同行 / 신경림
그 여자는 열살 난 딸 얘기를 했다
그 신고 싶어하는 흰 운동화와
도시락 대신 싸 가는 고구마 얘기를 했다
아침부터 가랑비가 왔다
명아주 깔린 주막집 마당은 돌가루가 하얗고
나는 화장품을 파는 그 여자를 향해
실실 헤픈 웃음을 웃었다
몸에 밴 그 여자의 비린내를 나는 몰랐다
어물전 그 가난 속에 얽힌 얘기를 나는 몰랐다
느린 벽시계가 세 시를 치며
자다 일어난 밤대거리들이 지분댔다
활석 광산 아래 마을에는
아침부터 비가 오고
우리는 어느새 동행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그러나 우리는 서로 묻지 않았다
-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 1975
벽 너머 남자 / 김해자
가끔 공동수돗가에서 만나면 사알짝 웃기도 했는데,
마당 끝에 있는 변소 앞에 줄 서 있기라도 하면
출근길 그 남자 미안한 듯 고개 숙이고 지나갔는데,
어느 차가운 밤 골목 입구에서, 고구마 냄새 나는
따뜻한 비닐 봉다리 안겨주고 도망가기도 했는데,
충청도 어디 바닷가에서 왔다던가 사출공장 다닌다던가
기침 소리, 라면 냄새 다 건너오던 닭장 집, 얇은 벽
너머 함께 살았지. 벽 하나 사이 두고 나란히 누웠던
그 남자 느닷없이 죽어, 하얀 보자기 씌워져 실려
가고서야 알았지. 세상에 벽 하나 그리 두터운 줄
벽 하나가 그리 먼 줄
말이나 해보지, 벽이나 두드려 보지, 죄 없는 벽만
쥐어박다 손때 묻은 벽 앞에 제상 하나 차렸다네.
고봉밥에 무국 고사리 도라지나물 해서 떡 사과 배도
얹고, 밥상 걸게 바쳤다네 이왕 가는 길 힘내서
가라고, 그 겨울 내내 벽 앞에 물 한 그릇 올렸다네
추석이 낼 모레, 십이야 고운 달빛 아래
마른 고사리 데쳐놓고 도라지 흰 살 쪼개며
삼십 년 되어가는 옛 이야기 풀어놓는 여자
웃어나 줄 걸 따듯하게 손이나 잡아줄 걸
그까짓 여자남자가 뭐라고 죽고 나면
썩어문드러질 몸땡이 그까짓 게 다 뭐라고
그 때 그 더벅머리 어미뻘 되어가는 여자
나잇살 차곡차곡 채워가며
산골짝 처녀귀신으로 늙어가네
가족 / 조성식
집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헛간이 서고처럼 서 있는데
처마 끝에 도서 대여목록 카드처럼 여섯 자루의
호미가 꽂혀 있다. 아버지 호미는 장시간 반납하지 않은
책처럼 한번 들고 나가면 며칠씩 밤새고 돌아온다.
산비탈을 다듬는지 자갈밭을 일구는지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자루만 조금 길면 삽에 가까운 호미, 그 옆에
어머니 호미는 가장 많이 빌려 보는 연애소설 같다.
테이프 여러 번 붙인 표지에서 파스 냄새가 난다.
빛나는 손잡이에 밥주걱의 둥근 날을 가진 넉넉한
호미, 땅을 파는 일보다 아버지가 파 놓은 흙을 다시
훑어보는 돋보기 알 같은 눈 밝은 호미, 나란히 서 있는
아내와 내 호미는 주말이나 가끔 들고 나가는 장식용
백과사전, 철물점 쇳내도 가시지 않은 두 자루 쇳덩어리,
제대로 땅 한 번 파지 못하고 마늘이나 고구마 살점만
물어뜯는 날선 칼날, 그 옆에 장난처럼 걸려 있는
아이들의 호미가 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 밭에 나가실
때 말동무로 따라 나서는 동화책같이 착한 호미가
한집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