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비킴은 IZM의 방장 임진모씨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혹은 '내가' 대신 '바비는' '바비가' 같은 주어를 썼다. 오랜 미국 생활의 영향이었을까. 서울 태생이지만 두 살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주, 1992년 귀국해 '닥터 레게' 활동을 하던 때에 할 수 있었던 말은 “엄마” “아빠” “배고파” “잘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모국을 찾아와, 특수한 환경에서 체화한 음악적 자산을 꽃피우기까지 10년 이상의 긴 세월이 요구되었다. 소통의 부재는 언어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1993년 닥터레게로 데뷔한 이래 '부가킹즈' 2집을 발표한 2005년까지 12년의 세월은,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그야말로 '인생극장'과 같았다. 한이 되었고, 혼이 되었고 그리하여 음악적 내러티브의 원천이 된 지난날의 고생을 바비킴은 소울(soul)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일까. 대개의 힙합 음악이 도발적 위풍당당에 가깝지만 바비킴의 음악 구석구석에서는 어쩐지 인간적인 슬픔이 여백을 채우고 있다. 상처는 그러나 과거이고, 지난해 발표한 솔로 앨범(실은 2집)에서 '고래의 꿈'이 히트하고 올해 낸 '부가킹즈' 2집에서는 'Tic tac toe'와 '여행길'로 다시 호응을 이어가면서 오늘의 바비킴은 자신도 놀랄 만큼 괄목상대했다. 국내 힙합 서클에서는 그를 두고 '힙합의 대부'로 추켜세우기도 한다. 얼마 전 윤도현은 TV에서 공개적으로 '부가킹스' 2집을 빼어난 앨범으로 강추, 화제를 모았다. 바비 킴은 자신이 추구하는 음악을 섞어 그만의 색깔로 빚어내는 작업을 '비빔밥'이라고 소개하면서 “섞더라도 개밥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죠.”라고 덧붙여 좌중의 폭소를 유도하기도 했다. 우리말이 영어에 비해 어렵지 않느냐는 물음에 “그렇긴 하지만 우리말은 편안하고 표현이 풍성해요.”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힙합이 아니라 한국음악을 하는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는 바비와 몇몇 음악장르 용어를 제외하고는 일절 영어를 쓰지 않았다. |
데뷔한지 12년이 되었습니다. 정말 긴 시간이었네요. 데뷔 시절의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제가 1973년생이고 서울에서 태어나서 두 살 때 샌프란시스코로 갔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직장 때문에 서울로 돌아와서 닥터레게 오디션을 봤어요. 그때가 1992년 8월이었고 이듬해 7인조 닥터레게가 결성되었구요. 스물한 살에 그룹의 막내로 데뷔했죠. 그때 그쪽에서 가장 어린 친구가 룰라의 고영욱이었어요. 저보다 두 살 어렸죠.
닥터레게의 활동 기간은 짧았습니다. 이후 부가킹즈로 재기하기까지 공백이 길었는데요, 그 동안 따로 작업한 것들이 있나요.
1995년 닥터레게가 해체되었고, 1996년 솔로 앨범을 만들었죠. 만들기만 했어요. 문제가 생겨서 출시가 되지는 못했다가 1998년 그냥 '바비'라는 이름으로 냈는데, 망했습니다. 아주 확실하게 망했죠(웃음). 그런 뒤 제 동생 쥬비, 간디와 함께 3인조 '부가킹즈'를 만들었어요. 2001년에 1집이 나왔는데 역시 제작사와 유통회사 사이에서 문제가 생겨 앨범만 달랑 내고 홍보도 거의 하지 못한 채 그냥 묻혀버리고 말았어요.
그렇게 실패를 거듭했다면 상당한 좌절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아주 최악이었죠('최악'을 강조하지만 사실 매우 담담한 어조).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을 다르게 하게 됐어요. 우리 시장이 야속한 게 아니라 저도 문제가 있다고 자각하게 된 거죠. 그땐 무작정 튀고 싶었고 특이한 음악만 하려고 했어요. 그래서 실패했던 것 같아요. 너무 미국화 되어 있었던 거죠. 그리고 지금 우리(부가킹즈)는 다 30대예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죠. 한국이라는 무대에서, 어른이라는 성숙한 입장에서 노랫말을 쓰고 컨템포러리한 감수성으로 바꾸자고 마음을 먹었어요.
한 번쯤 음악을 접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을 것 같은데.
왜 안했겠어요. 돈을 벌어야 하고 집안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늘 하고 있었죠. 그런데 잘 안 풀리니까... 그래서 작곡이나 프로듀싱을 하고 살아야겠다 했죠. 그러던 중 2001년 윤미래(T)의 앨범에 피처링을 했어요. 근데 윤미래가 그러더라구요. '혼자 해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겠느냐'구요. '이렇게 어느새 나이 먹었으니 음악 하기 힘들다' '다 포기했다' 싶으면서도 그 얘기가 참 강하게 남아있었어요. 마음도 복잡하고 해서 한 달 동안 미국에 가 있었어요. 바람 좀 쐬면서 생각을 정리했죠. 다시 돌아와선 지금의 사장님을 만나서 작업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윤미래씨 공이 컸어요.
그렇게 해서 솔로앨범이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왜 다음 작품이 바비킴 앨범이 아닌 '부가킹즈' 2집이 된 겁니까?
뭘 혼자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대적이지는 않았어요. 원래 그룹 플레이에 더 익숙했구요. 부가킹즈 1집을 내고 실패한 후 복잡했던 와중에 제 동생 쥬비가 군대엘 갔어요. 부가킹즈 2집은 요원해진 거죠. 하나도 되는 일이 없었고, 그런데 음악은 계속 하고 싶고. 그래서 솔로 앨범이 나온 거예요. 물론 윤미래의 조언도 도움이 컸지만, 시기상으로 어쩔 수가 없었던 선택이었죠. 부가킹즈를 못 내니까 어쩌다 솔로를 내게 된 겁니다.
'어쩌다'였지만 막상 바비킴 1집이 나왔을 때 언론과 평론가들 사이에선 평가가 참 좋았어요. 어느 정도 예감을 했는지.
깜짝 놀랐죠. 전혀 없었거든요. 원래 타이틀곡도 'Poor boy rhapsody' 아니면 '밤의 끝에서'를 밀려고 했죠. 그런데 가사가 너무 힙합적이어서 결국 몇 개월의 고민 끝에 '고래의 꿈'으로 결론을 낸 거죠. 많이 고민했어요. 바비가 먼저 영어로 가사를 쓰면 그걸 그대로 번역을 해서 실어요. 물론 영어로 나가면 힙합 마니아들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겠지만, '고래의 꿈'을 선택한 건 대중적인 힙합을 들려 줄 생각에서였어요.
'고래의 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바비킴 노래는 참 특이해요. 가창도 그렇지만 리듬감도 놀라운데요, 이렇게 비트를 잘 이해하는 보컬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앨범의 제목이 < Beats Within My Soul >이죠. 저는 노래를 만들 때 무조건 리듬부터 깔아요. 그리고 그 리듬을 타고 멜로디를 만들어요. 심지어 발라드조차도. 바비한테 1순위는 비트예요. 그리고 노래는... 바비에게는 소울이 있다는 생각을 해요. 그게 대단하고 거창한 게 아니구요, 창법을 말하는 게 아니라 노래로 표현하고 싶은 감정을 소울이라고 봐요. 그리고 그 비트 위에 소울을 담는 거죠.
노래를 들으면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신 분 같아요(웃음).
마이클 볼튼이 처음 나왔을 때도 그런 생각을 했죠. 저런 목소리라면 정말 힘들게 살아 온 인생이구나(웃음).
작년 솔로 앨범은 그야말로 힙합 패밀리 앨범입니다. 타블로(에픽 하이), 리쌍, 윤미래, JK 타이거(드렁큰 타이거) ... 이런 실력자들이 다 모여 있길래 바비킴은 숨어 있는 권력, '스트롱 맨'인 줄 알았습니다. 아니면 사람이 무지 좋던가.
아뇨. (크게 웃으며) 불쌍해서죠. 처절한 제목, 'Poor boy rhapsody'는 정말 제 얘기거든요. 잘 안 돼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이 친구들에게 항상 고마워해요. 무브먼트(Movement)는 소속사가 틀려도 다 서로의 음악을 존중하고 있어요. 바비가 하고 싶었던 음악적 욕구랑 정확히 맞기도 했구요. 작사의 경우가 그래요. 잘 나가는 A급 작사가에게 맡긴다면 좋은 글이 나올 수는 있지만 그게 바비 인생은 아니잖아요. 바비 안의 한이 표현되지 않는다는 거죠. 지난 12년을 친구들이 더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간디와 타이거 JK가 잘 써줬어요.
올해 'Tic tac toe'를 타이틀곡으로 한 부가킹즈의 2집이 나왔어요. 물론 이 앨범에서도 피처링이 인상적인데요, 가장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참여 가수가 윤도현과 클래지콰이의 호란이예요. 어떻게 이 두 가수와 작업하게 되었는지.
'여행길'은 도현이형한테 직접 말씀을 드렸어요. 형한테 어울리는 곡이 하나 있는데 힙합이다, 그랬더니 형 얼굴이 굳어지더라구요(웃음). 그러나 동생이니까 도와주겠다, 등 두들기면서 해주고 싶다, 해서 약속을 받고 데모를 건넸어요. 그랬더니 바로 연락이 오더라구요. 누가 만들었느냐, 이거 완전 내 스타일이다 하더라구요. 그때 도현이형은 '사랑했나봐'를 미느라고 바빠서 녹음 스케줄 잡기가 힘들었죠. 연습을 하긴 했는데 지금 목소리 상태도 안 좋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만한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녹음실에 와서는 45분 만에, 한 방에 끝내고 갔어요.
그게 바비킴의 승리죠. 윤도현의 포크적인 감수성을 간파하고 작업했을 테니까요.
작업을 하다 보니까 바비보다 (윤도현) 형이 하는 게 딱이다 싶었죠. '마음이 눈뜰 때'를 도와 준 호란도 마찬가지였어요. 처음에 연주곡으로 갈까 했다가 뭔가 비어있다는 생각에 제가 노래를 불러봤더니 도저히 들을 수가 없더라구요(웃음). 그래서 방향을 바꿨고, 서영은이나 호란, 이상은처럼 저음을 잘 내는 여성의 목소리를 찾았죠.
부가킹즈의 2집에서는 '서울 야화'가 가장 슬프게 들립니다. 가장 국산(國産)적이라고 할까요. 아주 찐한 느낌이에요. 바비킴 본인이 가장 좋아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확하시네요. 가장 애착이 가는 곡이죠. 가사는 더 슬프구요. 그리고 유일한 금지곡이기도 하죠. '성 상납'이라는 말 때문에 그래요. 저희도 그걸 빼려고 무지 노력했어요. 근데 대체할 말도 없었고 그렇다고 빼면 그 분위기가 안 살아서 그냥 그렇게 갔어요. 지난해 바비 앨범에서는 자전적인 이야기인 'Poor boy rhapsody'를 제일 좋아해요. 가장 의미가 있는 곡은 '미친 듯 살고 싶다'구요.
보컬에 대해 물어볼게요. 오늘 한번 다 해부해보죠(웃음). 이건 몇 년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싶었어요. 여물었다는 느낌이 들었죠. 여물었다는 말 아세요? 농익었다는 느낌. 그래서인지 싱잉도 아주 독특해요. 힙합은 보통 밖으로 내뱉는 스타일, 말이 될지는 모르지만 아웃(out) 방식으로 부르죠. 그런데 반대로 바비킴은 안으로 끌어들여서 노래해요. 인(in)이랄까. 'Tic tac toe'는 뱉는 게 더 적당할 것 같은데, 그조차도 바비는 안으로 부르는 것처럼 들려요.
(여물었다는 말에 잠깐 갸우뚱했으나 농익었다 하자 이해하면서) 아하. 노래 위주로 만든 노래들은 그렇게 하죠. 여기에 구분이 있어요. 흑인 힙합을 들어보면 훅(hook)이라는 게 있어요. 코러스가 나와야 하는 부분인데요, 랩과 멜로디를 섞어 외치는 게 유행이거든요. 그러니까 훅과 송(song)은 다르다는 거죠. 바비 1집의 'I'm still here'을 예로 들어볼게요. 훅의 부분에서 말씀하신대로 아웃팅(outing)을 했어요. 훅은 밖으로 뽑으려고 하고, 노래 중심의 송은 안으로 넣으려고 하죠. 근데 이게 잘 안 먹히는 건지, 나름대로 아웃팅을 하면 사람들이 자꾸 취했느냐고 물어봐서...(웃음).
소울에 기반한 이 이상한(?) 싱잉이 밑에 깔리고, 그리고 그 위에 비트를 얹어놓은 것 같습니다. 소울과 비트는 바비킴의 음악이기 이전에 삶 자체 같아요.
녹음작업에서 디렉팅을 하면요, 뱉는 소리와 호흡, 그런 게 다 보여요. 노래를 하면 저음이 동시에 같이 나온다고 엔지니어가 말씀하시는데 무슨 얘긴지 잘 모르겠어요(웃음). 그리고 보통 사람의 파형이 요만하다고 하면, 저는 이만하다고 하더라구요(손가락으로 파형의 크고 작음을 표시하면서). 혀가 짧은데도 그렇게 나오더라구요.
어쨌든 바비킴 1집과 지금의 부가킹즈를 통해 이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어요. 하지만 지금도 아쉬움이나 아픔이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 생각하면 포장마차에 가고 싶고, 술 한 잔 하고 싶고. 그래서 되도록 그런 생각 안 하려고 해요. 그래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지니까. 일단 바비는 미국에서 성장했고, 그때만 해도 샌프란시스코엔 한인이 거의 없었어요. 전 그들에 비해 눈이 작은 편이었고 피부 색깔도 달랐고, 늘 괴로워했어요. 왜 이렇게 내 눈은 작을까, 왜 내 피부는 이런 색깔일까... 그때 음악을 참 많이 들었어요. 아버지가 트럼펫 연주자이셔서 그 영향도 있구요. 제가 어릴 적부터 미국에선 힙합 문화가 막 붐하고 있을 때였어요. 물론 그런 음악도 좋았지만 이것저것, 컨트리도, 디스코도 참 많이 들었어요. 힙합이 유행하던 시절이어서 그때 친구들은 왜 이런 걸 듣는 거냐며 놀리곤 했죠. 그런 경험들이 결국 지금의 음악을 '비빔밥'으로 만들어준 것 같네요. 그렇다면 한국에 와서 아, 이거다, 싶었던 음악이 있었나요? 처음에 '솔리드' 음악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 완전히 아메리칸 스타일의 음악인데 우리말을 붙여서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본 거죠. 그리고 당시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가 진짜 많이 나왔는데요, 그것도 인상적이었어요. 바비가 어학원을 다닐 때였고, 한국말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가사는 안 들렸지만 그 멜로디가 참 선명했어요. 이런 게 혹시 한국의 멜로디인가 했죠. TV에 나오는 가수들의 창법과 많이 틀렸고 그냥 편하게 눈 감고 '에에에에-' 하면서 노래하는데, 뭔가 그림이 잡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제 바비킴은 힙합 레게 소울, 이런 흑인음악을 말함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존재로 섰습니다.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어떤 꿈이 있는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일단 내 옆에 있는 왼팔과 오른팔, 부가킹즈의 쥬비와 간디도 성공시키고 싶어요. 사실 주변에서 솔로 2집, 아니 3집을 내는 게 정상이라고 했지만 술 마시면서 “부가킹즈를 성공시킬 자신이 있다!”고 했더니 회사에서 군소리 하나 없이 제 의견을 받아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루도 안 빼놓고 아버지가 부는 트럼펫 소리에 일어나요. 그런 아버지를 만족시켜드려야죠. 이게 제일 힘들어요. 긴 말이 없으신 분이라서 딱 한 마디 하면 거기서 제가 답을 찾아야 해요. '아직 멀었다'는 얘길 하셨는데, 그게 가수로서 먼 건지 랩이나 작곡에서 먼 건지 편곡에서 먼 건지... 아마도 아버지 말씀은 누구나 들어도 편안한 음악을 하라는 것 같아요. 아직은 뭔지 잘 모르지만 그걸 찾아 보완하면 아버질 진정으로 만족시켜드릴 수 있겠죠. 그리고 결혼도 하고 싶고... (결혼하면 음악 하기가 어려워지지 않겠느냐고 하자 폭소와 함께 농담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바비킴, 그리고 부가킹즈의 음악을 규정해 본다면. 사람들은 제 음악을 힙합이라고 말하지만, 거기 얽매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힙합이라고 해도, 꼭 랩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냥 좋아하는 음악이 많고, 그걸 다 해 보고 싶고, 장르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곡 하나하나에서 완성도를 평가받고 싶어요. 이렇게 해서 인터뷰이기보다는 고백에 더 가까웠던 두 시간의 기나 긴 이야기가 끝났다. 파란만장했던 12년의 개인사를 듣고 나니 새삼 가장 흥미롭고 극적인 이야기는 소설이나 영화가 아니라, 생동하는 사람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는 전문가의 손을 거친 매끄러운 각색과 차원을 달리 하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담겨 있다. '누구라도 삶에서 한번쯤은 가난을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 있다. 한때의 절박함이란 뮤지션에게 있어 더욱 소중한 창작의 원소일 것이다. 소울이라는 인생과 비트라는 음악이 완벽한 일체를 이룬 바비킴은, 음악이 곁에 있는 한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없을 것 같다. 실패 앞에 덤덤했고, (가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에 망설임이 없었고, 음악적 이상을 담은 눈빛은 강렬했다. 공식적인 인터뷰를 끝내고 덧붙였다. 술을 무척 좋아한다고, 무척 많이 마신다고 했다. 처음 먹었을 땐 소독약인 줄 알았는데, 지금은 소주가 최고라고 했다. 그리고 음악에 관한 한 할 이야기가 많다고 했다. 하긴, 인터뷰 도중 포장마차를 가고 싶다는 말에 한번 의심해 봤어야 했다(?). 언제 한번 술 한번 사겠다는 임진모씨의 제안에 그는 말했다. “술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제가 좀 많이...” 인터뷰: 임진모 정리: 이민희 |
2005/09 이민희(shamchi@naver.com) |
첫댓글 부가킹즈도 꼭 성공시키고 싶다는 그 말이 참 인상깊게 다가옵니다..
바비의 바램대로 부가킹즈도 더 대중적이고 인기를 얻을 수 있기를 바래보네요..
매번 인터뷰를 볼 때마다 느끼니만,윤미래씨가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들고...생활에 대한 얘기를 늘 하는 바비킴..
이만큼 성공하셨으나,더 유명해지고 알려지셔서..돈도 더 많이 버셨음 좋겠고 (진심임다)음악도 더 많이 들려주셨음 좋겠고..아.글고.술 얘기도 늘 빠지지 않는데..주량이 얼마인지 그것도 궁금해요.ㅎㅎ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