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답사기는 어디까지나 학교 교양과목인 인문지리학 시간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한 초 약식 기행문입니다.
안내도 작성이 끝나는대로 정식(정식의 기준이 뭔데?) 기행문을 올리겠습니다. ㅡㅡㅋ
군데 군데 이상해도 그냥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0. 옛날에 한 철길이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초등학교 저학년생이던 시절 MBC에서 화요일마다 하던 ‘인간시대’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있었다. 어린 나로써는 정말 재미없는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런 내가 유독 흥미를 갖고 보았던 방영분이 있었다.
아마 그게 96년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수인선 마지막 운행을 맞아, 수인선 협궤동차와 연계버스를 타고 수원에서 송도까지 오가는 어느 할머니를 따라가보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내가 ‘수인선’이라는 국내 유일의 협궤철도노선을 알게 된 계기였다.
8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우연히 철도동호인의 세계에 들어선 나는 수인선, 그 ‘놓쳐버린 과거’에 서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광명에서 수인선 열차가 출발했던 수원까지는 전철로 40분 거리. 단 한번이라도 그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었던 과거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차라리 덜했겠건만, 그 멀지도 않은 곳에 있었던 과거를 놓쳐버렸다는 사실은 너무나 큰 아쉬움을 불러일으켰다.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는 수많은 수인선의 흔적들은 그 아쉬움을 더욱 부채질했다.
2003년 9월, 무작정 수원역에서 사리까지 6시간동안 걸었던 것을 시작으로 2004년 11월 수원역~오이도역 12시간, 12월 오이도역~남인천역 10시간, 총 3차에 걸친 수인선 답사를 감행했다.
3차 답사를 마치고 난 후 내 입에서 나온 한마디는 “다신 안한다.”였다.
그러나 인간이란 역시 망각의 동물인 모양이다. 그 다짐은 어디로 가고, 나는 지난번 답사에서 미처 제대로 보지 못한 것들을 다시 보려는 마음에 슬슬 네 번째 수인선 답사를 계획했다.
그리고 2005년 4월 23일, 마침내 나는 가방 한 자루를 메고 07:00에 광명사거리역에서 온수행 7호선 전철을 탔다.
#1. 2005. 4. 23.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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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0분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전철역인 인천역사 내부와 인천역 건너편의 북성동의 차이나타운을 둘러보았다. 개인적으로 차이나타운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실제 내 눈에 비친 차이나타운은 한국의 여느 비탈길 동네와 다를 바 없이 군데군데 조금 큰 규모의 중국집이 자리잡고 있는 수준이었던지라 상당히 실망한 채 다시 인천역전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08:15, 드디어 인천역 앞을 떠나 수원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인천역 서쪽에 있는 고가도로 밑에서 남인천역 방향으로 가는 선로를 찾아 쭉 걷기 시작했다. 인천역에서 남인천역까지 약 1.5km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는데 걸린 시간은 무려 1시간 10분, 이렇게 긴 시간이 소요된 것은 대부분 무작정 철로를 따라 움직이다가 큰길에서 횡단보도를 찾아 이동하거나, 혹은 철로를 따라 걷던 중간에 통제구역을 만나 어쩔 수 없이 도로로 빠져나가거나 하는 탓에 많은 시간이 낭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이 이후로도 수인선을 답사하는 내내 단 1km를 이동하는데 무려 40분이 소요되는 등 매우 느린 속도로 전진했다.
인하대학교박물관에서 펴낸 『水仁線-수원~인천간 복선전철 구간내 문화유적 지표조사』의 29페이지에는 1937년 수인선 각 역의 명칭과 역간 거리가 나와 있다. 이곳에 보면 수인선의 종착역은 ‘인천항’역이고, 이곳은 송도역에서 5km 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거리를 봤을 때 ‘인천항’역은 현재의 남인천역인데, 인천항을 확장하기 이전 남인천역은 만조가 되면 역 구내에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비단 남인천역뿐만이 아니라, 근대 이후 인천과 시흥 남부의 갯벌을 매립하기 전만 해도 수인선은 소래염전의 소금과 소래, 월곶포구의 해산물, 수원 일대 평야의 쌀을 운반하던 해안 철도였다. 지금은 신도시 북단, 혹은 중앙에 위치한 군자역(현 4호선 정왕역), 원곡역(현 4호선 안산역)등이 모두 해안선에 맞닿아 있는 역들이었다.
서울과는 전혀 딴판으로 벚꽃이 활짝 피어있는 SK공장 동편 담벼락을 끼고 걷다가 09:50경 동양화학 공장에 다다랐다. 인천역에서부터 이곳 학익동 동양화학 공장까지의 수인선 선로는 1435mm의 표준궤인데, 이 말을 처음 들은 사람이라면 약간 고개를 갸우뚱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수인선의 궤간은 협궤, 즉 762mm로 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원래대로라면 이 구간의 선로 역시 협궤여야 하지만, 1973년 인천-송도간 수인선 열차 운행이 중단된 이후 인천-학익동 구간은 동양화학에서 매입해 표준궤를 부설해 화물열차를 운행시켜왔다. 그리고, 이 동양화학 공장 역시 얼마 안 있어 학익동에서 다른 곳으로 이주할 예정이라고 한다.
거대한 동양화학 공장의 울타리를 끼고 인도를 따라 계속 걷다가, 옥련동에 이르러 그토록 갈망하던 수인선 협궤선로를 만날 수 있었다. 지난 12월에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대부분이 땅에 묻혀버려 자동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지만, 최소한 밭이 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도로인지 철길인지 분간이 안되는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지 약 15분 쯤 지난 10:25, 꽃히 활짝 핀 벚나무 몇 그루와 그 밑에 화물트럭들이 늘어서 있는 공터, 그리고 그 공터 뒤편에 덩그러니 서 있는 하얀 건물이 보였다. 이곳이 바로, 지금은 모 광고기업에서 사옥으로 쓰고 있는 송도역 건물이었다. 과거 3차 답사 당시 다른 역은 몰라도 이 건물만은 한눈에 송도역임을 알아보았는데, 위에서 언급한 ‘인간시대’에 나온 송도역사의 모습이 아직도 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송도역전의 시장에서 챙이 둥그런 모자를 1만원에 사서 눌러쓰고 다시 길을 나섰다. 인도를 따라 걸으면서 본 수인선 철로는 인근 주민들의 텃밭이 되어 도저히 진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청학사거리를 건너면서부터는 아예 수인선 철로가 사라지고 구 철도청에서 수인선 복선전철화 공사를 위해 조성해 놓은 부지와 방음벽만이 있다. 그리고 이 부지에도 어김없이 인근 주민들이 정성들여(!) 가꿔놓은 텃밭이 가득 들어차 있다. 국유지이니 경작을 금한다는 철도공사의 경고판과 아주 좋은 부조화를 이룬다.
그 텃밭 사이에 난 좁은 통행로를 따라, 연수역(구 문학역) 건설 예정 부지에 이르렀다. 여기를 지나 좀 더 가면 사방이 아파트 단지다. 이른바 ‘인천의 강남’이라 불리우는, 그리고 수인선 지하화 문제로 계속해서 철도공사와 마찰을 빚고 있는 그 연수지구가 바로 이곳이다. 수인선 지하화 문제에 대해서는 굳이 이 기행문에서까지 거론할 필요가 없을 듯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의 수인선 부지로는 급행 운영을 위한 복복선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복선만으로 완급 혼합 운영을 하고자 한다면 전동차의 배차 간격이 매우 길어질텐데(특히 화물열차가 함께 사용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점을 철도공사가 어떻게 해결해낼지 꽤나 궁금하다.
원인재역에 이르러 잠시 멈추었다. 눈앞에는 인천인력개발원 학생들이 통학로로 쓰는 철교(정확히 말하면 철교로 쓰일 예정인 콘크리트 다리)가 있고, 그보다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승기천을 가로지르는 약 200m 길이의 붉은색 철제 철교가 있다. 이왕 답사를, 그것도 왠만해선 실제 철로 터를 따라 걷기는 힘들고 언제나 철로를 구경만 하면서 걸어야 하는 수인선 폐철로 답사라면 조금이라도 더 많이 수인선의 흔적을 직접 발로 밟아보고 싶다는 것이 23일의 내 심정이었다. 마침 지난 3차 답사 당시에도 저 폐철교를 무사히 종단해 본 경험이 있는지라,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수인선 부지를 벗어나 원인재역 지하도를 통해 승기천변으로 다가갔다. ꘘ
침목도 레일도 사라진 채 붉은 뼈대만 남은 철교를 아슬아슬하게 걸어갔다. 재미있는 것은 철교 곳곳에 ‘XXX 완주 성공!’ 따위의 낙서가 갈겨져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XX야 사랑해!’ 따위의 낙서는 여태 연애 한번 못한 ‘완전 솔로’인 나의 심정을 박박 긁어놓기에 충분했다.
무사히 승기천 철교를 건넌 뒤, 다시 수인선 부지를 따라 걸어갔다. 남동역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자 철도공사에서 닦아둔 수인선 건설 예정 부지는 끝이 나고, 여기서부터는 도로변을 따라 걸을 수 밖에 없었다.
#2. 2005. 4. 23. 오후.
예전에, 수인선 답사는 아니지만 한번 소래에서 연수까지 걸어본 적이 있는데, 당시 꽤나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남동공단 입구에 있는 ‘호구포’라는 ‘해안포대’였다. 멀지 않은 옛날까지만 해도 이 곳이 ‘해안’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나였으니 육지 한가운데의 해안포대 터는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정거장이었던 논현역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원래 논현역이라는 곳이 역사는커녕 플랫폼도 갖추어지지 않은, 손님이 “내려주세요!”라 말하면 내려주는 형태의 임시정거장이었던 탓에 결국 찾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옛 수인선 철로는 한창 개발중인 논현동 택지지구의 한가운데에 있는지라 더 이상 따라가지는 못하고, 택지지구 북쪽에 건설된 왕복 4차선 도로를 따라 소래초등학교까지 가서야 다시 수인선 철로를 만날 수 있었다.
13:35, 수인선의 그 어느 역보다도 잘 알려진 역인 소래역에 도착했다. 과거에는 염전으로 통하는 지선을 거느리며 수인선 최대의 해산물, 소금 집산지로 번성했던 곳이고, 때문에 다른 역들과는 달리 이 역에는 플랫폼이 두개나 있다(수인선에 플랫폼이 두개인 역은 그리 많지 않다. 현재 흔적이 남아있는 역들만 가지고 따져보면 소래와 한대앞, 두 역 뿐이다. 정식 정차장인 중앙, 어천, 야목역이나 종착역이었던 수원, 남인천역에도 플랫폼은 하나뿐이었다).
특히 역사와 플랫폼, 선로 등이 모두 잘 보존되어 있는데다가 수그루의 나무들이 만들어내는 풍경도 좋아(물론 쓰레기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많은 철도동호인들이 수인선 전체를 답사하지는 못해도 이곳은 한번쯤 찾아오며, 주말이 되면 아저씨, 아줌마들의 소풍장소가 되기도 한다. 나도 수인선을 답사할 때 마다 이 역에서만은 꽤 이곳저곳 샅샅이 살펴보는 습관이 있고, 이 날도 사방이 봉쇄된 소래역사를 찍으려고 틈이란 틈 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셔터를 눌러댔다(그래봐야 얻은 것은 별로 없지만).
한참동안 소래역에서 빙빙 돌다가 다시 길을 나섰다. 소래포구에 들어서서 나는 잠시 지갑을 확인해 보았다. 내가 집을 나설 때 가지고 나온 돈이 26,000원, 이 중 모자를 사는데 10,000원이 들었고 안산에서 찜질방 비용으로 7~8000원을 지출해야 한다. 덤으로 카메라 배터리 상태가 좋지 않아 여벌의 건전지를 사는데 대략 2~3000원 정도가 나간다. 이렇게 계산하면 최악의 경우 남는 돈은 4000원, 좋게 쳐도 6000원이다. 이 돈으로 23일 점심, 23일 저녁, 24일 아침, 24일 점심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소리다.
말이 되는가.
그런 내 눈길을 끈 것이 바로 소래포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막걸리 천원, 안주 무한 공짜’ 노점들이다. 안주는 바로 돼지껍데기 볶음. 문제는 내가 막걸리에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먼 길 걸어야 하는 나로서는 술에 취한다는 것이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꼬르륵 소리를 연발해 대는 배를 움켜쥔 채 소래철교를 향해 갈 수 밖에 없었다.
소래철교는 아직 공사중인 인천국제공항철도의 영종철교(가칭)를 제외하면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바다를 건너는 철교이고, 여기에 협궤열차가 다니던 철교, 소래와 월곶을 이어주는 준인도교 등 여러 가지 상징성을 가진 철교다. 소래와 월곶을 바로 이어주는 탓에 광명이나 서울에서 화영운수 1번, 11-2번 버스 등을 이용해 월곶까지 온 관광객(!)들은 소래로 건너가는데 반드시 이 다리를 이용하고, 여기에 바다 위에 떠 있는 다리라는 특수성 탓에 자연 다리 위에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나도 이 다리 위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어댔는데, 매우 불행하게도 사진을 찍던 중 카메라 전용 충전지가 완전 소진되었다. 미리 준비해 간 에X자이저 건전지로 갈아 끼우긴 했지만, 이 건전지도 얼마나 갈지 알 수가 없어 앞으로 사진을 ‘적당히’ 찍기로 했다.
거의 대부분 주민들이 외지인인 월곶에서 뜻밖에 어느 어르신의 도움을 받아 월곶역 터를 찾을 수 있었다. 월곶역을 지나 승기천 폐철교처럼 뼈대만 남은 철교를 건너 시흥 본토(?)에 도착한 후, 지도를 꺼내 펼쳐들고 달월역의 위치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우선 4차 답사를 떠나기 전 읽은 다른 이들의 답사기에는 달월역 터를 찾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난 3차 답사 당시 시흥차량기지 서편의 대로를 따라 걸었던 나는 그 달월역의 터를 찾을 수 없었다. 지도책에는 신설 수인선의 코스가 현 시흥차량기지의 동편으로 되어 있다. 인근 주유소 아저씨의 조언을 구한 나는 영동고속도로 월곶IC 진입로 밑에 뚫린 마을 진입통로로 들어가 계속 걸어갔다.
한참을 걸어가자, 마을 소로라 하기엔 ‘지나치게 넓은’ 길이 나타났다. 오이도역 방향으로 길이 나 있는 것을 본 나는 뭔가 확신을 가지고 길을 따라가 보았다. 다른 이들의 수기에는 옛 달월역 인근엔 민가만 몇 채 남아있을 뿐이라 했다. 오이도역 방향으로 걷다가 민가 서너채가 모여있는 곳에 이르러 밭을 가는 어르신들께 잠시 여쭈어보니 바로 그 민가 앞의 도로가 옛 달월역이 있던 곳이었다고 했다. 이곳에서 사진을 찍고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하필이면 길 중간에 폐건설자재 집하장이 있어 덤프트럭 수십대가 먼지를 풀풀 날리며 지나가는 통에 상당히 고생을 했다.
오이도역 동편 출구에 이르러 잠시 고민을 했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옛 수인선 터이지만 이 길을 따라 걸으면 가게는커녕 마을도 없고, 반대로 오이도역사를 가로질러 서편으로 가면 옛 수인선과는 조금 멀어지지만 반대로 시화신도시가 나타난다. 잠시 고민을 한 끝에 오이도역 서편 광장으로 나가 햄이 든 500원짜리 빵을 사 먹고 다시 걸어갔다.
하여간 지금 최대의 문제는 돈이었다. 답사는 무엇보다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고 체력은 충분한 영양이 보충되어야 유지될 수 있는데, 돈이 없다면 당연히 영양을 섭취할 수 없다. 그러던 중 내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내 INTEC 교통카드에 쓰여 있는 ‘이 카드는 국내의 직불카드 가맹점, CD/ATM기에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설마 이 카드에 충전해 놓은 돈을 빼 쓸 수 있다는 것일까. 카드에는 당시 무려 4만원이 넘는 돈이 있었으니, 지금 1만원정도 빼 쓰고 나중에 내 돈으로 1만원을 다시 채워 넣으면 자금 부족 문제는 충분히 해결될 것이었다(참고로 난 돈을 ‘없어서 못 가져온’것이 아니라 ‘계산착오로 적게 가져온’것이었다). 정왕역을 100m 앞두고 아픈 다리를 질질 끌며 다시 남쪽으로 500m를 걸어가 모 할인마트에 들렀다. 떨리는 손으로 현금지급기 앞에 서서 교통카드를 집어넣고 버튼을 눌러댔다.
결과는 실패였다.
결국 나는 단돈 4~6천원으로 앞으로의 식사를 모두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처지에 이른 것이다. 아니, 그 중에서 천원은 찜질방에서 샴푸 등을 구입하는데 써야 하니 이 돈도 없는 셈 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시식코너 전체를 휩쓸어 점심을 때우고 2150원짜리 알X바 건전지를 사서 다시 정왕역에 도착한 것이 17:00이었다. 3차 답사 당시에는 주변 상가의 전광판이 번쩍거려 꽤나 번화한 느낌을 주었지만 낮에 와서 보니 커다란 역사만 덩그러니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꽤나 황량했다. 더불어 할인마트에서 정왕역까지 오는 동안 내 다리는 엄청난 압력과 열 등으로 인해 상태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과거 수인선 군자역이었던 이 역의 이름이 정왕역이 된 것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애당초 구 철도청에서는 수인선 안산~오이도 구간을 전철화 개통하면서 이 역의 이름을 과거에 그랬듯 ‘군자’역이라 하고 현 오이도역을 ‘정왕‘역이라 예정이었는데, 문제는 이미 서울지하철 5호선에 ‘군자’역이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옛 수인선 군자역은 ‘정왕’역이 되고, 정왕역이라 명명하려던 역은 ‘오이도’역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4호선 ‘오이도’역의 명칭에는 이런 가슴아픈 사연이 얽혀있다(실제로 오이도역에서 오이도까지는 승용차로 15분 정도가 걸린다).
인천 연수지구에서도 그랬지만, 시화지구에서도 옛 수인선의 흔적, 그러니까 레일이나 침목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안산역을 지나서도 한동안 마찬가지다. 14:30경 월곶에서 마지막으로 수인선 철로를 본 이후 처음으로 수인선 철로를 다시 찾은 것은 그로부터 무려 4시간 하고도 30분쯤 지난 후 안산 원곡동에서였다. 여기서부터 초지동까지는 매우 위태로운 답사가 펼쳐지는데, 철로 위에는 온통 작물들이 심어져 있고 철로 바깥은 진흙이라 천상 침목을 징검다리마냥 밟고 이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공단역에는 수인선 역이 없고, 또한 공단역을 지나 조금 가다 보면 수인선 철로가 왠 흙더미에 깔려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
바로 이곳, 흙더미에 깔려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곳에 이르러 더 이상의 수인선 흔적 찾기를 포기하고 바로 고잔역으로 향했다. 19:50에 고잔역에 도착해 고잔지구의 모 할인마트 시식코너에서 저녁을 때우고 피씨방에 들러 하루 종일 찍은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후 찜질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하루 입장료는 찜질복 대여비까지 합해 7천원이었다.
#쪼가리. 2005. 4. 23. 밤. ~ 2005. 4. 24. 아침.
찜질방에 들어가 발을 살펴보니 상태가 심각했다. 물집이 이미 7개나 생겼고, 특히 시화지구에서 임시방편으로 터트려 놓은 두개의 물집은 터트린 것이 잘못되어 곪아가려는 조짐까지 보였다. 그러고도 물은 빠지지 않고 있어 고통이 심했다.
놀랍게도(?) 그 드넓은 찜질방에 바늘과 실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찜질방 내 매점 주인아주머니에게서 침을 빌려 물집을 찔러서 물을 빼내긴 했지만 실을 꽂는 것 만큼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결국은 절뚝거리며 다닐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수중에 남은 돈은 약 4천원, 이 중에서 다시 1500원을 슬러시 사 먹는데 써버렸다. 차라리 많이 남았다면 아꼈으련만, 돈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고 나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 먹은 것이었다. 슬러시를 다 빨아먹은 후에는 어기적거리며 수면실로 들어가 핸드폰으로 알람을 6:00에 맞춰놓고 잠을 잤다.
처음 잠에서 깨어난 것이 5시 경이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잠에서 깬 것이었는데, 온 몸이 쑤셔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고 좀 더 잘 필요도 있고 해서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난 것이 4월 24일 오전 07:30경이었다. 쑤시는 몸을 탕에 담근 후 08:30에서야 찜질방을 나섰다.
#3. 2005. 4. 24. 오전.
아침만은 먹을까 하고 잠시 고잔지구의 상가들을 둘러보았지만, ‘라면 2천원’의 압박에 결국 눈물을 머금고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광덕로를 따라 4호선 고가철교 밑에 다다르자, 고가철교 기둥 남쪽의 수풀더미 속에 희미하게 수인선의 레일이 보였다. 레일을 따라 한참 걸어가던 나는 엄청난 난관에 부딪쳤다. 내 키만한 가시나무들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물집 잡힌 발로 나무들을 짓밟고 앞으로 나가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광덕로까지 돌아가서 다른 길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길 하나를 무단횡단하면서 계속 전진하자 중앙역이 나타났다. 수인선이 운행을 중단한 지 10년이 되어가지만 중앙역의 수인선 플랫폼과 행선판, 역사 출입구는 여전히 잘 남아 있었다. 한가지 흠이라면 이 수인선 플랫폼에서 역사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지금은 중앙역 청소부 아저씨가 대걸레를 널기 위해 출입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중앙역을 지나서부터는 수인선의 흔적이 사라지기 때문에 다시 도로를 따라 걸었다. 월피교를 건너 가울길에 이르자 길 저편에 거대한 언덕이 나타났다. 저것이 바로 옛 수인선이 달리던 둑방이다. 횡단보도를 건넌 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둑방을 기어올랐다. 간신히 올라간 둑방 위에는 철로도 무엇도 없이 벚꽃잎만 흩날리고 있었다. 덤으로 이 둑은 저 앞에서 다시 도로에 의해 잘린다. 즉, 또더 생각할 것도 없이 둑방을 기어올랐다. 간신히 올라간 둑방 위에는 철로도 무엇도 없이 벚꽃잎만 흩날리고 있었다. 덤으로 이 둑은 저 앞에서 다시
간신히 철길을 가로질러 건너편 언덕에 도착해, 이번에는 정체조차 알 수 없는 덤불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해 가며, 10:00에 드디어 한대앞역에 도착했다. 잠시 역무원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핀 후 수인선 플랫폼과 계단으로 연결된 전철 플랫폼에 올라가 보았다. 10년 전에는 이 역에 최첨단(!) 전동차와 낡은 꼬마기차가 함께 정차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덧붙여 1995년 12월 31일 마지막 수인선 열차가 운행했던 구간이 바로 수원~한대앞이었다.
한대앞역에서 좀 더 걸어나가면, 4호선 열차는 고가철로를 따라 산본, 금정 방향으로 사라지고 수인선 협궤철로는 아래로 내려가 남하한다. 이 구간에는 고질적으로 뻘지대가 되는 곳이 있어 용신1교에 이르러 도로 위로 올라왔다. 집 앞까지 가는 301번 좌석버스가 눈앞에 아른거렸지만 굳세게 마음을 먹고 본오동의 상가지역으로 들어갔다. 김밥 한줄을 900원에 파는 분식점으로 들어가 라면과 김밥을 시켜먹은 후, 다시 용신1교로 돌아와 수인선 철로를 따라 걸었다.
플랫폼이 꽃밭으로 변해버린 사리역을 지나 반월들로 접어들었다. 아파트단지 뒤편에 펼쳐진 광활한 들판에 불어닥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걸어가니 그렇지 않아도 걷기 힘든데 참 죽을맛이었다. 그러나 사실 반월들에서 맞이한 바람은 참 얌전한 것이었다. 수원에서는 그야말로 서있기조차 힘들 정도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반월천에 걸린, 레일도 침목도 모두 제대로인 철교를 건너 화성으로 들어서서부터는 큰길을 벗어나서 수인선 철로를 따라 나 있는 마을 소로를 따라 빈정까지 도착했다. 빈정에서는 잠시 고생을 좀 했는데, 수인선 철로를 따라 걸어야 할지 도로를 따라 걸어야 할지 계속해서 갈등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당시에는 육체적으로 너무나 피로하고 정신적으로도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이성보다는 거의 본능에 의해 나아갈 길을 결정하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아직도 수원역까지는 무려 15km나 되는 길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빈정에서 야목을 지나 어천까지 가는 길에 발의 통증 말고도 나를 괴롭혔던 것이 목마름이었다. 빈정이나 야목에는 학교는커녕 외부 수도꼭지 하나가 없었다. 게다가 정오의 햇빛은 그렇지 않아도 까무잡잡한 내 피부를 더욱 검게 태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을에 들어가 물 한잔 부탁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내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평생을 살아온 탓일까, 시골에 가서도 물 한잔 부탁하는 것이 내키질 않는다. 물론 당시 내 상태로써는 그렇게 마을에 들어갈 시간과 힘이 있으면 차라리 수원까지 한발짝이라도 더 옮기는게 현명한 일이었다.
너무나 휑해서 울고 싶을 정도인 98번 국지도를 몇분이나 걸었을까, 마침내 저 멀리 매송면사무소가 보였다. 자꾸 감겨지는 눈을 뜨면서 필사적으로 매송면사무소를 향해 걸었다. 면사무소에 수돗가가 있었나 없었나 계속 생각했지만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간신히 면사무소에 도착했지만 불행히도 수돗가가 없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나는 결국 면사무소 뒤편 잔디밭에 주저않아서 잔디밭에 물주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마셨다. 물통에도 물을 한가득 받았는데 이 물은 원평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닥이 났다.
면사무소를 떠나 14:00에 어천역에 도착했다. 옛 어천역사 안에는 왠 아저씨가 살고 있어서, 괜히 어천역사 안에 들어가 보려다가 된통 혼이 났다. 무려 20분이 걸려서 원평에 도착해, 매송초등학교에서 원없이 물을 마시고 다시 길을 떠났다. 그렇게, 여러 가지 각종 밭에 둘러싸인 수인선 철로와 나란히 걸으면서 14:45경에 드디어 수원시계가 보이는 봉담읍 수영리 - 국순당 공장이 있는 곳 - 에 다다랐다.
#4. 2005. 4. 24. 오후.
그야말로 투혼을 불사르며, 초록불이 깜빡깜빡이는 횡단보도를 ‘뛰어 건너는’ 엄청난 용기를 보이면서 드디어 수원시계를 넘었다. 그러나 수원역까지는 아직도 7km가 남아있었다. 물론 이 7km 역시 내 발로 직접 걸어야만 하는 것이고, 또한 이 7km가 가장 험난한 구간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이 구간 답사의 정석(?)은, 일단 오목천동까지는 인도를 걷다가 오목천동을 지나면 철로를 따라 걷는 것이다. 오목천동 구간의 철로는 온통 진흙 범벅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수원여자대학 밑을 지나는 수인선 터널은 완전히 늪이 되어 있어 이 구간을 통과하고자 한다면 고무보트가 필요하고, 또한 오목천동에 있는 수인선 유일의 과선교 밑 역시 진흙투성이이기 때문에 1차 답사 때에는 무릎까지 빠진 적도 있었다. 이것은 이곳의 철로가 주변보다 지대가 낮은 탓에 물이 잘 안 빠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리 상태가 괜찮다면 저 ‘정석’을 따를 법도 하건만 내 다리 상태는 도저히 저 정석을 따를 수가 없는 상태였다. 철로를 따라 걷는다는게 말은 쉬워보일지 몰라도 철로 전체에 깔린 자갈을 밟고 가자면 발바닥이 좀 피로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은 오목천동을 지나 고색동에 들어서서 한참을 가서야 수인선과 나란히 걸을 엄두를 낼 수 있었다.
화려한 역의 그 어디에도 수인선 협궤철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번부터 9번까지, 9개에 이르는 플랫폼들은 모두 전철과 국철이 다니는 표준궤 선로들이다. 앞으로도 수원역에 그 협궤선로의 흔적이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다.ϨϨ͒Ǵꘘ͒Ǵꘘ
원래는 경부선을 가로지르는 수인선 철교가 있었으나, 1996년 이후 이 철교는 사라졌다. 결국 이 둑 역시 경부선 철도에 맞닿은 부분에서 끊어지고 만다. 결국 이 둑을 내려가 경부선 철로 밑에 뚫린 지하차도를 이용해 건너편까지 가야 한다.
문제는 바로 이 내려가려는 시점에서 벌어졌다. 평동벌에서부터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닥친 것이다. 서 있는 것은 물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의 바람이었다. 어서 둑에서 내려가야 하는데, 너무나 바람이 세차다 보니 내려갈 길을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은 발의 아픔을 감수하고 ‘뛰어내리다 시피’해서 둑 아래로 내려가야 했다. 그렇게 내려가서 거의 1분 동안 일어서질 못했다.
간신히 일어서서 평동 지하차도를 통해 경부선 동편으로 건너갔다. 선로 위, 혹은 선로 주변이 ‘경고’에도 불구하고 온통 밭이 되어 있었던 인천, 안산, 화성과는 달리 수원에서는 수인선 폐선로의 공원화 추진과 함께 선로 위의 모든 농작물 경작을 완전히 금지하고 실제로도 농작물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매우 흐뭇한 광경을 보며 수인1로를 따라 걸었다. 수인1로와 수인2로가 만나는 지점, 바로 그 건너편에 이상한 철제 쪽문이 하나 있다. 정확하게 수인선 폐철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곳이다. 바로, 수원역의 수인선 출입구다.
남인천역에서 출발한 52석의 꼬마기차는 바로 저 작은 철제문을 통과해, 뒤뚱거리며 수원역 구내로 들어섰을 것이다.
#마지막. 2005. 4. 24. 저녁.
아직 끝난 것은 아니었다.
우선 횡단보도를 건너 이 ‘쪽문’을 살폈다. 전에도 몇 번 와 보았지만, 쪽문은 이미 어느 레미콘 회사의 창고로 쓰이고 있었고 수인선의 흔적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인도를 따라 수원역 방향으로 북상했다. 수원역이 보이고, 육교가 보인다. 마지막으로 수원역의 사진을 찍기 위해 우선 수원역전으로 갔다. 너무 가까워서 역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 육교로 올라갔다. 이번엔 각도 문제로 역이 제대로 나오질 않는다. 육교를 건너 북상해 카메라를 들이대었다. 이번에도 사진이 그리 맘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또 다시 길을 건널 엄두는 나질 않았다.
2005년 4월 24일 18:30, 인천역을 출발한지 무려 30시간 15분만에 수원역에 도착했다.
찜질방에 있었던 시간을 제외하고 생각하면 23일 인천역에서 고잔지구까지 11시간 40분, 24일 고잔지구에서 수원역까지 10시간, 도합 22시간에 육박하는 기나긴 시간이었다.
이 화려한 역의 그 어디에도 수인선 협궤철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1번부터 9번까지, 9개에 이르는 플랫폼들은 모두 전철과 국철이 다니는 표준궤 선로들이다. 앞으로도 수원역에 그 협궤선로의 흔적이 나타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거추장스러운’ 흔적을 수원역은 완벽하게 제거했다. 나처럼 특이한 취미를 가진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한, 수원역이 그 쓸모 하나 없는 흔적을 굳이 누군가에게 보여 줄 필요는 전혀 없을것이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어, 수인선의 흔적이 아직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면, 수인선 열차가 드나들던 그 문이 어느 창고의 문이 되어버리지 않았다면, 수원역의 그 어느곳에 수인선 플랫폼이 있었을지를 짐작이라도 해 볼 수 있었다면…….
지나친 망상은 몸에 해로운 것일까.
그 망상을 뒤로 하고 집에 도착한 것이 19:40이다. 광명사거리역에서 집까지 걸어오는데 평소 2분 거리이던 것이 이 날은 무려 15분소요, 이보다 힘들게 집에 들어온 경우는 없었다.
수인선 답사는 언제나 거대한 후유증을 남긴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답사기 정리다.
개인적으로 동호회 카페에 수인선 답사기를 올릴때에는 언제나 정교한 안내도와 수십장의 사진을 첨부하는 탓에, 안내도를 준비하는데에만 꼬박 두시간 가량이 걸리고 이 수십장의 그림파일들을 일일이 링크해가며 글을 쓰는데에는 꼬박 대여섯시간이 걸린다. 제4차 수인선 답사를 끝낸 후 거의 3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철도동호회에는 답사기를 올리지 못했다.
두 번째 후유증은 바로 추가 답사 모의다.
지난 2, 3차 답사를 통해 엄청난 고생을 맛보았으면서도 결국 제4차 답사를 떠났던 것처럼, 지금도 5차 답사를 언제쯤 나서는 것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후유증은 그 어느 곳을 여행하면서도 느껴보지 못한 강력한 증상들이다.
그 강력한 후유증을 남기는 곳, 그곳이 바로 녹슬고 벌어지고 뜯겨진 철로와, 그 철로에 마구 자라난 잡초와, 철로 주변에 마구 생긴 늪지와, 철로 위에 마구 생긴 밭을 가진 수인선이라는 52km의 버려진 철도 노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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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시베리아님의 글은 정말 감동적(?)입니다... 그 불굴의 투지...로 험난한 길을 4번이나 가셨다니.. 시베리아님 수인선 답사기 보고 완전 답사기 팬된....(답사기 처음 읽을때부터...)
잘 읽었습니다..그리고 대단하십니다..^^
천지옹의 글은 정말로... 그 길을 또 가셨다니... 시험기간만 아니었으면 같이 따라갔을 텐데... 저번에 오이도로 MT(?)를 갈때 보니 4호선 안산일대에서 수인선 선로가 보이긴 했습니다. '제국외전(http://cafe.daum.net/hhjang)'도 그렇지만 이것으로 확실한 팬이 되었습니다.
레포트로 쓰실 것이면 0번항목에 수인선 부설의 역사적 배경과 광복후 쇠퇴과정을 간단히 정리해서 제시해 주면 더 효과적일 겁니다.
헉... 1,2,3차때 죽을고생을 하셨으면서 또가신겁니까?? 대단하십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얼마전 수원역에 가봤는데 수인선은 커녕 협궤 선로가 있었던자리를 모두 없앴습니다.. -_- 그런데 쪽문의 사진이 안나오다니 ㅡㅡ!! 언제 한번 쪽문찾으러 가봐야겠습니다..
고덕역// 그걸 생각 못했군요. ㅡㅡㅋ
수원역 수인선 플랫폼은 수원역사 남쪽 막힌 곳에 있었습니다. 경부선 표준궤 플랫폼과는 완전히 별도로 있었죠. 제 기억에는 열차 5~6량이 간신히 설 만한 짧은 플랫폼이 상대식으로 있었습니다. 한쪽은 끊겨 있었고 철길은 단 두 줄기였죠. 가로등까지는 봤던 기억이 나는군요.
제가 저번주 일요일 수원역쪽 수인선 답사를 갔었습니다. 이번년도 1월 1일엔 안산 한대앞역에서 내려서 답사를 해봤고 저번주엔 수원역쪽 답사를 해봤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수원역에서 오목천동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서 오목천동부터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흔적은 남아있으니 관심있으신분들은 한번 가보세요.
다만 안산쪽 선로는 주변 풀이 다 정리되고 답사하기가 쉬운반면에 수원쪽 선로는 풀에 파뭍혀 선로가 보이지 않는곳이 많습니다. 그 숲을 헤치며 가야하니..제가 키가 큰편인데 제키만한 갈대를 헤치며 카메라 울러메고 다녔습니다.; 한 두시간정도 답사했습니다. 수인선위로 KTX 고가선로가 지나가는 곳 까지요.
흠 근데 문제는 저 쪽문에서부터 더 이상 협궤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죠. 나중에 정식 답사기에서 자세히 말하겠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