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설계 및 분석
I. 유아교육에서 소통과 대화
교육의 정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학습자의 발달과 전인적 성장을 돕는 것으로 그 목적을 두고 있으나 이러한 목적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이를 교육하는 교사와 학습자 사이에서 일어다는 다양한 형태의 상호작용이다. 상호작용이란 언어적 비 언어적 형태의 다양한 의사교류를 말하지만 유아교실에서 상호작용의 하루일과 속에서 매우 다양하고 빈번하게 그리고 매우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유아와 교사와의 관계적 형태를 말한다.
흔히 많은 말은 주고받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소통’은 발생하지 않았다는 말을 통해 우리는 상호작용이 단순히 말을 주고 받는 언표행위 이상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아는 교사가 짓는 미소와 친절한 손짓과 편안함을 통해 하루일과속에서 교사와 교감하는 상태에 있기도 하지만, 늘 지시와 감시, 어려운 개념을 묻는 교사들의 말 속에서 어렵고 힘든 하루를 보내게 되고 교사와 가깝지 않은 심리적 압박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많은 수의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대집단 활동은 그것이 이야기나누기, 게임, 미술, 노래배우기, 동극하기 등 어떤 형태의 활동을 취하든 교사는 매우 지시적이고 통제적인 언어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때 교사의 발화의 양은 하루일과중 가장 높은 빈도수에 이르지만 유아들과 진정한 의미의 교감을 나누고 소통이 발생하기에는 가장 어렵고 힘든 시간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는 연구와 논문이 발표되어 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과적인 학습이고 이를 위해서는 교사와 학습자가 단순한 말과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의사소통행위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소쉬르가 말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로 지시되는 말과 사물의 일치와 언표와 의미관계의 일치만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어떤 ‘의사전달’과 ‘이해’에 대한 것이며 의미의 발생을 통해 주고받는 언표적 행위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가르치는 학습자가 ‘유아’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쉽게 말을 하고, 자세히 설명하고, 혹은 유아의 미완성 적이고 유치한 표현들을 성인의 언어처럼 완성된 문장으로 다듬어 주는 것이 교사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유아’는 어떤 측면에서 성인과 의사소통을 하기에는 가장 어려운 학습자의 하나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유아가 일단 어른들이 사용하는 사회적 언어체계를 아직 익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고 또한 아직까지 자신의 독특한 정신 세계 속에서 성인과 다른 시선으로 세계와 교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유아교실에서 교사와 유아가 보내는 하루일과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대소집단 활동이 포함된다. 우리는 이것을 교육적용어로 ‘수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수업활동 속에는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형태의 학습활동이 일어나며 수없는 대화와 말이 오고가지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고 유아와 교사가 진정한 의미의 의사소통이 무엇이며 교실에서 소통의 중요성과 가능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란 단순한 언어의 주고받음 혹은 ‘대화주의’를 넘어서서 어떤 ‘교감’의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교사와 유아를 가장 친한 친구처럼 안내하는 친밀감이 발생하도록 돕는다. 그것은 언어행위 이면에서 혹은 언어가 비껴가는 어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융합의 형태, 그리고 공감의 영역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유아교실에서 진정한 소통행위는 교사와 유아가 매우 즐거운 상태에서 서로의 언어와 감성을 깊게 나누고 서로의 마음을 끄는 관계적 지향성이 발생하도록 돕는 교육적 행위를 말한다.
유아교사교육자 혹은 유아교사를 지원하고 협력하는 관계자로서 행정가와 관리감독자들의 역할은 유아교사들이 하루일과 속에 진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교사주도 활동에서 보다 질적으로 풍부하고 의미있는 교수학습이 발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행위 속에 포함되는 수업의 장학이나 컨설팅의 핵심은 교사가 주도하는 집단활동 속에서 교사와 유아 간에 일어나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과 대화에 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II. 유아교육에서 ‘수업’에 의미
1. 유아교육에서 ‘수업’
유아교육에서 ‘수업’은 공식적 용어가 아니며 ‘관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이다. 유치원 교육과정은 수업이라는 용어대신 하루일과에서 ‘활동’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으나 현장에서는 ‘수업 잘하는 교사’ 혹은 ‘부분수업’ ‘종일수업’ 등의 말은 매우 비형식적이고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그 예이다. 그러나 어느 학교단위이건 학습자가 집단으로 모인상태와 이를 이끄는 교수자가 설정되는 순간 ‘수업’이라는 형식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수업은 어떤 형태이든 학생과 교수, 시간과 공간이라는 구조와 형식을 가지게 된다. 바깥놀이도 형식과 구조를 가지고 산책도 형식과 구조를 가진다는 점에서 수업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유치원(유아교육기관)의 수업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교육인적과학부는 현재 학교교육 질 향상을 위해 가장 집중해야 할 영역이 ‘교사의 수업’이라고 교육개혁의 방향을 수업에 두고 있다. 수업은 유아교육기관의 특수성을 고려해서라도(그것이 활동이든, 아이들과의 만남 이든) 보다 나은 형태의 교육을 위해 유아교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진지하게 고려해 보아야 할 것이다.
현재 유아교육에서 수업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중의 일환으로 ‘우수수업’ 혹은 공개수업 등의 빈번히 일어나고 있고, 수업경시대회에서 좋은 수업의 사례로 우수수업이 선정되기도 한다. 수업의 내용을 보면 지역마다 격차가 매우 심하고 특히 유아교육과정의 일원화에도 불구하고 '개별 교사의 수업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현재 장학사나 교육청에서 좋은 수업과 그렇지 않은 수업을 가르는 중요한 잣대는 ’수업 계획안과 실제 수행의 일치도‘이다. 즉 교사가 수업계획을 잘 세우고 목표과 선정된 활동 실행을 통해 설정한 목표가 잘 이행되었는지를 보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의 가장 큰 문제는 ’유아가 지루하다‘라는 점이다. 특히 수업을 ’이야기나누기‘시간으로 보는 경향이 가장 많고 이야기 나누기 시간은 여타의 다른 활동에 비해 교사가 가르쳐야 할 내용(개념)을 분명히 하고 이를 직접적 교수법을 통해 발문하고 유아가 이를 이해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문제는 이야기 나누기 수업은 유아가 늘 교사가 주도하는 발문에 의해 대답하기 어렵고, 난해할뿐더러 ’답은 교사만이 아는‘매우 불공정한 상황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때 유아가 매우 수동적이고 ’무능력‘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교사는 수업의 목표달성을 위해 신경을 많이 쓰는 관계로 유아의 지루한 얼굴 표정이나 답답한, 멍한 표정에 크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많고, 지식과 개념의 성격상 유아가 모르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한다는 사실에 집착하기 쉽다. 따라서 몸을 뒤틀거나, 딴 짓을 하거나, 옆 친구와 이야기 하는 행위가 허락이 안 되고, 교사에게만 집중해야 하고, 어떻게든 교사가 원하는 답을 유아가 ‘발화’(유아의 입을 통해 답이 나오는)상황을 만들어야 교사는 자시이 설정한 교육목표를 유아가 학습했다고 안도를 하게 되는 경향이 많다. 여기서 중요한건 유아가 교사가 원하는 대답을 결국 알기위하여 교사와 유아가 나누는 언어게임인데, 이 과정의 결론은 결국 유아가 교사가 설정한 정답을 자신의 입을 통해 결국 ‘발화’함으로써 최종적으로 교사의 인정(칭찬)을 받게 되는 수업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수업을 타일러의 도식(Tyler' Schema)라고 부르고 학습목표가 성취되는 교육과정의 정상적 모형으로 여기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교사가 교육과정의 정상화를 위해 매우 권위적(지정한 유아만이 대답을 하거나, 답을 알 때까지 첫 글자만 가르쳐 주며 유아를 약 올리는...)으로 보인다는 것과 동시에 유아가 매우 무능력한 학습자(답을 잘 모르거나 엉뚱한 대답을 한다거나, 첫 글자를 가르쳐 줘도 전혀 추론하지 못하거나, 혹은 교사가 지명한 스마트한 유아만이 답을 알고 나머지의 유아는 소외되어 버리거나)의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야기나누기 수업의 전형적 패턴은 그 자체로 유아를 매우 취약한 학습자와 권위적 교사를 만들어 버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안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가장 큰 문제는 유아교육에서 수업이 ‘유아교육의 본질’인 ‘놀이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아교육이 여타의 초중등 교육의 수업과 구분되는 정신은 ‘학습자의 유희성’과 놀이성에 충실한 수업을 전개한다는 이데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유아교육의 정신은 ‘놀이를 통해 유아가 앎에 도달한다는’ 놀이와 유아의 동일성에 있다. 즉 이야기나누기 수업을 즐거워야 하고 즐거움을 통해 지식에 도달해야 한다는 유아교육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아교육의 본질에 훼손될 수밖에 없는 수업의 구조에서 유아들은 당연히 지루해 하거, 빨리 끝내고 간식을 먹고 바깥놀이를 나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수업시간에 유아가 몸을 뒤틀거나, 옆에 친구와 이야기를 한다거나, 졸거나, 누워버리는 행위는 유아가 교사에게 보내는 신호(너무 지루하니 얼른 끝내주세요)이다. 이것은 역으로 보면 무능력한 학습자라기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간접적으로 신호를 보내는 ‘적극적 신호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사는 그러한 신호를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오만한 학습자의 태도로 읽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유아교사들은 자신이 주도하는 이야기나누기 시간에 딴청을 부리는 유아들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한다. 유아가 발산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엇갈린 독해이다. 유아교사는 자신의 신호(개념적 지식)에 대해 유아가 따라오지 못하는 사실만이 매우 답답할 뿐 유아가 만들어낸 기호를 자신이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직관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어찌 보면 기호에 대한 오독(잘못된 해석)은 유아와 교사가 모두 발생시키고 있지만, 정작 오독에 대한 책임을 묻고 을 가하는 행위는 덩치 큰 교사만이 폭력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 교사들은 수업의 분위기를 흐트러뜨리는 유아(엉뚱한 대답을 하여 유아들을 너무 웃겨버려 진지한 학습을 방해하거나 뒤로 누워버리는 유아)는 ’생각하는 의자‘로 보래버리기 일쑤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아교실에서 수업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가장 큰 문제는 교사가 수업의 구조를 타일러의 도식으로 이해하고 유아가 보내는 신호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즉 ‘개념’을 중심으로 성인의 세계에 사는 교사와 '놀이‘를 중심으로 유아가 사는 세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결과이다. 이러한 교사의 오판은 유아교실에서 수업을 가장 지루하고 유아가 피하고 싶은 공부시간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유아교육에서 수업을 아예 하지 말자는, 해서도 안 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고(예를 들면 생태유아교육), 수업의 형태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프로젝트 수업이나 레지오 접근법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육과학 기술부와 유아교육 행정가와 유아교육과정 지도자들은 이야기나누기 수업이나, 게임, 실험이나 노래 부르기, 조형 활동 등과 같은 수업활동에서 오는 전형적 구조에 대한 고민이 충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좋은수업을 위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에 있다.
III. 수업컨설팅의 요소와 내용
1. 수업의 요소와 분석
수업은 학습자와 교수자 그리고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기본요소로 하여 발생하는 유의미한 교육행위라고 볼 때 교사와 학생, 그리고 교실이라는 공간이외에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의 내용을 담고 있는 텍스트와 교재, 즉 교육 과정적 요소를 포함한다. 즉 교사, 유아, 교육과정의 삼요소가 핵심이며 보다 넓게 보면 교실이라는 동일한 시간대의 일과와 공간을 필요로 하는 교육행위 이다. 여기에서 교육과정의 폭넓은 의미에서 보다 구체화 시켜보면 수업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의 방법론적 문제를 포함하고 수업컨설팅은 이 방법론에 초점을 두게 된다. 즉 수업컨설팅은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한 교육과정의 목적적 지식과 가치는 별개의 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잘 가르치는가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방법론에 초점을 둔다.
2. 좋은 수업방법을 보는 몇 가지 견해
아무리 명쾌하고 훌륭한 교육과정이라 해도 교사가 어떻게 해석하고 교실에서 학생과 실제로 일어나는 교육내용이 방법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좋은 교육은 일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좋은 수업은 교육의 목적이며 교육과정의 구체적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실천적이고 핵심적 교육행위이다. 좋은 수업을 만들기 위한 노력은 범교육적이고 초학교적이다. 특히 교육행위에 관련한 모든 사람들-교육과정 설계자, 관리자, 감독자, 교사-은 좋은 수업을 만들고 지원하기 위한 초개인적 노력으로 협력관계를 만들어 간다. 좋은 수업을 보기위한 몇 가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1) 수업시간과 내용의 분석- 학습의 양의 문제
2) 수업시간에 나눈 대화분석에 초점
3) 수업에서 발생한 학습자의 심리에 초점
3. 일반적 수업장학의 내용
1) 교육과정적 요소의 수용과 실천성
2) 수업목표와 수업행위의 명확성
3) 목표와 학습결과의 일치와 순환성
4) 교수방법과 매체의 적합성
5) 교수방법과 수업단위의 효율성
6) 학습의 명증성
7) 수업설계의 참신성
수업컨설팅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구조적 요소에 갇히는 것보다 교육과정이라는 넓의 의제에 비해 한 교실에서 수업이란 매우 작은 현상이고 매우 구체적이고 미시적이라는 행위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즉 수업은 매우 교실상황과 학습자 교수자의 복잡한 상관에 의해 이루어 지는 맥락적 요소이며 특히 구조와 형식으로 잡혀지지 않는 교수자와 학습자의 ‘심리’작용이라는 점이다. 듀이는 이를 교과의 심리화로 설명한다.
4. 교과의 심리화: 놀이와 수업의 관계성
그림1> 듀이의 교과의 심리화
IV. 유아교실에서 아름다운 수업 만들기
1. 수업에서 놀이와 지식
유아교육에서 수업은 교사와 유아가 만나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는 사건이다. 수업의 본질은 ‘즐거움’이다. 또한 수업이 기타 유아가 가지는 다른 유형의 즐거움(먹는 즐거움이나 컴퓨터게임의 즐거움이나 또래유아와의 놀이)와 다른 이유는 ‘유의미한 지식형성’이 함께 발생하는 놀이와 학습의 두가지 의미를 모두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즐거움과 유의미한 지식형성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유아교사들은 유아들의 즐거움을 담보잡고 쉽게 학습의 유의미성으로 도피해 버리기 일쑤이다. 앞의 두 사례가 보여주듯 교사들은 아무런 고민 없이 쉽게 학습목표의 성취(유위미한 지식형성)를 위해 유아들의 즐거움에 '괄호치기‘와 ’무시‘의 전략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아교육에서 수업의 본질은 즐거워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놀이처럼 발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업의 유희성은 유의미한 지식구성에 앞서 먼저 요구되는 조건이라는 점에서 담보 잡히거나 보류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에 ‘앞선 본질’이다. ‘유아들은 즐겁게 놀면서 저절로 배워버리는, 즐거운 앎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유아교육의 수업의 본질이다.
2. 수업에서 ‘교사’의 의미
그렇다면 수업에서 유아교사는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은 수업의 모형이나 교수법의 유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가장 진보적 수업기술이라 부르는 ‘구성주의’수업에서 조차 교사의 역할을 보는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히 유아교육은 ‘교육과 보육’이라는 이질적 동일성이 함께 존재하는 교육공간이라 유아교사(보육교사)의 역할이 훨씬 다 다층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교사를 ‘어머니’와 동일시 해 버리는 것이 오류일 수 있다는 생각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유아교사는 어머니와 동일자가 아니며, 그러해서도 안 된다. 유아교사는 어머니가 줄 수 없는 것을 주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것은 학교와 교육이 가정과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속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즉 교육기관은 가정의 대리보충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의미에 있다. 즉 할머니와 어머니, 형과 동생이 주는 관계적 편안함으로 넘어서서, 교사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만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으며, 그 무엇 때문에 교사가 ‘선생님’의 호칭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교사는 유아가 가정이나 여타의 사회적 맥락에서 획들 할 수 없는 것을 유아에게 경험하게 해주는 귀한 존재이다. 그것 때문에 유아들이 선생님 앞에 모여 앉고 선생님과 영혼을 소통하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교실은 매우 독특한 공간이다. 따지고 보면 책상과 걸상, 칠판과 의자들이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리적 공간이다. 유아교실은 유아들이 매혹적으로 느낄만한 교구들이 많이 계열화 되어 배치되어 있다. 유아들은 이러한 교구들 때문에 유아교실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교구라도 우리 집 거실에 있는 놀이감과 학교 교실 안에 있는 놀이감은 매우 이질적 느낌을 가지게 한다. 교실에 있는 교구가 가지는 독특한 느낌을 ‘아우라’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가정집의 장난감이 가질 수는 없는 독특한 ‘질’이다. 즉 우리 집 거실에 똑같은 인형이 백개 있어도 그건 흥미의 대상이 아니다. 교실에 있는 유일한 그 인형(다른 아이들이 모두 가지고 싶어 하는 그리고 유일하게 교사가 통제할 수 있는 그 놀이감), 그것을 만져보고 소유하고 공유하고 싶은 것이 유아와 교실과의 관계인 것이다. 이 교실공간이 가지는 독특한 아우라에 대한 유아의 욕구차이로 인해 그것은 차원이 다른 놀이감이 되어 나를 유혹하는 것이다..
또한 유아교실은 그러한 놀이감 때문에만 유아에게 매혹적인 것만은 아니다. 교실의 가장 독특한 매력완성 되는 시점은 ‘ 또래와 선생님의 입실’의 순간이다.. 자기 이외에 또래(혼자가 아닌 적어도 소집단 이상의 유아들)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교사의 입실로 교실의 의미는 완성된다. 선생님과 또래 그리고 나로 구성된 교실 공간은 이제 유아가 다른 어느 곳에서도 가질 수 없는 독특한 사회적 자아를 연습하는 공간이 된다. 단 하나뿐이 놀이감을 공유해야 하는 상황, 선생님이 아니라면 누구도 줄 수 없는 그 수업의 긴장과 즐거움, 선생님이 많은 친구들 앞에서 불러주는 나의 이름, 친구들이 모여앉아 있는 장소에서 선생님에 의해 선택받고, 만져보는 나뭇잎들, 돌멩이와 칠판의 글씨들 은 교실이 아니면 어디서도 체험하기 어려운 즐거운 체험이다. 오직 ‘교실에서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의해 나의 자아가 즐거움을 얻는 것이다.
그러한 선생님이 앞에서 설명한 개념식 수업에 대한 오판으로 인해 어렵거나 권위적으로 느껴지는 순간 유아들은 교사와 큰 거리감을 느낀다. 선생님이 두렵거나 불편한 존재로 각인되는 것이다. 실재로 이야기나누기 시간의 지루함과 불편함, 불쾌감은 교사들의 무의식적 행위에 숨어 있고 또한 유아에게 열등감과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교사의 무의식적 발화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유아와 교사의 사이간격을 점점 넓혀 버려 소통하기 어려운 학습의 이방인이 되게 한다. 그러나 즐거운 수업, 매력적이고, 몰입과 미적체험이 발생하는 수업을 통해 유아들은 교사와 성큼 가까워진 영혼을 보게 된다. 실제 즐겁게 수업을 마친 후에 유아들과 교사들의 관계는 사랑하는 연인처럼 돌변한다. 이러한 순간은 수업의 직적적 체험을 해본 교사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다. 교사가 스스로 ‘오늘 수업은 정말 잘 된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교사만이 느끼는 체험이다. 정말 좋은 수업을 유아와 함께 마치고 난후 교사들은 유아와 자신이 매우 가까워져 있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스스로 교사에게 다가오고, 안기고, 시간의 지속을 요구하고, 또 하고 싶고, 얼굴이 상기되는 순간 교사와 유아가 진정의 만나는 순간, 누구도 줄 수 없는 영혼의 양식을 교사로부터 얻게 된다. 그것은 자유놀이의 즐거움도 아니고, 바깥놀이의 즐거움이나 간식의 달콤함과도 교환하기 싫은 즐거움이다. 왜냐하면 그 수업의 즐거움은 유아도 갖게 되는 앎에 대한 욕망, 즉 유의미한 지적성장이 보완된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즉 좋은 수업은 유아가 가지는 최고의 즐거움(쾌락과 지식)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상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수업이 늘 상 있는 것은 아니지만 드물게 교사들은 이러한 순간을 경험한다고 고백한다. 그 순간이 정말 가장 흐뭇한 순간이고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우뚝 서게 되는 순간인데, 체험해 보지 않은 사람과 공유하기 힘든 감정이다(마치 백두산 정상의 경험을 서보지 않는 사람과 공유하기 힘든 것처럼). 따라서 유아교육에서 좋은 수업의 가능성을 체험해 보지 않은 타인들이 만들어 내는 수업의 해체와 부정성에 우리는 공감하지 않는다.
교실에서 선생님은 다른 누구도 줄 수 없는 앎과 즐거움을 알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상징’이자 유아에게 직접적 호소력을 가지는 강력한 ‘기호’이다. 그것은 교사의 존재감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실에 입실한 모든 교사에게 유아에게 영혼을 나누는 상징적 존재로 부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아가 느끼기에 오직 즐거운 수업을 할 줄 아는 교사에게서만 부여하는 (유아가 부여하는), 스스로의 복종과 권위라는 점에서 진정한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이 순간 ‘어머니’를 넘어선다. 우리는 유아교실에서 이러한 순간을 유아와 교사의 영혼이 교감하는 순간이라 부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