(瘞鶴銘)> : 예학명은 본래 강소성 진강시 초산의 절벽에 새겨져 있었으나 송대에 절벽이 붕괴되면서 다섯 조각으로 강바닥에 빠져 있었다. 청대의 강희 52년(1713년)에 초산 정혜사의 보묵헌에 다섯 조각의 글씨 90여자를 떼어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새긴 연대와 글씨를 쓴 사람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다. 송대의 황장예는 양(梁)의 천감 13년(514년)에 새겨졌다고 고증하였으며, 송대의 소순흠은 왕희지의 글씨라 하였고, 구양영숙은 당의 고황의 글씨하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왕찬의 글씨라고도 하였다. 또 송대의 황정견은 왕희지의 글씨는 아니라고 하였고, 황백사는 남양의 도홍경이 쓴 글씨라고 고증하였는데, 후대의 많은 학자들은 예학명은 도홍경의 글씨라는 황백사의 학설에 지지하고 있다.
예학명은 청대 강희 52년 이전까지는 물속에 있었으므로 겨울철 물이 말라 있을 때 탁본하였다고 한다. 이때 탁본한 것을 수탁본이라 하는데, 장소를 옮긴 청대 이후의 탁본은 마모가 많이 되어 장엄하고 강건한 기운이 다소 없어졌다. 물에서 건져낸 당시의 탁본은 수탁본과 큰 차이가 없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필획이 마모되었기 때문이다. 예학명은 커다란 글씨로 절벽에 새긴 글씨의 특징인 장엄하고 강건한 미감을 잘 간직하고 있다. 강봉과 원필의 필세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대범하고 생동감이 있으며 매우 호방한 맛이 특징이다. 해서의 결구법을 기본으로 하면서 전서와 예서, 행서의 필의를 가미하여 고졸하면서 질박한 서품을 이룬다.
소동파는 논서에서 “큰 글씨는 결구가 긴밀하면서 성글지 않게 하는 것이 어렵고, 작은 글씨는 너그럽고 여유 있게 쓰는 것이 어렵다.”고 하였는데, 황정견은 논서에서 “큰 글씨로 예학명을 능가하는 작품은 없다.”라고 하여 소동파가 말한 큰 글씨의 조건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작품으로 예학명을 꼽았다. 송대의 조사면은 법첩보계에서 “초산에 있는 예학명의 오묘한 필법은 서가의 법칙이 된다.”고 하였고, 청대의 왕주도 허주제발에서 “글씨가 많이 부서져 있으나 시원스럽고 담백하여 심원한 맛이 있으니 진실로 신선의 자취로다. 큰 글자는 작은 글자처럼 써야 하는데 오직 예학명만이 뜻하는 대로 마땅히 잘 표현하였다.”라고 하여 예학명이 큰 글자로 쓰여진 것이지만 결구와 필세가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
18) 최완수, 「우리 나라 고대 ․ 중세서예사의 흐름과 특질」.
19) 최완수, 상게서
20) 위진남북조의 사부(辭賦)와 산문(散文)은 진(晋)에 와서 반악 ․ 육기에 에 의하여 변려문을 이룬다. 이는 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4자 ․ 6자 구를 많이 사용하며 글의 대우(對偶)를 중시하고 성률(聲律)의 해화(諧和)에까지 신경을 써서 극도로 아름다운 형식을 추구하여 이루어진 문체이다. 이 변문은 남북조시대에 더욱 성행하고 수 ․ 당대까지도 가장 대표적인 산문으로 군림하며 사륙문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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