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심의 휘슬 소리가 울리자, 고요했던 한밭벌에 일순간 뜨거운 함성이 요동쳤다.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경기는 예정대로 시작됐고, 선수들의 몸놀림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전용구장에서 열리는 경기니만큼, 붉은 악마의 귀가 찢어질 듯한 응원 소리도 더욱 가슴 깊이 느껴졌다. 'AGAIN 1966'이라는 붉은 악마의 카드섹션은 대한민국으로 하여금 이탈리아를 맞아,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한번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수많은 붉은 물결 위에서 파도를 타듯이 옮겨 지는 대형 태극기는 우리 선수들로 하여금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비장한 정신력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이었다. 상대 페널티 구역 안에서 유니폼이 잡아 끌려진 채 그라운드 위를 나뒹군 설기현이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경기가 시작한 지 극초반에 얻어낸 득점 기회라서 조금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이탈리아에 선취점을 얻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손 끝에서 환희가 느껴졌다. 순간, 미국 전에서 이을용이 페널티킥을 실축 한 것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키커가 안정환인 것을 확인하니 아무일도 없었 다는 듯 마음이 편안해졌다. 주심의 휘슬 소리가 울리고, 안정환이 자신있게 슈팅을 했다. 그러나... 공은 세계 최고의 골키퍼라는 부폰의 손 끝에 걸려 허망하게 골대 옆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지난 미국 전에서 이을용이 실축한 것과 너무나도 똑같 은 모습이었다. 승리를 염원하던 나의 두 팔이 힘없이 축 늘어져버렸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했다. 페널티킥 실축에 아랑곳없이 평소 의 경기력을 끌어내기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러나 경기의 흐름은 우리 쪽으로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예선 세 경기 동안 상대를 압박하던 끈끈한 수비와 스피드를 앞세 운 가공할 공격은 쉽사리 펼쳐지지 못 했다. 지금까지 한국 팀이 승승장구 해오면서, 이탈리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실상은 그러하지 못 했다. 순간 나는 승리의 환희와 16강 진출의 감동 속에서 빠져나와 냉정한 현실 속으 로 돌아왔다. 그렇다. 이탈리아는 우리가 쉽게 넘볼 수 있는 그런 팀이 아니었다. 나 자신도 얼마 전에는 이번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꼽았던 팀이 아닌가. 그런 강팀을 맞아 16강전을 펼치고 있는 한국이 새삼 놀라웠다.
전반 중반쯤 한국은 상대팀에게 코너킥을 허용했다. 그리고 토티의 센터링을 받은 비에리의 헤딩슛은 우리팀 골네트를 흔들었다. 그토록 강력한 힘과 수그러들지 않는 끈기를 보여줬던 우리 대표팀의 수비가 순식간에 무너져버렸다. 덩달아 내 가슴 속 의 승리를 떠받들던 기둥도 무너져버렸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이탈리에게 지는 것 인가... 떠올리려 하지 않아도 몇 시간 전에 열렸던 일본과 터키의 경기가 생각났다. 일본도 우리처럼 전반 초반에 코너킥을 통한 헤딩 선제골을 먹고, 8강 진출의 문턱 에서 주저앉고 말았었다. 이것이 과연 세계의 드높은 벽이란 말인가. 전광판에 1:0 이란 스코어가 선명히 찍히면서 우리의 8강 진출에도 뿌연 먹구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한 점이 부족한 채 후반전 막판까지 힘겹게 그라운드 위를 뛰어 다니고 있었다. 이번 월드컵에서 기존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허술한 수비를 보여줬던 이탈리아의 빗장 수비는 아시아의 성난 개최국 한국을 맞아, 뜨거운 성원 으로 자신들의 기를 죽이려는 붉은 악마를 맞아 견고한 철벽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이런 이탈리아의 완강한 수비벽을 뚫기 위해 교체 선수 세 명을 모두 공격수로 투입하는 과감한 용병술을 발휘했다. 황선홍, 안정환, 이천수, 차두리, 설기현 등의 공격수들은 한 골을 만회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그리고 기회 는 왔다. 황선홍의 논스톱 패스가 이탈리아 수비수를 맞고 흘러 나오자,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설기현이 가볍게 상대 골문 안으로 공을 밀어 넣었다. 그동안 주춤거렸던 수백만 붉은 악마들이 일순간 환호성을 질러댔다. 차범근, 허정 무, 신문선 등 방송사는 다르지만 다들 한결같이 기쁨의 '골'을 외쳤다.
전반전에는 이탈리아 특유의 견고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빠른 공격과 정환한 패스에 짓눌렸던 한국이, 후반 들어서는 점점 자신의 기량을 뽐내더니 후반 막판에 천금 같은 동점골을 얻어낸 것이다. 그토록 목말라 했던 한 골이 터지자, 그동안 머릿 속 을 어지럽게 했던 패배의 그림자가 한순간에 그 자취를 감춰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경기의 흐름이 넘어왔다. 한밭벌의 뜨거운 응원 열기는 우리 선수들에게 마지막 남 은 체력을 아낌 없이 쏟아부으라는 듯 더욱 더 높아져만 갔다.
연장전이 시작됐다. 느낌이 참 좋았다. 승부차기를 하더라도 우리가 이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 전에 경기를 끝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 골든 골이 필요했다. 연장 전반, 경기 내내 신경질적인 플레이를 펼쳤던 이탈리아의 토티 가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경고를 받아 퇴장당하고 말았다. 지난 포르투갈 전에서 핀투와 베투가 퇴장당하던 모습이 눈 앞에 드리워지면서 승리의 기운이 점점 더 그라운드 위를 감돌았다. 설기현의 미스 패스로 말미암아 이탈리아의 강력한 슈팅이 골키퍼 이운재의 선방으로 막히는 순간 우린 절대 질 수 없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 다. 과연 행운의 여신은 우리 편의 손을 들어 줄 것인지...
연장 후반도 거의 끝나가는 분위기였다. 승부차기의 조마조마함을 어떻게 견딜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괜한 기우임이 드러났다. 전반전에서 페널티킥을 실축하여 이탈리아의 1:0리드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안정환이 깨끗한 헤딩슛으로 대망의 골든골을 터뜨린 것이다. 길고 길었던 숨막히는 접전은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안정환은 반지에 키스를 하는 골 세리모니를 선보인 뒤, 북받 쳐오르는 감격을 주체하지 못 하고 어린 아이 마냥 울먹이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건 그 뿐만이 아니었다. 수백만 붉은 악마들은 승리의 기쁨과 환희에 찬 감동의 눈물 을 흘렸고, 나 또한 믿겨지지 않는 극적인 역전승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수많은 불꽃들이 터지면서 승리의 쾌거를 축하해주었고, 붉은 악마들은 목이 터져라 선수들의 위업을 환호해주었으며, 이에 선수들은 그라운 드 위에서 우리 모두를 향해 감사의 승리 세리모리를 펼쳐 보였다.
시청 앞 광장, 광화문 거리, 대학로, 그 밖의 수많은 장소에서 한국팀을 열렬히 응원 했던 우리 국민들은 밤새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세계의 주요 외신들은 일제히 한국의 진정한 실력으로 달성한 8강 진출의 위업을 크게 보도하며 우리 국민이 똘 똘 뭉친 환희의 밤을 축하해주었다. 이제 더이상 한반도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아니었다. 잠에서 깨어난 한반도의 호랑이는 붉은 물결 속에서 우렁찬 울음 소리로 포효하고 있었다. 한밭벌 대전에서 8강 진출의 신화를 이뤄낸 우리 자랑스런 대표팀 은 이제 곧 빛고을 광주에서 벌어지게 될 스페인과의 8강전에서 4강의 전설을 만들 어 낼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의 심장인 서울에서 월드컵 결승 진출의 꿈을 이루길 기대해본다. 8강, 4강, 결승... 앞으로의 경기들은 갈수록 우리팀의 승률이 낮아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의 뜨거운 성원과 힘찬 응원 소리, 그리고 선수 들의 자신감은 그 무엇보다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한반도를 뒤흔드는 축제의 그 날 이 다시 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첫 승은 기쁨이 되고, 한국의 16강은 기적이 되고, 한국의 8강은 신화가 되고, 한국의 4강은 전설이 되리라...
ps) 정말 오랜만에 카페에 들러서 글도 남기네. 이 글, 원래는 싸이월드에 있는 FSL 클럽에 썼던 글인데, 이 곳에도 올리게 됐어. 승리에 감동한 나머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글을 쓰긴 했지만 아직도 그 환희는 잊지 못하겠다. 요즘 정말 흥분되고, 즐겁고... 월드컵 끝나고 좀 있음 군대 가야 하는데, 가기 전에 친구들 얼굴 보고 싶다. 연락할테니, 많이 나오도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