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해상왕국 가야 바닷길 통해 일본 열도로 넘어간 이유
카카오 환단원류사 박민우 카톡 신공부방에서 발췌
허접하게 주운 논문인데 의외로 볼게 잇네요.
대박입니다.
가야의 시조 김수로
金의 바다 김해 는 무슨 뜻으로 지었을까 김해 김씨와 김해허씨
그리고 그들의 조상이 소호금천씨라고 하였는디 그 근거는 성한왕이다.
성한왕이 투후인데 투후가 김일제가 아닐 가능성도 보인다.
즉, 김수로 인데 김수로는 어떻게 해땅 끝 김해에 왔을까 언제 왔을까 그리고 그들은 제철의 달인이엇다.
쇠(金)의 땅 이 김해아닌가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6세기까지 700년 이상 경남, 경북, 전남, 전북의 해안 및 하천 유역에 존재했던 나라들이
가야 제국이다.
지금 이야기는 조금다른 인류사의 저자 김진아 선생님의 논고를 소개합니다.
먼저 올린 논문은 누군지 모르겠으나 연장선 상에서 많은 실마리를 제공하니 각자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 다른 인류사]고대 해상왕국 가야 바닷길 통해 일본 열도로 넘어간 이유
이진아 환경생명 저술가
역사 기록, 유물, 유적 외에도 구비전승 및 고천문학, 고지리학, 고기후학 분야의 다양한 자료를 통합해서
역사인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이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 훨씬 더 많은 가야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만 보더라도 서해안과 거기서 이어지는 강을 따라 충청, 경기, 황해, 평남의 곳곳이
한때 가야의 무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인 위치 및 그 추정 근거에 대해선 앞으로 필요에 따라 언급하게 될 것이다.
(통상 이 지역은 백제, 혹은 낙랑‧대방 등 한사군(漢四郡)의 영역이었던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고대사회 해양국가들은 육지에서는 이웃 지역과 단절된 독립적 지형을 거점으로 활동했으며,
바닷길에서는 서로 막지 않았다.
따라서 요즘 볼 때는 ‘거기서 거기’ 같은 좁은 지역에서도 백제 혹은 가야 등
서로 다른 연맹체에 속하는 해양소국들이 엄연히 별개로 존재할 수 있었다.
육지 기반 집단은 그들의 활동에 손을 대지 못했을 것이다.)
파일: 조금 다른 인류사.pdf
존재감으로 본다면 그 가야들 중에서 단연 수로왕이 건립한 금관가야, 즉 가락국이 압도적이다.
적어도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3세기까지 약 300~400년 동안, 가야 특유의 철기 문명을 일구어 찬란하게 빛냈다.
그리고 그 문명을 일으킨 기술과, 아마도 인간적인 친화력을 앞세워 동아시아를 장악했다
[가락국은 그렇게 한반도 남해안과 서해안을 따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황하 및 양쯔강 중류까지,
일본의 규슈와 시코쿠, 혼슈의 서쪽 지역까지 진출해 국제적인 경제협력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선구적 행보가 이후 모든 가야 연맹체 국가들의 번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동시대 국가였던 고대 로마와 견주어도 결코 손색이 없는, 기후온난기 고대 해양국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크으~ 예리한 판단
가락국이 진출하기 전, 일본은 위치로서는 동아시아에 속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나 중국대륙과 거의 왕래가 없는 고립된 지역이었다.
그 고립은 해수면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해 바닷물이 동아시아 3국을 갈라놓았던 마지막 빙하기 끝 무렵,
즉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부터 시작했다.
진수의 ‘삼국지’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기원전 3세기 무렵의 중국↔가락국↔일본 교류의 경로.
일본과 중국은 가락국을 거쳐야 왕래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대륙에서 대방군, 즉 지금의 황해도로 일단 넘어온 다음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안을 따라
(혹은 육로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설명이 갈린다.) 한참 여행한 후 가락국, 지금의 김해까지 온다.
여기에서 배를 바꾸어 타고, 즉 가락국의 배를 타고 쓰시마를 거쳐 규슈로 넘어갔었다.
역방향으로 일본 열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파일: 조금 다른 인류사 이진아 주간조선 (1).pdf
금관가야의 초대 임금 수로왕은 서기 42년 출생으로 전해진다.
악명 높은 로마의 황제 네로는 서기 37년 생이다.
수로왕보다 5년 먼저 태어난 이 황제의 횡포를 아무도 신화일 뿐이라 치부하지 않으며,
로마제국을 먼 옛날 지중해 바닷가에 있었던 왕국이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해상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해 짧은 커멘트
주로 저지대 수몰지역이나 그 경계에 살던 사람들 사이에 배를 타고 생활하는 패턴이 발달한다.
이 상태가 더 진전되면 강가나 바닷가 포구에 베이스캠프를 두고 바다로 나가 원거리 교역을 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그 판이 커지면 이들을 “뜯어먹고 사는” 해적들이 생긴다.
해적들로부터 자신의 사람들을 보호하는, 지금의 해군이나 해경과 비슷한 전투 집단도 생기게 된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는 목재가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양쯔강 중하류에 자리잡아, 활발한 해상활동을 펼치느라 배가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이 목재를 잡아먹는 용도가 있었다.
철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제일 먼저 철을 제련하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선 아직 정설이 없다.
한 두 세대 이전만 해도 기원전 11세기 근동의 히타이트(Hittite) 족이 철 제련을 시작한 게 세계로 확산됐으며,
기원전 8세기경에야 양쯔강 유역에 도착했다는 게 학계 주류 시각이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서기 50년대부터 200년 무렵까지 약 150년 간 양쯔강 중류 노른자 땅의 지배자가
한반도에서 진출한 가야였다는 것이다. (가야의 지배가 그보다 훨씬 더 먼저 시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중국 역사에서 후한(後漢), 혹은 동한(東漢) 시대에 해당되는 기간으로, 삼국시대 바로 전 시기다.
그 중심지는 오랜 역사와 풍부한 문화를 보유했지만
현재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진원지로 갑작스럽게 악명 높아진 우한 일대다.
가야는 한반도 동남부 낙동강 수계를 따라 존립했던 변한의 소국들이 합쳐져 만들어진 연맹체였다.
그 중에서도 낙동강 하구에 있어 바다로 진출하기 쉬웠던 금관가야가 맹주였다.
금관가야의 설립자 김수로왕이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해를 건너 중국 대륙의 양쯔강 유역까지 진출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수로왕은 서기 42년부터 157년간 재위하고 199년 서거한 것으로 기록은 전하는데,
양쯔강 가야는 서기 40년대 말 50년대 초부터 수로왕이 서거한 직후인 201년까지, 약 150년 간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의 철괴인 ‘덩이쇠(철정)’은 동아시아 일대에서 거의 화폐처럼 통용되곤 했다
고대사회에서 천문은 농사일에 있어서 중요한 지침을 주는 분야였다.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는 ‘항해’였다.
나침반이 없었던 시대,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가늠하기 위해
낮에는 해, 밤에는별의 위치를 기준으로 바닷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이런 ‘스타 내비게이션(star navigation)’의 필요성 덕분에 고대의 해양족들은 발달한 천문학을 보유하고 있었다.
역사 기록의 속성을 고려한다면, 어쩌면 그게 신라의 기록이 아니라 가야의 기록일 수도 있다.
가야 출신의 사관들이 신라의 이름으로 역사를 쓰면서,
가야역사에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남겨둘 가능성은 충분히 있으니까.
혹시 후대의 누군가가 신라 역사에서 망실된 가야의 흔적으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확인할 순 없는 일이다.
지금으로선 당시 가야의 본거지는 중국 양쯔강 중류에 있었던 게 아닌가 추정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이 추정을 전제로 깔고 보면 여러 가지가 설명된다.
컴퓨터가 보여주는 고대 한반도 국가의 중심지 중 하나가 양쯔강 중류에 있었던 이유,
삼국시대 오나라 배가 작았던 이유, 오나라가 가야를 건너 뛴 이유,
그리고 가야가 가까이 있었던 일본과의 관계를 200년대 초에 가서야 개척한 이유 등등
가야 문화는 상당히 특색 있기도 했다.
종전까지는 한반도에서 보기 드물었던 ‘순장(殉葬)’,
즉 중요한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모시던 사람들을 같이 죽여 묻는 풍습이 있었다.
순장을 했다는 점이나 무덤의 형태로 보아, 가야 지배층은 고구려보다도 더 북쪽에 있었던 부여와 더 가까워 보였다.
한편 다른 부분에서의 연구를 보면 가야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 등 남방에서 온 영향도 뚜렷했다.
가야가 상당 기간 동안 일본에 진출,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여러 모로 확인되고 있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이곳저곳에 조그맣게 자리잡은 소국
가야의 특이성은 두 가지 축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철(鐵)’, 또 하나는 ‘해양국가’다.
이들이 주로 바다를 무대로 움직였다는 것과 철기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집단이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의미 있다.
인류사에 있어서 모든 커다란 움직임이 그랬듯이, 이들 뒤에는 거시적인 환경 변화라는 추동력이 있었다.
가야와 마찬가지로 바다 사람들의 경우도 이들이 직접 기록한 건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집단의 기록만 남아있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철기 사회 가야의 움직임을 보자.
낙동강 하류의 여섯 마을에, “하늘에서 알이 내려와” 6명의 소년이 나와서,
금관가야를 비롯해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고 각각 왕으로 즉위한다.
고대의 역사 기술 스타일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 왕들이 외부에서 왔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 테다. 어디서 왔을까?
그동안 여러 설이 있었지만, 최근 고분 발굴 성과가 축적되면서
가야 건국자들은 부여에서 온 사람이라는 설명이 가장 확실한 근거를 갖게 됐다.
순장 풍습, 청동 솥이나 마구 등의 유품들, 무덤 형태, 인골의 특징 등으로 볼 때 그렇다.
부여는 한반도 위쪽, 고구려의 북쪽 너머에 기원전 3세기에서 서기 5세기까지, 700년 이상 건재했던 한민족의 나라다.
“동해안을 따라 기마민족이 내려왔다”
그 근거로 동해안 바닷가 마을에서 비슷하게 전해지고 있다는 구음(口音) 한 가락을 불러주는데,
잠깐 듣기만 해도 보통 우리 민요와는 전혀 달랐다.
마치 수많은 사람이 말을 타고 달려오는 것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리,
빠른 박자의 박진감은 심장을 더 빠르게 뛰게 하는 것 같았다.
그런 심증을 확신으로 바꾸어준 것은 2017년 한국상고사학회에서 발표된, 한림대 심재연 교수의 논문이었다.
‘환동해지역 비(非)중원계 철 생산 가능성’, 풀어 말하자면, 연해주에서 한반도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경로의 지역에서,
중국의 제철 중심부로 알려졌던 양쯔강이나 황하에서 온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철이 생산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반도 철기시대는 기원전 3세기경, 중국에서 전파되어 시작됐다는 게 통설이었다.
하지만 최근 유물 발굴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 설은 이미 낡은 것이 됐다.
2007년 강원도 홍천에서 기원전 7세기에 제작된 철기 단편이 발견된 바도 있다.
2700여 년전
동해안 지역에서는 1990년대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철기시대 유적 〮유물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삼척 호산리, 동해 송정동, 동해 망상동, 강릉 안인리, 강릉 병산동, 강릉 교항리, 양양 동호리….
모두 바닷가 혹은 바로 바다로 연결되는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지역이며,
앞으로도 이런 지역에서 발굴이 더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의 제작 특성은 중국 중심부의 그것과 확연히 다르다.
중국에선 거푸집을 만들어 쇳물을 흘려 넣어 굳히는 방법이었는데,
이곳 철기는 선철 덩이를 계속 가열해가며 두드려 모양을 잡는 방식이다.
철광석을 제련하는 괴로의 구조도 다르다
이는 중앙아시아 고원지대에서 출발, 아무르강을 따라 만주 평원을 거쳐 연해주에 이르는 지역에서 발견되는
철기 제작 특성이다.
연해주로부터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한반도 동해안 지역 전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같은 특징이 북한강, 남한강, 임진강 및 한강 지천인 안성천과 왕숙천 유역 등 내륙 깊숙한 곳에서까지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들의 연대는 동해안에서보다 조금 나중의 것으로 추정된다.
강원도 춘천 중도에 유적지는 바로 이런 북방민족의 철기 문명이 동해안을 따라 이동해 온 것이다.
특히 한반도 동해안 지역에서 발굴되는 철기 유물에는 아주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제작 연대가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2세기 정도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왜 이런 연대에만 생산됐던 것인지, 관련 연구자들은 궁금해하는 듯하다.
만일 이 시리즈에서 추정하는 것처럼, 기원전 1세기, 백두산 폭발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유에서든,
다수의 부여인이 일시에 동해안을 따라 내려와서 그 중 일부가 중간중간 정착해가며 김해까지 갔다면, 충분한 설명이 된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를 보면 금관가야의 설립자 수로왕의 포부를 읽을 수 있다.
“이곳은 마치 여뀌잎처럼 좁지만… 하나에서 셋을 만들고 셋에서 일곱을 만드니 7성이 머물 만한 곳이다.
그러니 이곳에 의탁하여 강토를 개척하면 참으로 좋지 않겠는가?
오!!!!
천뷰경이 나옵니다.
가야
온난기를 맞아 수심이 깊어진 낙동강을 따라 바다로 나오면 일본과 중국까지 왕복 뱃길을 수월하게 해주는 해류,
고대국가에서 부(富)와 권력의 최고 기반이었던 철광과 동광,
그리고 그걸 제련하는 데 필요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제공하는 풍부한 목재.
여기에 동아시아 최장의 왕조 유지 역사를 자랑하는 알찬 국가 부여 출신들의 금속 제련 노하우,
수로를 이용한 교역 경험, 고대국가 경영 능력이 더해져,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을 테고,
그 명성은 동아시아 범위를 훌쩍 넘어섰을 것이다.
가야의 건국 시기는 그보다 100년 이상이나 빠른 기원전 1세기 전반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설을 깨는 발상의 전환
그렇게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적어도 네 가지 있다.
첫째는 가야 교역대에서 출토되는 화천이 서기 1세기 전반 중 통용된 것이라는 점이다
(관련 내용은 지난 회 ‘화폐 사용 뒤에 감춰진 가야의 진짜 역사’ 참고).
가야를 중심으로 중국에서 일본까지 이어져 있는 이 광대한 교역로에서
서기 14년부터 40년까지 사용되던 화폐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이미 이 시기엔 이 교역로가 안정되어 있었다는 얘기다.
따라서 국가로서 가야의 출발은 그보다 훨씬 앞섰을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
둘째는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서 백두산이 꽤 큰 규모의 폭발을 했었고,
그에 따라 그 폭발의 영향을 받는 부여인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으며,
가야도 그 과정의 일환으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세 번째 근거는 이 시리즈를 통해 여러 번 언급됐던 박창범 교수의 천문 관측지도다.
‘삼국사기’의 일식기록을 컴퓨터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한 것이다.
그 일식현상이 기록된 그 시기에 실제로 일어났었는지 확인하는 동시에,
어디서 그 현상이 관측되었는지 추적해서 표시한 이 지도는
우리 민족의 과거에 대해 충격적일 정도로 뜻밖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가야는 서기 42년이 아니라, 그보다 1세기 이전인 기원전 54년보다도 앞서 건국됐으며,
초대 수로왕은 ‘삼국유사’에서 전하는 것보다 더 오래 전 사람이다.
그는 광활한 범위에 걸쳐 영토를 개척했는데, 거기에 양쯔강 중류, 지금의 우한(武汉) 일대가 포함됐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가야는 약 250년간 존속했다.'
서해안을 따라 좀 더 북부로 올라가면 영산강 유역의 광주가 있다.
단일지역으로서는 화천이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이다.
화천은 왕망전으로 가야에서 자체 생산해서 유통 및 수출했던 것인가!
이진아 선생님 논고가 너무 길어 공부하다 지칩니다.
좀 쉬었다가
백마디 보다 이 한장의 그림이 다 말해줍니다.
한데 이들 원주민들은 특별한 제철 노하우를 갖고 있었다.
조개껍질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을 철광석과 섞어 제련하는 것이다.
현재 김해평야 일대가 다 당시에는 바다였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퇴적지 물가에서는 조개가 많이 잡혔다.
지금까지도 전해지는 거대한 김해 패총은
아주 오래 전 그 물가에서 얼마나 쉽게 다량의 조개를 이용할 수 있었는지 말해준다.
조개껍질을 잘게 부수어 숯으로 가열한 뒤 철광석에 섞어 녹이면 철에 포함된 불순물이 쉽게 제거되며,
같은 연료로 온도도 훨씬 올릴 수 있다.
강하고 탄력 있는 고(高)퀄리티 철을 얻을 수 있다.
당시 부여국의 철기 제작법도 이미 양쯔강이나 황하 유역의 그것보다 훨씬 효율성이 높은 방식이었다.
여기에 낙동강 유역 원주민의 제철 노하우까지 더해지면서, 가락국은 당시 동아시아에서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의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품질 철기를 만들어내는 기술을 갖게 됐다.
읽어보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