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각—인장 지식 대전 篆刻—印章知识大全 1
소스:이페어케이
인장 지식 대전
고대 도장의 기원
중국의 조각문자는가장 오래된 것은 은으로 된 갑골이 있다문, 주(周)의 종정문, 진(秦)의 각석 등 금동옥석(金銅玉石) 등 소재에 새긴 글자들을 통틀어 '금석(金石)'이라 부른다.새도장은 금석에 들어 있다.새인사의 기원이나 상대, 은대 등은 아직 정설이 없다.유물과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최소한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나타나 전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처음엔 상업적으로 물건을 주고받을 때의 증빙서류였다.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한 후, 도장의 범위를 권력자의 권익을 증명하는 법물로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확대하였다.
전국시대에 화해를 주장하다.종의 명상 소진패대6국 인쇄를 통해 최근 몇 년 동안 출토된 유물은 인장의 역사를 수백 년 동안 전진시켜 왔다.즉, 도장은 주나라 때 있었던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새인()은 대부분 옛 성곽의 폐허와 하천, 고분에 묻혀 있다.전쟁 중에 패전자가 망명하면서 버린 것도 있고, 전쟁 중에 순직한 사람도 전쟁터에 버린 것도 있는데, 당시엔 전쟁터에서 노획한 도장은 반드시 상납해야 하고, 관리가 자리를 옮기고 죽은 뒤에도 인끈을 벗고 상납해야 하는 관행이 있었다.관직과 같은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도 적지 않고, 길어인, 초형인 등 실물이 아닌 순장(殉葬)인 경우도 적지 않다.전국시대 토기와 표준양기에, 또 제후국의 금화에 도장으로 이름을 찍거나 장인의 이름이나 도기(圖記)의 성격을 적은 기호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고새는 선진인장의 통칭이다.우리가 지금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도장은 대부분 전국 고새다.이 고새의 많은 문자들은 지금도 우리가 알고 있다.주문 고새는 대부분 넓은 테두리를 두른다.인문필화는 모두 주조에서 나온 것이다.백문의 고새는 대부분 가장자리를 달거나 가운데에 계란을 세우고 글을 다듬었다.관새의 인쇄 내용은 '사마' '사도' 등 명칭 외에 여러 가지 불규칙한 형태가 있으며, 내용에는 길어와 생동감 있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인장의 역사와 감정
정아벌거정권이 백출하던 남북조(南北朝)를 지나니, 역사는 마침내 좁은 병목에서 벗어나 활짝 열렸다.그러나 고대 도장 예술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다시 빛을 보지 못했다.전순평통의 완정을 바탕으로 한 진한인풍은 80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구중문은 공인을 주물렀고, 공인은 실각하여 수백 년간 실용도로에서 기계반곡으로 번성해 온 문인들의 전각의 빛으로 가려졌다.
수당 도장의 혁신
수나라 때는 진나라에 이어,중국 고대 도장의 제도와 풍격의 또 다른 역사적 단계를 열었다.이 표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서신이 너무 이르기 때문에.이미 일상에서 전면적으로 물러나, 종이는 정부 공문서 등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공인은 더 이상 간략한 문서에서 얻을 수 있는 좁은 평면에 국한되지 않는다변 길이가 2.3㎝ 안팎(진한 1인치)에서 5.4㎝가량(수 2인치)으로 부쩍 커졌다.인체의 확대로 인해 진한시대처럼 직관명을 간각하여 관리 본인에게 패용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를 대표로 하는 관서에 보내는 것으로 직관인에서 관서로의 인인 전환이 이루어졌다.관인은 더 이상 지참하지 않고 갑으로 변하여 관청에 보관한다.
둘째, 인장이 아니므로다시 봉니를 단속하다 종이로 바뀌어 봉니시대가 끝나고, 규주시대가 도래했다.인주(보통 빨간색)가 나타났다.역시 눈에 잘 띄는 실용적 목적에서 공인이 진한의 음문에서 양문으로 바뀌었다.
셋째, 진한인 주요한두 가지를 주조하고 파내기 때문에 사용하는 모든 것은 빈틈이 없다.수나라 공인은 얇은 구리 조각을 구부려 인문을 만들고, 인면에 용접하기 때문에 반조인( 。條印)이라고도 하였다.그 인문이 구불구불하고 많은 것이 원곡 필도이다.후대는 넓은 인면(印面)을 채우기 위해 글자 획을 임의로 중첩시켜 구첨문으로 발전시켰다.
넷째, 진한 시대,관인은 결코 서금을 하지 않았다. 수나라 때부터 관서에 돈을 새기는 습관이 있었다.인쇄 대금이 있는 수공은 범견 3례를 모두 '관'과 같이 주조하였다.'양현인(陽賢印)', 등에끌어서 만든 '개황16년(596년) 시월15일조'다.
당나라 시대의 공인이 주로 계승되었다수인의 특징을 보고 약간의 발전이 있었다.
우선 보물이 떴다.'주기' 등 새로운 도장을 자명하다.
그 다음, 당초 인장단추수나라 때 한위에 가까웠던 코의 단추에서 송나라 때의 말뚝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코의 단추가 올라가면서 단추가 점차 세로 직사각형을 이루면서 발전했다.당나라 후기의 인장은 이미 사라지고 완전히 말뚝으로 변했는데, 예를 들면 서안 문물 고고학 연구소의 장당 천우부인 같다.
셋째, 글자의 뒷면에는 많은 해서체를 많이 새긴다.책인쇄문(書印文)은 당(唐) '무이(武異)현의 지인(之印)'과 같이 '배금각(배금각)' 5자로, 수(隋)공인( 。公印)과 같이 배인( 。印)을 새기지 않았다.
넷째, 새로운 것이 나왔다인장문류감장인과 재관인
송대 공인의 변천
송초백폐대흥, 관직한 때 5대 구인을 그대로 본떠서 사용하다.얼마 되지 않아 공인을 다시 주조할 때, 인문은 "新" 또는 "신주"라는 글자를 삽입하여 5대 공인과 같이 북송 태평흥국 5년 980년 "동관현 신주인" 등과 구별하였다.백관인은 일률적으로 구리로 주조하며 크기는 관계의 높낮이에 따라 구별된다.
송초기 인쇄본과인변은 굵고 세밀한데 이후 인변이 점점 넓어져 989년 '공성칠도우후기'처럼 인변은 인문보다 2배 가까이 0.1cm나 넓어졌다.남송경정원년(1260)에 이르러 '가흥부 금산방해수군통령인(嘉興府 金山防水軍統令印)'을 주조하였는데, 인변폭이 0.3㎝에 달한다.
송공인 인문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수인(隋印)처럼 번조(蟠條) 기법으로 직접 주조하여 인문(印文)의 획간은 수당( 。唐)과 같지도 않게 되었다.각 긴 손잡이는 이미 구멍이 나지 않았다.
수당 공인과 관계가 있다송(北)의 초기 공인은 '동관현(東關縣) 신주인(新主印) '배착( 背 。)'과 같이 태평흥국(太平興國) 5년9월주(五年九月主)와 같은 연금을 새긴 것이 많다.중기 이후에는 연금을 새기면서 주관을 겸하여 수여하는 기관인 '소부감(少府監)'이라는 명칭도 붙였다.가령 '바오제우(保捷濟) 백삼제육지휘사주기(白三男 六 。主記)'다.남송공인(南宋公印)은 문사원(文思院)에서 통괄하여 관리하게 되었는데, 그 돈의 액수 중 '소부감'이 '문사원'으로 대체되었다.
정강원년(112년)6) 정강지난 후 송나라 관리 창황난도, 인신도 유실되었다.남송은 또 공인을 다시 주조하였지만, 인문 앞에서 "행재행재"라거나, 관년호이별신구"("송사?")라고 하였다.여복지).
하요원금공인본양식
양송 시대와 중원은한족 정권이 대치하고 있는 것은 모두 소수민족 정권으로, 북방에는 요(遼), 서북에는 하(夏), 동북에는 금(金)이 있다.후에 요나라가 금을 멸망시켰고, 후에 상위에 있던 몽고인들이 다시 거리낌 없이 서하와 금을 수습한 후에 송을 멸송하여 원나라를 세웠다.이 네 소수 민족이 세운 정권과 왕조는 모두 공인 제도에 있어서 서로 다른 정도를 받았다송나라에 와서 공인을 찍어내는 제도의 영향이 나름대로의 독특한 특징을 만들어 냈고, 인문에 있어서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났다.서하공인(西夏公印)은 서하문(西夏文), 요(遼)원(元)공인(元公印)은 한문(漢文)으로 하고, 거란문( 契丹文)이나 팔사바문(八思巴文)을 쓰기도 하고, 금공인(金公印
1. 서하공인
서하(1038-1227년) 당항족이 세운 정권으로, 한자의 획을 흡수하는 특징이 있지만 한자와는 전혀 다르다.서하공인에는 다음과 같은 특색이 있다.
첫째, 중국고대공인은 기본적으로 정사각형이므로 송요금원(宋辽金元)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서하공인(西夏公印)은 원각(圓角)의 형식을 단독으로 사용했다.
둘째, 수당 이래.주문공인(朱文公印)이 유행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서하공인(西夏公印)은 모두 만백문(滿白文)으로 돼 있어 획이 굵고 테두리가 두툼하다.송(宋)나라에서 유행했던 구절문의 특징을 받아들여 인면(印面)을 고르게 배치했다.
셋째, 인문은 두 글자로 시작한다.6자까지는 차이가 있다. 그중에서 2-이자의 수령은 현존하는 서하공인의 9할을 차지하는 것이 가장 많다.'수령'이라는 두 글자는 서하문을 상하로 배치하였는데, 한나라 사람과 두 글자의 인을 좌우로 배치하였다.
넷째, 양송공인1반배출금 중에는 연월(혹은 아직까지도 정확하다)과 기구만 새겨져 있다.서하공인은 인배 왼쪽에 주인을 새겼는데, 월일도 기록하지 않고, 주물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단춧돌의 오른쪽 등판에 집인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한인의 공인제도에서는 볼 수 없는 일이다.때때로 서하공인이 등받이의 꼭대기에 있으면 서하문을 새깁니까?상(上)자, 송(宋)자의 영향임에 틀림없다.
2.요인 요나라
요(916~1125년)는 거란 사람들이 세운 정권이다.그 자손은 농업을 주로 하는 한인과 발해인, 그리고 목축업을 주로 하는 거란과 해 등으로 나뉜다.그러기 위해서는 요(遼)의 근본이 되는 곳에 알맞도록 하여 "계단(啓丹)을 국제로 다스리고, 한(漢)제(漢)제를 한(漢)사람에게 베풀자"(요사?)고 하였다.백관제)의 원칙으로 남쪽 관과 북쪽 관을 병행하는 제도이다.공인(公印)도 각각 한전문과 거란문을 쓴다.거란문은 또 거란대자와 거란소자로 나뉜다.
거란문은 요신책 5년(920년)에 한자 예서의 절반에 따라 증손된 것이다.1125년 김멸료(金灭遼) 이후 계속 사용되다가 김명창(金明昌) 2년(1191년)에 폐지되어 300년간 통행했다.명청대 이래 아는 사람이 없어 진정한 '절학'이 됐다.
3. 금조공인 금나라
금조(金朝, 1115~1234년)는 우리나라 동북부의 유서 깊은 소수민족인 여진족(女眞族)이 세운 것으로 남송(南宋)서하(西夏)와 정족(政族)으로 100여 년간 대치해 왔다.
김건국의 초기에는 료요벌송 과정에서 약탈한 료, 송관인이 사용되었다.정륭 원년(1156년) 해릉왕은 김조 관인을 개혁하고 습용의 요(遼)송(宋)구인(宋舊印)을 추징하였다.해릉왕과 김세종 때(11491189년) 금대공인(金代公印)의 전범으로 꼽히던 시절, 공인은 정예하고 외관은 반들반들해 기공이나 가시가 잘 보이지 않았다.금인(金印)은 보통 왼쪽에 소부감(少府監)·예부(禮部)·상서예부(尙書禮部)·행궁례부(行宮禮部) 등 조판기관 이름을 새긴다.우측 각인 연월.인쇄대 옆면에 문명과 인장을 겸한 번호를 새기다.서기 1200년의 금 "쿠프리겐 필자모극인", 인쇄대의 왼쪽 면에 "쿠프리겐 필자모극인", 인쇄 오른쪽에 연월 "영안오년윤이월", 왼쪽에 인쇄기관 "예부"를 새겼다.만들다.
김조 말기 우외환이 겹치면서 김정은은 군대를 늘리고 장교도 증설해야 했다.군직과 '동…'급 군사기관의 공인 수가 급증해 '동일한' 명칭의 공인은 순서대로 번호를 매길 수밖에 없었다.번호에는 오행(金, 木, 水, 火, 土) 시스템과 천자문(千字文, 天, 地, 玄, 黃, 宇…) 시스템이 두 개 있다.이 일련번호는 김말위소왕~애종시대(1209~1234년)에 주로 유행했다.
4. 원나라 공인
원나라(1271368년)는 몽골족이 세운 정권이다.그 공인은 한문인과 파스파문인 두 종류가 있다.전자행(前子行)은 파스파원(八思博文)이 반포되기 이전의 원나라 초기, 네이멍구쇼우(內蒙古昭愚) 다맹(達盟)성(寧城)현 랴오중경(遼中京)의 대명성(大名城) 유적에서 출토된 지원(至元):: 년(1265오) '무평현위사인(武平縣 。司印)'으로 인문(印文)이 표준한문구첩(漢文九 。)이다.
기원전 6년(1269년)에 쿠빌라이 국사가 파스파에게 병음문자 하나-파스파 문자, 이른바 '몽골 신자'를 창제하라고 명령한 이후 한자 구절문 공인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원래 티베트 라마교인 서슨파파 왕인 바시바가 창안한 새 글자는 요(遼)김(金)하(夏)문자처럼 한자와 인연이 있는 글자가 아니라 장문(藏文)에서 발전한 것이다.파스파 문인은 송인구첩의 특징을 받아들여 매우 균형이 잘 잡혀 있고 모서리가 뚜렷하다.겐바시 바웬이 공인한한 가지 큰 특징은 모두 한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파스파문을 식별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입니다.
원공인쇄면은 인변 폭이 넓어 인문필화 폭보다 610배 넓어진 것이 특징이다.반면 수당 송 초에는 인문과 인변이 종종 등폭이었으나 이후 인변이 계속 넓어졌다.
명청공인의 특징
명대(1368~)1644년) 황제, 왕부의 보배는 옥저전옥인(玉箸玉印)을 사용하였다.이런 전서 "필획 두 끝은 살이 차고 살이 잘 빠지며 끝은 날카롭지 못하다"는 것이 바로 "전서정종( 也書正宗)"이다.진풍(모인술).어보사(御寶舍)에 있던 송(宋)구첩이 구첩을 모아 당 이상의 옥저전(玉箸篆 。)을 소급한다는 것은, 구첩에 공인을 옭아매는 빙산이 느슨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 명대 내각인옥젓가락 문인, 직단추, 방일촌칠분, 두께6분, 장군 인용 유엽문, 평강, 평만, 정서, 진삭 등의 장군 인용 이무정문은 모두 은인호이다.
버튼, 사방 3인치 3분.두께는 9점. 나머지 백관인은 모두 구첩문, 동인직단추를 사용하는데, 이러한 인쇄의 비중이 가장 크다.고궁박물관의 장명홍무22년(1389년)에 '도안위도지휘사사지인(圖安衛都使之印)'이 지어진 것과 같다.
명대의 곧은 단추는 이미 두 송이가 달았다직사각형 모양의 다이얼이 위아래로 큰 타원기둥 모양으로 바뀌어 8㎝ 정도 높아져 후대의 속칭 '인장 손잡이'를 형성한다.명대의 관인배금 은 모두 연관과 일련 번호를 매겼다.
송지 양송지시, 구첩 중 소위 "九"는 "개략수"로, 극언할 때 많아도 확실히 아홉 겹이 있는 것은 아니며, 다섯 겹, 일곱 겹으로 되어 있을 수도 있고, 겹쳐서 한 글자 안에 가로로 그려진 층수일 수도 있다.그러나 명나라 때 구절문의 절대 다수가 확실히 9층의 횡화를 가지고 있다.
청대 백관인 등급 구역마찬가지로 엄격했고 도장이 커진 게 일반적이다.글씨로는 몽골문 해서 만문 한전 등이 있다.가장 흔한 것은 한만문 대조가 동시에 인면에 나타나는 점인데, 이것도 청공인의 큰 특징이다.이 중 한전에는 구첩(九文)의 글이 잘 발달하지 않아 옥저전(玉箸傳), 현침전( 。 悬 。), 유엽전(柳葉篆), 지영전(地英英) 등이 등장한다.
인장의 종류
도장의 종류는 아주 많은데, 기초가 있다본상에는 관인과 사인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관인: 관용도장. 역대 관인. 각기 제도로 이름이 다를 뿐만 아니라 모양, 크기, 인문, 구식에도 차이가 있다.인장은 황실로부터 수여받으며, 권력을 대표하여 관직과 작위를 구별하고 나타낸다.관인은 보통 사인보다 크고, 근엄하며, 사각형이 많고, 콧구멍이 있다.
사인: 관인 이외인장(章)의 총칭. 사인(私印)체제는 글자 뜻, 문자 배치, 제작 방법, 치인(治印)재료 및 구성 형식 등을 분류할 수 있을 정도로 복잡하다
1. 글자 그대로 다음과 같다.
이름표 도장:인문각인이름, 표 또는 호.한인은 이름이 일자(一字)가 많고, 그 삼자(三字)가 많으며, '印'이 없는 자(字)인 것이다.글자는 당송(唐宋) 이후부터 주문(朱文)의 두 글자를 정격(正格)으로 삼았는데, 성 밑에 '씨(氏)'자를 붙인 것도 있었다.현대인들도 필명을 새기는 경우가 있다.
재관인: 옛사람들은 늘 자기자신을 위했다.거실, 서재라는 이름을 붙이고 인장을 만들곤 했다.당(唐) 이심(李 印)이 '단거실(端居室)'이란 도장을 찍은 것이 이 도장의 최초다.
서간인:인문은 이름 뒤에 쓴다.'계사', '백사', '언사'를 합한 자.현대에는 '재배', '근봉', '돈수'가 있다.이 인쇄는 서간 왕래가 전용이다.
수집감상인: 이런 종류의 인은 많다서화 문물을 도장을 만드는 데 쓰다.그것은 당나라에서 생겨서 송나라보다 낫다.당(唐) 태종(太宗)은 '정관(貞觀)', 현종(玄宗)은 '개원(開元)', 송휘종(宋徽宗)은 '선화(宣和)'로 각각 어장서화에 사용되었다.수집류인 인도카는 "수집", "보관", "장서", "장화", "진물놀이",밀완도서.감상 종류에는 감상, 진상, 청상, 심상, 훑어보기, 안복 등의 글자가 많이 붙는다.교정상에는 '교정', '고정', '검정', '감정', '증정' 등의 글자가 많이 인쇄되어 있다.
길 어인: 인문이 길한언어. 한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이', '일리', '대행', '장락', '장행', '장부', '의자손', '장강수', '영안녕', '일입천석', '일리천만' 등이 모두 이에 해당한다.진나라 소새에 작물이 있다"고 했다.병제, 영강휴, 만수녕"이라고 적었다.성명에 길어를 붙이는 사람도 있어 한나라 때 양면에 찍혔던 것으로 보인다.
고사성어인: 한장 따위에 속한다.. 인문은 고사성어, 시어, 또는 푸념, 풍월, 불도 등의 말로 새겨져 있으며 일반적으로 서화 위에 도장을 찍는다.성어인 인은 송원(宋元)에서 성행하여, 전가상도(傳家相道)에는 '현자후락이락(賢者後樂一)', 문가(文嘉)에게는 '조석여이가명(趙錫如以嘉名)', 문팽에는 '아노팽(我老彭)'이소(異骚)과 함께 전해진다.어, 웃음을 금할 수 없다.성어의 입인은 진한길 어인(語印)에서 변천하여 온 것으로, 한 때의 놀음에 따르되, 그 의미심장하다 하여 마음대로 억측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쇼형인: "상형인''도장이 새겨진 도장'도장 도장'.고대에는 초형인(昭形印)에 보통 인물, 동물 등의 도상이 새겨져 있으며 취재가 다양했으며, 용·봉·호랑이·견·말·어·새 등이 있어 고박으로 승리하였다.초형에는 백문이 많고, 어떤 그림에는 글자가 더해져 있다.한인(漢印)에는 이름(名名)에 용호(龍虎) 또는 '사령(四令청룡백호주작현무)'이 많이 붙어 있다.
서압 인쇄: "화압 인쇄"라고도 한다."꽃을 조각해 이름을 쓴다는 서명이 붙어 있어 모사하기가 쉽지 않다.이런 인신은 송나라 때 시작되어 일반적으로 테두리가 없다.원대에 성행했던 것은 대부분 직사각형이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을 새기고, 아래에 파스파 문자나 화압을 새겨, '원압'이라고도 하였다.찌르세요"라는 글을 올렸다.
2.문자선상에서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백문인주문인주백상간인쇄 회문인쇄
3. 만드는 법부터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주인착인탁인분사
4. 치인재료로부터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금인, 옥인, 은인, 동인철인, 상아인, 코뿔소인, 수정인, 석인 등오늘날 사람에게는 아직도 목질도장플라스틱도장이 있다기계 유리 도장 등.
5. 구성 형태상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일면인,이면인,육면인,자모인쇄
인장의 감상
인장의 미학적인 가치는 귀결될 수 있다두 가지 측면: 인장의 예술미와 인장의 재질미.인예의 아름다움은 네 부분으로 분화할 수 있다: 인문, 인금, 인보 및 인장。
인문의 감상
인장 문자를 감상하려면, 먼저 기예를 파악해야 한다.표현 수법의 특징, 예를 들면 서예, 장법, 칼법,다시 인문의 내용에 내포된 감정을 체득해야 한다재미와 의미를 종합하면 자세히 감별할 수 있다천천히 감상하라
서예
뛰어난 인예가들이 서예를 중시해 온 점을 감안하면 '무일오필(無一 。筆)'은 인문의 감상적 가치를 담보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다.서예는 글씨 쓰는 예술인데 글씨도 못 읽으면 무슨 예술감상이라도 할 수 있단 걸 알고 있다.도장이 역대 지식인들에게 추앙과 사랑을 받았던 것도 바로 그의 어려움, 그의 고난이 불러온 도전의 유혹이었다.손에 잡히는 것은 도전적이지도, 유혹적이지도, 감상의 가치도 없다.감상자에게는 인식과 전서가 우선이다. 전자는 처음에는 낯설어 보이나 배우기는 쉽지만 정통하기는 어렵다.전자는 형(形)을 중심으로 발전해 나중에 의상으로 변모했지만 그 근원을 파악하면 늘 유형의 자취를 따라갈 수 있어 처음부터 미술성을 갖추고 있었다.
장법
인문법은 바로 글자와 글자, 행과 행 사이의 위치 배치와 배치를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방법입니다.도리에 맞는 장법은 고품격의 향락을 선사하고, 도리에 맞지 않는 장법은 한눈에 봐도 그 바탕이 부족하거나 짝퉁임을 알 수 있다.장법의 기본적 요구는 균형 있고, 성실하고, 대범하고, 단정하며, 한인장법은 대부분 여기에 기초하고 있으며, 더욱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고, 정취를 추구해야 비로소 협의하고 음미할 수 있다.
칼질
옛사람들은 구리를 파고 옥을 새겼는데, 그 공로가 매우 깊고, 그 과정이 비교적 복잡하다.좋은 돌은 특히 힘을 받기에 적합하며, 양지의 붓놀림이나 철필이 행해진 곳과 같이 비듬이 어지럽고 자연적으로 붕괴되는 효과를 나타내며, 선의 흔적은 고풍스러우면서도 힘찬 금석 같은 느낌을 준다.칼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돌격돌칼과 절도입니다.칼 행진이 쾌활하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면서 서예의 탁 트인 붓놀림처럼 우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칼 행진이 더디고 짧은 조각칼로 연속으로 자른 발자국은 마치 서예의 떫은 붓처럼 강렬하고 온건한 기상을 드러낸다.때로는 두 가지 칼질을 결합해 사용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정취와 의미
우리는 역대 많은 문학가, 시인, 서화가들이 모두 인장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고, 많은 인인들이 동시에 시서화 제작도 겸하고 있으며, 그들이 종종 고사성어, 시와 사의 가구 또는 비속어를 사용해서 한 장의 내용으로 삼았는데, 종종 기이하게 승리할 수 있어 정취가 넘친다는 것을 알고 있다.우리가 이런 어구를 감상할 때, 또한 흥미진진하고 흥미진진하다고 느낄 것이다.
변두리의 감상
변형, 즉 인장면이나 둘레에 새겨진 이름, 연월 등의 문자 기록이다.종정 등의 명문에 따르면 '형은 음자오입자, 식견은 양자출입자'라 하지만 인장 영역에서는 음양을 불문하고 변형 또는 단식으로 통칭하기 때문에 인장 양문을 '변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드물다.
상고인장 극소서금, 쌍칼행서금(雙 刀行書 彭)으로 풍토를 일으킨 문팽은 이후 인가(印家)들이 제각각 실력을 발휘하면서 도장 모서리가 인장예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급부상하는 등 회화발(發) 같은 역할을 했다.인가들의 뛰어난 칼질과 뛰어난 서예 경지를 엿볼 수 있는 단면도 있다.
인감도장은 서예비첩의 예술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 외에도 매우 높은 문학성을 가지고 있다.일이나 서정을 기억하거나 재담하거나 품위있게 읽으며 옛 감정을 곰곰이 되새길 수 있다.'방촌간, 기상만만'이란 단지 인문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형식에도 적합하며, 둘 다 금주옥탁의 미묘한 감각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사람을 끌어당겨 끊임없이 연상하게 하며, 우리에게 무궁한 의미를 가져다 준다.
인보의 감상
인보는 인문 및 형식상의 기재체이다.관제탑의 정교한 인보는 뛰어난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다.인보(印報)의 관제탑은 청도광(淸道光) 이전에 인니주탁인장(印泥朱拓印章)만 사용되어 탁본( 。 。)이 인식되지 않았으며, 서령인(西 印章印) 예술이 번성하던 말기에 이르러서야 임운루(林雲樓)가 탁비첩( 拓 。 。 。 。 。)의 방법으로 인보(印報) 뒤에 놓였다.그 후 모두가 본받으러 와서 더욱 기풍이 되었다.인보(印報)의 관제탁은 밑글을 찍어내는 관제주( 朱朱), 인감(印印) 형식의 묵탁(墨拓) 등 두 단계로 나뉜다.유주도장은 반드시 우수한 인주를 골라 써야 한다. 좋은 인니는 섬세하고 광택이 나며, 기름기가 빠지지 않고, 변질되지 않고, 두껍고 고른 입체감을 지녀야 한다. 인보는 오래 지속되어 새롭고 화려하다.묵탁 인쇄는 조작이 비교적 복잡한데, 한편으로는 숙련된 기예가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는 시간을 파악해야 하며, 세심함과 경험이 필요하다.인보의 제작은 일반적으로 선탁묵의 제작, 후각주인, 후도묵의 제작, 또 묵탁과 밀랍 탁으로 나뉘는데, 밀랍 탁보다 정미하고 분명하여, 일시적 긴급한 수요에 대응할 수 있을 뿐, 악보 제작에 적합하지 않다.먹빛이 짙고 '오금탁'과 '매미익탁'으로 구분되는 묵탁은 전자에 비해 강렬하고 광택이 있으며, 후자는 담백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지 않다.인보전탁의 좋고 나쁨은 인문, 인쇄금액의 표현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에 "각지공토, 탁지공4"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인보관탁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참고로 인보는 탱아 장정을 하였으며, 종이는 정피면선, 단선 또는 연사지를 선택하여 매 인쇄마다 주 단선, 주단 현묵이 서로 어울려 보는 것이 매우 좋으며, 관상은 물론 임습과 토론도 할 수 있어 사람들이 즐겨찾기에 귀중한 물건이 된다.
도장 디자인의 예술성
인장은 예술품으로, 하나는 외형 디자인, 즉 인뉴의 디자인, 주조 기예, 그리고 후기에는 한 차원 높은 심가공 기예, 두 가지 측면에서 가치를 나타납니다.둘째는 인면문자의 서예와 조각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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