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서구에서 말하는 산업혁명 과정이 없다. 그래서 핵심 기술과 소재 등 대부분을 수입해 산업화를 시작했다. 그 결과 항상 선진국을 따라잡기에 바빴고,한편으로 후주자에게 덜미를 잡힐우려에 시달리기 일쑤다. 그러나 반도체에 이르러 말은 달라진다. 메모리칩 분야에서 15년째 1위. 이는 1970년 인텔사가 1K D램을 개발하면서 시작된 메모리산업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례로 기록돼 있다. 역사 이래 대한민국발 그 어떤 성과도 이를 능가할 수 없다는 평가도 나왔다. 1983년 2월8일 이병철(1910~87) 삼성 회장은 삼성그룹이 반도체 산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내용의 '도쿄 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이 회장은 64K D램 기술 개발에 착수하겠다는 구체적 계획까지 내놓았지만 국내외의 반응은 1974년 삼성이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처럼 냉소뿐이었다. 그러나 도쿄 선언 10개월 뒤인 1983년 12월 삼성은 전 세계 반도체 업계를 충격에 빠뜨리는 발표를 내놓는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을 개발해낸 것. 세계 반도체 업계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로서는'꿈의 기술'이라던64K D램을 독자기술로 개발해냈기 때문이었다. 10여 년 뒤인 1992년, 이병철 회장의 셋째 아들로 삼성 회장직을 이어받은 이건희(1942~ ) 회장은 다시 한번 세계 반도체 업계를 경악하게 하는 발표를 했다. 세계 최초로 삼성전자가 8인치
웨이퍼 투자를 결정했던 것. 일반인에게는
낯선 이야기지만 8인치 라인 가동은 1993년
삼성이 마침내 메모리칩 업계 세계 1위에 올라 올해까지 15년째 부동의 세계 1위를 고수하는 시발점이었다. 삼성의 임직원이 반도체 세계 1위를 자축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1993년
2월, 이 회장은 갑자기 삼성전자 사장단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불러모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독일 프랑크푸르트-일본 오사카-영국런던으로 잇는 4개월여에 걸친 대장정에서 연인원 1,800여 명의 임직원을
해외로 불러들였고 장장 500여 시간 열변을 토했다.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자율경영'을 강조하며 '은둔의 경영자'로 여겨지던 그로서는 전에 없던 파격이었다. 당시 그의 강연을 들었던 삼성 임직원들은 "마치 신들린 사람
같았다"고 회고한다. 평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보다 상대방 의견을 듣는 데 열중하던 이 회장의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다는 것. 대장정의 끝자락인 1993년 6월7일,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했다. 선친인 고 이병철 회장의 '도쿄 선언이 있은 지 꼭 10년 만이었다. 당시 그는 이 선언을 통해 "삼성이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며 강력한 개혁을 요구했다. 반도체 세계 1위에 오른 상황임을 감안하면 다소 의아한 주문이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이 회장은 "세기말적 변화를 앞두고 경쟁력을 갖추지 않으면 초일류 기업과의 경쟁에서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다른 기업들이 거품경제의 환상에 매료돼 5년 후 다가올 외환위기의 대재앙을 상상조차 못하고 있을때 이 회장은 삼성을 살려낼 방주를 주조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이제 세계시장에서 '반도체=삼성'의 등식은 일반화됐다. 뿐만 아니라 삼성이 세계 1등인 것은 컬러TV·LCD모니터 등 무려 10여 개에 달한다. 한국의 1등을 명실공히 세계의 1등으로 만든 삼성 이건희 회장의 행보가여전히 주목되는 것은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1등에 대한 궁금증을 계속 던지 있기 때문 아닐까?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
8. 장영실
노비에서 당대 최고 발명가로, 과학기술의 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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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래현 관노 출신/ 1425년 세종 특명으로 중국연수단 발탁/ 1425년 상의원 별좌 제수/ 1432년 천문의 제작/ 1434년 금속활자 주조, 자격루 제조/ 1437년 현주일구 제작/ 1441년 측우기 발명/ 1442년 불경죄로 파직 | | |
조선 왕조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세종의 시대를 과학기술문화를 가장 찬란하게 꽃피운 시기로 꼽는다. 심지어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이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이 '특기할 정도로 뛰어났다'고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조선 초기의 과학기술을 상징하는 인물이 바로 장영실(蔣英實·생몰연대 불확실)이다. 그의 선조는 중국의 소·항주(蘇·杭州) 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해 대대로 군기시·서운관 등 과학기술과 관련된 직책에 복무했다. 장영실의 아버지 장성휘(蔣成暉)는 고려 말 전서(典書)를 역임한 관리였으나 어머니는 기녀였다. 그런데 어찌 된 연유인지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官奴)로 있었다 그렇지만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은 그는 일찍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냄으로써 태종 때부터 중앙으로 차출돼 활동하기 시작했다. 1421년에는 세종의 특별 배려로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이천 등과 함께 천문관측기구의 제작에 참여해 두각을 나타냈다. 그렇지만 장영실의 진가는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 제작 과정에서 발휘되었다. 자격루는 다른 기구들과 달리 매우 복잡한 기계였음에도 장영실은 자신의 책임 아래 세종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단기간에 완성했다. 이에 세종은 그를 호군(護軍)으로 승진시켰다. 이어 장영실은 자격루보다 더 정교한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제작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것으로,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해야 할 농사일까지
알려주는 다목적 시계였다. 뿐만 아니라 장영실은 금속 채굴과 제련 관련 분야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다. 지방으로 파견돼 청옥·동철과 연철의 채굴 작업을 감독했다. 또한 1434년에는 중국인 김새(金璽)로부터 금속 제련 기술을 전수받아 갑인자 주조 사업에 핵심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금속활자 주조 기술의 발달에 이바지했다. 이러한 공로 늦어도 1438년이전에 대호군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세종 24년(1442) 그가 제작을 감독했던 임금의 '안거(安輿·임금의
수레)'를 세종이 타고 온천욕을 위해 경기도 이천으로 가던 도중
부서진 사건으로 직첩을 회수당하고, 장형(杖刑)을 당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결국 장영실의 등장과 퇴장은 당시 조선사회의 역동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노비 출신의 그가 관리로 발탁된 것은 신분적 자격보다 업무 능력과
경험을 더 중시했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건국 초기에 국가의 통치체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을 것이다.그렇지만 여느 전통적 문반 출신의 사족(士族)들과 달리 그의 업적은 자손들에게 계승되지 못했다. 이는 문반 중심의 신분질서를 존중했던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장우_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실장
9. 이승만 (李承晩)
'대륙풍' 차단, 해양문명권 편입 시도한 현대판 문명 개화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kr.img.blog.yahoo.com%2Fybi%2F1%2F44%2Ffb%2Fsw0747%2Ffolder%2F6%2Fimg_6_1092_8%3F1175380673.jpg) |
▲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생/ 1894년 배재학당 입학/ 1898년 정부전복획책 혐의로 투옥/ 1917년 뉴욕 세계약소민족대회 대표/ 1945년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1948년 초대 대통령 취임/ 1960년 4선 대통령 당선/ 1960년 4·19혁명으로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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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李承晩·1875~1965)이 한민족에게 기여한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를 국가사적·민족사적 관점보다 거시적인 세계사적 관점 또는 문명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승만의 진정한 역사적 가치는 오늘날 전 지구적(globalist) 차원의 '문명충돌'이 일어나는 시대에 비추어 볼 때에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주의'가 막 시작되던 1945년 이승만은 한국인들을 중국 중심의 대륙문명권으로부터 떼어내 '현대판 로마제국'인 미국 중심의 해양문명권에 편입하는 '문명사적 전환'을 주도했다. 한국인의 문명권 소속을 바꾸려는 혁명적 시도였다. 그는 새로운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세계적 표준에 맞도록 한국인들의 수준을 높이기에 앞서, 자신부터 그 수준에 맞추었다. 그래서 그는 배재학당에 이어 조지워싱턴·하버드·프린스턴대학을 거치면서 최고 교육을 받고, 세계어인 영어를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웠다. 그 결과
그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최초의 한국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것은 그가 유학생 자격으로
미국 땅을 처음 밟은 1904년부터 하와이에서
죽은 1965년에 이르는 동안 <뉴욕타임스>
에만 실린 그의 기사가 무려 1,256건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대한민국 땅이'팍스 아메리카나'로 편입되는
과정은 아주 힘든 것이었다.오랫동안 공동체
주의적이고 관념주의적인'중국적 생활식'에 젖어 있던 한국인들에게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주의적인'미국적 생활방식'은 낯설었다.
그 때문에 폭동, 정치파동, 6·25전쟁과 같은
수많은 진통이 따랐다. 그럼에도 1953년의 한미동맹 결성을 계기로
대한민국의 해양문명권 편입은 확실해졌다.
또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한국은 60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연간 국민
소득이 35달러에서 2만 달러 가까이에 이르는 눈부신 발전을 했다. '미국적 생활방식'인 자유민주주의의 정착은 이승만이 자유주의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가능했다. 6·25전쟁의 극한상황에서도 그는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고, 국회를 해산하지도 않았다. 대통령 직선제를 포기하지도 않았고, 헌법을 정지시키지도 않았음은 물론이었다. 이승만은 야당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민주당이 자유당과 함께 양당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흥사단계의 <사상계>와 한민당계의
<동아일보>가 그의 통치를 맹렬히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 1960년의 4·19 혁명은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 철학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됐다. "국민들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겠소"라는 그의 하야 선언은 평생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청년 이승만의 이상 그 자체였다. 또 한 국가의 지도자가 물러날 때 어떻게 처신해야 명예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했다.
국내가 아닌 하와이로 거처를 옮긴 일 역시 국민들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이승만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남겨 준 과제는
대한민국 땅이 다시 대륙문명권으로 되돌아가지 않게 막는 동시에,
여전히 대륙문명권에 붙어 '현대판 위정척사파'의 노선을 따라가고 있는 북한 땅을 해양문명권에 편입시키려는'현대판 문명개화파'의 역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주영_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0. 백남준 (白南準)
'비디오아트'로 서구 우월주의에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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