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제 16 장
자발적인 죽음에 대하여(4)
「그러나 도둑처럼 슬금슬금 기어오며 하얀 이빨을 드러내는 죽음이 승자에게와 마찬가지로 싸우는 자를 증오하며 마치 주인처럼 다가온다.
나는 그대들에게 내가 말하는 죽음을 권한다.
그것은 내가 원하기 때문에 나에게로 오는 자발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그대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면, 어떻게 자신의 죽음에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동양에서는 가장 위대한 각자覺者들이 자신의 죽음을 미리 선언하는 전통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오해해왔다.
사람들은 각자들이 죽음을 예언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삶을 완성했고,
더 이상의 삶은 없고,
더 이상 발견할 것이 없고,
그들의 여정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7일 후, 혹은 3일 후, 혹은 내일이라도, 나는 죽게 된다.”
이런 선언은 그들이 자신의 죽음을 바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언이 아니다.
그러나 동양은 모두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들은 이것을 예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절대로 예언이 아니다.
그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조금 더 연장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떤 것도 더하고자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완성되고,
마지막 마무리도 완성될 때가 바로 떠날 때이고,
이 세상에 작별인사를 할 때이다.》
「그러면 나는 언제 그것을 원하는가?
목표와 후계자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목표와 후계자에게 가장 유리한 때에 죽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리와 승리를 얻기에 너무나 연로할 때까지 산다.
이빨이 없는 입은 더 이상 진리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영광을 바라는 모든 사람은 적절한 때에 명예를 버리고, 적절한 때에 사라지는 힘겨운 기술을 연습해야 한다.
나는 빠른 죽음을 설교하는 자들이 나타나기를 바란다.
그들은 생명의 나무를 뒤흔드는 폭풍이 될 것이다.
그러나 늦게 죽고, ‘세속적인 모든 것들’을 인내하도록 설교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선과 정의라고 부르는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막이 홀로 있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 그는 대지와 함께 살고 사랑하는 법, 그리고 웃음까지도 배울 수 있었을 텐데!
나의 벗들이여, 그대들의 죽음이 인간과 대지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기를 그대들의 영혼의 꿀에게 간청하노라.
이 땅 위에 석양이 따오르듯이 그대들의 죽음에서 그대들의 정신과 미덕이 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들의 죽음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죽고자 한다.
그러면 내 벗인 그대들은 나를 위해서 이 대지를 더 사랑할 것이다.
나는 다시 대지가 되고자 한다.
그래서 나를 낳아준 대지 안에서 평화를 얻고자 한다.
진정으로 차라투스트라는 목표가 있었고 자신의 공을 던졌다.
이제 그대 벗들은 내 목표의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며, 나는 황금 공을 그대들에게 던지노라.
그러나 나의 벗들이여!
무엇보다도 나는 그대들 역시 황금 공을 던지는 것을 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땅에 조금 더 머물 것이니 그것에 대해 나를 용서하라!」
차라투스트라의 통찰력은 여러 측면에서 탁월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그 가운데 가장 위대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추하고 모욕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광된 죽음을 바란다면, 바로 이 순간으로부터 진정으로 살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사는 삶이 그 핵심이다.》
《전체적으로 사는 것, 양쪽 끝으로부터 삶의 불꽃을 완전히 태워버리는 것을 말한다.》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느낄 때 전체적으로 죽을 수 있다.
삶에 매달리지 않게 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해왔다.
그들은 거지처럼 매달리며 죽는다.
삶을 아직 살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죽음이 왔기 때문에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삶이 있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낭비했다.
이제 죽음이 그들의 문을 두드리자 자기들이 삶을 낭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삶을 전체적으로 산 사람은 문을 열고 죽음을 맞이한다.
즉음은 그대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단지 집을 바꾸는 것이다.
《하나의 육체에서 다른 육체로,
하나의 형체에서 다른 육체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형체 있는 것으로부터 대지를 둘러싸는 무형의 것으로 옮겨가는 과정이다.》
진정으로 종교적인 사람은 종교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예술가는 삶을 산다.
그는 예술적으로 살 뿐만 아니라 위대한 예술로써 죽음을 맞이한다.
《완전하고 전체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놀이를 하듯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주 간단한 일이다.》。끝.
오쇼의 차라투스트라 1
오쇼 강의/박형진 옮김. 젠토피아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