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谷 李元和先生에 대한
훼절과 왜곡을 論駁한다.
대저 우리가 家門을 말하고 儒家를 운운함은 천년세 도도하게 간직한
곧음(直)과 바름(正)을 근본정신으로 간직하고 따르므로서 가능한 일이거늘,
금번 某 門中 일부 인사가 발간한 책자에서의 우리 선조 (淵谷先生 廣州李公
諱 元和)에 대한 망령된 훼절과 왜곡이 극에 달한 원통한 현실을 접하고서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우리 廣州李氏十韻科公派 一族은 단종조 계유정란과 문신옥사를 피하여
忠愍公 諱 斗信公과 그 後孫들이 落南한 이래 長興都護府는 우리 문중의
鄕地로서 현재까지 누대로 살아오고 있으며 문과급제자 무과급제자 사마시급제자
南行 제수 등에서 府內外 어느 문중보다도 현달했으며 출중하였다.
당대 같은 시기에 落南하여, 金筆先生 金塊先生 金勿先生 己卯名賢 김광원
선생을 위시한 수 많은 名賢을 배출한 靈光金門과의 交遊는 깊고도 깊어
후대에 이르기 까지 兩 門中의 友意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忠節로 名聲을 떨친 南平文門 풍암 文緯世 先生 역시 本 廣李門의
參奉 諱 景春의 서랑(壻郞)이시며 六凱선생 발현이라는 신화를 이루었다.
鄭名世 先生을 위시한 장흥 명망가인 晉州鄭門과의 활발한 교유 또한
독곡 조대에서의 양 문중간의 깊은 친교를 새삼 상고할 필요 조차 없다.
竹山安門의 安艇(艤)公 역시 本 廣李門의 兵曹正郞公 諱 之賁의 서랑(壻郞)으로
直長公 安重默의 父이시며 進士로서 縣監이신 安範 선생의 孫이시다.
安範 선생은 淵谷 李元和선생이 訥齋 박상선생과 함께 寶林寺(伽智寺)을
유람할 때 함께 동행하신 분이시다. 이렇듯 兩 門中간의 友意도 또한
깊고 돈독하였다.
長興魏門과의 교유와 통문 역시 깊어 貴門도 익히 알다시피 唐谷進士
魏鯤先生을 우리 廣李門이 緣을 맺고 통문하였는바 이로서 五德선생이 발현
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렇듯 廣李門과 제 문중간의 통문과 활발한 교유는 당대 장흥지역에서의
인적교류와 문화창달의 중심이였으며 오늘날 문화도시 장흥의 기초를 이룬
始原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某門의 일부 인사가 출간한 책자를 보면,
靈川 申潛선생의 문집인 <관산록>에 출전하는 우리 廣李門 선조이신
淵谷 和之 諱 元和先生의 詩文을 망령되게 훼절하고 왜곡하여 수록한
현실을 목도하고 통분한 마음을 금 할 수 없으며 참으로 그 정상이 정도를
벗어나고 어긋남이 이리 심할 수가 없다.
이에 우리 廣李門은 문중의 정신인 선조의 詩文이 불현듯 훼절되어
위용됨을 바로 잡음은 물론 儒家의 근본인 곧음(直)과 바름(正)을 직시하여
정현과 정도의 의리에 따라 이러한 훼절과 왜곡을 바로 잡고자 한다.
淵谷 李元和선생은 본관은 廣州이며 字는 和之로서 忠愍公 諱 斗信의
次子이신 李遂公의 현손으로 進士 贈 兵曺參議 李精秀의 子이다.
長興府 府東坊에서 태어 나셨다.
중종 2년(1507년) 增廣試에 문과급제하여 사간원 정언과 사간원 헌납을
지내셨으며, 중종 7년 臺諫으로서 昭陵복위를 수차 상소하였으며
공조정랑으로서 빈전도감 낭청에 제수되신다.
중종11년(1516년) 靜庵 조광조선생 訥齋 박상선생 容齋 이행선생
慕齋 김안국선생 陽谷 소세양선생 등과 함께 師儒에 간택되시는바
師儒라 함은 道를 가르치는 儒者로서 선비들의 師表가 되는 者를
말하며 이는 곧 “先生” 이시다.
중종17년(1522년) 정난공신의 품계와 관작이 과함을 고변하는 등
조정 중대사의 바른 정치를 위해 수차 상소하여 직언하였고 이런 연유 등
으로 인하여 체직되어 교수 등 지방직이 제수되였으나, 연고를 핑계로
불응하여 결국 파직되고 관작이 삭탈되어 낙향한 후 오랫동안 등용되지
못 하였다.
중종33년(1538년) 재직 중인 공조참의에서 체직되고, 황주목사 재임시
황주에 있는 광원루가 화재로 전소되자 중종37년(1542년) 목사직을
사직하신다.
先生의 葬處地는 長興 南面 鉢里山 艮坐이며 禮葬이시다.
상기 기록은
朝鮮王朝實錄(中宗實錄),
長興誌 府內坊 및 府東坊 기사,
廣州李氏 族譜 癸酉譜(遁村 諸兄弟公派 大同譜),
廣州李氏 族譜 乙巳譜(十韻科公 派譜),
廣州李氏 族譜 己未譜(遁村 諸兄弟公派 大同譜),
廣州李氏 族譜 甲子譜(遁村 諸兄弟公派, 栗亭公派, 石灘公派, 巖灘公派 大同譜)에
기록되어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淵谷 李元和선생 관련해서는 당대 대문장가들의 문집과 전적에서
“淵谷” 또는 “和之”라는 표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한다.
靈川 申潛 선생의 문집인 <관산록> 에서는 말할 것 조차 없으며,
訥齋 朴祥선생의 문집인 訥齋集의 [古風一首二十韻]이라는 詩題에서
“知心淵谷李和之”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訥齋集 券一 시문에서
[客況無聊。偶成古風二十五韻。錄似崔詞伯子眞。兼簡和之求和]라는
詩題가 올라와 있고,
訥齋集 券二 [和之甫同宿寶林寺。次天章父]라는 詩題가 있으며,
訥齋集 券三 [述懷投淵谷] 이라는 詩題,
訥齋集 券五 [奉和和之贈權子醇] 라는 詩題 등등
셀 수 없을 정도로 “淵谷” 또는 “和之”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訥齋 朴祥선생의 문집인 訥齋集의 수 많은 시제와 내용에서 “淵谷”
“和之”라는 표현이 반복되어 나타나며 심지어 “知心淵谷李和之”라는
귀절에서는 “淵谷”과 “和之”가 한 문장에서 동시에 나타난다.
이 표현에서 보 듯이 淵谷이 곧 和之임을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아울러
淵谷先生이 他 姓氏가 아니고 李氏임을 또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제학을 지내셨으며 중종조 당대 대문장가로 알려진
企齋 申光漢 선생의 문집인 企齋集에서는 企齋集卷之四의 시문에
“奉酬淵谷丈人 李元和”라고 표현하여 연곡선생이 이원화라고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으며 企齋集卷之四의 또 다른 시문에서도 “奉酬淵谷丈人”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장인(丈人)이란 표현은 어른 또는 윗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연곡 이원화
선생보다 불과 3년 늦게 문과급제(중종5년)하신 企齋 申光漢 선생 조차
이렇듯 깍듯하게 연곡선생을 대우함을 알 수있다.
이럴진대 문과급제가 12년이나 늦은 靈川 申潛선생(중종14년)이 선생의
문집인 <관산록>에서 연곡 이원화선생에게 “和之先生” 또는 “淵谷先生”
이라고 존경어린 경어를 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앞에 서도 언급하였지만 淵谷 李元和 선생은 조정으로부터 師儒에 간택
되시었고, 師儒라 함은 道를 가르치는 儒者로서 선비들의 師表가 되는 者를
말하며 이는 곧 “先生” 이므로 靈川 申潛선생께서도 당연히 그리 하셨을
것이다.
企齋集卷之六 시문에서도 “次李判校 元和 韻” 이라는 詩題가 나타나며
企齋集卷之八 시문에서는 “汲古。用其韻。衍爲二絶。復和之。” 이라는
시제 또한 보이는데 이로서 和之 李元和가 淵谷先生임을 明明白白하게
알 수 있다.
默齋 洪彦弼先生은 중종2년 증광문과에 연곡 이원화선생과 동반급제
하시는데 默齋先生의 문집에서도 역시 淵谷先生이 이원화임을 증명하는
시문이 수 없이 등장한다.
默齋先生文集卷之一 에서 “次淵谷 元和 詩韻”이라는 詩題가 나오며,
默齋先生文集卷之三 에서 보이는 “和淵谷韻” 이라는 시제의 詩에서는
淵谷 李元和선생을 “詞伯”(詩文의 大家를 높이어 일컫는 말)과“馬班”
(사마천과 반고를 의미하며 이 역시 대문장가를 높이어 일컫는 말) 이라
표현하며 극찬하고 있다.
당대 문단에서 企齋 申光漢 선생과 쌍벽을 이룬다는 湖陰 鄭士龍先生의
문집인 湖陰集에서도 淵谷 李元和선생에 관련한 시문이 여지없이 출전한다.
湖陰雜稿卷之一 에서 “奉答李淵谷韻” 이라는 詩題와 “依韻答淵谷見寄”
라는 시제 등을 볼 수 있고 이 역시 “李淵谷”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한다.
또한 己卯名賢이신 思齋 金正國先生의 문집인 思齋集에서도 思齋集卷之一
에 “寄李和之”라는 시제가 나오며 和之선생이 “李和之” 즉 李氏라고
분명하게 적시하고 있다.
상기와 같은 사례은 많고 많아 다 上考하고 記述할 필요조차 없으나
漁村 沈彦光先生의 문집인 漁村集卷之一에서도 “次李 和之 韻” 이란
詩題가 출전하며 漁村集卷之三에서는 “次李正郞 元和 韻”이라는 詩題
또한 보인다.
이렇듯 淵谷李元和선생 관련해서는 靈川 申潛선생의 문집인 <관산록>
에서는 말할 것 조차 없으며, 당대 대문장가들의 문집과 전적에서
“淵谷” 또는 “和之”라는 표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등장하는데,
이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정령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보는가 !!!!!!!!!
잘 읽었습니다...장흥부의 당시 공조판서 이두신 공(장흥낙남 公卿)의 후손으로 이런 훌륭한 분이 계셨다는 것은 자랑입니다..
장흥군청에서는 연곡선생의 시문을 복간하는데 지원을 바랍니다.. 10.08.21. 23:28 이민영(주민) 바로 잡아지길 기원합니다. 10.04.28. 17:18 이민영(주민) 신잠은 신숙주의 증손자이자, 대과(문과) 급제자이지요 10.08.21. 23:33 이민영(주민) 신잠은 조광조 건의에 의해 신설된 현량과를 통하여 문과에 올랐고, 사림입니다. 이원화의 문과 급제는 조광조의 문과급제보다 빠릅니다.박 상은 연산조에 등과, 중종조에 벼슬을 했고 파직도 당했습니다. 박상의 눌재집에서 연곡 이원화님과 나눈 시문에서 연곡은 눌제로 부터도 공경의 현인으로 대접 받습니다.조광조신도비명에 여러인이 등장하나 유독 박상과 김정이 등장 합니다. 이 신도비명은 영상노수신이 作하고 영상 아계 이산해가 썼습니다.그렇다면 조광조에게 박상의 존재는 선학의 대상입니다.조광조는 김굉필 제자이나 같은 계입니다.조광조에게 이원화선생은 사림의 선인입니다.그렇다면 신잠의관산록의 연곡은 누구일까요 10.08.23. 23:48 이민영(주민) 박상의 눌제집을 보면 신잠과 나눈 시문이 등장합니다..그것은 박상의 일대기=체직등, 신잠의 일대기=유배등 시기와 갑습니다.. 10.08.22. 01:55 이민영(주민) 즉 이전에 중앙무대에서 이미 교유한 선비들이란 이야기이지요..이원화-박상-신잠--조광조..김광원..등등이... 10.08.22. 02:00
Re:淵谷 李元和 , 김굉 先生등등의, 사유 간택 기록-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에서|장흥땅향토사모임
이민영(주민) | 조회 10 | 2010.08.24. 01:15 http://cafe.daum.net/jangheungpeoples/QOIQ/185
중종11년6월19일(기사)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이 함께 의논하여,
사유(師儒)에 합당한 인원으로
정수강(丁壽崗)·...김안국(金安國)·김안로(金安老)·김 굉...
송 흠(宋 欽)·한효원(韓效元)··홍언필(洪彦弼)·소세양(蘇世讓)· 이원화(李元和)·...
조광조(趙光祖).박 상(朴祥)·김 정(金淨)을 간택(揀擇)하여 아뢰었다.
사유란 사림 -유림 선비 중에서 선비들의 스승--감히 스승으로 모실 분들이다.
유생의 스승이다.중종반정을 통하여 집권한 중종은 정난공신의 횡포에 심해한 나머지 시정의 책으로
바르고 깨끗한 이상의 정치, 젊은 학자들을 선호했다. 그래서 조광조 김정 등을 등용하고
이른바 개혁정치를 시정한다. 학문과 이상, 국부를 앞세운 중종의 시대는
곧, 바른 선비들이 대접을 받은 시기가 되었고 이른바 현량과란 과도 만들었다.
전국적으로 학문이 높고 사림의 존경을 받을 만하고 사표가되는 선비를 선정한 것이 이른바
사유이다...선비들의 스승이란 것이다 중종조 사유에 선정된 많은 이들은 이후 출사하여
당시 정부 주요 관료를 역임했다.
그래서 사유는 의정부/이조/예조/성균관이 선정한다.
사유로 간택된 사람은.. 경연, 시강원, 성균관등 학문하는 관청의 관리를 역임하거나
그 중에서 후일..세자나 왕자, 왕의 교육을 담당한다..
君師父일체 당시, 조정에서 사유의 위치란.
寄李和之 이화지에게 부치다.
曾同民部郞僚。공조관리들이 함께 하다.
當時李吟一絶云 /요즘 李和之가 시를 읊으지 않는 다는데/
不堪吟倒古風杯 /고풍배에 걸리면 읊으지 않을 수 없으리라./
十年流落鴨江? /압강 물굽이에서 10년 동안 유락되어서/
東望脩門首幾回 /동쪽 궁궐문을 향해 몇 번이나 머리 돌렸나./
每憶淸班趨鵠路 /번번히 청반으로 바로 가길 바라면 서도/
閑思郞署側英材 /영재와 함께 한가로이 낭서(郞署)을 사모하네./
匏尊時自獨斟了 /술잔이 저 홀로 스스로 술 따를 때 되면/
襟抱憑誰相向開 /서로 바라보며 흉금을 의지할 사람 누구인가./
衰老益知離闊苦 /늙어 쇠약함이 차라리 깊은 고난 도움되겠지/
可能重倒古風杯 /고풍배로 말미암아 능히 우뚝 설 수 있으리라./
六曹故事。新來曹司。每飮飮以大鍾。曰古風杯。
古風杯 : 六曹에 신참 관리가 들어오면 曹司 낭료들이 함께 모여 큰 술병의
술을 함께 마시는 풍습으로, 오늘날 신고식과 같은 행사.
보성강 : 보성군 웅치면 대산리 제암산 남동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북동쪽으로 흐르다가
장흥에서 장평천(長平川)과, 보성읍 북쪽에서 노동천(蘆洞川)과 합류한다.
곡성 오곡면 압록리에서 섬진강과 합류하며 일명 鴨江 또는 석압강이라고 한다.
脩門(수문): 궐문, 도성문
淸班 : 양사와 홍문관
匏尊(포존) : 술을 담아 두는 뒤웅박
金正國 선생
1485(성종 16)~1541(중종 36).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으로 기묘명현
본관은 의성.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 팔여거사(八餘居士).
김안국(金安國)의 동생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09년(중종 4)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다.
淵谷 李元和선생
本 廣州 字 和之
長興府 府東坊 출신
중종 2년(1507년) 문과급제(增廣試)
사간원 정언, 사간원 헌납 역임.
중종 7년 臺諫으로서 昭陵복위 상소.
공조정랑으로서 빈전도감 낭청 제수.
중종11년(1516년) 조정에서 師儒에 간택.
중종17년(1522년) 삭탈관직되어 낙향.
중종33년(1538년) 공조참의 체직.
중종37년(1542년) 황주목사 사직.
先生의 葬處地는 長興 南面 鉢里山 艮坐이며 禮葬.
이민기 (1646~1704)
鳳鳴亭用黃鶴樓韻
최 호의 등황학루 시운을 사용해 봉명정을 읊다.
三盃取醉誰家酒 뉘 집 술인데 석 잔에 취하나.
百尺登臨郡郭樓 백 척 성곽누대 올라 고을 보네.
行路古今人去去 고금의 사람들 길 가고 가는데
源泉晝夜水悠悠 밤낮 샘물은 길이 흐른다.
亭空樹老殘橋外 잔교 밖 빈 정자에 나무는 늙고
鳥宿烟沈芳草洲 방초주 안개 자욱해 새는 잠드네.
千載鳳鳴名獨在 천년 봉황 울었던 명성만 남았어.
丈夫無事任閒愁 대장부 일 없이 한가한 시름에 맡기네.
註)芳草洲 -당나라의 시인인 최호의 〈등황학루(登黃鶴樓)〉 시에 “맑은 시내에 역력한 건 한수(漢水) 북쪽 나무요, 방초가 무성한 것은 앵무주 모래톱일세.〔晴川歷歷漢陽樹 芳草??鸚鵡洲〕” 하였다.
신 잠(1491-1554)
鳳鳴亭 在府之東門外
봉명정 장흥부 동문 밖에 있다.
伊昔何時有鳳鳴 옛날 어느 때 봉황 울음 있었나.
亭今獨在?稱名 지금은 정자만 있어 명성 칭송하기 아득해.
依依山影自朝暮 산 그림자 절로 아침저녁 무성하니
袞袞行人相送迎 길손 맞고 보내며 물은 세차게 흐른다.
獨對斜陽共寂寞 혼자 저물녘 대하니 함께 적막해져
幾經世變空?嶸 세상변천 얼마인가, 공연히 세월만 쌓였네.
我來最晩更流落 난 가장 늦었는데 다시 떠돌이 신세
??不聞雙淚傾 말방울소리 들리지 않자 눈에 눈물만 흘러
예양강(汭陽江) 동정(東亭)에서 경회(慶會)에게 시를 남기고 작별하다
천관산 수려하지만 내 고향 아니니 / 冠山雖麗非吾土
이별한 다섯 해에 홍안이 늙었구려 / 別來五年紅顔蒼
만난 지 며칠 만에 또다시 작별하니 / 相逢數日又相別
맑은 눈물 뚝뚝 이별 잔에 떨어지네 / 淸淚浪浪落離觴
예양강 흐르는 강물 유리처럼 푸르고 / 汭陽江水琉璃碧
꽃 진 뒤의 봄빛도 반 넘어 저물었네 / 花落春光歸半强
성조에는 한 인재도 버림이 없으니 / 聖朝一才無棄擲
그대 같은 문장을 누가 능히 잊을까 / 如君詞藻孰能忘
뇌양의 춘죽은 남인의 사모함이니 / 雷陽春竹南人思
구공은 응당 중서당에 들어가리라 / 寇公應入中書堂
말하노니 부디 음식 많이 드시구려 / 寄語努力加?飯
학서 당도할 날 이제 응당 바쁘리라 / 鶴書赴?今當忙
봄날 동정 위에서 작별하는 이 자리 / 春天祖席東亭上
죽마고우의 정회는 크게 상할 뿐이라오 / 竹馬情懷太堪傷
[주D-001]뇌양(雷陽)의……들어가리라 : 한창 돋아나는 봄 죽순은 남쪽 지방 사람들의 사모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니, 응당 등용되어 중서성(中書省)의 정사당(政事堂)인 중서당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말이다. 북송(北宋)의 명신(名臣) 구준(寇準)의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구준이 형주 사마(衡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죽자, 서경(西京)으로 장사를 지내려고 형남(荊南) 공안현(公安縣)을 지나게 되었다. 고을 사람들이 모두 길에 나와 곡하고 제사 지내면서 대나무를 잘라 땅에 꽂고 지전(紙錢)을 걸어 놓았는데, 한달 뒤에 보니 마른 대나무에 다 순(筍)이 났다고 한다. 《宋史 卷281 寇準列傳》
[주D-002]학서(鶴書)……바쁘리라 : 머지않아 다시 부르는 왕명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학서는 일명 학두서(鶴頭書)로, 서체의 하나이다. 옛날 조서(詔書)를 학두서체(鶴頭書體)로 썼기 때문에 제왕의 조서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직역도 좋습니다, 하지만 시적표현을 현대문으로 다듬는것이 제2의 창작이라고도 하더이다,어차피 번역이란 백이면 백사람이 다 다를수도 있구요,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10.02.02. 17:49 草-露 그렇씁니다 .
글간의 의미와 시상 작자의 사물을 관찰하는 혜안
흐름을 느낀다는 것은 각자 다를수있지오 .
마음에 담고갑니다 . 10.02.04. 22:23 草-露 別離 만나고 해여짐 인지상정이라 했던가
봄날 깊은정 아픈마음 다 놓아두고 떠나니 세월 무상이로고 . . . 10.02.04. 22:35
봉명정(동정)의 한시
추강 남효온 (1454~1492)
汭陽江東亭, 留別慶會 -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에게 이별시를 드림.
冠山雖麗非吾土, 別來五年紅顔蒼
相逢數日又相別, 淸淚浪浪落離觴
汭陽江水琉璃碧, 化落春光歸半强
聖朝一才無棄擲, 如君詞藻孰能忘
雷陽春竹南人思, 寇公應入中書堂
寄語努力加식飯, 鶴書赴?今當忙
春天祖席東亭上, 竹馬情懷太堪傷
관산 수려해도 내 고향 아니거니
이별한지 다섯 해에 홍안은 늙었구려.
만난지 며칠만에 또 헤어지자 하니
맑은 눈물 샘솟아 이별 잔에 떨어지오.
예양강물 푸르기 유리구슬 같은데
꽃 지자 봄빛도 마지못해 돌아가네.
성군께선 한 인재도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 같은 글재주를 그 누가 잊으리오.
뇌양의 춘죽은 남인의 사모함 이니
구공도 마땅히 중서당에 들었었소.
부탁하노니 애써서 밥 거르지 마시오.
학서 당도할 날 이제는 응당 바쁠게요.
봄날에 송별 자리 동정을 펼쳐주니
옛 친구 정회로 이 슬픔 견딘다오.
영천 신잠 (1491~1554)
鳳鳴亭 -在府之東門外
伊昔何時有鳳鳴 저 옛날 언젠가 봉황이 울었었지.
亭今獨在만稱名 정자만 홀로 남아 그 이름 무성하네.
依依山影自朝暮 산 그림자 온 종일 의의롭게 늘어지고
袞袞行人相送迎 사람들은 곤곤하게 맞이하고 지나보낸다.
獨對斜陽共寂寞 석양에 홀로 마주서니 온 세상 적막한데,
幾經世變空?嶸 뒤집히는 세상사에 변함없이 우뚝 서있네.
我來最晩更流落 지금 여기 이제와 시작하는 타향살이
??不聞雙淚傾 봉황 울음 듣지 못해 두 눈물 흐르네.
기봉 백광홍(1522~1556)
又呈七律 (다시 칠언율시를 올리다.-영천 선생에게 바치는 시)
南中何處最淸凉 남녘 땅 어느 곳이 가장 맑고 시원한가
鳴鳳高亭檀一鄕 명봉정(鳴鳳亭) 높은 정자 한 고을에 으뜸일세.
楹立汭江魚鱉背 정자 기둥 예양강의 고기등에 솟아있고
?連獅嶽桂衫香 사자산에 잇닿아 계수나무 향기롭다.
嵐粧石色前峯白 이내가 돌빛 꾸며 앞 뫼는 희디 흰데
鷺拂楊化遠浦蒼 백로는 양화(楊化)털고 먼 포구는 아득하다.
爲送靈川還北路 영천 상공 북녘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매
王孫原草斷離腸 들판에 왕손초는 이별 애 끊나니.
점필재 (?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朝鮮中期 性理學者
東亭
어리진을 겨우 파하자마자 / 才罷魚麗陣
행주에선 옥 술잔 넘치는구나. / 行廚?玉杯
며느리 바우엔 햇살 빗기고 / 婦巖紅日側
예양강은 흰 마름꽃 피었네. / 汭水白?開
봄놀이는 점차 늦어만 가는데 / 春事垂垂晩
징서는 자주자주 내려오누나. / 徵書鼎鼎來
군문으로부터 이십 리 일대는 / 轅門二十里
다시 빙 둘러 화성을 띠었으리. / 更帶火城回
·
옥봉 백광훈(1537~1582)
鳳鳴亭下次韻 (봉명정 아래서 차운하다.)
長橋日映水如天 긴 다리에 해 비치고 물도 하늘빛인데,
鶯전孤城柳不煙 꾀꼬리 우는 외로운 성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最是江南好風景 이게 바로 강남에서 가장 좋은 풍경일레라.
釣磯深處倚竿眠 낚시터 깊숙한 곳에서 낚시대에 기대존다.
옥봉 백광훈(1537~1582)
鳳鳴亭下次韻(봉명정 아래서 차운하다.) 원문대조결과.바로잡습니다.
長橋日暖水如天 긴 다리에 따뜻한날 물도 하늘빛인데,
鶯전孤城柳拂煙 꾀꼬리우는 외로운 성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새 지저귈전)
最是江南好風景 이게 바로 강남에서 가장 좋은 풍경일레라.
釣磯深處倚竿眠 낚시터 깊숙한 곳에서 낚시대에 기대어존다.
전자는 轉 구를전자 앞에 입구자를 합한자입니다.
참고, 2번째줄 비칠映자가 따뜻할난 (暖 )난자로 바뀌었구요,
세번째줄 아니不자가 떨칠불 拂 자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번역이 약간 바뀌게 되었답니다,...백광철 드림
반곡 정경달(1542~1602)
鳳鳴亭
綠楊江水野烟生 푸른 버들 강물은 들에 연기를 일으키고
舞蝶飛花滿鳳鳴 춤추는 나비 달리는 꽃은 봉명정에 가득하네.
人去酒醒春菽菽 사람은 가고 술은 깨었으나 봄은 조용하고 쓸쓸해.
一聲鳴鳥下西城 한 마디 새 울음 소리 서쪽 성에 내려 오네.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책 가운데 어제의 잘못을 깨우쳤다 했으니
寒暄有語得依歸 한훤당(김굉필) 말씀 얻어 돌아와 의지하리.
優游涵泳無窮樂 조용히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는 끝없는 즐거움
顔孟何人亦庶幾 안회와 맹자는 어떠한 사람 이기에 되려 하는가?
취곡 조여흠(1549~1579)
題鳳鳴亭
鳳鳴亭上又淸秋 봉명정 위엔 높고 푸른 가을하늘
地戴明公淑氣浮 대지 위에 우뚝 서 맑은 기운 넘쳐나네.
?雨白鷗汭浦曲 성긴 비속에 백구는 예양굽이 넘나들고
落霞孤?壯元頭 지는 가을놀 장원봉엔 홀로 해오라기
仁風蕩蕩草從偃 인산의 탕탕한 바람에 풀들은 드러 눞고,
恩澤汪汪水共流 은택은 깊고 넓어 물처럼 함께 흐른다.
夜靜餘閒看物象 고요한 밤 여유롭게 제 모습들 보여주니
世間別境更何求 이 세상 별경을 어디가 찾겠는가?
만수재 이민기 (1646~1704)
鳳鳴亭用黃鶴樓韻
三盃取醉誰家酒 석잔에 취해보면 뉘집 술인들 어떠랴.
百尺登臨郡郭樓 백척 성곽루에 올라 온 고을 내려다 본다.
行路古今人去去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제 갈길 오고가고
源泉晝夜水悠悠 샘물은 쉼 없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만 가네.
亭空樹老殘橋外 잔교 옆 텅빈 정자에 세월을 머금은 나무
鳥宿烟沈芳草洲 자욱한 안개에 새는 잠들고 꽃들은 피어난다.
千載鳳鳴名獨在 천년전 봉황이 울었거니 그 이름 남아있는데
丈夫無事任閒愁 장부 할 일 없음에 깊은 근심에 빠져드네.
李元成선생
ㅇ 본관 廣州, 字 成之
ㅇ 성종17년(1486년) 문과 급제
ㅇ 성종25년(1494년)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ㅇ 중종 2년(1507년) 사헌부 장령
ㅇ 중종 4년(1509년) 장악원 정(掌樂院正)
ㅇ 중종 5년(1510년) 光州牧使
淵谷 李元和선생
ㅇ 본관 廣州, 字 和之 元成 弟
ㅇ 중종 2년(1507년) 문과 급제
ㅇ 중종 9년(1514년) 사간원 헌납, 소릉복위 청원
ㅇ 중종10년(1515년) 공조정랑 이원화 빈전도감 낭청 제수
ㅇ 중종11년(1516년) 師儒 간택(소세양, 조광조, 박상 등 동시 간택)
ㅇ 중종12년(1517년) 臺官으로서 강상의 죄을 물어 이자화 탄핵
ㅇ 중종17년(1522년) 정난공신 이말손 상언(上言)의 일로 체직 후 사직
- 정난공신 이말손(상산도정,왕족 종친) 품계과 과함을 고변 등
- 교수 등 지방직 제수하였으나, 연고를 핑계로 불응하며 낙향
ㅇ 중종18년(1523년) 서용 제청
- 동시 파직된 윤사익 같은 사람은 서용되어 승품(정3품직)됨
ㅇ 중종33년(1538년) 공조참의 체직
ㅇ 중종36년(1541년) 황주 광원루 화재 전소
ㅇ 중종37년(1542년) 황주목사 사직
李之賁선생
ㅇ 본관 廣州, 字 子實 元和 宗弟
ㅇ 중종14년(1519년) 문과 급제
- 영천 신잠선생과 동년 급제
ㅇ 중종25년(1530년) 형조좌랑 체직
訥齋 朴祥선생
ㅇ 본관 충주, 자 세창(世昌)
ㅇ 연산 7년(1501년) 문과 급제
ㅇ 중종 2년(1507년) 사간원 헌납
ㅇ 중종 3년(1508년) 한산 군수(韓山郡守)
ㅇ 중종 4년(1509년) 임피현감 사직, 光州에서 자적(1509~1512)
ㅇ 중종 7년(1512년)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ㅇ 중종10년(1515년) 담양 부사(潭陽府使)
- 소릉복위 상소로 인해 나주(남평)으로 유배
ㅇ 중종11년 (1516년) 장악원 첨정
ㅇ 중종12년 (1517년) 순천부사 역임 후 모친상으로 사직
ㅇ 중종15년 (1520년) 선공감정
ㅇ 중종19년 (1524년) 상주목사
ㅇ 중종21년 (1526년) 문과 중시 장원, 나주목사 후 병으로 사직
靈川 申潛선생
ㅇ 본관 고령(高靈), 자 원량(元亮),
ㅇ 중종 8년(1513년) 진사 급제
- 생원 이약빙(李若氷,本 廣州)과 진사 신잠 등 각 1백 인을 뽑았다
ㅇ 중종14년(1519년) 문과 급제
ㅇ 중종16년(1521년) 장흥으로 유배(1521 ~ 1537)
# 평안북도 우산군 소재 운산으로 유배 후 장흥으로 이배됨
ㅇ 중종38년(1543년) 사옹원 주부(司饔院主簿)
ㅇ 명종 7년(1552년) 상주 목사
諸 先生 낙향(장흥) 交遊 시점 비교
1522년---1526년---1530년---1533년----1537년-1538년
이원화 ===================================
신 잠 =====================================
박 상 ============
이지분 ====================
## 淵谷 李元和(字 和之)선생의 장흥 낙향기간(1522~1536)과
靈川 申潛선생의 유배기간(1521~1537)은 정확히 일치함은
물론 子實 李之賁선생과도 일정기간(약 7~8년) 중첩됨.
靈川 申潛선생과 子實 李之賁선생은 중종14년 같은 해에
문과급제하여 초기 관직생활을 같이 시작한 사이임.
또한 訥齋선생이 나주목을 사직(1526년)한 이후 약 5년간 역시
申潛선생의 장흥 유배기간과 중첩됨.
## 결국 淵谷 李元和선생, 靈川 申潛선생 등 諸 先生 들은 장흥땅에서
짧게는 5년에서 길게는 15년동안 서로 시문을 주고 받으며
활발히 交遊 했슴을 알 수 있으며,
東班職의 及第者 출신으로서 제 선생간에 격조 높은 문장을
주고 받았슴을 여러 문집에 나오는 시문 등에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1)<이두신,이원성,이원화> 분들의 묘소는 지금 어디에 모셔져 있는지요?
2)<장흥 이씨 이원성>과 <광주이씨 십운공파>는 그 관게를 어떻게 정립하고 있는지요?
3) 연곡 이원화 선생의 생몰 연대는 어떻게 되고, 영천 신잠 선생과는 나이 차이가 어떠한지요?
4)영천 선생이 말한 <연곡>은 장흥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요? ...차례대로 질문드리겠습니다. 10.01.13. 09:39 이민영(주민) 신잠 선생은 중종 14년에 문과(현량과,조광조가 만듬)급제하여 검열 등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피화되었지요, 기묘사화는 중종대 개혁정치를 부르짖는 조광조,김식, 김정 등의 명현 260여명이 죽거나 귀양가거나 파직되거나 한. 사화입니다.신잠이 선생이라고 깍듯한 예우를 하는 분이라면 연곡이 누구시라는 것은 바로 답이 나옵니다.기묘명현이란 조광조등 젊은 사림들이 훈구파등에 대적하고 개혁정치 하고자하다 다친 사림이었지요..사유 간택 이원화,소세양..조광조등 볼때..신잠선생이 이원화선생을 시문에서 깍듯하게 모시는 모습은 당연 합니다.. 10.08.22. 00:31 이민영(주민) 신잠은 현량과를 통해 문과급제자로 중앙정치무대 활동자로 이미, 이원화,조광조. 박상등과분을 익히 알고경모하는 사이입니다..신잠의 영천집은 123권으로 그중 관산록이라하여 상,중권이라 나중에 이야기했고, 시문의 무대가 일부 장흥이나 그러나 중앙, 다른지방것도 많습니다..그래서 신잠의 관산록의 연곡은 마음속으로 경모하는 연곡이자 이 연곡은 화지 이원화 분이 맞습니다. 그이유는 신잠의 학문 계통->>사림-조광조-이원화/박상..등등 관계를 보면 압니다. 10.08.22. 00:32 이민영(주민) 조선초,중기 장흥에서 문과급제자의 수나 사림의 추는 단연 공조판서 두신의 후손들인.. 장흥 광이 이었습니다.. 10.08.23. 23:12 이민영(주민) 이지분, 신잠은 중종의 현량과를 통하여 급제 10.09.03. 02:
장흥의 문과 급제자 (초)
ㅡ예양강
ㅡ"이른바 연곡 선생" 논란을 계기로 나름대로 정리해보다가,
지난 연말의 개인적 사정상 중단하였는데,
이미 출간된 <방촌학1,>에서 "연곡선생" 부분이 충분히 논증되었거니와,
여하튼간에 일단 되살려 보았습니다.
ㅡ연곡 선생 논란 쟁점은 "연곡 이원화가 존재했는지, 연곡이 누구인지여부"가 아니라
"관산록에 등장하는 연곡 선생이 과연 누구인지 여부"이겠습니다.
ㅡ"연곡 이원화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촌학1>은 "연곡 이원화가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있는 상태에서
"관산록에 등장하는 연곡 선생, 화지선생이 누구인지"를 논증하고 있습니다.
ㅡ마침 이 코너에 "광(廣)주이씨"분도 참여한 것 같은데,
"장흥지방 광주이씨의 내력" 소개와 더불어 계속 지적`조언해주기 바랍니다.
필자는 이미 오래전에 장흥신문에 <조대기>와 "광주이씨 역량"을 소개하였습니다.
<방촌학1>도 그 당시의 "광주이씨와 장흥위씨간의 사돈관계"까지 언급하면서
광주이씨 집안을 정중하게 조심스럽게 취급하고 있는데,
다만 "관산록의 연곡선생이 누구인지"를 그 책자 방론에서 논증했을 뿐 입니다.
ㅡ아래 자료는 "지 못난 놈이 지 조상 자랑한다"는 우스개 소리를 넘어서서
우리 장흥 땅 장흥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정리해본 글입니다.
많은 제언 바랍니다.
ㅡ방촌학 1, 위의환, 방촌유물전시관, 2009년10월,비매품
1. 기본자료
ㅡ조선시대 문과백서 (上, 송준호·송만오 편저, 2008.4.)
ㅡ장흥읍지`지리지
2,조선초기, 장흥지방의 대과급제자 명단
· 태종 8년(1408) 식년방 - 김원로(金元老), 선산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우의
- 다른 기록에는 ‘거주지 미상’으로도 나타난다.
-<국조방목>에는 '생원 출신, 거주 미상, 관직 감찰'로 나타난다.
세종 29년(1477) 식년방 - 김필(1426~1470),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경의
- '김필'에 관련된 유적이 ‘장흥 사인암·사인정’이다. 생원시 장원
그 아들이 ‘김괴·김물’이다. <장흥읍지 부산방>편에 나온다.
'김필'은 장흥지방에 낙남거주하지 아니했다. 곧바로 재출사하였음을 유념해야한다.
이 부분을 간과하면 장흥지방 선비들간의 교류,사승 관계에 혼선이 있게된다.
cf,김시습(1435~1493)
문종 즉위년(1450) 식년방 - 노자형, 광주 노씨, 거주 미상, 부 노의
- <장흥읍지 용계방>편에 나타난다.
성종5 년(1474) 식년방 - 김괴(1450~1482),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필
- 예종 원년(1468) '생원시 장원'하고, 그 중간에 '참봉'을 거쳐, 문과급제 하였다.
- 아래의 ‘김물’의 형이고, 그 아들이 "월봉 김광원(1478~1550)'이다.
- 장흥 석대에 '석정' 각자가 있었다. 김괴 역시 요절한 셈이다. 안타깝다.
성종 17년(1486) 식년방 - 이원성(成), 경(慶)주 이씨, 장흥 거주, 부 이정수
- 여기엔 '경주 이씨'로 기재되어 있으나, '광(廣)주 이씨'이라 하겠다.
ㅡ<국조방목>에는 "진사출신,장흥 이씨,거주 미상,관직 정언"으로 되어있다.
- 이두신의 직손이 아니라서, 이원성이 '장흥 이씨'로 분파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동생이 ‘이원화’이다. 그 아버지 이정수는 <장흥읍지>에서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ㅡ이두신과 그 직계는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이원성`이원화 형제는 <부동방>편에 있다.
· 성종 20년(1489) 식년방 - 김물(勿),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필
- 남효온의 <사우명행록>에는 ‘강진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착오일 것 같다.
- 추강 남효온(1454~1492)이 장흥땅을 찾아간, 여러 이유들 중 하나가 될 지 모르겠다.
-<장흥읍지 부산방>에는 "김物"로 나온다.
중종 2년(1507) 증광방 - 이원화, 광(廣)주 이씨, 창평 거주, 부 이정수
- 여기엔 '창평 거주'로 되어있는데, 혹 처가집 거주지일지 모르겠다.
-<국조방목>에는 '유학 출신, 본관· 미상, 거주 미상, 관력 목사'로 나와있다.
병과 26위 합격자이다. 홍언필이 동방 급제자이다. 호-연곡, 자 -화지 이다
-<장흥읍지>엔 형 이원성이 '목사', 동생 이원화는 '사인'으로 바뀌어져 있다.
cf,'자 - 화지'에 "화지 선생"이라 부를 수 있는가?
한편, "연곡 이원화"는 그 자가 <화지>인데,
영천 선생이 그 '호'도 아닌, <자, 화지>를 두고 <화지 선생>이라 올려 불렀을까?
ㅡ대저 <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자>를 두고 <ㅡ선생>이라 올려 부르는 법이 우리 장흥지방에 있는가?
ㅡ앞서의 <방촌학1> 책자가 <관산록의 연곡 선생,화지 선생>을 "화지 위유형"으로 보고
"연곡 이원화"로 보지 아니한, 유력한 이유들의 하나이다,
두 사람간의 생몰연대 차이도 물론 있다. ㅡ 한편, <연곡>은 "위유형의 당호"이다.,
지금도 "장흥읍 평화마을"에서는 <위습독(유형) 산정터>를 <연곡>으로 부른다.
중종 14년(1519) 식년방 - 이지분, 광(廣)주 이씨, 거주 미상, 부 이맹균
-<국조방목>에는 '유학 출신,거주 미상, 관직 군수'로 나와있다.
-<장흥 읍지 부내방>편에 , "이두신의 5대손"으로 나온다..
-그 부친 '이맹균'은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홍치 생원, 관 주부"로 나와있다.
중종 29년(1534) 식년방 - 김삼택, 영암 김씨, 장흥거주, 부 김세정
- 중종38년 식년방의 '김삼달'과는 형제이다.
- <장흥읍지>에는 그 본관 표시가 되지 않고 있다.
중종 35년(1540) 별시방 - 임회, 부안 임씨, 장흥 거주, 부 임경손
- 초시 시험과목으로 갑자기 ‘강경’을 실시하였기에 불과 53명이 참여했었다.
- 안양 '기산 8문장'이다.
- 이 때의 동방급제자는 ‘김인후’, ‘고맹영’이었다.
중종 38년(1543) 식년방 ㅡ 장흥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급제한 사례
1) 김삼달, 영암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세정
- 앞서 ‘김삼락’과 형제지간이다.
2) 김희련, 영암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익환
- <장흥읍지>에는 '경주 김씨'로 나타나는데, '영천 신잠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다.
명종 7년(1552) 식년방 - 백광홍, 해미 백씨, 장흥 거주, 부 백세인
-그가 1556년에 졸함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동생 옥봉이 계속 공부못한 이유도 된다.
-장흥지방의 토반화된 집안에서 사실상 최초로 중앙정계(옥당)에 본격 진출하였다.
앞서의 광주이씨와 영광김씨 경우는 이른바 낙남1`2세대라 하겠다.
선조 3년(1570) 식년방 - 정경달, 영광 정씨, 거주 미상, 부 정몽언
ㅡ이충무공 이순신의 종사관, 반곡 선생이다. 임진란 전에 '선산부사'였다.
예양서원에 모셔진 '천방 유호인'의 제자이다.
선조 12년(1579) 식년방 - 정명세(1550~1593), 진주 정씨, 장흥 거주, 부 정희장
-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순사하였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장흥읍지>에 '송천 양응정'의 제자이다.
'광(廣)주 이씨,초계 변씨'와 더불어 장흥의 '진주 정씨' 역시 재조명될 필요가 크다.
선조 13년(1580) 별시방 - 김공희, 광산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윤
- 안양 기산 8문장의 ‘김윤, 김공희’ 부자이다.
선조 39년(1606) 증광방 - 정명열, 영광 정씨, 장흥 거주, 부 정경달
- 정경달·정명열 부자 합격이었다.
광해 13년(1621) 알성방 - 선세휘, 보성 선씨, 장흥 거주, 부 선봉장
- 광해군이 주관한 ‘이른바 폐모시’의 장원 급제자이다.
- 천관산 의상암의 ‘선세휘·위정훈’의 전설로 남아있다.
- 현재 장흥 지방에서 별다르게 평가` 언급되지 못함은 무슨 까닭인가?
· 인조 26년(1648) 식년방 - 김여원(金汝源), 영광 김씨, 장흥 거주, 부 김이
- <장흥읍지 부산방>편에 '김괴'의 현손으로 나온다.
-<국조방목>에는 "거주 장흥, 관직 尙都事'로 나와있다.
3. 쟁점
·1) 대과 급제자 의미
- 생원·진사시를 거쳐 대과 급제로 가는 것이 표준적 진출 방법이었으나,
실제의 사정은 다양했다.
-대과 급제를 하지않고서도, 명성을 얻거나, 판서` 또는 유명인사가 된 경우
-박광전, 백광훈, 송시열,서원리,조정만,위백규...
..(예양서원의 남효온, 김광원, 유호인 ..모두 대과 급제자가 아니다)
2) 관직진출 형태 및 유형
① 관직진출 - 생원·진사
② 관직진출 - 생원·진사 - 문과급제
③ 생원·진사 - 관직진출 → (백광훈)
④ 생원·진사 - 관직진출 - 문과급제 → (김괴)
⑤ 생원·진사 - 문과급제 - 관직진출 → (백광홍)ㅡ표준적 진출방법
3) 기타 여러 사정
-생진시 합격하고서 문과 급제에 ‘10년 여년 또는 남짓’ 소요된 경우도 꽤 있다.
-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 43명,
개인적 사정으로 보아야 할 일이지, 무능으로 단정할 수는 없을 터.
·-문과 급제자가 오히려 문음 출신자보다 늦어지는 경우도 꽤 있었다.
벌열집안 자제 경우는 '대과'를 피해 일부러 "문음"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먼저 "문음"을 선택하여 관직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중시(重시)"에 응하기도 했다.
·4)지방 거주자는 여러모로 크게 불리하였다.
-"정철, 임제…" 경우는 '서울 출신자'로서 응시하였다.
- 생원·진사의 '서울 거주지' 비율 - 15세기 44%, 16세기 전반 46.15%
- 심지어는 지방 유생의 <별과 (알성시·별시)응시>를 제한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 지방 거주자는 통상 <정례적 식년시>를 통해 진출한다.
5)문음(음관,음직)출신의 의미?
-중앙 명문`벌열가 자제들의 통상적인 관직진출 방법에 해당한다.
-전반적으로 중앙관직의 1/3을 담당하였다. 조선 초기 비중은 더 상당했다.
-좋은 집안의 문음이라면 대과급제가 아니더라도 '판서,정승' 에 이른 경우가 꽤 된다.
-지방 '부사'라 하여 언제나 대과 급제자로 충원되는 것이 아니다
"문과,무과,음직"이 그 고을에 미리 부여되고 할당된 기준과 성격에 맞추어
전국적으로 보면, 각 1/3 씩 비율로 부임한다.
·6)원유계자의 문과응시-
7)장흥 지방의 "광(廣)주 이씨" 현황?
- '광주이씨 둔촌공파'와 '광주이씨 십운공파'는 구별된다.
-이두신은 '둔촌 이집'의 둘째 동생되는 '십운공 이자령의 증손'이다.
- 조선 초기에 유명했던 "둔촌공파, 광주이씨 5극 형제 (이집의 손자 이인손의 아들들)"와
"십운공파 이두신"은 같은 항렬이다.
-한편 '이두신의 방손'에 해당되는, '이원성·이원화'가 광주 이씨 대동보에 어떻게 나오는지는
아직 직접 확인하지 못했다 ㅡ 문중족보 기록?
이들 형제는 '둔촌공파가 중심되어 만든, 광주이씨 문중기록'에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한다.
십운공파 자체도 나중에야 대동보에 편입되었고,
그 중간에 일부 후손이 '장흥 이씨'로 분파했기 때문 아닐까?
- 장흥으로 낙남한, 이두신
-공조판서 이두신 묘소는 '장흥'이 아닌, ‘경주’(광光주?)에 있다한다. 그 곡절은?
(광주 이씨분의 조언을 당부드립니다)
장흥에는 이두신 분의 묘소가 없는 것 같다. <장흥읍지>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두신'은 물론이고, "그 후손들, 이숙경`이발동`이침"은 대과 급제자가 아니다.
ㅡ장흥읍지`지리지 <문과>편에 기재된 것은 "조선초기,넓은 의미의 과거(문과)"에
소과 합격자도 포함되기 때문이다.이발동은 소과 합격후 무과로 돌아선 것 같다.
-그 후손들,'이숙경,이발동,이침'은 <장흥읍지 부내방>편에 나온다.
- 이원성......'장흥 이씨'로도 나타난다.
- 이두신의 둘째 아들의 후손이다. 즉 그 직손이 아니라 다시금 "방손"이다.
cf, 생진시 통계표에 나오는 '장흥이씨 2명'은 과연 누구일까?라는 의문이 남는다.
- 이원화
-'이원성'의 동생이다, '호 -연곡'이고, '자 -화지'이다.
<화지 위유형>과 혼선을 빚고있다.
-cf,화지 위유형 .....<방촌학1>에 정리되어있다
<호- 화지, 자 - 자실, 당호- 연곡>,<위습독공>이다.
장흥읍 예양강 남쪽 평화마을에 "연곡" 산정터가 지금도 있다.
영천의 '관산록'에는 '위습독 산정'과 그 주인이 나온다.
ㅡ연곡 이원화.
....필자 확인으로는, <눌재집>말고는, <송흠,송순,임억령,윤구,양응정,백광홍,정철,백광훈>등 ,
그 당대 호남문사들의 문집이나 장흥선비들 문집에 연곡 이원화는 일절 없었다.
-이원화를 "이른바 기묘명현"으로 보는 일부 주장의 근거가 무척이나 궁금하다.
이원화는 오히려 "기묘사화 가해자 남곤,이유청 "쪽의 재등용 요청을 받고 있으며,
나중에는 '눌재 선생의 제자 정만종'이 올리는 파직 상소의 대상이 되며,
실제로 1542년경 고령과 무능을 이유로 황주목사직에서 70무렵 전에 체직된다.
(이런 사정들은 영천 신잠의 "장흥 유배기간(1521~1538) 과 관산록" 내용에 배치된다).
만약 일부 주장대로, '연곡 이원화'가 만약 장흥 지방에서 오랫 동안 계속 활동하면서
기산 8문장 등 제자를 키우고, 영천 신잠으로 부터 아낌없는 존경을 받고,
더 나아가 기묘명현에 해당되었다면, 그 아래급 인물이라 할,
'월봉 김광원, 천방 유호인' 그 분들을 제치거나 앞서서 장흥 예양서원에 먼저 추배되고,
장흥 현지의 여러 기록에 단 한 줄이라도 남아있어야 그나마 합당한 것 아닐까?
ㅡ인터넷에 대충 떠도는 글에 의하면, "이원화의 손자 사위가 월봉 김광원이다"라는 식이니
도대체 뒤죽박죽 그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이지번(蕃)
-<장흥읍지 부서방, 사마>편에 "가정, 진사"로 나온다.
ㅡ아래의 생원,진사 들을 보면, 조선초기 광주이씨의 활달한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cf,영천 신잠이 1521,12월경 장흥에 유배와서 대면한 "이생원"은 광주이씨 누구일까?
(1)이 비 생원 (선덕 연간,1426~ ) -이 두신 자
cf,(정통1436~ ),(경태 1450~ ),(성화 1465~ )
(2)이맹균 생원 (홍치 연간,1488~ )-이 숙강 자, 이지분 부
(3)이중균 진사 (정덕 연간,1506~ )-이 맹균 제
(4)이지번 진사 (가정 연간,1522~ )-이 중균 자
-영천 신잠 선생(1491~1554)의 장흥 유배기간= 1521,12~1537
8)장흥의 대과 급제자 통계의 의미?
-조선 초기에 가장 많은 대과 급제자를 배출한, 장흥 지방 집안은 ?
-<문과백서>에 의하면, 그나마, "영광 김씨4 > 광주 이씨3, 영암 김씨3"이다.
cf,"광주 이씨 6"이 아니다. 그런 주장은 <장흥읍지>의 '문과 오독'이라하겠다.
-조선 중기, "성현"이 제시한 ‘명문거족 75개 성관’에 '장흥지역 성관'은 하나도 없다.
ㅡ<장흥 지방성씨와 타지역과의 대과 급제자 비교 통계?>
cf전국 통계 ㅡ
(1)한국학중앙연구원ㅡ전주이씨769,파평윤씨419,안동권씨368,남양홍씨326,안동김씨318....
(2)와그너교수ㅡ전주이씨845,안동권씨361,파평윤씨338,남양홍씨322,안동김씨317,
청주한씨278...
-한편, 조선 후기에는 장흥지방 대과 급제자는 없다.(거의 없다?)
-이른바 낙남계 1,2세대가 아닌,장흥토반 출신이 중앙정계로 본격 진출했던 실제적 현황은
어떠한가?
4,생원시, 진사시 경우
1) 유념할 부분 ㅡ
-생원,진사 합격 자체로 관직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문(대)과 급제를 위한 예비시험이다.
그러나 이른바 양반`선비 신분 증표구실을 하며, 하급관직으로 초입사 진출이 가능해진다.
.
-한편,<생진시> 쪽의 '소과 장원 입격자 441명'이라지만,
그중 '210명'에 한하여 대과 문과급제로 나갔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는?....
-<진사시>는 조선 초기부터 일관되게 시행된 것이 아니라, 세종 시대에 일시 채택되었다가,
단종 때에서야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2)생원`진사시 합격자의 성관별 전국 통계?
-조선초기 대과 급제자 통계와는 "꽤 다른 양상"이 드러난다.
cf,전라도에서 "장흥출신 생진사 비율"이 그리 높지 않음을 유념해둘 만하다.
<배출지역별 전국 총계> ㅡ서울14338, 안동783, 충주624,....
ㅡ(전라도지방) 전주432,남원389,나주323,광주285,장성116,보성104,창평103,영암98,
태인93,고부86,장흥86,담양69,강진58, 해남48,화순47,능주42.순천39,동복37...
-장흥 토성씨,외래 이입성씨 들에 관련된, 성관별 생`진시 전국 통계?
1)<장흥지방 관련성씨 전국통계>ㅡ진주정씨144,수원백씨106,남평문씨80,장흥고씨39,
인천이씨35 초계변씨32,영광김씨26,영광정씨26,장흥위씨26,진원박씨22,장흥임씨21,
보성선씨14...
cf,<장흥본관 성씨통계>ㅡ고39,김1,마3,위26,이2,任21,林3,鄭1,曺1
2)전국성관, 생진시 합격자 비교>
ㅡ전주이씨2719,파평윤씨934,안동권씨909,남양홍씨833,밀양박씨755
안동김씨716,연안이씨614,청송심씨567,경주김씨535,한산이씨519,경주이씨517,동래정씨482,
김해김씨469,전의이씨432,광주김씨411대구서씨393,풍양조씨391,문화유씨386,
광(廣)주이씨376,순흥안씨325,창녕성씨317,기계유씨284,반남박씨283,진주유씨282,
덕수이씨275,해평윤씨271,청풍김씨240,은진송씨219,창녕조씨202,완산이씨202,인동장씨167
죽산안씨120,남원양씨103,......
-(전주이씨 숫자가 월등하게 많은 이유는 '종친 특혜조치'에 힘입었기 때문이다)
·
<참고문헌>
1, 조선시대 생원진사 연구, 최진옥,1998
Ⅰ. 조선초기 문과급제자 연구, 김창현, 1999.
Ⅰ. 조선시대 과거와 벼슬, 허흥식 외, 2003.
1, 조선초기 광주이씨 인물연구,성남문화원,2005
1, 조선시대 음관연구,임민혁,2007
1, 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에드워드 와그너,2007
Ⅰ. 조선시대 문과백서(상), 송준호·송만호, 2008.
Ⅰ. 장흥읍지·지리지 모음집, (1747, 정묘지)
1, 국조방목, 영인본, 소화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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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주민) 광이대동보는 둔촌파 십운공파는 별보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오고...모든 문중의 족보중에서 대대로 광이족보는 가장 정확한 것만 기록합니다..특히 관직/등과등은 사실대로만...한음 이덕형선생님이 찬한 대동보에 이원성,원화,원창형제가 나오고..이후 한말 대동보까지...3형제기록이 나오며...조선 후기는 전부 절손이 되어 있습니다..
원래 전라도에서 조선초중기에는 장흥 광이가 가장번성햇고 공조판서 두신공이 유배된 때부터입니다 보성광이=둔촌파는 조선중기 이후기부터 번성하여 오늘에 이릅니다...광이내에서는 장흥광이 보성광이라고 부릅니다.. 10.08.22. 20:48 이민영(주민) 지금 서지학자들 중론은 광이보만큼 정확하고 간략하게 기록된 족보가 없다.당쟁사화시에 훈삭탈직이 있었다면 관도 기록치않음..광이보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가 한음 이덕형(영의정)이 서하고 찬한 경술보인데. 경술보를 보면.관직도 간단합니다 꾸미거나 미사여구가 전혀없습니다.이 원칙은 조선 내내 내려왔고..이원성 원화/원창의 장흥 광이 기록도 내려 옵니다.철종대 이판 이승재의 서로 마지막 간행했는데 그때 기록이 그대로 오늘에 이릅니다.조선내내 후손은 보첩 내용을 절대로 추가 부기한 적이 없이 그대로 옮깁니다.지금도 광이는 족보 자구하나 고치는 것은 사학계 공인과 대종회 전체승인이 없으면 절대 불가합니다. 10.08.24. 22:13
추강집 제2권
시(詩)○칠언율시(七言律詩)
관산(冠山)의 객관으로 이가진(李可珍 琛)이 술을 가져와서 나를 위로할 때 초(初) 자를 얻어 시를 짓다
선비가 영락하여 흰머리 성글어졌으니 / 靑衿零落二毛疎
웅대한 포부 안고 천리를 다녔구려 / 弧矢任他千里魚
어찌 생각했으랴 진평 문밖 수레 길에 / 豈料陳平門外轍
지금 소자의 술병 실은 수레가 올 줄을 / 今來邵子酒甁車
소낙비에 꽃이 날려 봄날 장차 저물고 / 花飛凍雨春將暮
푸른 숲에 잎이 덮여 초여름 되려 하오 / 葉遍靑林夏欲初
무성에서 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출 때 / ?酒武城歌舞裏
선배를 기쁘게 만나 시와 서를 얘기하네 / 喜逢先輩話詩書
[주D-001]웅대한……다녔구려 : 호시(弧矢)는 ‘뽕나무로 만든 활〔桑弧〕’과 ‘쑥대로 만든 화살〔蓬矢〕’이다.
고대에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뽕나무 활에 쑥대 화살을 메워 천지 사방에 쏨으로써 장차 천하에 원대한 일을 할 것임을
기대하였던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천하를 경영하려는 남아의 큰 포부를 뜻한다. 《禮記 內則》 천리어(千里魚)는
물고기가 천리를 헤엄친다는 말로, 무익하고 부질없이 어떤 일을 추구해 마지않는 것을 비유한다. 《관윤자(關尹子)》에
“동이로 못을 삼고 돌로 섬을 삼으면 물고기가 노닐 때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지 못하고 끝없이 뱅글뱅글 돈다.” 하였다.
[주D-002]어찌……줄을 : 그대 같은 사람이 술을 갖고 나를 찾아올 줄을 몰랐다는 말이다.
한나라 진평(陳平)의 집이 가난하여 떨어진 거적자리로 문을 삼고 있었으나,
문 밖에는 찾아온 장자(長者)들의 수레바퀴 자국이 많았다고 한다.
《史記 卷56 陳丞相世家》 소자(邵子)가 술을 싣고 온 고사는 미상이다.
- 계속해서 -
내가 생각건대, 천지 중에 부여된 것은 동일한 명(命)이기 때문에 만물이 태어날 때에 타고나는 것은 동일한 성품이다.
그러므로 편안함을 추구하고 위태로움을 피하며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과 물건이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사람은 물고기를 보고서 잡아먹고 물고기는 사람에게 잡혀서 삶기게 되니,
물고기의 근심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아서야 되겠는가. 말하자면 이렇다.
하늘과 땅이 나뉜 뒤에 만물이 가득 생겨나고, 이미 가득 생겨났으나 아직 어리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으니,
필요한 것은 음식의 도이다. 이미 음식으로 도를 삼았다면 약육강식하는 것이 이치일 것이다.
그러므로 황제(黃帝)가 그물을 만들었고, 우(禹) 임금이 날고기를 올렸고, 순(舜) 임금이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고,
공자가 그물질은 하지 않으나 낚시질은 그만두지 않았고,
맹자가 왕도를 논하면서 또한 “물고기와 자라를 다 먹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고,
소자(邵子)가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답하는 것을 가설하여 종일토록 시비를 논할 때에
마침내 땔나무를 꺾어 물고기를 삶는 데에서 담론을 바꾸었으니, 물고기를 낚는 즐거움이 진실한 것이다.
하물며 물고기는 나에게 먹히고 나는 조물주에게 먹히니, 내가 조물주에게 먹히는 것이 즐거운 것임을 안다면,
또한 물고기가 나에게 먹히는 것이 즐거운 것임을 알겠다.
어찌 낚는다는 것으로 이름을 내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문을 지은 뒤에 내가 또 두 선생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올렸다.
옛날 엄자릉(嚴子陵)이 동강(桐江)의 칠리탄(七里灘)에서 물고기를 낚으며 그 앉았던 곳을 조대(釣臺)라고 이름하였다.
내가 가만히 생각건대, 이것과 저것은 이름은 같으나 취향은 다르다.
엄자릉의 큰 절개는 백세 위로 떨쳐 일어나 곧바로 일월과 더불어 빛을 다투지만,
군신의 의리를 억지로 끊어서 공업도 못 세우고 초목처럼 썩기를 달갑게 여겼으니,
써 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우리 성인의 의리를 크게 잃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회(慶會)로 말하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종유(從遊)하여 그 학문이 관홍(寬弘)하고 엄정하며 낙이(樂易)하고 충실하며
재주와 지혜가 원대해서 조정에 오를 기국(器局)이 있음을 익히 알았고,
가진(可珍)으로 말하면, 행실은 효렴(孝廉)을 갖추었고 재주는 문무(文武)를 겸하여 일찍이 함열현을 예악(禮樂)으로 다스려서
그곳에 훌륭한 치적이 있었으니, 두 선생은 진실로 절개를 숭상하고 고상함을 기르는 데 얽매여 자유롭게 노닐다
세월만 허송한 사람에게 견줄 분들이 아니고,
이른바 강호의 먼 곳에 처하면 임금을 근심한다는 분들이다.
뒷날 성상의 은혜가 시골 마을에 쏟아져서 학서(鶴書)가 조대(釣臺)로 달려온다면,
두 선생은 반드시 푸른 신을 벗고 낚싯줄을 거두어 낚싯대 잡은 손을 옮겨 금정(金鼎)의 염매(鹽梅)를 조미할 것이 분명하니,
어찌 융통성 없는 엄자릉의 조대와 서로 견주겠는가.
곧바로 강 태공(姜太公)의 조황(釣璜)과 더불어 천재(千載)에 서로 상하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예양강의 조대는 필시 후인들이 위수(渭水) 가라고 지적할 것이다.
내가 이로써 기대하니, 두 분은 이로써 힘쓰소서.
[주D-001]하늘과……도이다 : 《주역》〈서괘전(序卦傳)〉에서 괘의 전개 순서를 설명하여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생겨나니,
천지의 사이에 가득한 것은 만물이다. 그러므로 둔(屯)으로써 받았다. 둔은 가득함이니, 둔은 물건이 처음 나온 것이다.
물건이 나오면 반드시 어리므로 몽(蒙)으로써 받았다. 몽은 어림이니, 물건이 어린 것이다.
물건이 어리면 기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수(需)로써 받았으니, 수는 음식의 도이다.” 하였다.
[주D-002]우(禹) 임금이 날고기를 올렸고 : 수토(水土)가 다스려지지 못하여 백성들이 곡식을 먹을 수 없으므로,
새ㆍ짐승ㆍ물고기ㆍ자라 등의 여러 고기를 백성들에게 올려서 먹고 배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서경》〈익직(益稷)〉에 우 임금이 말하기를 “익과 함께 여러 날고기를 올렸다.〔?益奏庶鮮食〕” 하였다.
[주D-003]순(舜) 임금이……잡았고 : 순 임금이 미천하였을 때에 역산(歷山)에서 밭을 갈고, 하빈(河濱)에서 질그릇을 굽고,
뇌택(雷澤)에서 물고기를 잡았다고 한다.《孟子集註 公孫丑上》
[주D-004]공자가……않았고 : 공자는 “낚시질은 하였으나 그물질은 하지 않았고 주살질은 하였으나 잠자는 새를 맞추지는 않았다.
〔釣而不綱 ?不射宿〕” 하였다. 《論語 述而》
[주D-005]맹자가……하였고 : 맹자가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방도를 얘기하면서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와 못에 넣지 않으면
물고기와 자라를 다 먹을 수 없을 것이다.〔數?不入?池 魚鼈不可勝食也〕” 하였다. 《孟子 梁惠王上》
[주D-006]소자(邵子)가……바꾸었으니 : 소옹(邵雍)의 〈어초문대(漁樵問對)〉를 말한다.
〈어초문대〉는 소옹이 문답 형식을 빌려 음양(陰陽)ㆍ화육(化育)의 단서와 성명(性命)ㆍ도덕(道德)의 오지(奧旨)를
논한 것으로, 처음에 낚시꾼과 나무꾼이 물고기와 사람의 이해(利害)를 말하다가 땔나무와 물고기의 관계를 가지고
수(水)와 화(火)의 체용에 대한 내용으로 옮겨서 본격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性理大全 卷13 皇極經世書》
[주D-007]엄자릉(嚴子陵) : 자릉은 후한 광무제(光武帝) 때의 고사(高士)인 엄광(嚴光)의 자(字)이다.
엄광은 광무제와 어린 시절의 벗으로, 광무제가 즉위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했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여 칠리탄(七里灘)에서 낚시질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부춘산에 그가 낚시하던 조대(釣臺)가 있다고 한다. 《古文眞寶後集 卷6 嚴先生祠堂記》
[주D-008]써 주면……의리 : 공자가 안연(顔淵)에게 말하기를 “써 주면 도를 행하고 버리면 은둔하는 것은 오직 나와 너만이
지니고 있을 뿐이다.〔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하였다.《論語 述而》
[주D-009]낙이(樂易) : 화락(和樂)하고 평이(平易)함이다.
[주D-010]강호의……근심한다 : 범중엄(范仲淹)의 〈악양루기(岳陽樓記)〉에 나오는 말이다.
“묘당(廟堂)의 높은 곳에 거하면 백성들을 걱정하고, 강호의 먼 곳에 처하면 임금을 근심한다.
〔居廟堂之高則憂其民 處江湖之遠則憂其君〕” 하였다. 《古文眞寶後集 卷6》
[주D-011]학서(鶴書) : 학두서(鶴頭書)로, 제왕의 조서(詔書)를 말한다.
[주D-012]금정(金鼎)의 염매(鹽梅)를 조미 : 나라를 다스리는 재상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는 말이다.
금정은 국가를 상징하는 구정(九鼎)이고, 염매는 조미료인 소금과 매실이다.
은(殷)나라 고종(高宗)이 재상 부열(傅說)에게 말하기를 “내가 만약 간을 맞추는 국을 만든다면,
네가 소금과 매실이 되어야 한다.〔若作和羹 爾惟鹽梅〕” 하였다. 《書經 說命下》
[주D-013]강 태공(姜太公)의 조황(釣璜) : 강 태공은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스승이다.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하며 은둔하다가 문왕에게 등용되었고 뒤에 무왕(武王)을 도와서 천하를 차지하도록 하였다.
조황은 강 태공이 낚시질하면서 얻은 옥이다. 그 옥에 “주나라가 천명을 받는다.〔周受命〕”는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조대기(釣臺記)는
추강 남효온(秋江 南孝溫) 선생이 홍치(弘治) 4년(1491, 성종22) 3월 초에 장흥의 별관(別館)에 우거할 때
廣州李公 李琛 선생, 海南尹公 윤구선생과 교유하며 지은 글이다.
추강집 제4권 기(記)
조대기(釣臺記)
수령천(遂寧川)이 가지산(迦智山)으로부터 나와서 장흥부(長興府) 북쪽 몇 리를 흐르다가 물길을 돌려 동쪽으로 흘러가고,
동정(東亭)을 지나 예양강(汭陽江)이 되었다가 강물이 또 남쪽으로 내려간다.
성 남쪽 7, 8리 거리의 독곡(獨谷) 서쪽 기슭에 강물을 굽어보는 기이한 바위가 있으니,
그 위는 30여 명이 앉을 만하고 푸른 물결이 두루 감돌며, 괴석(怪石)이 곁으로 서 있고 기이한 화초가 그 주위에 이리저리 자라 있다.
북쪽으로 착두산(錯頭山)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수인산(修因山)을 보고 남쪽으로 사인암(舍人巖)을 대하고 있으며,
바위 뒤로 만덕산(萬德山)이 봉우리를 드러내니, 참으로 절경이다.
홍치(弘治) 4년(1491, 성종22) 3월 초에 내가 장흥의 별관(別館)에 우거하며 날마다 향중의 인사들과 노닐었다.
그때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으로 있다가 성 남쪽에 우거하는 자(字)가 경회(慶會)인 윤구 선생과
함열 현감(咸悅縣監)으로 재직하다 모친상을 당하여 돌아와서는 복이 끝난 뒤에 복직하지 않고 성 북쪽에 사는
자가 가진(可珍)인 이침(李琛) 선생이 있었다.
하루는 두 선생이 술과 어구(魚具)를 마련하고 나를 맞이하여 남강(南江)에 노닐다가 이 바위에 올랐더니,
위아래에 큰 돌이 셋이었다.
풀을 베어 우묵한 곳을 채워서 두터운 자리를 마련하고, 황어(黃魚)와 잉어를 낚아 굽기도 하고 회를 치기도 하여
조촐한 술자리를 열고 청담(淸談)을 펼쳤다.
이때 좌객(坐客)으로 온, 자가 자미(子美)인 김세언(金世彦) 공은 부백(府伯)의 맏아들이고,
자가 인재(隣哉)인 김양좌(金良佐) 공은 부백의 사위이고, 자가 울지(蔚之)인 이세회(李世?) 공은 경회의 사위였다.
두 명의 시골 늙은이는 흰 수염이 몹시 아름다우며 산야(山野)의 복장을 하였는데,
하나는 박의손(朴義孫)이고 하나는 최석이(崔石伊)로 또한 두 선생을 따라온 이들이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았을 때 해가 져서 달이 뜨고 바람이 일어 물결이 생겼다.
박의손이 일어나 춤추고 최석이가 노래 부르니, 여러 손님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두 선생이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여기서 노닌 지 오래되었으나 이곳에 이렇게 기이한 바위가 있는 줄 몰랐소.
어찌 시골 늙은이들과 힘을 합쳐 대(臺)를 쌓아 영원히 전하지 않겠소.” 하니,
두 늙은이가 절하면서 “오직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두 선생이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즐거움은 물고기를 낚는 것이 제일의 승사(勝事)이니,
대 이름을 조대(釣臺)라 해야 하지 않겠소.” 하고, 이에 나에게 기문을 짓도록 명하였다.
장흥읍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15㎞쯤 달리면 오른쪽으로 커다란 산이 하나 버티고 있다. 천자의 면류관을 쓴 것 같다는 천관산이다. 그리고 이 산 아래에 방촌마을이 얌전히 앉아 있다. 이 마을은 장흥 위씨 집성촌이다.
장흥읍에서 용산면 방면으로 향하는 길가에 위백규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호남실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인물이다. 위백규와 그 겨레붙이가 살았던 곳이 바로 방촌마을이다.
마을 어귀에는 석장승 두 기가 버티고 있다. 화강석으로 된 이 두 장승은 성별이 남녀로 다르다. 고려 말경에 조성된 것으로 전라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돼 있다. 장승은 보통 마을을 수호하거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방촌마을의 이들 장승은 수호의 기능을 담당한다. 서쪽의 것이 미륵석불로 여장승이고, 동쪽의 것이 진서대장군이라 불리는 남장승이다. 언뜻 보아도 성별구분이 가능하다. 남장승이 훨씬 우락부락하고 코가 대단히 커서 얼굴의 반을 차지한다.
장승을 지나면 우측에 방촌유물전시관이 보인다. 마을은 도로 좌우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을 둘러보기 전에 대략 어떤 마을이고, 어떤 가옥들이 있는지 미리 살펴보는 게 필요하므로 유물전시관으로 먼저 길을 잡는다. 방촌마을이 언제 생겼고, 사람들이 어떠한 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보여주는 전시시설이다.
방촌마을에는 1578년 위덕후라는 인물이 입향하면서 위씨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다. 이곳에는 방촌마을에서 살았던 다양한 위씨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오래된 전축, 안경, 옷가지, 농기구 등 모두가 방촌마을에 사는 위씨들이 기증한 것들이다. 전시관 한편에 탁본체험시설이 있다.
꽃 만발 아름다운 돌계단
전시관을 나온 후에는 하나 더 둘러볼 것이 있다. 고인돌군이다. 전시관 건너편 소나무숲에 고인돌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된 것으로 모두 93기가 이 숲에 있다. 고인돌은 그 형태에 따라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나뉜다. 북방식은 일명 탁자형 고인돌이라고 부른다. 큰 돌을 괴고 그 위에 판판한 돌을 올린다. 반면 남방식은 작은 굄돌 위에 덮개돌을 올려 바둑판모양이다. 방촌리 고인돌들은 남방식이다. 크고 작은 것들이 어울려 있는데 숲 속에 있던 탓에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지석묘군까지 본 후에야 방촌마을로 들어간다. 일단 길 좌우측에 있는 마을 중에서 왼쪽으로 향한다. 이곳에 위백규 생가(중요민속자료 제161호)와 위성룡 가옥(전남 민속자료 제6호), 위봉환 가옥(전남 민속자료 제39호) 등이 있다. 따사로운 가을볕에 벼들이 누렇게 익은 논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자, 고풍스런 한옥들이 눈에 들어온다. 순서대로 보자면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위백규 생가이고, 다음이 위성렬 가옥이다. 같은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마을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200m쯤 가면 위봉환 가옥이 있다.
방촌마을의 한옥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깃들어 살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위백규 생가는 현재 비어 있는 상태다. 장흥군청에서 위임한 이들이 매일 청소하고 관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실제로 사는 집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온기가 없다. 위백규가 공부하던 서재와 사당이 볼 만하고, 뒤쪽에 자리한 정원은 운치가 있다.
위성룡 가옥은 할머니 한 분이 지키고 있다. 집안의 넷째며느리다. 올해 여든 셋이지만 무척 정정하다. 혼자 큰 집을 지키노라면 적적하지 않을까 묻는데, "그럴 일 없다" 하신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니 이해가 간다. 바람이 늘 먼지를 내려두고 가는 툇마루마저도 반들반들 깨끗하고, 마당에는 콩이며 결명자 따위가 심어져 있다. 담장을 끼고 있는 유자나무도 가꾸고, 대밭 옆에 있는 감나무도 보살핀다. 하나 더, 콩과 결명자를 심은 마당의 남는 부분과 집으로 오르는 돌계단에는 각종 꽃들을 심었다. 특히 계단에는 함부로 밟아 올라설 수 없을 만큼 꽃들이 만발했는데, 이보다 아름다운 계단을 이제껏 보지 못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하노라면 적적할 틈이 있을 리 없다.
위봉환 가옥은 담장이 아름답다. 황토를 이겨 돌과 함께 쌓은 토석혼축담이다. 담장너머로 석류가 빨갛게 익어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집 오른쪽으로 대나무밭이 자연 조성돼 있다. 아직까지도 낮 동안은 더위가 남아 있는 요즘, 바람이 사르르 댓잎을 간질이고 가는 소리가 시원하다.
위봉환 가옥까지 둘러본 후 길 반대편 마을로 향한다. 이곳에는 위성탁 가옥(전남 민속자료 제7호)이 있다. 대문 앞에 배롱나무가 있다. 또한 대문 우측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하나 있다. 바람이 '쉬' 지나칠 때마다 안채의 처마 끝에 달아 놓은 풍경이 은은하게 울린다.
볼 만한 장천재?노력도 풍경
한편, 방촌마을 인근에도 둘러볼 곳들이 꽤 많다. 방촌마을에서 천관산을 바라볼 때 오른쪽 등성이에 자리한 장천재를 비롯해 남으로 20분쯤 길을 달리면 닿은 노력도와 천관산 남쪽 기슭에 있는 천관문학관 등이 있다.
장천재는 장흥 위씨들이 장천암 터에 세워 한학의 서재로 이용하던 건물이다. 위백규가 이곳에서 공부했다고 전한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돼 있다. 봄이면 주변으로 동백이 좋다. 가을이면 또한 억새산행객들이 이 앞을 무던히 지나가는데, 정작 장천재에 관심을 두는 이들은 별로 없다.
노력도는 회진면 덕산리에 자리한 섬이다. 아니 이제는 섬이 아니다. 다리가 놓여 자동차로 건너갈 수 있다. 섬은 작다. 해안선의 길이가 7㎞밖에 되지 않는다. 노력도로 들어가는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해오름이 장관이다.
천관문학관은 대덕읍 연지리 천관산 등산로 상에 자리한다. 그 위로 천관문학공원과 천관사가 있다. 장흥 출신 문인들의 연보와 대표적 작품, 육필원고 등을 전시한 문학관을 관람한 후 마음을 울리는 시구들이 돌에 새겨진 문학공원을 산책하고, 보물 제795호로 지정된 3층석탑 등의 유물이 있는 천관사까지 둘러보면 여행이 마무리된다.
여행안내
▲길잡이: 서해안고속도로 목포나들목→2번 국도(장흥 방향 직진)→순지교차로→23번 국도→장흥읍→방촌마을
▲먹거리: 장흥군청 정문 건너편에 있는 한정식집 신녹원관(061-863-6622)을 추천한다. 육회, 피조개, 전복, 낙지, 소라, 해삼, 장어구이, 홍어 등 30가지가 넘는 요리들이 상다리를 휘게 만든다. 1인분 1만 5000원, 특정식은 2만 원이다.
▲잠자리: 숲에서 하룻밤 어떨까. 장흥읍 우산리에 우드랜드((www.jhwoodland.co.kr·061-864-0063)라는 편백숲이 있다. 30만 평이나 되는 임야에 40년생 편백나무가 들어선 숲이다. 편백을 테마로 한 전통한옥과 편백노천탕, 편백톱밥찜질방 등을 갖추고 있다.
#연곡 선생에 대하여
1992년 12월 30일 성주인 이상구 장흥 문화원장이 발간한 “장흥 지리지 ? 읍지 모음”을 보면 장흥 부내방, 부동방편 “本朝 文科”에 이런 기사가 있다.
“李斗信, 李叔耕, 李發東, 李琛, 李之?, 李元成, 李元和”가 문과 급제자로 올라 있다.
이 일곱 분은 ‘李自齡’을 파조로 하는 광주 이씨 십운과급제공파(十韻科級第公派) 이다.
이 파는 自齡 - 蓮仝 - 蓬老 - 斗信 - 庇 - 叔耕 으로 이어지는 세계인데 조선 세조 때 자헌대부 공조판서 두신이 병자년(1456, 세조1) 文臣獄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귀양 가면서 이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장흥고을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다.
장손 집안은 自齡 - 蓮仝 - 蓬老 - 斗信 - 庇 - 叔耕 - 琛 - 鐵塊 로 내려오다 뒤가 없다.
당시 영광 김씨 문경공파는 조선조 수양대군의 癸酉靖難(단종1,1453년)후 諱 敬義 평강 할아버지는 큰 아들 瓚 둘째 아들 王/筆 큰집 조카 琳을 데리고 全羅道 長興 夫山坊 泉谷(내안리 내동)에 단종3년(乙亥1455) 집 자리를 마련한다.
광주 이씨와 영광 김씨 간의 통혼 관계를 살펴보면,
이조참판공 김필의 貞夫人 광주 이씨는 父 찰방 叔剛, 祖 찰방 庇, 曾祖 판서 斗信이다.
당시 대과 급제자는 정부인 이씨의 백부 叔耕, 숙경의 아들 琛, 오라버니 發東이다.
참판공 필의 손자 月峯公 光遠의 仲子 龜壽(어산파 파조)의 宜人 광주 이씨는 진사 元昌의 여식이다.
원창은 원성, 원화의 동생이다.
廣州李氏 進士 元昌은 용산 상금에 살았는데 月峯公 仲子 龜壽를 사위로 맞으면서 영광 김씨 어산파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다.
형조 좌랑 귀수의 유택은 상금마을 뒤 필봉 중턱에 있다.
진사 원창은 贈兵曹參議 李精秀의 아들이고 문과 급제자 牧使 成之 李元
成,
牧使 和之 李元和의 아우이다.
成之와 和之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와 있고 淵谷先生 화지는
문장가로 당시 여러 명망가의 문집에 등장한다.
季子 龜命(건산파 파조)의 부인은 광주 이씨 참봉 勃의 여식이다.
발은 영의정 蓬老의 후손으로 원성의 손자이다.
自齡 - 蓮仝 - 蓬老 - 斗信 - 遂 - 安道 - 約文 - 精秀 - 元成 - 仁根 - 勃 - 中轍
장흥 용산 포곡 십운과급제공파 선산을 보면 제일 위에는
설암공 필의 장인 이숙강, 처남 이발동 순으로 봉분이 자리한다.
선산입구 懸揚碑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과 급제자 “李斗信, 李叔耕, 李發東, 李琛, 李之?, 李元成, 李元和” 諱를 나란히 차례로 碣石했다.
淵谷 李和之 선생의 세계를 알아보면 이렇다.
自齡 - 蓮仝 - 蓬老 - 斗信 - 遂 - 安道 - 約文 - 精秀 - 元和 - 石根 - 孫生
손자 ‘손생’ 대에서 무후가가 된다.
당시 장흥 용산 상금에 살았던 연곡의 동생 진사 원창은 당대에서 후사가 끊긴다.
長兄 원성의 후손도 고단하게 겨우 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叔剛 - 發東 - 孟均 - 之? 으로 내려오는 문과 합격자 之?도 이 세대에서 문을 닫는다.
지분은 원성, 원화와 같은 항렬 형제이고 다들 동시대 급제자이다.
이런 세계로 말미암아 탁락한 才士들이 역사에 잊혀 진 인물이 되고 만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곱 사람의 합격자 “李斗信, 李叔耕, 李發東, 李琛, 李之?, 李元成, 李元和” 가운데 후사가 있는 분은 李斗信, 李發東, 李元成 셋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가문과 혼인해 광주 이씨 따님을 맞아들인 집안들은 자손이 번연했다.
영광 김씨 참판공 필파, 장흥 위씨 진사 鯤의 五德, 풍암 문위세의 六凱 등이다.
광주 이씨 파보 면주를 보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데 나라의 禮葬이 여러 차례 치러 질 만큼 한 때는 찬란한 화벌이었으나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후손들이 잔약하게 되어 문헌을 보존하지 못했다.
개인의 事德을 살펴보려면 차라리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하는 편이 낳을 것 같다.
더구나 연곡 자신이 문자를 후세에 남기고 싶은 뜻이 없음을 영천자 신잠의 관산록에서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관산록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이 영광인 월봉 김광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월봉공은 영천자 신잠과 같은 ‘안처겸의 옥사’ 즉 ‘송사련의 신사무옥’에 연루돼 억울하게 오랜 기간 국토 변방에서 귀양 살았다.
한 사람은 전라도 장흥, 또 한 사람은 평안도 영변에서 겨우 목숨을 건져 말년에 관직 생활을 했거나 아니면 산림에 묻혀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大樹 임억령은 월봉공의 조카사위, 金子潤은 재종, 淵谷 선생은 겹사돈, 子實 이지분은 外戚이다.
이런 사연으로 월봉 김광원의 신화는 전해져 산림처사들에게 잊혀 지지 않았고 삼백 여년이 지난 고종 대에 벼슬이 판서에 추증되고 “문절”이라는 시호가 내리게 된다.
광주 이씨 십운과급제공파(十韻科級第公派) 精秀와 아들 셋의 면주기사는 아래와 같다.
精秀 - 明宗甲子1564年生員贈兵曹參議.
元成 - 생원, 문과 목사, 長子 仁根.
元和 - 진사, 문과 官牧使檢詳舍人, 墓在長興南面鉢里山艮坐 禮葬立表石.
元昌 - 문과 성균관 진사.
[조선의 방목]
이지분(李之?)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중종(中宗) 14년
과거시험연도 : 1519 기묘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15(丙科15)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지분(李之?)
자 : 자실(子實)
본관(本貫) : 광주(廣州)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전력(前歷) : 유학(幼學)
관직(官職) : 군수(郡守)
[가족사항]
부(父) : 이맹균(李孟鈞)
조부(祖父) : 이발동(李發東)
증조부(曾祖父) : 이숙강(李叔剛)
注)進士 魏鯤은 廣州李氏와의 사이에 5남 德弘, 德毅, 德寬, 德和, 德厚를 두었다.
楓菴 文緯世는 廣州李氏와의 사이에 6남 元凱, 英凱, 亨凱, 弘凱, 汝凱, 括凱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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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영(주민) 장흥의 예서 선인들의 이야기 / 기록 잘 보았습니다..장흥의 유명한 ,사인암/사인정 전설의 주인공이 김필이지요...김 필 선생은 당대의 훌륭한 선비입니다. 10.08.21. 22:54
안녕하세요.
저는 廣州李氏 十韻科公 24代孫 이주일입니다.
뚜르아르님의 글을 접하면서
후손으로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흥은 저의 廣州李氏 十韻科公派 종원들이
누대로 살아온 고장으로,
님께서 탐구하신 연곡선생(元자 和자)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元자和자 할아버지는 당대에도 학문과
덕망으로 뭇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던 듯합니다.
중종 11년에는 조정에서 소세양, 조광조, 박상 과
같은 당대 최고의 선비들과 함께 사유(師儒)로
간택되기도 합니다.
기실 뚜르아르님께서 자주 언급하신
訥齋 朴祥은 저희 집안과 緣이 있습니다.
저희 선조 중에 叔자貞자(叔자剛자 第)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순천에 居하셨으며 갑산부사를 歷하셨습니다.
바로 이 叔자貞자 할아버지가 訥齋 朴祥의 인척이
되십니다.
이러이러한 많은 연고로 인해 눌재선생의 시문에
연곡선생은 물론 元자成자 할아버지가 자주 등장하게
된 듯 싶습니다.
뚜르아르님께 거듭 감사 말씀 올리며,
장흥에 함 내려가면 혹 뵐 수는 있는지...... ^^*
이주일님께 !
반갑습니다.
십운과공파 후손을 만나게 돼서,
궁금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닌데 앞으로 많은 의문점을 님을 통해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자세히 보첩 면주기사를 보니 눌재 박상 선생이 諱 叔貞의 둘째 사위가 되는 군요.
저는 숙정의 바로 윗형님인 諱 叔剛의 첫째 사위 諱 王/筆[필]의 후손입니다.
한때는 찬란했던 廣李門이 어떻게 해서 문헌이 남아 있지를 않는지 알고 싶은 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和之 元和 선생의 경우 나라에서 예장을 치르고 표석까지 세워 용산 鉢山에 모셨는데 지금까지 실묘하지 않고 관리가 되는지요,
그리고 成之 元成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서울에서 생활합니다.
좋은 인연있기를 바라겠습니다.
뚜르와르님께 !!!
저 역시 영광김문(靈光金門)의 후손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영광(?)입니다.
장흥의 영광김문(靈光金門)은
조선 단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설암(雪岩) 김필 선생을 필두로, 사간원 헌납 김괴(金塊)선생,
홍문관 전한 김물(金勿)선생, 기묘명현(己卯名賢) 김광원(金光遠)선생 등등
이루 다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명문이죠.
저희 집안은 諱 斗信 를 비롯한 선조들께서 계유정난 뒤 벼슬을 버리고 장흥/강진 등으로 낙남한
이래 차츰 중앙 정계로 부터 멀어지고 자손들도 무후(无後)한 경우가 많아
관련 문헌을 많이 보전치 못한 듯 합니다.
廣李 보첩을 보면서,
몇 년 전 중앙도서관 고전연구실에서 복사해온 靈光金門 보첩을 보면서,
먼 옛날 두 집안의 돈독한 우의와 두 집안 어른들의 학문적 열정을
느끼는 듯 합니다.
저 역시 서울에서 생활하며.
근자에 한번 연락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옴시레기>
"고스란히"를 뜻하는 <옴시레기>에 관한 자료 입니다
1)방언의 정서적 의미......이태영 교수
2)옴시레기 ......한겨레신문 2009,9,14 연재칼럼
ㅡ장흥 회진 덕도 신상리 출신,
한승원 선생님은 <옴씨래미>로 표현하고 있습니다.ㅡㅡ예양강
1)자료1 ㅡ방언의 정서적 의미
ㅡ방언의 정서적 의미
이태영 교수 (전북대학교)
‘샘(泉)’의 의미를 알아보기 위하여
『표준국어대사전』(1999)을 펼쳐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샘 : ? ① 물이 땅에서 솟아 나오는 곳. 또는 그 물.
② =샘터.
③ 힘이나 기운이 솟아나게 하는 원천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단일어 ‘샘’보다는 주로 ‘샘터, 샘물, 옹달샘’과 같이 복합어로 많이 쓰이고 있는데
위의 ‘샘’의 뜻풀이는 ‘샘’이 가지는 물리적 의미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전라 방언의 ‘시암’을 쓴다면
이 ‘시암’의 의미는 필자가 생각해 본 바로는 물리적 의미를 포함화여
아래와 같은 다양한 정서적 의미를 갖는다.
시암 : ? 1. 집안이나 마을 어귀에 있는 물이 솟아 나오는 곳.
2. 쌀이나 채소를 씻거나 손빨래를 하기 위해 물을 긷는 곳.
3. 아낙네들이 모여 삶의 애환을 나누는 곳.
4. 겨울에 물 길러 갔다가 물이 얼어 넘어져서 다친 곳.
5. 여름철 더위에 등멱을 하던 곳.
6. 두레박으로 물을 떠서 먹는 곳.>
‘시암’에 얽힌 추억에 따라서 방언형인 ‘시암’의 문화적 의미, 정서적 의미는 아주 다양할 것이다.
방언은 이처럼 다양한 정서적 의미를 갖기 때문에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표준어보다는 방언형을 쓰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표준어 사전은 물론 방언사전을 편찬하면서도
이러한 정서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는 풍토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어려서부터 익숙해진 어휘를 사용하게 된다.
그러므로 방언의 문화적, 정서적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표준어를 강조하는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들은 표현에 한계를 느끼고 글쓰기와 말하기를 어렵게 생각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은 방언을 많이 사용한다.
독자들이나 비평가들은 작가들이 방언을 사용하면
작품에서 사실감을 느끼게 하고 현장을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학의 방언은 특별히 이해되는 것이고, 일반 사람들이 쓰는 방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혼불’을 쓴 작가 최명희는 ‘옴시레기’라는 부사를 쓰면서
도저히 다른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워서 ‘옴시레기’라고 썼다고 고백한다.
남원산성 그 거창헌 거이 입 안으로 옴시레기 들왔다고 허고이 <4권 20쪽>
옴시레기 도려내어 가시만 남은 가슴이 없었더라면 <15권 232쪽>
삼천리 고고샅샅 강토가 땅덩어리째 옴시레기 일본의 것이고 , <15권 262쪽>
ㅡ“‘옴시레기’라는 말도 있습니다. 네, 사전에 있나요? 전라도 사투리인데요,
‘옴시레기’ 얼마나 이뻐요. 이게 ‘모조리’라는 거하고는 좀 다르잖아요?
‘모조리’는 뭔가 ‘깡그리’이런 뜻이 있지만,
‘옴시레기’, ‘아유, 옴시레기 왔구나!’ ‘모두 다, 가득’ 이런 뜻인데 얼마나 정감이 있어요?
‘옴시래기’ 그럼 귀엽잖아요. 우리 늘 쓰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사전에는 없어요.
네 그래서 좀 우리의 그 넋이 담긴, 우리의 생활이 담긴, ]
우리의 그리움이나 꿈이나 혹은 그 삶에 대한 해석이 담긴,
이러한 낱말들이 좀 우리 국어사전에 ‘옴시레기’들어와 가지고
좀 이렇게 한 소쿠리 가득 옥돌같이 담긴다면
시대의 강물은 거세고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이 국어사전의 징검다리가 우리들이,
또 우리 후손들이, 또 대대로 어디론가 자기 걸음을 가는 그런 걸음이 물에 빠지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고
그렇게 제자리로 저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소중한 어떤 그 건널목이 되지 않을까.”
최명희의 말을 빌리긴 했지만 ,
우리나라 각 지역어가 갖는 정서적 의미의 중요성을 깊이 새겨볼 만한 대목이다.
ㅡ출처 : [기타] 국립국어연구원
2)자료2ㅡ 한겨레신문 <고장말> 칼럼(2009,9,14)
ㅡ"고스란히"를 뜻하는 전라도<옴시래기>가
소설가들 마다 조금씩 차이있게 표기되고 있습니다.
"묏동 속으가 옴시레기 도도레 찌고 앉아었는 꼴이 될랑까 어쩔랑가" ㅡ 최명희,<혼불>
"양어장 하나 옴시란히 떠날렷으면 되얏지 뭣이 또 그런디 요냐? " ㅡ 윤흥길,<완장>
"새끼내 옴시램히 불 질러쭐고 목포로 나온지가 벌써 십년도 더 되얐단마시" ㅡ문순태,<타오르는 강>
"하룻밤 새에 옴씨래미 숙청해버렸제잉" ㅡ 한승원,<안개바람>
호는 연곡 〓 자는 화지 〓 이원화 〓 장흥 부동방 사람 〓 광주 이씨 〓 이정수의 아들 〓 목사 성지 이원성의 동생 〓 형제가 문과 급제자 〓 황주 목사로 퇴직 〓 대 문장가.
注)장흥읍지(丁卯誌,1747) P 93 府東坊 인물 本朝 文科란에 이런 기사가 있다.
李精秀 生員 贈兵曹參議
이정수 생원, 증 병조참의
李元成 廣州人 精秀子 官牧使
이원성, 광주인, 정수의 아들, 벼슬은 목사.
李元和 元成弟 官舍人
이원화, 원성의 동생, 벼슬은 사인.
李元昌 精秀子 進士
이원창, 정수의 아들, 진사.
다른 해 발간 된 장흥 향토사지도 똑같다.
[출전 - 박상의 訥齋先生集]
李牧使成之甫挽詞
목사 이 성지 씨를 애도하는 글
易良眞長者 선량하고 참 점잖은 사람
人世泛虛舟 인간 세에 빈 배 띄워
三作周常正 세 차례 검열 벼슬 지내고
連爲漢牧州 이어서 목사 되었네.
靑氈猶自守 청렴 더욱 스스로 지켜
負郭不謀優 성 아래 옥토 좋게 지으려 않아
草草牛車葬 급급하게 소마차로 장송하니
淸風凜九秋 맑은 바람 깊은 가을에 차구나.
甲子當而立 나이 서른에 진사시에
初登丙午科 처음 병오년에 급제했어.
素餐期伐輻 벼슬길 보람 있게 하자 다짐했지.
丹?仰卷阿 일편단심 우러러 좋은 정치 권면했네.
栢府飛騰晩 사헌부는 승진 늦고
薇垣獻納多 사간원은 공헌 많았다오.
百年無限恨 인생 끝없는 한 지니고
牢落忽蓬? 갑자기 쓸쓸하게 무덤에 묻히네.
注)初登丙午科 - 왕/년도 : 성종(成宗) 17년, 과거시험연도 : 1486 병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33명, 등위 : 병과12(丙科12)
鐵硯輸螢雪 쇠 벼루에 형설의 공 쌓았고
詩書幾?咀 시서는 몇 번이나 잘근잘근 씹었나.
桂林俄掉? 과장에서 여유 있게 급제하여
芸閣遂飄? 마침내 교서관에서 옷자락 펄럭였어.
監察朝天子 감찰로 천자 조회하고
拾遺奉乘輿 습유로 임금 모실 줄 알았더니
孰知終齟齬 누가 끝내 어긋날 줄 알았으리.
官位竟屯如 마침내 벼슬살이 어려울 줄이야.
前春伽智寺 지난 봄 가지사에서
解后眼回靑 해후할 때 반갑게 맞았지.
連理看常? 연리지 형제 우정 보며
飛鳴對脊? 날고 우는 할미새 마주해
共傾安範酒 함께 안범의 술 마시다
同聽上方鈴 모두 산사 풍경소리 들었어.
不謂都門外 모든 문밖 일은 말하지 마오.
西風哭縞輧 서풍에 상여잡고 곡할 줄이야.
(當年正月李牧同弟正郞君至伽智寺安範亦携酒來故詩中?之)
이 해 정월 이 목사가 동생 정랑군과 가지사에 왔고 안범도 술을 차고 왔다. 그러므로 시에서 언급했다.)
*번역자 注)안범은 장흥도호부 부내방 출신으로 竹山人이며 南行으로 현감을 지냈다. - 장흥읍지(정묘지,1747) 참고.
注)連理 -連理枝, 두 나무의 가지가 붙어 하나가 된 것.
脊? - 할미새로 형제간의 우애를 말할 때 쓰는 표현인데 여기서는 형제를 뜻한다. 《시경》 소아(小雅) 상체(常?)에 “물새가 언덕에 있음에 형제가 위급함을 구원하는도다.〔脊令在原 兄弟急難〕” 하였다.
昔殿陽城考 지난날 光州를 鎭守하러 올 적에는
?蕪彭澤園 도연명 전원 거칠어짐 서글퍼했어.
何年還舊隱 어느 해 옛 은거지로 돌아갈까.
再命荷新恩 재차 명으로 새 은혜 입고 있으니.
康健如平日 강건하기 평소와 같았고
朝參望禁? 조회 참석해 통행금지 지켜봤어.
一朝?二竪 하루아침 병마에 얽혀
長臥寂無言 고요히 계속 누워 말없구나.
歸葬冠山麓 관산 산기슭에 귀장하니
遙遙海極南 머 언 바닷가 남쪽 끝이라.
?喪看令弟 치상은 아우가 맡아보니
寧?有賢男 상 입고 슬퍼하는 어진아들 있구나.
秋月當重八 가을 달은 8월 8일 맞아
郵亭屬十三 갈 길 역참 객사 열 셋이라.
浮休元袞袞 생사는 원래 큰 물 흐르듯 해
天地幾彭聃 천지간에 팽조 노담 몇이나 될까.
鍾樓初罷漏 종루에 처음 북 두드리니
?馭出西門 상여는 서문을 벗어나네.
祖奠賓車集 발인할 때 빈객의 수레 모이자
哀歌?曲喧 구슬피 부는 해로곡 울리구나.
永辭江北國 강북의 고장 영원히 사직하고
遙向海南村 멀리 바닷가 남쪽 마을로 가네.
脈脈休人事 말없이 인간의 일 그만두니
榮枯不復論 영고성쇠야 더 말할 나위 있는가.
烏兒萬里客 까마귀 만 리 나그네
以淚送鄕關 눈물로 고향으로 전송해.
?遞重原道 아득히 거듭되는 들판 길
凄凉振鷺班 단아한 문상객 처량하다.
雁行秋斷絶 기러기 행렬 가을에 끊기고
鸞影鏡?殘 지아비 잃은 아내 괴로워하네.
聖凡同黃土 성인 범인 똑같이 흙으로 가는데
征西不足觀 정서장군은 볼만할 것 없어.
蘊藉由天性 본래 천성 온화하고 여유 있어
風流實可人 참으로 풍류객이었지.
三珠寧後거 차라리 삼형제 큰 공 세운 뒤에
一桂最先詵 대과급제 賢良對策 천하제일이었어.
外帶靑?質 겉은 푸른 옥 자질 나타나고
中含白璧醇 안은 백옥의 순후함 지니고 있네.
可憐無善相 가련타! 관상 잘 보는 이 없어
終不騁騏? 끝내 기린 같은 자질 드러내지 못해.
注)거 - 부지런할 거, 큰 공을 세움.
蒿里千人競 묏둥은 천인이 다투지마는
聞君返故都 그대 고향 가는 소식 들었어.
?來關塞? 변경도 오가는 길 멀어
飄蕩客魂孤 떠도는 객 영혼 외롭겠지.
書劒催收匣 재촉해 책과 검 상자에 넣고
田園摠付? 전원은 다 처자에 주었네.
永抛湖海酒 영원히 세상 술 포기하며
愁入菊花枯 시름에 들자 국화꽃은 시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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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제 장흥읍지에 조선문과란의 기사까지 올리셨군요. 좋은자료 잘보았습니다. 지금은 광주이씨들이 장흥에는 몇집이없으시고 거의 보성에 많이 집성촌을 이루고 계신것으로 압니다만,그 시절엔 우리장흥에서 대단히 성하셨던가 봅니다. 09.09.14. 17:10 뚜르와르 조선 5백년 동안 198명의 대과 급제자를 냈구요, 장흥에서도 여러분이 나왔습니다. 제가 확인한 분만 일곱이니 이 고을에서는 최고 같습니다. 장흥에 선산이 수곳 있답니다. 09.09.14. 19:12
번역자 注)“장흥 위씨 대동보 지장록”에서 옮김.(P95,96)
魏由亨(위유형)
고려합문지후 ?의 현손이다.
당시에 조정에서는 각 가문의 자손들의 禁錮錄을 해제하였는데 공만이 홀로 벼슬길에 나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山亭을 지어 주위에 삥 둘러 竹栢을 심어 놓고 거기서 기거하면서 자신의 정신을 수양하니 南秋江이 南遊時에 심히 공경하고 정중히 여겼으며 申靈川이 오래도록 본부에 귀양 와서 있을 때 詩酒로서 수작하여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공이 계제인 유정더러 이르기를 우리 가문이 천년동안 내려오는 사족으로서 가히 이 때문에 매몰될 수는 없으니 자네는 과거에 응시하여 명예를 이루기를 계획해야 하며 나는 지후공의 봉사손으로 결코 참아 못한다고 하였다.
일찍 承文院 習讀官으로 선발되었으나 마침내 취임하지 아니하였다.
註)禁錮錄 : 벼슬길을 막아 등용하지 아니하는 각 씨족의 자손들의 이름을 기록해 둔 장부.
[출전 - 신잠의 冠山錄]
淵谷以書遺楮生與蟹胥而蟹胥不至余於是作詩一篇以寄一以爲謝一以更索兼冀和示
연곡 선생이 편지로 종이와 게젓을 보냈다고 했는데 게젓이 나에게 도착하지 않아 이때에 시 한편을 지어 부치면서 한편으로는 사례하고 한편으로는 다시 찾을 겸 해서 화답 주기를 바라다.
江南上游有礪良 강남 위에 노니는 여량 있으니
非海非山于康藏 강장은 바다 산도 아니야.
貢毛雖未諸郡方 元貢毛物 여러 고을에 좋은 일 아니지만
會稽二淅聊可當 회계의 절동 절서 그런대로 가당하네.
主人念我最非常 주인은 날 보통으로 생각하지 않아
爲致土物驚遐鄕 놀랍게도 먼 고향 토산물 보내왔어.
余初見書喜欲狂 내가 처음 편지 보면서 기뻐 미칠 것 같아
催呼赤脚?入堂 급하게 소리치며 맨발로 자주 방에 들어갔네.
但見楮生?然長 종이만 보면 헌걸차게 길지만
不覩郭索來登床 게가 와서 상에 오른 것은 보지 못했어.
我恐笭?道遺忘 난 고기 담는 그릇 잃었다고 말할까 두려워
出入更僕問諸詳 드나들며 많은 얘기 모두 상세히 물었네.
竟將垂?視行裝 마침내 전대 차려는 행장 보며
坐使妻子顔無光 앉아 처자 얼굴빛 없게 하네.
可怜知白喜文章 가련하구나! 楮知白의 기쁜 문장
獨尋三友來文房 혼자 와서 문방삼우 찾았네.
顧我年來志荒亡 몇 년 돌아보니 뜻 사냥과 주색에 빠져
旣?於口徒遑遑 이미 허기진 입 한갓 허둥 지둥이라.
汚池小渠亦彷徨 작은 못 작은 도랑에서도 방황하며
終日把竿心茫茫 종일 낚싯대 잡으니 마음 아득하구나.
況此??無他腸 더구나 이 꽃게는 딴 창자 없다오.
?中唯有堆雌黃 흉금에 오직 자구 첨삭 쌓여 있네.
漬鹽沃酒雜椒薑 산초 생강 섞어 소금 적셔 술 붇자
又???經冬藏 황송하게도 쥐엄나무는 겨울 갈무리를 지나네.
華堂薦進一盤香 화당에서 천거해 올리는 한 쟁반 향기
座客??皆軒張 모든 장 경부 좌객들 혀가 마르도록 칭찬하네.
余始聞之自洸洋 나는 이제 따로 광대하고 심원한 학설 들으며
不覺垂涎於口傍 입 주위에 침 흘리는 것 알지 못했네.
太守好事固無量 태수의 좋은 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어
更煩一力投潛郞 다시 번거로이 한번 일하다 잠랑 던졌구려.
形模雖入一笑場 그 모습 한바탕 웃음거리 되더라도
風味可能極口嘗 풍미는 입이 닳도록 말할 만 하리.
我非宋戒侈荒束 난 宋丈이 타이르지 않아 거칠게 단속해
縛千百庸何傷君 천백을 묶더라도 어찌 그대를 상심시키랴.
不見畢生左手持 필탁이 왼손에 게 다리 잡는 것 보지 못했으나
靑匡右手執酒觴 푸른 눈은 오른손에 술잔 잡았구나.
浮泊酒池一生空?佯 술 못에 떠 한생 쓸쓸히 배회하리.
注)江南上游有礪良 - 礪良은 전라북도 여산의 옛 지명.
이때 欽之 宋欽이 여산 군수를 제수 받았다.
會稽二淅聊可當 - 진(晋) 나라 사안이 소시부터 명성이 있었는데 회계(會稽)의 동산(東山)에 은거하여 나오지 않다가 뒤에 나와서 이름난 재상이 되었다.
郭索 - 게의 별칭으로 ‘발이 많다〔多足〕’는 뜻으로 붙여진 별칭이다.
笭? - 물고기를 담는 대바구니인 종다래끼인데 어구(漁具)의 총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당(唐)나라 육귀몽(陸龜蒙)의 어구(漁具)라는 시 서문에 “싣는 배를 거룻배〔??〕라 하고 담는 바구니를 영성이라 한다.” 하였다.
更僕 - 피곤하면 사람을 바꾸어 가며 말하는 것으로 얘기가 매우 길다는 뜻이다. 애공(哀公)이 유행(儒行)에 대해 묻자 공자(孔子)가 대답하기를 “갑작스레 헤아려 말해서는 다 얘기할 수 없고 자세히 다 얘기하려면 오래 머물러야 하니 피곤하여 보좌하는 사람을 번갈아 세우더라도 다 말할 수 없습니다.〔遽數之 不能終其物 悉數之乃留 更僕未可終也〕” 한 데서 온 말이다. 《禮記 儒行》
荒亡 - 사냥과 주색(酒色)에 빠짐을 이른다. 맹자가 말하기를, “짐승을 쫓아 만족함이 없음을 황(荒)이라 하고, 술을 즐겨 만족함이 없음을 망(亡)이라 한다.〔從獸無厭 謂之荒 樂酒無厭 謂之亡〕”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華堂 - 관원의 역소(役所)를 가리킨다.
軒張 - 주희(朱熹)의 절친한 벗으로 주희, 여조겸(呂祖謙)과 함께 동남(東南)의 삼현(三賢)으로 일컬어진 장식(張?)을 가리킨다. 학자들이 그를 존경하여 남헌 선생이라고 불렀다. 자는 경부(敬夫)이다.
潛郞 - 재능이 있으면서도 불우하게 오랫동안 낮은 관직에 묻혀 있는 것을 말한다. 한(漢) 나라 안사(顔駟)가 문제(文帝) 때 낭(朗)이 되어 경제(景帝)를 거쳐 무제(武帝) 때까지 승진하지 못하고 낭서(郞署)에서 늙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畢生左手持 - 술을 끔찍이도 좋아하면서 예속(禮俗)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을 가리키는 말이다. 진(晉) 나라의 이부랑(吏部郞) 필탁(畢卓)을 가리킨다. 남의 집 술을 밤에 훔쳐 먹다가 붙잡힐 정도로 술을 좋아하였는데 “오른손에 술잔 왼손에 게 다리를 잡고서 술 못 속에서 퍼 마시다 죽으면 충분하다.[右手持酒? 左手持蟹? 拍浮酒池中 便足了一生]”고 한 그의 말이 전한다. 《晉書 畢卓傳》
*위 사실에서 보듯이 자실 위유형 선생은 승문원 습독 벼슬을 하사 받았지만 관직에 출사한 적이 없으나 영천자 신잠의 문집에 등장하는 연곡은 말직의 벼슬을 내던지고 있다.
이백 두보에 버금가는 대문장가 라는 사실도 여러 시에서 나타난다.
이상에서 고찰한 대로 위유형 선생이 연곡이라는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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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명제 이렇게 어려운 자료들을 전부 찾아서 번역해 올려주시고 증빙들을 제시해 주심으로해서 저희같이 단문한 사람들도 쉽게 볼수있도록 애써주신 뜨르와르님 감사 드립니다. 사실 그동안 우리지역에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남이 번역해놓은 자료들을 가지고 지역의 향토사를 왜곡하고 선비연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지요.확실하게 알게되는것 같아서 수고해주신 뜨르와르님께 감사드립니다. 09.09.13. 20:26 뚜르와르 천만에요. 장흥 정맥을 탐구해 똑고른 논지를 펴고 싶을 따름입니다. 09.09.13. 20:54
ㅡ대덕 <옹암>,<매생이> 그리고 <잘피 숲>
ㅡ예양강(2009,9,11)
1,대덕 옹암
정말 장흥군 장흥반도의 끝 동네이다.
이청준 선생님이 당신의 고향, 진목리를 두고 <우렁이 막창자 끄트머리>라고 표현하셨지만
<대덕 옹암 마을>이아말로 "이청준 선생의 진목리"나 "김영남 시인의 분토리"보다
더 심한 진짜 끝자락이었다.
도로 포장이 안되었을 때 처음 그 곳에 가보았는데 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다.
우연히 탔던 택시 기사가 장흥 옹암리 출신이어서,
참 멀리서 올라와 출세하셨다고 인사하고 서로 웃은 일도 있다.
<장흥군 향토지리지,1975>에는 "낭주 최씨"가, <마을유래지,1986>에는 "한양 조씨"가
600년전 무렵에 설촌했다고 되어있는데, 그 정확한 사정이 궁금하다.
어쨌거나 <장흥읍지,정묘지,1747>의 '대흥방 편'에 <옹암> 마을 이름이 나타나며,
"저포(猪浦)" 마을에는 "박씨"를 기재해놓고 있다.
<장흥 마을유래지,1986>는 "한때 대덕에서 김 생산량 1위가 옹암이었다,
문어도 특산물이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혹 <매생이> 아닐까?
2,매생이
그 부르는 명칭이 사람들 마다 "매생이 매산이 메셍이..."로 엇갈리는데,
<신증동국승지여람>에는, "장흥의 토산물"로 한자말<대죽머리 붙은 매+산=매산産>으로 나타난다.
"김"은 한자말,<해의 海衣>로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렸을 때 "해우"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의 전남 진상품, 김정호,1992>에는 전남의 토산 해산물로
"미역,가사리,감태.김" 까지만 정리하고 있을 뿐 <장흥 매산이>가 빠져있다.
그 책은 <매산,매생>이를 아예 말하지않고 있다.
아마 그 저자가 진도 출신인지라 <매산><장흥 매산이>를 처음부터 몰랐을지도 모른다.
(한편, "파래"는 그 당시도 제 몫을 못찾아 '지역 토산품' 취급을 못받은 것 같다,
"파래"도 꽤나 맛 있는데 ^^ ^^)
한편 <매생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이는 "장흥 관산 출신, 소설가 이승우"이다
아마 <샘섬>이란 작품으로 기억하는데, (그 후로도 매생이가 나오는 몇 작품 더 있다)
그는 <매생이>를 앞장 세워 그의 어린 시절과 그 고향마을 관산 신동을 다시 찾았다.
그 보다는 물론 훨씬 전이지만, 서울 생활을 시작하면서
물정모르고, 서울 시장바닥에서 <매생이>를 찾아 헤매었던 일이 기억에 새롭다.
그때는 장흥`강진`완도 사람들이나 겨우 <매생이>를 알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서울 사람들에게는 "반지락"도 "꼬막"도 모두 "그냥 조개"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앞서의 모든 사정을 종합해보면,
<장흥 매생이>야말로 "매생이의 원조, 매생이의 정통"이라 할 것인데
자꾸만 강진`완도쪽 짝퉁(?) 매생이들한테 더 밀리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래도 여러분들과는 통하리라.
여러분들은 알고있으리라.
장흥에서 어머니가 직접 사들고 가져온 매생이가 제일 진하고 가장 고소하다는 것을!!
3,대덕 앞바다, 옹암 청등포 잘피 숲 ㅡ(중앙일보,2009,9,10)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장흥읍쪽에서 성장하다보니. 바다쪽 사정은 잘 몰랐는데,
바다에 <잘피 숲>이 무성해지면,
해산물 어패류가 잘 자라고, 바다가 한결 깨끗해지고, 바다 낚시도 잘 된다는군요
어제, 중앙일보에 "장흥군 대덕 옹암리 청등포 잘피 숲"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늘 <대덕 옹암>과 <고향 매생이>를 생각해보게 된 것은
대덕 옹암마을이 표시된 지도와 함께
어촌계장 박종태씨가 활짝 웃고있는 사진이 나온,
바로 이 <옹암 잘피숲 기사>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중앙일보 2009,9,10- "바다의 밀림, 잘피 숲 되살아난다"
오염으로 줄어들던 물풀 군락지 장흥 청등포선 10㎢ 넘게 늘어
전남 장흥군 옹암마을 어민 박종태씨가 청등포 갯벌에서 뽑은 잘피를 들어 보이고 있다. 하루에 4~5㎝씩 자라는 잘피는 물의 깊이에 따라 어른 키 이상으로 크기도 한다. [프리랜서 오종찬]
2일 오후 3시쯤 전남 장흥군 대덕읍 옹암마을 앞 청등포.
썰물로 드러난 갯벌을 지나 먼발치로 보이는 바다가 검다.
어촌계장 박종태(66)씨는 “저게 전부 잘피 밭”이라고 말했다.
배를 타고 3분가량 가자 사방이 온통 물풀 들판이다.
벼처럼 긴 이파리들이 절반쯤은 수심이 낮아진 물 위에 누워 있다.
배 엔진 소리에 놀란 물고기가 여기저기에서 물 밖으로 튀어 오른다.
“잘피 숲 속에서 봄에는 어미들이 산란하고 새끼 고기가 숨어서 자라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물고기는 깊은 바다로 나갑니다.
장흥 앞바다에 전국의 바다 낚시꾼이 몰리는 이유입니다.”
박씨가 하루 전 설치한 통발들을 건져 올렸다.
잘피가 있는 곳에 설치된 통발에서는 참돔·농어·망둥어·바닷장어·돌게·소라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전어·우럭·문어·낙지·꼬막·바지락도 많이 나는 황금어장”이라며 “잘피 숲 덕분”이라고 말했다.
국립수산과학원 남해수산연구소의 김정배 박사는
“잘피 숲은 물 흐름이 약하고 플랑크톤 등 먹이 생물이 많아
어패류의 산란장과 새끼 고기의 은신처·성육장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청등포에는 과거엔 ‘바다의 열대 우림’ 잘피가 많았으나 수질 오염으로 감소했다.
그러다 몇 년 사이 다시 늘어 군락의 면적이 10㎢가 넘는다.
수위가 낮을 때는 스크루를 감아버려 배가 오도가도 못할 만큼 무성한 곳도 적지 않다.
잘피는 하루 2~3㎝씩 자라 2m 이상 되고, 번식 또한 왕성하다.
해조류로서는 드물게 펄에 내린 뿌리로 영양분을 흡수한다.
겨울철의 미역·김처럼 계절적으로 번성했다 사라지는 일반 해조류와는 달리 연중 바다 속에 숲을 이룬다.
이명흠 장흥군수는 “잘피 서식지가 늘어난 것은 바다가 살아나고 있다는 증거”라며
“해양 생태 관광과 체험 자원으로 활용하겠다”고 말했다.
잘피는 1970년대까지는 수심 약 5m 이하의 연안에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하지만 수질 오염과 어패류 양식, 간척, 바다 밑을 긁는 마구잡이 어업으로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전남 완도군 고금도·소안도, 광양만에서 대규모 군락지가 확인됐다.
거제시와 울산은 다대포 갯벌·태화강 하구에 모내기 하듯 일일이 이식해 잘피 인공 복원에 나섰다.
제주시는 지난해 3월 구좌읍 하도리 하수종말처리장 주변 바다 5000㎡에 잠수부를 동원해 잘피를 이식했다.
잘피는 93년 세계적으로 보호받아야 할 다년생 해초로 선정됐고,
2007년에는 정부가 지정한 보호대상 해양 생물 46종 가운데 하나가 됐다.
장흥=이해석 기자 ,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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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란 역시 장흥의 청정지역이 확실합니다. 이처럼 좋은 조건을 가지고도 홍보나 준비가 미흡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바다낚시와 더불어 김 채취와 메생이 채취를 직접 경험 할 수 있는 프로그램과 자리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09.09.14. 09:29 예양강 ㅡ신무기사를 떠오다보니 거기에 달린 사진은 날아가버렷군요..^^ ^^ 이 정도의 자료소개라면 "공정한 인용"으로 저작권 면책사유에 해당되어야하는데요...
<예양강의 역사와 문화>, ㅡ2009,7,29 물축제 발표문에서
3) 예양강 봉명정 鳳鳴亭의 재발견
- 동정(東亭)·단정(短亭)·오리정(五里亭)-관(官)정
- 근거자료 -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봉명정중수기(1555?), 동국여지지(1656),
장흥읍지·정묘지(1747), 대동지지(1861~1866)
- 창정 - 조선초, 변포 부사
ㅡ"변포 부사가 언제 장흥부사로 재직했는지",그 구체적 시점을 찾을 수는 없었지만
그가 세조10년(1464)에 '전라도 경차관'직을 수행했던 점에서
그 시기를 간접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 중수 - 장응량 부사(1553.9.부임) + 한온 부사(?)
-한온 부사는 을묘왜변(1555) 때에 전사했다.
- '취곡 조여흠'의 '봉명정 중수기,1555(?).
-그 정확한 중수시점이 '장부사'인지 '한부사'인지 모호하다.
ㅡ위의환 선생의 번역문이 있다.
- 훼손 - 1579(만력·기묘) 수해, 정묘지(1747)-‘재예양강동안 금폐’
cf. 초계 변씨 장흥 이거 - 변포 부사의 손자 변온(1474~1554)
-임진란 때 초계 변씨 13형제 순사충훈
- 명칭 - 왜 '봉명정'인가?,
"봉황은 ‘오동나무'에 깃들어 '죽실'을 먹고, '동화동(동화산)'에 산다"
“서쪽에 '기산(岐山)'을 두고, 동쪽 방향에 봉명조양(鳳鳴朝陽)이 있게된다”
- 위치 - ‘재부성 동문외, 예강동안, 동문외 예양강안,
(장흥성 동문東門은 예전 '장흥극장앞 언덕'에 있었다합니다).
-유정고치 예강지곡(有亭高峙 汭江之曲)’ … 동화동 바깥
cf. '관산록'에 나타난, 영천 신잠의 거주지?
- ‘동화동 동화모옥’, ‘죽림(竹林)’이 있는 곳, ‘성 북쪽의 예양강가’,
‘며느리 바위가 바라다보이는 곳 (...我居相對)’
- 구별 - 봉명정 (동문외 예강동안), 봉명대 (남산서록 남문밖), 봉명재 (안양 기산)
- 활동 내역
· 그 시경 장흥 선비들이라면 한번쯤 ‘봉명정’을 노래했다. - 이른바 ‘봉명정 문학’?
· 중국의 ‘악양루·황학정·등왕각’에 빗댈 정도로 장흥 ‘예양강·봉명정’ 풍광에
장흥선비들은 크나큰 자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자료별첨>
- <봉명정>, 신잠·백광홍·백광훈·정경달·조여흠`임홍의`이민기…
- <동정>, 남효온
.................................................................................
13. <별첨자료> - 봉명정(동정) 한시
· 남효온 (1454~1492)
汭陽江東亭, 留別慶會 -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에게 이별시를 드림.
冠山雖麗非吾土, 別來五年紅顔蒼
相逢數日又相別, 淸淚浪浪落離觴
汭陽江水琉璃碧, 化落春光歸半强
聖朝一才無棄擲, 如君詞藻孰能忘
雷陽春竹南人思, 寇公應入中書堂
寄語努力加식飯, 鶴書赴?今當忙
春天祖席東亭上, 竹馬情懷太堪傷
관산 수려해도 내 고향 아니거니
이별한지 다섯 해에 홍안은 늙었구려.
만난지 며칠만에 또 헤어지자 하니
맑은 눈물 샘솟아 이별 잔에 떨어지오.
예양강물 푸르기 유리구슬 같은데
꽃 지자 봄빛도 마지못해 돌아가네.
성군께선 한 인재도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 같은 글재주를 그 누가 잊으리오.
뇌양의 봄 되보면 그대 생각 날것이니
구공도 마땅히 중서당에 들었었소.
부탁노니 애써서 밥 거르지 마시오.
조정 소환 집에 올 날 이제는 바쁠게요.
봄날에 송별 자리 동정을 펼쳐주니
옛 친구 정회로 이 슬픔 견딘다오. (역, 김성언)
· 신잠 (1491~1554)
鳳鳴亭 -在府之東門外
伊昔何時有鳳鳴 저 옛날 언젠가 봉황이 울었었지.
亭今獨在만稱名 정자만 홀로 남아 그 이름 무성하네.
依依山影自朝暮 산 그림자 온 종일 의의롭게 늘어지고
袞袞行人相送迎 사람들은 곤곤하게 맞이하고 지나보낸다.
獨對斜陽共寂寞 석양에 홀로 마주서니 온 세상 적막한데,
幾經世變空?嶸 뒤집혀지는 세상사에 변함없이 우뚝 서있네.
我來最晩更流落 지금 여기 이제와 시작하는 타향살이
훼훼不聞雙淚傾 봉황 울음 듣지 못해 두 눈물 흐르네. (역, 박형상)
· 백광홍(1522~1556)
又呈七律 (다시 칠언율시를 올리다.-영천선생에게 바치는 시)
南中何處最淸凉 남녘 땅 어느 곳이 가장 맑고 시원한가
鳴鳳高亭檀一鄕 명봉정(鳴鳳亭) 높은 정자 한 고을에 으뜸일세.
楹立汭江魚鱉背 정자 기둥 예양강의 고기등에 솟아있고
?連獅嶽桂衫香 사자산에 잇닿아 계수나무 향기롭다.
嵐粧石色前峯白 이내가 돌빛 꾸며 앞 뫼는 희디 흰데
鷺拂楊化遠浦蒼 백로는 양화(楊化)털고 먼 포구는 아득하다.
爲送靈川還北路 영천 상공 북녘으로 가는 길을 전송하매
王孫原草斷離腸 들판에 왕손초는 이별 애 끊나니. (역, 정민)
· 백광훈(1537~1582)
鳳鳴亭下次韻 (봉명정 아래서 차운하다.)
長橋日映水如天 긴 다리에 해 비치고 물도 하늘빛인데,
鶯전孤城柳不煙 꾀꼬리 우는 외로운 성에 버들가지 휘날린다.
最是江南好風景 이게 바로 강남에서 가장 좋은 풍경일레라.
釣磯深處倚竿眠 낚시터 깊숙한 곳에서 낚시대에 기대존다. (역, 이하상)
· 정경달(1542~1602)
鳳鳴亭
山濕今朝雨 산은 축축한데 오늘 아침 비가 내리니
溪含昨夜雲 계곡은 어젯밤 구름을 머금었지.
西林僧有路 서림사 스님 길이 있어
芝蕨自芸芸 지초와 고사리로 저절로 많다네. (기산문집, 김규정)
鳳鳴亭
綠楊江水野烟生 푸른 버들 강물은 들에 연기를 일으키고
舞蝶飛花滿鳳鳴 춤추는 나비 달리는 꽃은 봉명정에 가득하네.
人去酒醒春菽菽 사람은 가고 술은 깨었으나 봄은 조용하고 쓸쓸해.
一聲鳴鳥下西城 한 마디 새 울음 소리 서쪽 성에 내려 오네.
小學書中悟昨非 소학책 가운데 어제의 잘못을 깨우쳤다 했으니
寒暄有語得依歸 한훤당(김굉필) 말씀 얻어 돌아와 의지하리.
優游涵泳無窮樂 조용히 학문의 깊은 뜻을 완미하는 끝없는 즐거움
顔孟何人亦庶幾 안회와 맹자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되려하는가? (기산문집, 김규정)
· 조여흠(1549~1579)
題鳳鳴亭
鳳鳴亭上又淸秋 봉명정 위엔 높고 푸른 가을하늘
地戴明公淑氣浮 대지 위에 우뚝 서 맑은 기운 넘쳐나네.
?雨白鷗汭浦曲 성긴 비속에 백구는 예양굽이 넘나들고
落霞孤?壯元頭 지는 가을놀 장원봉엔 홀로 해오라기
仁風蕩蕩草從偃 인산의 탕탕한 바람에 풀들은 드러 눞고,
恩澤汪汪水共流 은택은 깊고 넓어 물처럼 함께 흐른다.
夜靜餘閒看物象 고요한 밤 여유롭게 제 모습들 보여주니
世間別境更何求 이 세상 별경을 어디가 찾겠는가? (역, 박형상)
- 重修鳳鳴亭序 (조여흠)
(그 전문을 위의환 선생이 이미 번역하였으나 사정상 소개를 생략합니다)
“....鳳鳴亭, 재장흥부 동문외, 예양강상, 개(蓋)국초 부사변포건야 …
… 유정고치 예강지곡 (有亭高峙 汭江之曲)….....”
· 임홍의
鳳鳴亭
亭上靑山亭下流 정자 위 푸른 산 정자 아래 흐르는 물
長堤十里暮烟脩 긴 뚝방 십리길에 저녁연기 멀다.
滿目風光吟不盡 눈 가득한 풍광 다 읊을 수 없어
洞賓誰識岳陽樓 동빈 도사라도 어찌 악양루를 기억할까.
(기산문집의 '(기산)동네손님'을 '동빈도사'으로 바꿔 이해함)
· 이민기 (1646~1704)
鳳鳴亭用黃鶴樓韻
三盃取醉誰家酒 석잔에 취해보면 뉘집 술인들 어떠랴.
百尺登臨郡郭樓 백척 성곽루에 올라 온 고을 내려다 본다.
行路古今人去去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제 갈길 오고가고
源泉晝夜水悠悠 샘물은 쉼 없고 강물은 유유히 흘러만 가네.
亭空樹老殘橋外 잔교 옆 텅빈 정자에 세월을 머금은 나무
鳥宿烟沈芳草洲 새들 잠들고 안개 자욱하고 꽃들은 피어난다.
千載鳳鳴名獨在 천년전 봉황이 울었거니 그 이름 남아있는데
丈夫無事任閒愁 장부 할 일 없음에 깊은 근심에 빠져드네. (역, 박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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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녕 예나 지금이나 자연속에서 인생을 배우고 자연에 비추어 자신에게 닥친 하루의 삶을 정돈해보곤 하는 모습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늘은 초등학교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부르고 서로 부대끼며 우정을 나누었는데...이곳에 들러 선인들의 하루를 들여다보게 되니....과학문명에 기대어 편해진 부분을 빼면 우리네 삶이 선조들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습니다...그래서 참 좋습니다...감사합니다...^^ ^^ 09.09.09. 23:36 봉명제 박변님의 좋은자료 감사드립니다. 마침 장흥읍의 곡자조합 자리에 산림과에서 도시숲 가꾸기 사업을 하면서 멋드러진숲과 정자를 짓었는데요, 정자 옥호논의가 건산리 마을에서 있었다고 하기에 제가 가지고 있는자료와 박변호사님의 좋은 자료를 인쇄해서 건산마을 유지어른께 드렸습니다. 군청에서 참고 하실것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09.12.09. 16:31 예양강 ㅡ 저쪽 <기산마을> 글과 <백광철 블로그>글 잘 보았습니다.
ㅡ여기에서 주고받은 의견들이 보탬이 되어 결국에는 고향 장흥 땅에 좋은 결실로 맺어진 것에 감사드립니다.
더구나, 이제부터 시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이미 완공이 된 봉명정을 보게되니 감개무량입니다.
ㅡ자칫 부동정으로 자칙 기울어질 뻔한 일을 봉명정으로 잡아준 것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ㅡ이쪽 코너를 그간 닫아둔 것은 <의견자체는 공개하여 비판검증을 받아보되 더 계속 보충해야할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차 <봉명정> 책자를 만들어 볼 계획이었습니다. 이제는 우선 열어두고 저쪽으로도 옮겨놓겟습니다. 10.01.07. 22:20
鳳鳴亭 在府之東門外
봉명정 장흥부 동문 밖에 있다.
伊昔何時有鳳鳴 옛날 어느 때 봉황이 울었나.
亭今獨在?稱名 오늘 정자에 홀로 있어 이름 부르기 아득해.
依依山影自朝暮 산 그림자 절로 아침 저물녘 무성하니
滾滾行人相送迎 길손 서로 맞고 보내며 물은 세차게 흐르네.
獨對斜陽共寂寞 혼자 석양 맞으니 함께 적막해져
幾經世變空?嶸 세태변화 얼마인가, 쓸쓸히 세월만 쌓이네.
我來最晩更流落 난 가장 늦었는데 다시 떠돌이 신세
??不聞雙淚傾 말방울소리 들리지 않자 눈에 눈물만 흘러.
注)高靈世稿續編 靈川先生 冠山錄上 앞 쪽에 실려 있다.
婦巖詩 幷序
부암시. 서문을 아우른다.
長興治東有山曰億佛其上有石兀立而北向長丈餘正如人獨立而望遠者厥名婦巖也考諸輿地志但有其名而不著其事意或望夫石之類也余作短篇以寓其意云
장흥고을 동쪽에 산이 있으니 말하기를 억불이라 하는데 그 정상쯤에 바위가 북쪽을 향해 우뚝하게 서 있어 높이가 한 장쯤 되고 바로 사람이 홀로 서 있으면서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다.
그 이름을 부암이라 한다.
여러 여지지를 고찰해 보니 다만 그 이름만 있고 그 일이나 뜻이 드러난 것이 없으니 혹 망부석 종류 같다.
나는 짧은 시를 지어 그 뜻을 부친다.
昔聞望夫石 예전엔 망부석이라 들었으나
而今見婦巖 또 지금 부암을 보네.
問婦有何寃 지어미에게 묻노니 무슨 원한 있나.
萬古空?? 만고에 쓸쓸히 우뚝하네.
頑然自無語 완고하게 절로 말없으니
不是口三緘 입 세 번 봉하는 일 옳지 않아
風雨以櫛沐 비바람으로 씻고 빗질하며
苔蘇以爲衫 이끼로 적삼을 삼았구려.
可怜北望懷 북쪽 그리는 생각 가련해
默默徒自銜 말없이 스스로 입 닫았네.
莫惜無人知 아는 이 없어도 서글퍼 마소.
月星長照監 별 달은 오래 비추리.
注)口三緘 - 공자가 주(周) 나라 태묘(太廟)에 갔을 적에 입을 세 겹으로 봉한[三緘其口] 금인(金人)을 보았는데 그 등 뒤에 새긴 명문(銘文)을 보니 “옛날에 말조심을 하던 사람이다. 경계하여 많은 말을 하지 말지어다. 말이 많으면 실패가 또한 많나니.[古之愼言人也 戒之哉 無多言 多言多敗]”라고 씌어있더라는 고사가 전한다.
注)이상은 金圭錠님의 번역입니다. 지금까지 잘못 번역이 된 부분도 (연곡선생?)밝혀내신것 같군요 앞으로 자료가 확보되면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자료출처: 기산마을카페 문학코너)
ㅡ자료소개..........<죽산안씨(신)종친회> 싸이트에서 옮겨왔습니다.
그 작성자는 '카페지기 안병주' 님입니다.
그 해설글 분량이 상당하기에 장흥향토사 코너 성격을 고려하여
그 원문 취지를 손상하지않는 범위 내에 그 일부내용을 줄였습니다.
ㅡ예양강
죽산안씨 여경화 이야기(餘慶花說, 書竹山安氏宗案後)
ㅡ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지음
ㅡ19代孫(죽산24세) 안동교(安東敎) 옮김
대개 사람은 감정을 지니지만, 오직 사물은 사심이 없다.
감정을 지니면 사욕에 쉽게 막히고 사심이 없으면 그 천성을 온전히 나타낼 수 있으니,
바로 나무와 풀은 사심이 없는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가끔 기이한 나무와 풀이 하늘의 조화인 듯 신통함을 발하여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데,
나는 만수동(萬壽洞)에 있는 안씨 선조의 묘소에서 그런 특이한 꽃을 발견했다.
그 꽃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안씨의 시조 죽성군(竹城君)의 휘는 원형(元衡)이요,
그의 현손인 직장공(直長公)의 휘는 여주(汝舟)였는데,
관산(冠山)에 살던 좌랑(佐郞) 조수(曺璲)의 사위가 되었다가 세상을 떠나자,
금장(金藏)의 동쪽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묻혔으니 이곳이 곧 <만수동>이다.
직장공은 지금의 후손들에게 12대조가 되니, 번성한 자손들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다.
그들은 장흥, 보성(옛지명은 山陽), 강진(옛지명은 金陵)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
보성파는 또 한양에서 나뉘어 살고 있다.
매해 초겨울에 안씨는 종족들을 모아 만수동 묘소에서 세일제(歲一祭:또는 時享)를 지내왔다.
묘소의 섬돌에 옛부터 두견화(杜鵑花:진달래) 두어 떨기가 있었는데 제사드리는 날에 꽃을 피우기도 하였다. 꽃을 피우면 안씨문중에는 반드시 과거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고,
만약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반드시 승진하는 사람이 나오니 그 또한 신기롭고 괴이하다.
이 꽃을 보면 돌틈에 박힌 묵은 뿌리에서 나온 쇠잔한 몇 떨기가, 움이 틀 때 더부룩하지 않지만
살펴보면 말라죽지 않고 서리를 맞으면서도 꽃망울을 터뜨리니,
이것이 안씨에게 상서로운 경사를 나타내는 조짐이다.
직장공을 장사지낸 지 어언 300여년에 꽃이 피면 반드시 증험이 나타남이 부절(符節)을 맞춘 듯하다.
또 묘소를 산지기가 이미 가을에 벌초하고 풀베는 아낙네와 나무하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왕래하건만,
한 두 신령스런 꽃망울이 반드시 제사드리는 날에 이르러 안씨자손들의 눈에 이채로운 자태를 드러내니,
이것이 앞에서 말한 하늘의 조화인 듯 신통함을 발하여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사람들은 십세(十世)가 넘은 친족간이면, 상복을 입는 예도 두번이나 다했고,
사는 곳이 또 달라 좋은 일이나 슬픈 일에 서로 관여하지 않음이 또한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처럼 대할 뿐이다. 그러나 이 꽃은 애당초 한 부모의 몸에서 생겨나와 상서로운 징조와 증험을 나타내되
친소(親疎:친근함과 소원함)의 틈을 두지 않으니,
관산에서도 반드시 감응(感應)하고 보성과 한양에서도 반드시 감응하고
강진에서도 반드시 감응하여 10世를 하루처럼 여기고 많은 자손을 한몸처럼 여기니,
이 어찌 사물이 그 천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사물의 무심(無心)은 반드시 감정을 지닌 사람이 감동한 뒤 응하나니,
안씨 가운데 문무(文武)에 현달한 사람은
관산에 몇사람이요 보성과 한양에 몇사람이요 강진에 몇사람이다.
이 꽃이 필 때에는 비록 백리나 천리를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증험이 있으니
이것은 안씨가 소원하다고 해서 서로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미약한 후손이라 하더라도
또한 증험을 나타내는 것은 안씨가 강약으로 서로에게 해를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안씨의 화목과 우의가 사욕에 막히지 않고 그 천성을 온전히 나타냄이
사물에 앞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이 꽃을 보면 곧 안씨를 알 수 있다.
내가 듣건대 안씨가 여러 군에 흩어져 사는 종족을 모아 그 이름을 장부로 만들어 ?종안(宗案)?이라 하고,
유사(有司)를 정해 제사에 올릴 희생과 곡식같은 제수(祭需)를 관장케 하며,
제사지내는 날에는 여러 군의 후손이 모두 모여 들어 제사를 드리고 음복을 한 후
반드시 이 꽃이 탈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다. 끝으로 진지한 우의를 펴고 돈독한 정화(情話)를 나눔이
잘 어우러졌으니, 장차 이로써 ?안씨화수회(安氏花樹會)?라 불러도 또한 좋을 것이다.
무자년(1768년) 仲冬에 안택문(安宅門)씨가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금년에 꽃이 또 피었다.” 하고, 또 “이 달 보름경에 종족을 모아 ?종안?을 다시 수정하려 한다.” 하니,
내가 말하기를 “그대는 안씨의 종손이 아닌가? 안씨는 직장공으로부터 그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2대이니,
종손이나 지손에게 모두 경사스런 일이네.
비로소 이 꽃이 세덕(世德)의 영화(英華)요 적선(積善)의 부채(符彩)임을 믿게 되었으니,
감히 이 꽃을 ‘여경화(餘慶花)’라 이름붙이길 청하네.”
그런데 선비 집안에서는 문과, 무과에 급제하는 것을 가문과 종족을 빛내는데(名家偉族)
또한 근본으로 보지 않는다.
이 꽃은 태천공(泰川公, 죽산10세 안언룡)의 큰 도량과 깊은 지식,
동애공(桐厓公, 죽산10세 안중묵)의 힘써 닦은 탁월한 몸가짐,
우산공(牛山公, 죽산11세 안방준)의 독실한 학문과 의병활동에서 더욱 이채로움을 드러냈다.
나는 장로(長老)들이 일찍이 무어라 말했는지 모르지만, 오늘날 다시 이채로운 모습을 나타냈다면
안씨의 흥성함은 가히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아! 이로부터 세대가 더욱 멀어지되 화목함을 더욱 돈독히 해나간다면,
아마도 ‘선조를 공경하는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이고(桑梓無改),
묘소 주위의 나무가 끼친 음덕(松 遺蔭)’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안씨의 자형화(紫荊花: 옛날 중국의 田 眞 3형제가 재산을 나눌 때 자형화도 삼분하기로 하자
이 꽃이 말라죽었다는 故事, 형제간의 화목을 말함)는 영원히 말라죽지 않으리라.
이어서 이 꽃을 노래한다.
만수동에 두견화 萬壽之花
흐드러지게 피었구나. 鄂不
후손들의 무궁한 번창은 本支百世
바로 조상 덕의 증험이네. 維德之符
존재집[存齋集] ; 조선 후기 실학자 위백규(魏伯珪)의 시문집. 1796년(정조 20) 정조의 명으로 내각(內閣)에 올렸던 저자의 자편고 24권이 없어진 뒤, 후손 병석(炳錫)·영복(榮馥) 등이 가장초고(家藏草稿)를 바탕으로 재편하고 임헌회(任憲晦)의 교정을 받아 1875년(고종 12)에 간행하였다. 위백규(1727∼1798)는 본관이 장흥(長興), 자는 자화(子華), 호는 존재(存齋)·계항(桂巷)이다. 천문(天文)·지리 ·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였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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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임진왜란 전후로 해서 무반으로 유명했던 장흥위씨 집안과
장흥에 살았던 죽산안씨 좌랑공 구파(6세 안구) 중에서도 봉사공파(죽산11세 안극인)와 해남파(11세 안극의)는
3대에 걸쳐 양쪽 집안은 약5번의 혼인을 하게 됩니다.
장흥위씨 사위와 죽산안씨 딸들의 결혼만 해서 말입니다.
역으로 장흥위씨 집안 따님들 중에서 죽안안씨 집안으로 약3분 정도가 시집을 오게됩니다.
죽산안씨 따님들이 시집가신 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장흥위씨 유명한 분들을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인연으로 쓰게된 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선 초 한성참군을 지낸 위종복(魏宗復)에게는 위유형(魏由亨) · 위유정(魏由貞) 두 아들이 있었는데,
유형의 자손들은 주로 관산 일대에서 살아 '관산파'라 하고,
유정의 자손들은 주로 장흥읍 행원에서 살아 '행원파'라 부르면서 세칭 관산파와 행원파의 두 파로 갈린다.
장흥위씨 21세 판서공(判書公) 위덕화(魏德和)
- 부인 죽산안씨(죽산12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의 1남1녀 중 따님
공의 휘는 덕화(德和; 21世 1551 ~ 1598, 進士 鯤의 子, 參奉 晉賢의 孫子 지장록p924)다. 선조(宣祖) 1583년(乙酉) 무과(武科)에 급제, 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9년 후 임란(壬亂)이 일어나 서울이 왜군(倭軍)에 의해 함락되자 임금을 호종(扈從), 밤에 송도(松都)에 이르렀다. 피난행렬이 민가에 머물었으나 먹을 것이 없자 공이 촌부(村婦)들에게 서숙 밥을 얻어다 임금에게 바치니 선조는 그 밥을 먹으며 팔진미(八珍味)보다 낫다고 하였다. 피난행렬이 송도를 떠나 의주(義州)에 이를 때 장흥에서 천리를 걸어서 올라온 중형 청계공(聽溪公)과 극적으로 해후(邂逅)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조와 좌의정(左議政)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우의정(右議政)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 등 조정관리들이 감격하였다. 공은 1593년(癸巳) 참상(參上)으로 승진, 궁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왜군의 괴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가또기 요마사(加藤淸正) 등이 각 포구를 장악, 불안이 그치지 않자 왕에게 나가 싸우기를 자청했다. 왕은 공의 충성심에 감동하여, 언양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당일로 부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공이 1596년 내직인 군자훈련정(軍資訓練正)으로 전근할 때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의 체포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 그 후 1598년(戊戌) 신병 때문에 귀향해 요양하다 생을 마쳤다. 공이 타계한 후 조정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정철(廷喆)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을 감안,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추증(追贈)했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됐다. 1남 위정철(魏廷喆) 2남 위정혁(魏廷赫) 두 아드님이 있습니다.
장흥위씨 22세 웅천현감공(熊川縣監公) 위정열(魏廷烈)
- 부인 죽산안씨(죽산13세)는 죽산11세 안극례(安克禮) -> 12세 안호민(安?民)의 2남2녀 중 큰 따님
공의 휘는 정렬(廷烈, 22世 1580 ~ 1656, 判官 德厚의 子 지장록 p123)이다. 24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1627年 정묘란(丁卯亂) 때 백형 정훈(廷勳) 등 형제들과 의병과 군량을 모아 호소사(號召使) 오리(梧里) 이정승(李政丞)의 격문에 응해 체부군관(體府軍官)으로 일하다 난리 후 귀향했다. 조정은 호란(胡亂)으로 북변에 전념하고 있을 때 남해안이 근심스러워 특별히 수령을 고르던 중 공을 발탁, 웅천현감(熊川縣監)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호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길에 오르는데 쌍교(雙橋) 나루를 지키던 병사(兵使) 민영일(閔泳一)의 군(軍)이 군률(軍律)을 잃자 이에 격분, 혼자서 칠흑의 어둠을 뚫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서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왕의 항복으로 전투가 종식되자 고향으로 돌아왔다.
장흥위씨 22세 위정첨(魏廷瞻)
- 부인 죽산안씨(죽산13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 -> 12세 안준민(安俊民)의 2남 1녀 중 따님
장흥위씨 위천회(魏天會)
- 부인 죽산안씨(죽산14세)는 11세 안극인(安克仁) -> 12세 안준민(安俊民) -> 13세안용흠(安用欽)의 2녀 중 큰 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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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양강 ㅡ여기 존재선생님의 글 본문에 나오는 <관산>은 곧 <장흥>을 지칭합니다. 좁은 의미의 관산면(읍)이 아닙니다. ㅡ그 역문을 소개하고 해설을 덧붙인 <죽산안씨(신)종친회 안병주님>에게 감사드립니다. ㅡ"관산위씨,죽산안씨" 집안혼인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습니다. 09.09.08. 1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