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웅태 요셉 신부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마르코 12,1-12
포도원 사건이 주는 교훈 요즘 시골도 영농기술의 변화로 그런 풍경들이 차차 우리 눈에 사라져 가는 편이지만, 그래도 연세 많으신 분들은 시골에 "원두막".. 하면 옛날 농촌의 정서를 쉽게 연상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포도원"에 관한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가 시골의 풍경을 환히 알듯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쉽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가를 상식적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포도원"에는 모든 것이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경계를 표시하고, 도적을 막고, 들 짐승들의 내습을 막기 위해 울타리가 으례 만들어 있었고, 거기에는 으례 술통이 있었고, 포도를 밟아서 즙을 짜내는 술 만드는 틀이 있었고, 틀 밑에는 짜낸 즙이 흘러 들어가는 술통이 있었고 그곳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술을 저장하였으며 농부들이 그곳에 유숙하였으며, 수확기에는 도적을 망대에서 지켜왔습니다.
더구나 예수께서 하신 비유의 용어들은 이사야 5 ; 1-7 말씀의 반복과도 같은 내용의 용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 앞에 자기들의 비행을 꼬집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 듣고 분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점은 무엇이겠습니까? 1) 첫째,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원은 농부들이 일하기 쉽고 이익을 많이 얻을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을 정비해 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에게 세상을 주셨고 삶의 터전을 나름대로 주셨고 나의 삶을 주시고 계시다는 점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 하느님은 우리를 신뢰하신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멀리 떠나고, 포도원은 농부들에게 그 경영을 맡겼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리를 충분히 신뢰하시고, 우리 스스로가 무엇인가 나름대로 하게끔 우리가 선택하는 할 수 있는 인생을 삶을 자유를 주셨다는 점을 감사해야 합니다.
3) 셋째, 하느님의 인내를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번이 아니고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주인은 농부들이 진 빚을 지불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주인은 그들이 무엇을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호의와 인내로서 그들을 대우해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러한 인내와 호의로서 기다리십니다. 4)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의 의도를 저버린 곳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경고를 주십니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내와 호의를 저버리고 악용할 때 정의의 심판이 기여히 닥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불순종과 반항과 무관심에 대하여 오랫동안 참으시나 끝내는 심판의 처벌을 하신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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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마르코 12,1-12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교회의 본질은 하느님이십니다. 교회가 사랑인 까닭입니다.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인 까닭은 교회가 거룩한 사람들의 모임이라서가 아니라 모자라고 흠 많은 인간을 택하시어 거룩하게 만드는 하느님이 계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인 까닭은 사랑이 많고 화평한 사람들이 모인 덕이 아니라 섬기는 기쁨을 가르치고 낮은 즐거움을 일러주시는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도 모자란 것 투성이인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잘 할 것이라’ 믿어 주고 ‘대단 하구나’ 칭찬하시며 ‘해 낼 것이라’고 추켜 주십니다. 끝내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높이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사랑의 모습을 갖출 것이라 여기십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앎으로써 교회에는 평화가 풍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그분을 알고 따르는 우리에게 영광과 능력과 모든 힘을 주실 것이라는 진리를 아울러 밝히십니다. 그분을 앎으로써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욕망을 벗고 그분의 본성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뜻입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감히 주인이신 하느님께 도전할 수 있겠는지요? 은혜로 거저 얻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사랑하기를 아끼고 높이 우대받기를 바라고 우쭐댄다면 결과는 비참합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내가 그분께서 이르신 대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온 천지가 놀랄 일입니다. 내가 그분의 영광을 얻어 살아가는 일만큼 놀라운 일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열성을 다하여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앎을 더하며” “앎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신심을 신심에 형제애를” “형제애에 사랑을 더하는”일이 평화의 비법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꼭 실천해야 할 까닭입니다. 이 미련하고 우둔한 노력이 교회의 본질,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살게 할 것이고 이 끈질긴 수고와 인내가 사랑에 허약하지 않은 튼튼한 교회를 세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찬미와 영광의 주님께 감사 올릴 뿐입니다.
부산교구 장재봉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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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광수 야고보 신부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마르코 12,1-12
"포도밭"(마르 12,1-12) "어떤 사람이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세를 놓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되자 그는 소작인들에게서 포도밭 소출에서 얼마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 이 비유는 이사야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임의 포도밭을 노래한 사랑의 노래를 내가 임에게 불러 드리리라. 나의 임은 기름진 산등성이에 포도밭을 가지고 있었네. 임은 밭을 일구어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지. 한가운데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도 마련해 놓았네.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했는데 들 포도가 웬 말인가? "(이사 5, 1- 2) 이것은 사랑하는 임을 사모하며 부른 사랑의 노래이다. 임이 포도밭에 쏟은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지극하였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임이 손수 돌을 골라내어 좋은 포도 나무를 심었고, 망대를 쌓고, 즙을 짜는 술 틀까지 마련해 놓은 최상의 포도밭이었다. 얼마든지 많은 수확을 낼 수 있도록 모든 조건을 다 마련해 놓은 포도밭이다. 임은 포도가 송이송이 맺을까 하고 수확 철이 되어 가 보았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들 포도가 달려 있으니 임의 실망이 오죽하였겠는가?를 노래한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표현되고 있다. 즉 포도밭 주인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맺을 수 있도록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사랑을 쏟아 잘 가꾼 다음 소작인들에게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주인은 그 포도밭을 소작인들에게 포도 철이 될 때까지 잘 관리하도록 맡긴 것이지 넘겨준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주인이 믿고 맡긴 그 포도밭을 정성껏 관리하여 많은 결실을 맺도록 잘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이 정성스레 가꾼 포도밭이다. 또한 나의 가정이 주님의 포도밭이고 나의 직장이, 나의 본당이, 나의 사도직 장이 주님께서 나에게 관리하도록 맡긴 주님의 포도밭이다. 나는 주님이 맡기신 주님의 포도밭이 많은 결실을 맺도록 얼마나 잘 관리하고 있는가? 나의 몸을 함부로 또는 무리하여 병이 들게 하거나 또는 나의 가정과 직장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는가? 나에게 맡긴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는가? 자연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맡긴 포도밭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자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의 자연은 온갖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우리의 관리 소홀로 자연은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 주인이 정성껏 만들어 놓은 포도밭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떠나 갈 때에는 가장 신임하는 소작인에게 맡겼을 것이다. 그리고 쌍방간에 일정한 계약을 맺고 떠났을 것이다. "포도밭의 도조를 받아 오라고 종 하나를 보냈다."는 것이 그것을 입증해 준다. 주인은 포도 철이 되자 당연히 종을 보내어 도조를 받아오라고 보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소작인들이 그 계약을 위반한 것이다. 소작인들이 어떤 짓을 하였는가? 그들이 저지른 행동을 종합해보면 "첫 번째는 때리고 빈 손으로 돌려 보냈고, 두 번째는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세 번째는 이번에는 아예 죽어 버렸다. 마지막으로는 주인의 아들마저 잡아 죽이고 포도밭 밖으로 내어던졌다." 소작인들이 저지른 행동은 점 점 더 포악해져갔고 마침내는 주인의 아들마저 죽여버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행동들이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후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반복해서 저질러지고 있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동들이 그대로 재연되었다. 오늘도 우리 가정과 사회에서, 직장에서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악한 행동들이다. 순박하기만 했던 소작인들 (농부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끔찍한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저지를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해서 악한 행동들이 이렇게까지 발전될 수 있었는가? 이 소작인들이 이렇게까지 타락하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의 소유욕 때문이었다. 7절에서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것을 말해준다. 자기들 것이 아니면서도 자기들 것으로 차지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인간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하고 동물로 타락하게 만들었다. 즉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동물처럼 본능적인 욕구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타락한 모습이다. 인간이 어떤 욕심에 너무 집착할 때 눈이 멀어진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이성을 잃어 버리게 된다. 욕심에 집착할 때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인간 관계를 망쳐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욕심에 집착할 때 다른 것들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장님, 귀머거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무서운 짐승으로 돌변하게 된다. 더 이상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이 된다.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는 소유욕이야 말로 인간이 쉽게 빠지는 유혹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이 소유욕 때문에 일어난다. 부모와 자식간에, 친척간에, 친구간에 이웃 간에 등 모든 관계가 악화되는 원인은 "내가 차지 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이다. 이 욕심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였듯이 내 안에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알아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소유욕이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마음을 굳어버리게 만든다. 이번에는 주인의 입장을 묵상하자. 한번 당한 것도 분하고 괴심한 일인데 주인은 도대체 어떤 마음이길래 한번도 아닌 두 번 세 번 네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제 정신이 아니고서는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주인은 그렇게 당하하면서도 왜 그토록 보내시기만 하는가? 우리는 오늘 주인의 마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주인의 마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야 한다. 이런 주인의 마음이 없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벌써 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악한 행동과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아직까지 망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주인의 한 없는 이해와 용서와 인내의 덕분이리라. 주인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라는 말이다. 주인의 행동을 잘 나타내는 동사는 "보내다"이다. "보내다"는 동사가 5번 사용되었다. 보낼 때마다 사정은 점점 더 나빠졌지만 주인의 행동은 계속해서 보냈다. 나중에는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하는 아들까지도 보냈다.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에는 "알아 주겠지"하는 소작인들에 대한 기대와 신뢰심이었다. 주인은 소작인들을 끝까지 신뢰했고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인내하며 또 많은 희생을 치루어 가면서까지 기다려 주었다. "알아 주겠지" 라는 마음으로 보내고 또 보내는 주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어머니의 마음 아버지의 마음에서나 비슷하게 찾아 볼 수 있고 느껴 볼 수 있는 마음이다. 부모가 아니면 그 누구한테서도 나 올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자식에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다. 속는 것을 알면서도 또 돈을 보내고, 사람을 보내는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수 있을까?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말이 있다. "알아 주겠지" 하는 주인의 마음은 그렇게 손해를 보면서도 또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또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식을 이길 수 없는 부모의 마음이기 때문"이라는 말로밖에 설명 할 수 없는 것 같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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