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4일 연중 9주간 금요일
<어찌하여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35-37
그때에 35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율법 학자들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36 다윗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말하였다. ‘주님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셨다.
′내 오른쪽에 앉아라, 내가 너의 원수들을 네 발아래 잡아 놓을 때까지.′’
37 이렇듯 다윗 스스로 메시아를 주님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다.
그리스도 관
어릴 적 '미켈란젤로의 조각'이란 영어로 된 우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 국회의사당에 다윗왕의 석상을 세우고자 하였는데 돌팔매로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영웅의 모습을 세움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한 영웅의 상을 심어주려고 하였습니다. 그 조각을 미켈란젤로가 맡았을 때 국회의장이 와서 거의 완성된 조각품을 보고 "코가 좀 높으니 깎아 달라."고 했습니다. 조각가가 생각하건데 코는 조금도 높지 않지만 국회의장의 체면을 생각해서 사다리에 오르기 전에 돌가루를 조금 들고 올라가서 가루를 떨어트리며 "좀 깎았는데 어떠십니까?"말하니 과연 그는 "참 훌륭합니다." 하고 칭찬하였다고 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다윗 왕이 언제나 가슴에 남아있는 성군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다윗왕의 이름을 붙여 생각하고 율법에도 그 다윗 후손 중에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고 다윗왕의 시편은 성영(聖詠)으로 지금도 가장 화려한 기도로 우리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성군이고, 시편 작가이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있는 성군이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시고, 육화로 세상에 오신 분이시지만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하느님이심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윗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아무리 모든 곳에서 깎아내려도 깎을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신성입니다.
사람이 구세주가 될 수 없음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구세주는 시대와 지리적 위치에서 벗어나신 분이셔야 합니다. 지금도 그 분은 구세주이시고, 우리의 메시아시십니다. 지금은 다윗 자손이라고 고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이상 랍비가 아닙니다. 이제는 메시아시고,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 중 유태 교인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우상론'에서 '종족의 우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선민의식(選民意識)에 사로잡혀 있고, 자신들의 조상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라는 것만 고집하고 있습니다. 그런 편견과 아집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고집으로 지금까지도 낡은 율법의 문자만 가지고 메시아를 판단합니다.
옛날 중국의 정현에 사는 '복(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지가 다 헤어져서 부인에게 바지를 만들어 달라고 했는데 부인이 "어떻게 만들어 드릴까요?"하고 물었을 때 남편은 헌 바지를 주면서 "이 바지대로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새 바지에 구멍을 내고 꿰매고 헤진 자국을 만들어 헌것과 같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복자처작신고'(卜子妻作新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도를 배우되 시대에 맞추지 못하면 복씨의 부인마냥 기워진 부분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왕의 시편과 많은 기도를 통해서 이미 다윗 왕이 당신을 주님으로 불렀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바로 당신이심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고 헌 옷에 새 옷을 꿰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구태의연한 율법과 자신들의 고집으로 세상을 판단하는 오류를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아직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유다 인들을 보면서 우리의 그리스도 관을 확고히 가져야 합니다.
이 시대의 구세주관은 예수님의 성경의 말씀대로 가르쳐 주시는 진리에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 진리는 문자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른 진리이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하면서 이 시대의 메시아 관을 확고히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기본을 사는데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토빗기의 말씀입니다. 11,5-17
그 무렵 5 안나는 자리를 잡고서 자기 아들이 돌아올 길을 살펴보고 있었다.
6 그러다가 토비야가 오는 것을 알아보고 토비야의 아버지에게,
“봐요. 당신 아들이 와요. 함께 갔던 사람도 오네요.” 하고 말하였다.
7 토비야가 아버지에게 가까이 이르기 전에 라파엘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는 잘 알고 있소. 저분은 꼭 눈을 뜨실 것이오.
8 물고기 쓸개를 저분 눈에 발라 드리시오. 그 약은 눈의 하얀 막이 오그라들다가 벗겨지게 할 것이오.
그러면 그대의 아버지께서 시력을 되찾아 빛을 보게 될 것이오.”
9 안나는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고, “얘야, 내가 너를 다시 보게 되다니! 이제는 죽어도 괜찮다.” 하면서 울었다.
10 토빗도 일어서서 다리를 비틀거리며 마당 문을 나섰다. 토비야가 그에게 마주 갔다.
11 물고기 쓸개를 손에 든 토비야는 아버지를 붙들고 그 눈에 입김을 불고 나서, “아버지, 용기를 내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이어서 그 약을 아버지에게 바르고서는 잠시 그대로 두었다.
12·13 이윽고 토비야는 양손으로 아버지의 눈가에서부터 하얀 막을 벗겨 내었다. 그러자 토빗이 아들의 목을 껴안고
14 울면서 “얘야, 네가 보이는구나, 내 눈에 빛인 네가!”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 모두 찬미받으소서.
그분의 위대한 이름 언제나 우리 위에 머무르소서. 그분의 천사들 모두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15 그분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셨지만 내가 이제는 내 아들 토비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기쁨에 넘친 토비야는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돈을 가져온 것과 라구엘의 딸 사라를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고, 또 그 사라도 오고 있는데 니네베 성문 가까이 왔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16 기쁨에 넘친 토빗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며느리를 맞으러 니네베 성문으로 갔다.
니네베 사람들은 토빗이 오는데 손을 붙잡고 인도해 주는 사람 없이 힘차게 걸어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7 그때에 토빗은 하느님께서 자기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눈을 뜨게 해 주셨다는 사실을 그들 앞에서 밝혔다.
이어서 자기 아들 토비야의 아내인 사라에게 다가가 그를 축복하며 말하였다. “얘야, 잘 왔다. 얘야, 너를 우리에게 인도하여 주신 너의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빈다.
너의 아버지께서 복을 받으시고 내 아들 토비야도 복을 받고, 그리고 얘야, 너도 복을 받기를 빈다.
축복 속에 기뻐하며 네 집으로 어서 들어가거라. 얘야, 들어가거라.” 그날 니네베에 사는 유다인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축일 6월 4일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Francis Caracciolo)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 연도 : 1563-1608년
같은 이름 : 방지거, 카라촐로, 프란체스꼬, 프란체스꾸스,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쿠스, 프란치스꼬, 프란치스꾸스, 프란치스쿠스, 프랜시스
귀족 집안 출신인 성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Franciscus Caracciolo, 또는 프란체스코)는 1563년 10월 13일 이탈리아 중부 아브르초(Abruzzo)의 발라 산타 마리아(Villa Santa Maria)에서 태어나 아스카니오(Ascan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는 22세 되던 해에 나병으로 여겨지는 중병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하느님께 자신의 생을 바치겠다는 사적인 서원에 하였고, 기적적으로 회복되어 나폴리(Napoli)에서 공부하고 1587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도록 사형수들을 돌보는 '정의 백의 사제단'(Bianchi della Giustizia)에 가입하였으며, 1588년에는 요한 아우구스티누스 아도르노(Joannes Augustinus Adorno) 신부와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병원의 환자들과 죄수들을 위하여 일하고 사목하는 '작은 수행 성직자 수도회'(Ordo Clericorum Regularium Minorum)를 설립하였다. 이 회는 규칙은 그 해에 교황 식스투스 5세(Sixtus V)로부터 승인을 받았고, 아도르노 신부가 첫 번째 장상으로 선임되었다. 다음 해에 그는 종신서원을 하면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의 청빈을 본받는 의미에서 프란치스코라는 수도명을 정했다.
그들은 나폴리에 수도원을 짓고, 그 다음에는 에스파냐로 뻗어나가려 했으나 에스파냐 정부 당국이 수도원 건립 허가를 주지 않아 미뤄지는 사이에 이 수도회는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장되었다. 1591년 아도르노 신부가 사망한 후에 총장직을 승계한 성 프란치스코가 에스파냐를 방문했을 때는 그전보다 훨씬 좋은 여건이었기 때문에 마드리드(Madrid)와 바야돌리드(Valladolid) 그리고 알칼라(Alcala)에 수도원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7년 동안을 총장으로 봉사하다가 사임하고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Santa Maria Maggiore)의 원장 겸 수련장이 되었다. 그는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의 주교직 제의를 끝까지 거절하고 수도생활에 전념하다가 1608년 아뇨네(Agnone)에서 병이 들어 그해 성체 성혈 대축일 전날인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일생은 환시와 예언의 은혜가 충만하였다. 그는 1769년 6월 4일 교황 클레멘스 14세(Clemens XIV)에 의해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리고 1838년에 나폴리의 수호성인이 되었으며, 1925년에는 아브르초에 있는 성체회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나폴리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에 안치되었으나, 후에 몬테베르지넬라(Monteberginella) 성당으로 옮겨졌다.
오늘 축일을 맞은 프란치스코 카라치올로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