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총 기준 세계 1위 기업 애플(Apple)을 일구어낸 미국의 천재적 기업가 고(故)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말했다.
“고객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
고(故) 스티브 잡스 ⓒBen Stanfield/flickr
그가 죽기 직전까지 고수했던 독특한 경영 철학은 고객이 원하는 것에 맞춰 제품을 개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제품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기업은 제품이 가져다줄 사용자 경험에 대한 가치를 정확히 알 수 있지만, 고객은 근시안적이므로 제품의 가치를 미리 알 수 없다. 따라서 기업은 일단 자신이 생각하는 최고의 제품을 만든 후, 이것이 정말로 완벽한 제품이라는 것을 고객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시장조사를 통해 고객이 원하는 기능이나 서비스가 무엇인지 파악한 후, 이를 바탕으로 제품을 개발한다. 고객 불만 사항을 체크해 고객이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내고 이 점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 기업에게 있어 고객의 요구는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것이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경영 전략인 것이다.
그러니 감히 고객을 가르치려드는 잡스의 오만함은 다른 기업들의 비웃음만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자신의 고집을 지키면서 출시하는 제품마다 대박행진을 이어갔고, 결국 오늘날 수많은 경영학도들의 연구 사례가 되었다.
테스코 슈퍼마켓 ⓒNinian Reid/flickr
영국 기업형 슈퍼마켓(Super SuperMarket, SSM) 테스코(Tesco) 그룹의 회장, 리처드 브로드벤트 경(Sir Richard Broadbent)은 지난 2011년에 회장직에 취임했다. 그가 그룹의 경영 혁신을 선포하면서 인용했던 것이 바로 잡스의 경영 철학이었다. 슈퍼마켓이 주력 사업인 테스코가 가전제조사인 애플을 표방하면서 고객을 가르치겠다는 것이었다. ‘고객 중심주의’를 과감히 버리고, 슈퍼마켓 회사에게 가장 중요한 재고관리는 물론 판매활동까지 ‘기업 중심주의’로 나아가겠다는 야심찬 선언이었다. 당시 최고경영자였던 필립 클라크(Philip Clarke)에게 이 같은 혁신을 이루어낼 전략을 수립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결국 클라크 체제에서의 테스코는 이전과는 180도 달라진 기업으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테스코의 맞춤형 쇼핑유도 서비스
테스코는 2011년부터 혁신을 위한 2대 비밀 전략 개발에 착수했다. 바로 ‘기후예측을 통한 재고관리’와 ‘고객의 구매 패턴 분석을 통한 맞춤형 쇼핑유도 시스템’이다. 이 두 개념에는 사전 예측을 통해 기업이 선제적으로 공급 사슬을 제어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테스코는 2013년부터 기상청의 기후 예측 데이터를 통해 날씨, 특히 지역별 온도를 예상하고, 이에 따라 해당 테스코 매장이 보유한 상품의 재고를 조절했다. 예를 들어, 여름철인 8월에 기온이 1도 상승할 때마다 런던 남부 지역에서 빙과류와 야외 바비큐 도구 매출이 약 4% 증가한다는 데이터 아래, 기온 예측이 가능한 3일 전부터 해당 지역 매장에 관련 제품 재고를 4% 늘린 것이다.
테스코 맞춤형 서비스의 핵심인 클럽카드 스마트폰 앱. <출처: 테스코 홈페이지>
2014년 6월부터는 자사의 포인트 적립식 멤버십카드인 클럽 카드(Club Card)의 데이터를 이용해 고객이 언제 무엇을 얼마나 구입 했는지 파악하고, 영양균형 등을 분석해 다음에 쇼핑할 때는 특정 제품의 구매를 줄이도록 안내하고, 필요한 제품이 무엇인지 권장하는 서비스를 전국적으로 실시했다. 예를 들어, 고객이 지난 수주간 너무 많은 당분과 지방을 섭취한 사실이 클럽카드 데이터에 저장되었다고 하자. 이 고객이 그다음 주 매장에 방문해서 탄산음료나 감자튀김을 사기 위해 해당 매대로 걸어가면, 클럽카드 앱이 고객의 스마트폰에 ‘위험하다’는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대신 부족했던 식이섬유와 필수 비타민 섭취를 늘려야 한다며 고객을 유기농 과일 코너로 안내하는 것이다.
테스코 측은 “고객들은 건강한 식단을 원하지만 자신이 직접 다이어트 상황을 체크하고 관리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가 대신 관리해주길 바라고 있다. 클럽카드로부터 얻는 구매 패턴 데이터를 이용해, 우리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고객의 건강을 챙길 것이다”라며 서비스의 취지에 대해 설명했다.
클라크 씨는 쇼핑유도 서비스 개발에 애플의 철학이 도움이됐다고 밝히면서, “많은 이들은 슈퍼마켓이 고객에게 이것저것 지시하고 간섭하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진정으로 고객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면 고객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조언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구글(Google)의 광고 기술은 인터넷 사용자의 방문기록을 수집해 고객의 취향과 가장 유사한 내용를 광고로 보여주는 반면, 애플의 지니어스(Genius) 기술은 고객의 패턴을 분석해 오히려 고객이 모르던 새로운 것을 권한다. 테스코는 지니어스의 기술을 서비스 롤모델로 채택했다. 클라크 씨는 “구글의 광고 방식이라면, 고객이 콜라를 많이 구매해왔기에 다음에도 콜라를 구입하도록 유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고객이 많이 구입한 제품이 고객에게 가장 득이 되는 제품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고객의 이익을 위해 우리의 매출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애플 지니어스 ⓒpanache2620/flickr
스마트 쇼핑, 소매시장으로 확산되다
고객의 구매 패턴을 분석해 특정 제품을 권장하는 맞춤형 쇼핑유도 서비스는 테스코에서 최초로 시도했지만, 오늘날 영국에서는 슈퍼마켓 같은 대형 유통업체는 물론 백화점, 온라인 쇼핑몰, 식당에 이르기까지 대유행이다.
스마트폰으로 구매해야 할 제품을 안내받고 있는 테스코 쇼핑객. <출처: 테스코 홈페이지>
사실 소비자들은 기업이 무언가를 사지 말라고 만류하거나 특정 제품을 사라고 권유하는 것에 쉽게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서비스가 기업의 매출에 악영향을 끼칠 수 도 있다. 그런데 어떻게 영국에서는 소비자들의 큰 반발 없이 이러한 서비스가 정착될 수 있었던 걸까? 여기엔 정부의 역할이 컸다.
영국 보건부는 비만, 당뇨 등 성인병 발병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가운데, 국민의 건강을 배려하는 테스코를 사회적 공헌을 하는 기업의 모범 사례로 지목했다. 그리고 다른 기업의 동참을 호소하는 ‘기업의 자발적 사회책임 공약(Responsibility Deal, 이하 RD)’을 공표했다. RD는 식품과 음료를 대상으로 유통업체에 저칼로리 등의 건강한 식품으로 제품 포트폴리오를 대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직접 제조업체에 식품의 원료와 조리법을 바꾸도록 강요할 수 없으므로 유통업계가 자발적으로 건강에 위해를 가하는 제품을 차별하는 ‘필터링’을 하게끔 유도한 것이다. 테스코를 포함한 영국의 관련 업계 최대기업 47개 사가 자발적으로 RD에 가입했으며, 영국 산업부인 기업혁신기술부까지 파트너십을 체결할 것으로 알려져, RD 대상 산업은 식품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재 전체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영국 소매산업협회(British Retail Consortium)의 기업규제 부문 담당이사인 톰 아이언사이드(Tom Ironside) 씨는 테스코와 보건부가 주인공인 RD 사업에 대해, “기업이 매출을 희생하면서까지 고객의 건강을 배려하는 바람직한 일”이라며 칭찬했다.
다만 수요를 자의적으로 제어하는 개념을 환영하는 소매업체와는 달리, 소매상에 제품을 공급하는 제조사들의 불만은 크다. 컨설팅업체 이노베이터 캐피털(Innovator Capital)의 멍고 파크(Mungo Park)씨에 따르면, 영국 유통업계 관례상, 계약에 따라 소매상에 납품된 식품이 판매되지 않았을 때 전량의 회수 책임은 제조업체 측에 있기 때문에 소매상 입장에서는 특정 상품이 안 팔리더라도 금전적 피해가 거의 없다. 때문에 매장 내에서 고객이 자유 의지로 제품을 고르는 것이 아닌, 매장 측이 특정 제품을 고르도록 유도하는 것은 특정 제조사의 매출을 하락시키는 차별 행위인데, 이 같은 차별을 하더라도 소매상의 매출에는 악영향이 없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또한, SSM은 물론 백화점 같은 종합매장들은 특정 타입의 상품을 전체의 몇 % 항시 유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재고 포트폴리오 구조가 정해져 있으며, 납품업체와의 B2B 계약 시에도 판매량에 따라 전체 포트폴리오 내 비중을 보장하게끔 되어 있다. 따라서 유통업체 측이 특정 제품의 재고를 직접 줄일 때 발생하는 계약상 불이익을 감수하기보다는 고객을 조종해 실제 판매량을 조절하는 것이 납품업체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소매상이 제조사를 대상으로 ‘갑질’을 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 목록 테스코 밸류 제품 ⓒben dalton/flick | 테스코 밸류 제품 ⓒTJStamp/flickr |
테스코의 경우, 영양균형 등 건강상의 이유 외에도 ‘이것보다는 저 제품이 더 싸다’는 식으로 경제적 이유를 들어 고객을 동종 저가 제품 구입으로 유도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자사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편법으로 악용될 여지가 있다. 테스코가 OEM으로 자체 운영하는 저가 브랜드 ‘테스코 밸류(Tesco Value)’는 제품당 이익 마진이 타 브랜드에 비해 많게는 5배 이상 차이가 나며, 이 같은 자체 브랜드 OEM 제품은 전량 테스코 측에서 재고를 소유 및 관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간접적 방법을 통해 자사 브랜드 제품의 구매를 유도해 납품업체를 견제하고 자사 영업이익률을 높인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유통업의 기본은, 수요와 공급을 적절하게 제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요를 예측함으로써 고객의 선택권에 직접 간섭하려는 시도는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고객이 왕’이라는 신념이 절대적인 우리나라 시장에서는 큰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는 경영 전략일 것이다. 테스코가 영국에서 업계 최초로 이러한 전략을 도입한 것은 당시 금융위기의 정점에서 매출 감소로 인한 위기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모험은 성공을 거뒀고 고객들의 큰 반발 없이 오히려 시장의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서비스의 천국이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소비자의 필요에 대한 기업의 선제적 대응방식이 정착한다면, 과연 어떤 기발한 서비스들이 등장하게 될지 기대된다.
'2016 한국이 열광할 12가지 트렌드' 시리즈 보기 (9/21)
- 재창조(Recreation)
- 디스럽터(Disruptor)
- 온디맨드(On-Demand)
- 캐시 프리(Cash Free) 발행예정 2016.01.22
- ‘벤모해!’로 통하는 뉴요커들 발행예정 2016.01.22
- 현금이 사라지고 있는 덴마크 발행예정 2016.01.25
- 비밀번호로 식사를 해결하다 발행예정 2016.01.26
- 은행의 한계를 뛰어넘은 모바일 머니 발행예정 2016.01.27
- 출처
- 2016 한국이 열광할 12가지 트렌드
- 전 세계 85개국에 흩어진 KOTRA의 주재원들은 2015년 한 해 지구촌 곳곳에서 새롭게 떠오른 시장과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던 상품과 서비스, 기발한 소비자들을 목격하고 취재한 정보를 담은 책. 주재원들이 직접 각 나라의 시장에서 뜨고 지는 상품을 접하며 그 나라 소비자들과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세계의 지금을 정확하고 생생하게 소개한다.
- 책정보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