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제티 <베아타 베아트릭스> 1870년, 캔버스에 유채, 86.4 x 66 cm, 런던 테이트 미술관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는 이제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축복받는 그분의 얼굴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 단테 <새로운 인생> 마지막 구절[1]
이 그림은 영국의 라파엘전파 화가인 로제티 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 가 1870년에 완성한 작품이다. 제목은 <베아타 베아트릭스 Beata Beatrix>로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도 “축복을 주는 자”라는 뜻이니 그림 제목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이 그림은 단테의 <새로운 인생>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 포르티나리의 죽음을 묘사한 것이다. 시인이기도 한 로제티가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갖던 <새로운 인생>은 본인이 직접 번역하여 1861년 <초기 이탈리아의 시인들>[2] 이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로제티의 퍼스트네임이 단테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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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단 두 번 만났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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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참석한 연회에서 9살의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처음 만난다. 그리고 9년 후인 1283년 그들은 길에서 우연히 다시 한번 마주치는데 이때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 인사를 건넨다.
단테는 “그때부터 사랑이 나의 영혼을 지배했다”고 한다.
그러나 7년 후인 1290년 베아트리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빠진 단테는 그때까지 베아트리체를 연모하며 썼던 시를 엮어 <새로운 인생 La Vita Nuova>(1295)을 간행했던 것이다.
단테는 <새로운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서 “베아트리체에 대하여 아직까지 어떤 여자에 대해서도 씌어진 적이 없는 작품을 쓸것이다”라고 다짐한다.[1] 이 약속은 한참 뒤에 결국 <신곡>이라는 걸작으로 실현되었다.
<신곡>에서 베아트리체는 “지옥”에서는 그의 중재자가 되고,“연옥”에서는 그의 목표가 되며, “천국”에서는 그를 이끌어주는 안내자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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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아트리체 또는 시달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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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특별한 것은 로제티가 죽은 자신의 아내 시달 Elizabeth Siddal (1829-1862)을 베아트리체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로제티와 시달의 사랑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애틋한 사랑과 중첩된다.
단테가 연모해 마지않던 베아트리체가 24세에 요절한 것처럼, 시달 또한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시달은 아이를 사산한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아편 과다복용으로 죽었던 것이다.[3] 슬픔에 잠긴 로제티는 시달이 죽은 지 일년 후 이 그림을 시작했지만 7년 후에야 그림을 완성했다.
그림 속에서 눈을 지긋이 감은 베아트리체는 손을 앞에 모으고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상황이라기보다는 신에게 갈구하며 기도하는 듯 환각상태에 빠진 듯 그려졌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죽음을 의미하는 여러 상징이 등장한다.
성령의 상징인 붉은 비둘기가 시달의 손에 물어다 주는 흰 양귀비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아편을 의미한다. 그녀의 머리 위로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사별했던 중세도시 피렌체가 흐릿하게 비친다.
그림 오른편에서 단테가 왼편의 베아트리체를 바라보고 있다. 정열을 의미하는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베아트리체는 죽음을 암시하는 듯 손에 깜박거리는 불꽃을 들고 서있다. 길게 드리운 해시계의 그림자는 베아트리체가 죽은 시각인 9시를 가리키고 있다.
“베아트리체의 죽음 자체의 재현이 아니라, 무아의 경지 또는 갑작스런 영혼의 변용으로 상징되는 주제의 이상을 표현하고자 했다.” [4]
로제티는 1873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목이 길어 슬프다고 했던가. 목이 너무 길고 뻣뻣해서 과연 사람의 목인가 싶을 정도로 부자연스럽지만 아무튼 이 그림은 로제티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게 되고 시달은 일약 베아트리체의 화신이 되어버렸다.
Dante Gabriel Rossetti - Salutation of Beatrice 로제티 <베아트리체의 경배> 1859년, 패널에 유채,
160 x 74.9cm, 캐나다 오타와 국립미술관
The Salutation of Beatrice. Dante Gabriel Rossetti
A cut from Dante Gabriel Rossetti, The Salutation of Beatrice.
좌측의 그림은 시달이 죽기 전인 1859년에 그린 <베아트리체의 경배>라는 작품으로 역시 단테의 <새로운 인생>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왼편 그림은 계단을 내려가던 베아트리체가 계단을 오르던 단테에게 인사를 하며 스치는 장면이다. 아마도 단테가 18세가 되던 해 다리 근처에서 우연히 그녀와 만나는 장면일 것이다.
오른편 그림은 베아트리체가 죽은 후 단테가 베아트리체를 영원한 에덴 동산에서 재회하고 사랑을 약속하는 장면으로 <신곡>에서 영감을 받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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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이전으로 돌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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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전파 Pre-Raphaelite Brotherhood”는 사회개혁에 대한 요구로 어수선한 1848년 영국에서 결성된 젊은 예술가들의 단체였다. 로제티, 밀레이, 헌트 등을 주축으로 한 일곱 명의 반항아들이 만든 비밀조직이었다. “라파엘전파”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의 정점을 찍은 라파엘로의 미술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그들의 취지다. 그들은 당대 아카데미 미술에 만연했던 감상적이고 진부한 화풍을 경멸했다. 그들은 다시 순수한 감수성, 진지한 태도, 그리고 진솔한 미감을 회복함으로써 예술의 재활과 도덕적 개혁을 추구하고자 했다.
<베아트리체의 경배>는 이런 의미에서 <베아타 베아트릭스>에 비해 라파엘전파의 이상에 보다 더 충실한 그림이라고 볼 수 있다. 20년 정도 후에 그린 <베아타 베아트릭스>는 말기 라파엘전파의 전형을 보여주면서도 심령주의적 요소나 분위기 등 후에 유행할 상징주의적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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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쑥날쑥한 모습으로 피렌체의 명소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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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베아타 베아트릭스>를 보면 베아트리체의 머리 주변으로 희미하게 피렌체의 풍경이 어른거린다. 단테가 뮤즈 베아트리체를 만났던 장소이며 지순한 사랑의 무대가 된 장소다.
단테의 말대로 베아트리체의 죽음을 슬퍼하는 피렌체는 “얼마나 외롭게 서 있는가!” 중앙에 어렴풋이 보이는 다리의 실루엣은 피렌체를 상징하는 다리 “폰테 베키오”일 것이다. 다리는 남녀가 만나 사랑에 빠지기 쉬운 위험한 장소라던가.
졸리는 교각 사이로 아르노는 달콤하게 흐르고 /
연인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 끄덕 / 벤베누토 첼리니 화난 모습 감추지 않고 /
나는 쳐들거야 촛불을.. 촛불을
- 리카르도 마라스코 <폰테 베키오 위에서> [5]
폰테 베키오 Ponte Vecchio 즉 “오래된 다리”는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 강에 서있는 다리다. 이 다리가 지나는 지점은 아르노 강이 가장 좁아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 곳에는 로마시대 때부터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다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996년에야 등장한다.
이 “최초”의 다리는 1117년의 홍수로 무너지고, 이후 석재로 재건한 교량도 1333년의 역사적인 홍수로 가운데 두 개의 교각만 남긴 채 쓸려가고 만다.
현재의 “폰테 베키오”는 1345년에 건설된 다리다. 이 다리는 세 개의 세그멘탈 아치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 아치의 경간은 30미터이고 양측 경간은 각 27미터다.
죠르죠 바사리[6]의 기록에 의해 가디 Taddeo Gaddi 가 다리를 설계했다고 믿어져 왔으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피오라반티 Neri di Fioravanti 가 설계자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다리 양편으로 늘어선 보석상과 기념품가게 건물들이 강 쪽으로 들쑥날쑥 튀어나온 독특한 모습은 수세기에 걸친 개축과 증축에 의한 것이다. 이 독특한 모습으로 인해 폰테 베키오는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피렌체의 명소가 되었다.
상류 쪽에서 바라본 폰테 베키오와 피렌체의 저녁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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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로 비밀통로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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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5년 메디치 대공 코시모 1세는 죠르죠 바사리로 하여금 피렌체의 베키오 궁과 새로 구입한 강 건너의 피티 궁을 연결하기 위한 통로를 건설하게 한다. 이 통로의 건설은 코시모의 아들 결혼에 맞춰 이루어지는데 코시모가 국정을 보는 궁전과 강 건너에 있는 저택 사이의 통행을 보다 개인적이고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군주들이 그랬듯 그도 군중 속에서 신변에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들쭉날쭉하던 다리 위의 상점들 위로 코시모의 개인 비밀통로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이 “바사리 통로” 아래에 모여있는 보석상들이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594년경 푸줏간들이 쫓겨난 직후의 다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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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줏간 냄새가 진동하던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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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 피렌체의 관리들은 시의 위생과 청결을 위해 시내의 모든 푸줏간과 정육점들을 다리 위로 옮기도록 명령한다. 푸줏간들을 귀족들의 저택과 궁전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는 아침마다 푸줏간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수레에 싣고 아르노 강으로 가는 길에 흘리는 냄새 고약한 오물 때문이었다. 강 위에서는 쓰레기를 모으고 운반할 필요도 없이 그때그때 다리아래로 던져버리기만 하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다리는 고기 시장이 되었고 푸줏간 조합이 다리를 독점하게 된다.
그러나 푸줏간 주인들은 좁은 공간을 넓히기 위해 마구잡이로 집을 달아내고 증축을 해댄다. 집들이 삐죽삐죽 강물 위로 내밀게 되면서 현재의 독특한 모습의 다리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약 한세기 반이 지난 후인 1593년, 왕 페르디난드 1세는 바사리 통로를 지나게 된다. 그런데 특별히 예민한 코를 가졌던지 그는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푸줏간 냄새를 참지 못한다. 결국 그는 “품위가 없는” 푸줏간들을 쫓아내고 금세공과 보석 상인들로 교체해버린다.
하류 쪽에서 바라본 현재의 다리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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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다리의 목숨을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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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동맹을 위해 이탈리아를 찾은 히틀러는 무솔리니와 함께 이 다리를 방문한다. 이 방문을 위해 다리 중앙의 “바사리 통로”에 창문 세 개를 만들게 된다 (사진 참조).
히틀러가 강 하류의 경관을 제대로 감상하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러한 인연이 작용했던 것일까?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던 무렵. 강 북쪽으로 쫓기던 독일군은 아르노 강의 다리들을 모조리 폭파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폰테 베키오만은 남겨둔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문화재를 사랑했던 히틀러의 긴급명령으로 폭파 직전에 간신히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리 북쪽 입구의 측면. 아치의 왼편 위로 단테의 글이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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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대를 끝내는 제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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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테 베키오는 뭐니뭐니해도 위대한 시인 단테와 인연이 많은 곳이다. 다리 북쪽 입구에는 단테의 시 한 구절이 붙어있다.[7] 그러나 다리를 칭송하거나 축복하는 글이 아니다.
흥미롭게도 1216년에 이 다리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피렌체의 평화가 깨진 것을 개탄하는 글이다.
“…하지만 피렌체는 마지막 평화 시에 다리를 지키는 그 부서진 돌에 희생물을 바칠 필요가 있었지”
- 단테 <신곡> “천국” 16장 145-147행[8]
다리 입구에 붙은 단테의 시
이 시의 내용인즉슨 이렇다.
어느 날 피렌체에서 귀족이 된 한 청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아미데이 가문에서 열린 이연회에 부온델몬테 Buondelmonte 라는 청년이 손님으로 찾아온다. 그런데 이 청년은 아미데이 가문의 청년과 시비가 붙어 상대 청년의 팔을 칼로 찌르는 사고를 친다.
원로들이 모여 회의를 열고는 부상과 불명예에 대한 보상으로 부온델몬테가 아미데이 가문의 처녀와 정혼할 것을 결정한다. 그리고 곧 두 가문 사이의 혼사를 공식적으로 알리는 약혼식 행사를 열기로 한다.
약혼식 날, 동네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그런데 말을 타고 등장한 부온델몬테는 예상과 달리 아미데이 가문 쪽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더니 도나티 가문에 속한 여자의 손을 덥석 잡는 것이 아닌가.
아미데이가의 친척들이 다시 모여 가문의 치욕을 복수할 방법을 의논한다. 얼굴에 상처를 내줄까, 흠씬 두들겨 패줄까를 고민하던 그들은 결국 부온델몬테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부활절 아침, 흰옷을 차려 입은 부온델몬테는 백마를 타고 도나티 가문의 여인과의 결혼을 위해 폰테 베키오를 건넌다. 그가 다리의 수호신인 마르스의 석상이 있는 자리에 도착하자 기다리고 있던 아미데이 가문의 사람들이 달려들어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칼로 난자해 죽여버린다. 이때가 1216년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저 시작일 뿐이었다. 이 사건은 이후 피렌체 사람들이 두 패거리로 나뉘어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는 정쟁의 단초가 된다.
부온델몬테 가문 편을 든 쪽은 ?프당 Ghelphs 이라 불리는 “교황 옹호파”가 되고, 아미데이 가문의 편을 든 쪽은 기벨린당 Ghibellines 이라 불리는 “황제 옹호파”가 되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베로나의 캐퓰렛과 몬테규 가문의 스토리를 기억하는가. 어디서든 그들은 그렇게 죽기로 싸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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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이룰 수 없었던 단테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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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의 시에 등장하는 “부서진 돌”이란 다리 입구에 서있던 군신 마르스의 깨진 석상을 가리킨다. 이 전쟁의 신은 오랫동안 이탈리아인들의 숭배의 대상이었고 폰테 베키오의 수호신이었다. 그러나 이 기나긴 원한과 분열의 단초를 제공했던 깨진 석상도 1333년의 대홍수로 다리와 함께 쓸려가 버린다.
피렌체는 원래 “꽃의 도시”라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피렌체는 평화와 사랑의 꽃을 피우지 못하고 피비린내 나는 정쟁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끝없는 싸움만이 전개되던 도시였다.
단테도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35세에 추방당하여 이곳 저곳을 유랑하며 지냈다. 피렌체 시민들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 줄 것을 소원했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1321년 객지에서 세상을 떴다.
그래서 단테는 고향이자 그토록 사랑했던 베아트리체가 잠들어있는 피렌체에 묻히지 못하고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사원에 잠들어 있다. 그를 유랑의 고난으로 몰아냈던 그 피비린내 나는 정쟁이 바로 이 다리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미주 [1] Dante Alighieri, The New Life, Trans. by D. G. Rossetti, Ellis and Elvey, London 1899. pp. 159 (eBook Project Gutenberg) http://www.gutenberg.org/files/41085/ [2] Dante G. Rossetti (Ed. Trans.), Dante and His Circles: with The Italian Poets Preceding Him., Roberts Brothers, Boston, 1887. https://archive.org/details/danteandhiscirc02aliggoog [3] 우정아, <명작, 역사를 만나다> 아트북스, 2012. pp. 246 [4] 아래의 사이트에서 재인용 http://www.victorianweb.org/painting/dgr/paintings/6.html [5] 마라스코 Riccardo Marasco (1938- )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민속음악가이며 음유시인이다. 벤베누토 첼리니 Benvenuto Cellini (1500-1571)는 피렌체 출신의 유명 금세공사, 조각가, 작가로 그의 흉상이 다리 중앙의 광장에 서있다. [6] 바사리 Giorgio Vasari (1511-1574)는 피렌체의 화가, 건축가이자 예술행정가다. 그의 저서 <예술가 열전>은 세계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사라고 할 수 있는데 최근 기록의 정확성에 대해 도전을 받고 있다. [7] Ida Riedisser, Inscriptions from Dante’s Divina Commedia in the Streets of Florence, Explained and Illustrated, Alfieri & Lacroix, Milano, 191. pp.39 [8]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천국)>,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2007. pp.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