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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감 마을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 지도자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형제의 고향이며, 녹암계(鹿菴係)가 형성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또한 교회 창설에 앞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거나 토론하던 곳이었으며, 충청도와 전라도의 복음의 뿌리를 둔 곳이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과 초기 순교자들과 관계가 깊은 천주교회의 요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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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신의 친아들로 권철신의 양자가 된 순교자 권상문(權相文, 1769~1802, 세바스티아노)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에 전국 각지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 문하에 모여들 정도로 권철신이 당대 최고의 학자 중의 하나였으므로, 권철신·권일신 형제의 영향으로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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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의 한강개는 지금의 행정 구역상으로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 앞에 있던 나루로, 여주·양평군의 경계에 있는 양자산(704m)과 그 남서쪽의 앵자봉(667m)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들이 합쳐져 흐르는 완계천이 한강과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완계천은 바로 양평군과 여주군의 경계이다. 한강개의 동쪽 강안은 양평군 개군면인데 호수처럼 보이는 한강 줄기는 바로 강상면과 개군면 사이에 있는 지점으로 일명 ‘감호(鑒湖)’라고도 하였다. 거울처럼 맑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부터 한강개는 세월리뿐만 아니라 위쪽 대석리에 있는 ‘대감 마을’까지를 통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이 마을은 한강변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한강에서 직선거리로 약 3km 서쪽에 떨어져 있는 곳이지만, 마을 어귀 언덕(이웃 세월초등학교 뒤편의 언덕)에서 보면 감호가 맑게 펼쳐져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대감 마을의 이름은 대감이 살았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한강개’가 이화(異化) 작용을 거쳐 ‘한감개’로 변하고, 일제 치하 때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면서 다시 ‘대감(大監) 마을’ 또는 대석리로 변경된 것이라 한다. 현재 대석리 한강개의 도로 위편 북서쪽 100m 지점에 있는 넓은 밭 주변이 권철신 형제가 거처하던 집터로 추정하고 있다. 일설에는 도로 남쪽이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집터 뒤로는 효자봉(481m)이 솟아 있는데, 그 남쪽 자락 7부 능선쯤에 위치해 있던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의 무덤은 1981년 11월 29일에 천진암으로 이장되고 부친 권암(權巖, 호 尸菴)의 무덤만 남아 있다.
대석리 한강개는, 권철신의 제자로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밀사로 활약하면서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를 입국시킨 후 1795년의 을묘박해로 순교한 윤유일(尹有一, 1760~1795, 바오로)과 그의 아우 윤유오(尹有五, ?~1801, 야고보)의 고향이기도 하다. 권철신, 권일신 형제가 살던 마을 위치에 대해서는 이견들이 있다.
▒ 권철신 암브로시오
권철신(權哲身, 1736~1801)은 남인(南人) 학자로 이익의 학통을 이었는데 많은 제자들이 따라서 녹암계(鹿庵系)를 형성했다.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講學)을 주도하고, 양명학과 천주교를 수용하는 등 열린 가슴을 갖고 있었고,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일어나자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등 저명한 남인 학자들과 같이 잡혀 국문을 받았다. 그는 국문에서 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는 매를 맞아 2월 22일(음) 66세로 옥중에서 죽으니 사실상 그는 물고(物故, 杖殺)당한 것이다.
▒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일신(權日身, 1751~1791)은 한국 천주교의 창설을 주도한 인물 중의 하나다. 권철신의 아우이자 조선조 중기의 실학자 안정복의 사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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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감 마을에 대한 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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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근성지, 감호암 발견 [평화신문 보도] 2010.5.10
한국 천주교회 창설을 이끌었던 권철신ㆍ권일신 형제가 활동했던 지역으로 알려진 '감호(鑑湖)'가 경기도 양평군 양근리 지역임을 뒷받침하는 사료가 발견됐다.
수원교구 양근성지(경기도 양평군 양평읍) 전담 권일수 신부는 "양평 강변에서 우연히 '감호암(鑑湖岩)'이라 쓰여진 바위를 발견했다"면서 "그동안 감호가 양근리 일대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었는데 이 바위로 권철신과 권일신 형제 생가터가 양근임이 확실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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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권철신이 여러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했다는 감호정(鑑湖亭)은 이 감호암 위에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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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신부는 "감호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견"이라며 "양근리 일대가 한국 천주교회 창설과 관련이 깊고 초기 순교자를 배출했던 성역임이 확실해진만큼 양근성지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겠다"고 말했다. 권 신부는 이와 함께 감호암과 양근성지, 양근대교 아래 순교터, 생가추정터를 연계해 배를 타고 순례하는 성지순례코스를 개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평화신문 박수정 기자 catherine@pbc.co.kr
2010. 05. 09발행 [106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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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교자
◆ 순교자 권상문 세바스티아노(1769∼1802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상문 세바스티아노는 양근 출신으로 권철신(암브로시오)이 큰아버지이고, 교회 창설에 참여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 그의 아버지였다. 훗날 권상문은 조선의 풍습에 따라 큰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윤유일(바오로) 형제를 비롯하여 몇몇 교우들과 함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0년 6월 양근에서 일어난 박해로 권상문은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양근과 경기 감영을 오가면서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1801년의 신유박해가 한창일 무렵에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 양근 형장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33세였다.
◆ 순교자 권 데레사(1784∼1819년) <하느님의 종 125위>
권 데레사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딸이요,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권상문(세바스티아노)의 동생이다. 1784년 경기도 양근에서 태어나 7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1791년의 신해박해로 아버지까지 잃었다. 동정을 지키며 살아가려 하였으나 친척들의 설득으로 동정을 포기하고 21세 때 조숙(베드로)과 혼인을 하였다. 당시 베드로는 냉담자였다.
혼인하는 날 밤 권 데레사는 남편에게 동정 부부로 살자고 부탁하자 베드로는 마음이 변하여 아내의 원의를 들어주었고, 신앙심이 되살아나서 딴 사람이 되었다. 이후 데레사 부부는 남매처럼 동정으로 지냈다. 성 정하상(바오로)을 도와 일하다 1817년 3월 말경 체포되어 2년 이상을 옥에 갇혀 있다 1819년 8월 3일(음력 6월 13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나이는 36세였다. 순교한 지 한 달이 지나서야 시신을 거두었는데 데레사의 머리뼈를 바구니에 담아 성 남이관(세바스티아노)의 집에 두었는데, ‘바구니를 열면 향기가 진동하였다’고 여러 교우들이 증언하였다.
◆ 순교자 윤유일 바오로(1760∼1795) <하느님의 종 125위>
윤유일 바오로는 1760년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이웃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801년에 순교한 윤유오(야고보)는 그의 동생이고, 윤점혜(아가타)와 윤운혜(루치아)는 그의 사촌 동생들이다. 양근으로 이주한 뒤 권철신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던 그는 스승의 아우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이후 가족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데 열중하였다.
1789년 교회의 지도층 신자들은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밀사를 보내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때 밀사로 선발된 신자가 바로 바오로였다. 이에 따라 바오로는 북경을 오가는 상인으로 가장하고, 구베아 주교를 만나 조선에 성직자를 파견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대해 들었다. 1790년 봄 그가 귀국하자, 지도층 신자들은 성직자 영입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이후에도 바오로는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에는 마침내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조선에 잠입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주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면서 최인길, 윤유일, 지황은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사정없이 그들을 때려 숨지게 한 뒤, 비밀리에 그 시신을 강물에 던져버렸다. 아마도 포도청에서 죽었으므로 관례에 따라 광희문을 거쳐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 다리 인근에서 강물에 버려졌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바오로의 나이는 36세였다.
◆ 순교자 윤유오 야고보(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윤유오 야고보는 경기도 여주의 점들(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리)에서 태어나 인근에 있는 양근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로 이주해 살았다. 1795년에 순교한 교회의 밀사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형이다. 일찍부터 형 윤유일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야고보는 고향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웃에 교리를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이 순교한 후에는 인근에 사는 조동섬(유스티노), 권상문(세바스티아노) 등과 만나 기도 모임을 갖거나 교리를 연구하면서 신심을 북돋우었다.
1801년에는 신유박해가 일어나 윤유오도 양근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그곳 관아로 압송되었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문초와 형벌을 당하면서도 전혀 신앙을 버리지 않았으며, 결국 관장은 야고보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801년 4월 27일(음력 3월 15일), 양근 관아로부터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큰길가로 끌려 나가 동료들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하게 되었다.
◆ 순교자 윤점혜 아가타(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윤점혜 아가타는 1778년경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95년에 순교한 윤유일(바오로)은 그의 사촌 오빠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루치아 혹은 마르타)는 그의 동생이다. 아가타는 일찍부터 동정 생활을 하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풍속에서 용납되지 않았기에 그녀는 남장을 하고 사촌오빠 바오로의 집으로 가서 숨었다.
1795년 윤유일이 순교한 뒤에는 어머니와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때부터는 결혼한 과부처럼 행세하며 동정을 지켜나갔다. 1797년에는 주문모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기도 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녀는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가서 함께 생활하였다. 또 주 신부의 명에 따라 동정녀 공동체를 만들고, 그 회장으로 임명되어 다른 동정녀들을 가르쳤다.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압송되었고, 다시 양근으로 이송되어 그곳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1801년 7월 4일(음력 5월 24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순교 당시 그녀의 목에서 흐른 피가 우유 빛이 나는 흰색이었다고 한다.
◆ 순교자 윤운혜 루치아( ? ∼1801년) <하느님의 종 125위>
윤운혜 루치아는 경기도에서 태어나 양근의 한강개(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어머니 이씨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정광수(바르나바)는 그의 남편이고, 윤점혜(아가타)는 그의 언니가 된다. 그는 여주에 사는 정광수와 혼인하였는데, 비신자인 시부모의 반대로 혼인 문서는 주고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루치아는 남편과 함께 부모의 곁을 떠나 한양의 벽동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양으로 이주한 뒤부터 루치아 부부는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교회 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자기 집 마당 한편에 집회소를 짓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였으며, 그 집회소를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때 그곳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은 홍필주(필립보),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롬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그러던 중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 언니 윤점혜가 체포되자, 그녀는 남편 정광수를 피신시킨 다음, 혼자 남아 집을 지키다가 2월에 체포되었다. 이후 윤운혜 루치아는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신문을 받았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루치아는 형장으로 끌려나가 5월 14일(음력 4월 2일)에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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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아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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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례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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