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의 변신
김 선 구
볏짚은 시골농가에서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만드는데 쓰였던 재료이다. 새끼를 꼬거나 짚신을 만들고, 메주띄우기나 계란꾸러미 역할도 했다. 초가지붕을 덮기도 했고, 멍석과 망태, 가마니를 만들어 농사용품으로, 일부는 소여물로도 쓰였다.
요즘은 늦은 가을 교외로 나들이를 하다보면 벼를 수확해버린 논밭에 한얀 비닐로 싸맨 짚단들이 널려 있는 모습들을 보게 된다. 커다란 공 같은 물건들이 멋대로 굴러가다가 멈춰 선 듯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겨울 들녘의 설치미술.“ 추수가 끝난 농촌 들녘에 널려있는 원통형 모양의 포장 물들을 보고 어느 사진작가가 표현한 말이다.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그 모습이 마치 행위예술이 펼쳐 놓은 미술작품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것은 예술품이 아니고 겨울철 소먹이로 사용할 볏짚뭉치(곤포사일리지)들이다. 탈곡이 끝난 볏짚을 비닐로 포장하여 잠시 논밭에 방치해 놓았을 뿐이다. 황량해야 할 들판에 이런 구조물들이 널려있으니 나름대로 새로운 풍경을 연출한다고 할 수 있다.
오래 전 남부독일 알프스지역에 머물고 있을 때 일이다. 멀리 산을 등지고 푸른 초원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울창한 숲과 초원 그리고 그림 같은 집들이 어울려 사진속의 풍경화처럼 보였다. 국토 구석구석이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듯 잘 다듬어졌고, 목책으로 구획되어 있는 초원에는 소들이 한가롭게 풀 뜯고 있었다. 그 지방은 전통적으로 목축업과 초지농업이 발달한 곳이었다.
초원길 주변들판에 오리집처럼 낮고 작은 집들이 여기저기에 널려있는 모습들이 신기했다. “저 작은 집들이 뭐하는 거예요?“ 옆 사람에게 물어봤다. ”아 저것들! 목초를 비에 젖지 않도록 잠시 저장하는 곳이에요.“
목장에서는 겨울철을 대비하여 월동용 건초를 만드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풀을 말리는 도중에 비라도 맞으면 낭패다. 목초지의 작은 집들은 풀을 베어 말리다가 비가 내리면 목초를 잠시 피신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간이창고들이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도 목축문화의 한 자취로서 여겨진다. 그 때 초원에 널려있던 조그만 창고들의 모습도 하나의 전위예술처럼 보였었다.
농업은 그 지역의 지형과 기후조건에 따라 여러 가지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남부독일에는 산지와 구릉지가 대부분이고, 비가 많아서 풀들이 잘 자랐다. 풀이 풍부하면 소들에게는 낙원이라 할 수 있다. 초식동물인 소들은 풀을 양껏 먹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기 때문이다. 풀로 배를 채우고 천천히 되새김질 하는 모습을 보면 마치 여유를 부리며 망중한을 달래는 것과도 같다.
반면 우리나라의 소들은 가난한 집 자식들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유럽 소들이 좋은 목초로 배를 채울 때 한우들은 볏짚이나 산야초로 허기를 면해야 했다. 목초가 쌀밥이라면 볏짚은 초근목피라 해야 할까. 맛도 없고 영양분도 없으니 죽지 못해 먹는 꼴이었다.
우리나라는 지형 상 높은 산과 평야가 많다. 여름철에는 기온이 높고 일조량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다. 부산물로서 남는 것은 볏짚뿐이었다. 소를 농용으로 한 마리씩 키울 대는 산야초로 겨울철 먹이를 충당했다. 그러나 여러 마리를 사육하면서 농가에서는 소를 먹일 풀자원이 부족했다. 자연히 주요 부존자원인 볏짚을 어떻게 사료자원으로 활용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래서 연구개발한 것이 볏짚 곤포사일리지이다. 볏짚을 젖은 상태로 비닐 포장을 하여 발효시키는 것이다. 맛이 좋아지고 영양가도 높아지도록 만들었다. 비닐로 포장되어 들판에 널려있는 볏짚뭉치들은 발효과정에 있는 것들이다. 그 내부에서는 볏짚을 숙성시키기 위하여 미생물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여가를 이용하여 예술행위를 하고 있으니 볏짚들의 놀라운 변신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 때 우리들은 볏짚을 소 사료로 쓰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알프스지역처럼 초지를 조성하고 양질의 목초를 공급해주어야 올바른 사육방식이라고 주장했다. 산지를 개발하고 푸른 초원을 만드는 것이 축산 입국을 실현하는 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누천년 벼농사를 이어온 우리나라의 환경에 초지농업을 도입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는 목축기술개발. 그것이 볏짚의 변신을 유도했다.
발효된 볏짚은 소들의 입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 번 마술을 부린다. 볏짚먹인 한우쇠고기가 특등육이 되어 소비자들의 식탁에 오른다. 외국산 수입육을 따돌리고 소비자들로부터 크게 호평 받는다. 볏짚이 맛있는 쇠고기로 변신하여 우리의 음식문화에 기여하고 있음이다. 소비자들도 한 번 쯤 이 사실을 되돌아봤으면 한다. 볏짚의 변신은 우리나라의 유일한 축산문화가 아닐까!
첫댓글 오래 전에 쇠고기 수입이 개방되면 우리 나라 축산업은 고사할 거라며 강렬히 반대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이도 빗나간 예측으로 우리 축산업은 별 영향이 없었던 걸로압니다. 우수한 목초지를 이길 수 있는 지혜가 빛났겠지요?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벼는 인류의 생명 줄입니다. 특히 산이 많은 우리나라 에서는 벼 재배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 동안 피나는 노력으로 쌀은 자급자족 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미흡한 실정입니다. 특히 옛날의 볏짚은 상당히 귀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볏짚에 대한 변신을 다양하게 분석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