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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flood / mabul / kataklusmos)
창 6-9장에서 타락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자세히 수록된 대파국을 초래한 홍수를 가리킨다.
이 홍수로부터 노아와 노아의 방주에 그와 함께 있던 자들만이 구원을 받았다.
과거(선사시대)에 있어서 대홍수에 대한 유사한 민담들-이들 중 많은 민담들은 그 원인을 인류의 죄로 본다-
이 세계 전역에 걸쳐서 존재한다. 그들의 상호적인 관계 및 성경 기사에 대한 관계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다.
이들 전설들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실질적인 홍수에 대한 민간 회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 전설들은 또한 역사적인 홍수 전승들과는 별개로 어떤 우주적 순환 주기 체제에 합병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에서 홍수 대재난은 한 시대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인간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전개한다.
성경 이야기는 과거에 대한 순환적 전통을 받아들이나 그것을 미래에 적용하는 것은 분명하게 부인한다(창 9:15).
1. 구약의 홍수 기사: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창조를 후회하시고 인간과 짐승들을
멸하고자 결심하셨다(창 6:5-13)오직 의로운 노아와 그의 가족만은 구원하기로 하나님은 작성하셨다(8-9절).
그러므로 하나님은 노아에게 땅을 멸하겠다는 그의 의도를 알리셨고(6:13,17,7:4) 정확한 설계와 치수에 따라 방주를
지을 것을 그에게 명령하셨다(6:14-16)
노아는 방주로 그의 모든 가족(6:18, 7:1)과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할"(7:3) 모든 종의 동물들 한 쌍씩을(6:19-20, 7:2-3) 그리고 홍수 기간 동안을 양식을 싣도록 명령을 받았다(6:21).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였다(6:22, 7:5,7-9,13-16). 방주가 완성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가족 그리고 동물의 모든종들과 더불어 방주로 들어갔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닫아
넣으셨다"(7:16). 그런 다음 하늘이 열리고 비가 내렸다. 그리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
이로써 땅에는 큰 홍수가 일어났다(7:11). 땅에 있는 모든 것이 홍수를 당하였고"모든 생물이 죽었다."
가장 높은 산 위로 15규빗이나 물이 오르니(7:17-20)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육지로부터 멸절되었다"(7:21-23a).
마침내 물이 줄어든 후에 방주는 "아라랏산에" 머물렀다(8:4).
그리고 노아는 처음에는 까마귀를, 그 다음에는 비둘기를 내보내(8:6-12) 땅이 말랐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았다.
땅이 말랐다는 것을 알았을 때(8:13-14)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방주에서 나왔고(8:15-19) 노아는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다(8:20). 이에 하나님은 기뻐하시어 다시는 홍수에 의해(9:8-11) 인간을 멸하시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8:21-22). 그 다음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을 축복하셨고(9:1-7) 그리고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땅에 대한 그의 계약의 표시로 무지개를 주셨다(9:12-17).
2. 성경 이야기의 문학적 분석:
(1) 자료들: 비록 이 이야기는 단순하고 일관된 것으로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 가운데 두 개-보다 초기의 야훼 문서 자료(J)와 포로 후기의 제사문서 자료(P)-의 독립된, 부분적으로는 불일치되는 평행을 이루는 홍수 이야기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쉽게 역설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독특한 용법(야훼, RSV는 Lord<창 6:5-8, 7:1,5,16b, 8:20-21>; 하나님<창 6:9-13,22, 7:16a, 8:1-15, 9:1,6,8,12,16-17>)과 일반 표현법에 있어서의 독특한 차이들(참조. 76:2의 '자웅'<J>과 6:19, 7:9,16의 '암수'<P>)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는 설화의 거의 모든 국면에 이중적인 표현이 있다는 것을 식별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하나님이 인간의 사악함을 보시고(J=6:5-7; P=6:11-13) 방주로 들어 가라고 명하신다
(J=7:1-3; P=6:18-20). 노아가 방주에 들어간다(J=7:7-9; P=7:13-16). 홍수가 임한다(J=7:10; P=7:11).
물이 증가한다(J=7:17b; P=7:18-20). 모든 육체가 소멸된다(J=7:21). 하나님께서 미래에는 파멸하시기 않기로 결심하신다(J=8:21-23; P=9:9-
11). 이러한 평행법들에 더하여 또한 몇가지 대립적인 요소들도 있다. J에서방주는 이미 존재한다.
P에서는(6:14-16) 그것이 축조되어야 한다. J에서 노아는 모든 정결한 짐승 7쌍, 모든 부정한 짐승 한 쌍씩을 방주에
싣는 한편, P에서는 구별없이 모든 종류를 한쌍씩 방주에 싣는다.
더 나아가 날짜의 명기를 포함하는 P는 물이 증가한 기간을 150일로, 전체 홍수 기간을 1년으로 제시하는한편, J는 그
기간을 40일로 제시한다(7:4,12,17, 8:6). J에 있어서의 홍수는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 들어간 지 칠일만에 내리기
시작한(7:10) 비가 원인이 되는데(7:4) 한편 P에 있어서의 천재지변은 비와 지하수의 솟음에 의하여 초래된다(7:11, 8:2).
우리가 이 이야기의 두 흐름들을 구별할 때, 우리는 각 시리즈가 그 자체로 완전히 연속적인 설화를 형성하는 두 시리즈의 절들을 발견하게 된다. J설화는 6:5-8, 7:1-5,7,(8-9),10,12,16b,17b,22-23, 8:2b,3a,6-12,13b,20-22을 포함한다.
한편 P설화는 6:9-22, 7:6,11,13-16a,17a,18-21,24, 8:1-2a,3b-5,13a,14-19, 9:1-17을 포함한다.
J와 P설화 사이의 문체와 문학적 힘에 있어서의 차이는 분명하다.
J설화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내보내는 그림 같은 사건을 포함하는 상상적이고 매력적인 이야기인 반면에, P설화는
"형식적이고 정확하며 계산적인" 이야기이다.
융합된 현재의 성경 기사는 두 자료들에 포함된 정보를 기술적으로 보존하고 있다.
홍수 설화에서 오직 두 자료만이 발견된다는 명제는 현존하는 성경 기사에 나타나는 모든 다양성을 설명하는 데
만족스럽지 못하다. 학자들은 현존하는 설화 내에 제3의 독립적인 요소가 발견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J', L, S, E 등 다양하게 호칭된다.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인용하였던 증거는 쉽사리 논박되어질 만한 것들이 아니며, 홍수 이야기의 역사적인 성장의 복잡성, 그리고 현존하는 성경 기사의 기원을 기술하거나 설명하기 위하여 제출되는 모든 이론들의 가설적 특징
모두를 강조하는 데 기여한다.성경 이야기에 있어서 줄거리가 분리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현상을 완전하게 설명하려는 어떠한 이론도 필연적으로 실험적인 가설에 불과할 뿐이다.
예를 들어 모든 자료는 "어느 정도 확실하게 그 구성 요소들로 분해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각각 가정된 무서의 추정
잔여물들"이 모두 함께 원래의 전체 문서를 반드시 구성되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주장되어 왔다.
만일 우리가 온전한 원래의 문서들을 소유하였다면"(이러한 문서들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논증을 위하여 가정한다면),
우리는 이들 문서들 사이에 전혀 불일치한 점이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Heidel).
이와 같은 주장들은 현존하는 성경 이야기-이것은 어떤 점에서 그것이 현재 존재하는 데로 취급되어야만 한다-에 주의를
돌려야 옳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들은 결코 일반적으로 용납되는 자료 분석이론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으며 또한 성경 기사의 현재의
상태에 대한 만족스러운 설명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오경 구성에 대한 이론들이 결정적으로 입증된 사실들이 아니라 있을 수 있는 유력한 가설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2) mabul: 천재지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용어는 hamabul이다.
이같이 정관사를 지닌 형태는 9:11,15을 제외하고 이 이야기의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창 6:17, 7:6-7,10,17, 9:11,28, 1
0:1,32, 11:10). 이 관용법은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mabul은 물과 관련된 잘 알려진 실재였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창 6:177:7). 구약 다른 곳에서 이 용어는 시 29:10에서 한번 사용된다.
학자들은 종종 이 용어가 "회오리바람"이라는 뜻의 용어 wabubu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며 아카드어 abubu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 용어는 히브리 설화에 있어서 mabul의 사용에 일치하는 방식으로 바벨론 홍수 설화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타당성이 없다.
그 이유는 A. "b"에서 "l"로의 이화가 셈계어 문법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B. 만일 abubu가 원형이라면 두문자에 있어서 "a"가 "m"으로 어떻게 변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은 말할 수도 없고 C. 히브리 단어에 있어서 이중 자음은 설명되지 않는 채로 남는다. 어떤 학자들은 히브리어 mabul의 원형으로 "홍수"를 뜻하는 아카드어 bubbulu, biblu, bibbulu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추론은 언어학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당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아카드어
이야기에서 사용된 용어는 bibbulu가 아니라 abubu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제안은mabul을 "멸하다"는 뜻의 아카드어 어근 nbl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어원론 또한 언어학적인 난점들을 지닌다.
그러나 이에 더하여 이 어원론은 이 히브리 용어를 '파멸'이라는 추상적 개념으로 만드는데, 이는 창세기에 있어서의
관용법에 부합한다고 보기가 아주 어렵다. mabul이 아카드어에 기원을 둔 용어라는 이론은 일반적으로 포기되고 있다.
mabul이 '홍수'의 의미로는 P와 P에 의존하는 자료들에서만 나타난다(창9:11,15,28, 10:1,32, 11:10). 한편 예를 들어
이사야서(54:9)가 이 이야기를 언급할 때 이 용어를 피하고 단순히 "노아의 물들"로 말했다는 사실이 주목되어 왔다.
여하간 mabul이 본래는 '홍수'를 의미할 수 없다는 것이 홍수 이야기 도처에 있어서의 그 용법을 볼 때 분명하다.
P에서 이 용어가 처음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지상의 물의(the) mabul을 임하게 하시리라는 그의 의도를
선언하신다(6:17). 노아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분명 잘 알려진 mabul이 아니라 그것을 땅에 내리시겠다는 발표이다.
J에서 노아는 처음부터(7:4) 땅을 물로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도만을 배운다.
그리고 mabul은 7:10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더 나아가 이야기 전체에 걸쳐서 홍수 자체가 언급될 때는 언제나 그것은
사 54:19에서와 같이 "물"로서 언급된다(창 7:18-20,24, 8:1,3,5,8-9,11,13).
다른 한편 mabul이라는 용어는 천재지변의 발단에 관련해서만 나타 난다.
J에서 홍수는 mabul로서 결코 언급되지 않고 다만 "그 mabul의 물"로서만 언급된다.
그리하여 "칠일 후에 그 mabul의 물이 땅에 덮이니"라고 되어 있다(7:10; 참조. 6:17, 7:6,17).
더욱이 7:10,12(J)을 연결지을 때, "칠일 후에 홍수의 물이 땅에 덮이고...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는 것은
mabul이 지상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고찰에 비추어 볼 때 시 29:10은 mabul을 "여호와의 발 바로 밑에놓인 하늘의 대양을 가리키는 고대 명칭임"을
분명하게 나타낸다(Begrich).
P가 mabul을 '홍수'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이 용어가 홍수 전승에서 지닌 확고한 위치를 시사하며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용어의 본래적 의미에 대한 기억의 점진적인 쇠퇴를 시사한다.
의미에 있어서 이러한 변화는 두 단계로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A. 만일 홍수시에 mabul이 실제로 쏟아졌다면(이것이 이야기 속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J에서처럼 그 mab-ul의
물 대신에 mabul 자체가 땅에 내렸다는 관념은 자연스러운 결론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려는 개념은 창1장에서 하나님이 태초에 세계의 물들을 분리시켜 궁창의 위 또는 아래에 그 자리를
정해 주셨듯이 이제 P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혼돈을 형성하기 위하여 홍수 이야기에서 다시 그것들을 합쳐지게
하였으리라는 것이다. B. 일단 mabul이 전체 땅에 넘쳐 흐른 홍수의 물의 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면 하늘의 대양으로부터 세계를 덮은 홍수라는 개념으로의 의미 변천은 당연한 과정이다.
끝으로 mabul의 유래는 "흐르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yabal이나 아니면 "물을 나르는 가죽 부대"란 뜻의 nabal
(참조. 욥 38:37)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만일 후자의 어원이 가능하다고 하면 mabul은 "하늘의 대양" 또는 "하늘의
물항아리 저장소"를 가리키는 전문용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3. 성경 이야기의 문학적 의존성: 많은 홍수 전설들이 세계의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알려져 왔고 또한
훌륭하게 입증된 사실이다. 한때 홍수 전승의 이러한 광범위한 분포는 성경 기사의 역사성에 대한 증거로 생각되었다.
이 이야기가 예상할 수 있는 정도의 수정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근동에있는 그들의 본래의 고향으로부터 흩어질 때 전세계로 파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마땅히 포기되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무수한 민족들이 그들의 문학에 있어서 홍수 전설을 소유하지 않고 있음을 안다.
홍수 이야기들은 아프리카에서는 거의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아시아의 많은 지역들에서도 부재한다.
그것은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태평양 제도들에는 널리 퍼져 있다.
이에 더하여 알려진 홍수 전설들 중 많은 것은 성경 이야기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성경 이야기 및 서로서로와 독립하여
위치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전세게적인 홍수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며 다만 국지적인 홍수만을 안다.
또한 모든 이야기들이 "여호와의 마음에 든" 한 사람 또는 한 가족의 구원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흔히는 영웅들이 신들의 개입없이 보트를 타거나 또는 산을 올라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건진다.
더 나아가 오직 소수의 홍수 이야기들만이 인간의 사악함을 홍수의 명분으로 제시한다.
많은 경우들에 있어서 홍수의 특성들 또는 그 유래된 수단들에 관하여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흔히 폭풍우, 때로는 비, 대양의 해일, 지진이 홍수를 유발한다. 구
원받은 자는 한 사람(남자 또는 여자), 부부, 전체 가족, 특정한 또는 불특정한 수효의 사람들일 수 있다.
다만 소수의 민담들에서만이 동물의 다양한 종들과 대표들이 구원의 배에 들어간다.
홍수의 기간은 만약 제시되는 경우라면 며칠에서 여러 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러한 종류의 사실들은 성경 기사가 모든 홍수 이야기들의 원조라는 주장을 반증해준다.
하지만 성경 이야기와 이러한 놀라운 유사성을 지니는 하나의 홍수 전승이 있다.
이 전승은 성경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결부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설형문자(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전승이다.
기독교 기원 이전부터 많은 점들에서 성경 이야기와 유사한 바빌로니아 홍수 이야기의 존재가 알려져 왔다.
바빌로니아의 사제인 베로수스는 홍수 이야기를 포함하는 바빌로니아 역사를 편찬하였다.
그는 이 책을 주전 275년경 희랍어로 출판하였다. 불행하게도 그의 저술은 유실되었다.
그러나 그의 저서로부터의 발췌문들이 희랍 역사가들에 의하여 수집되어 우리에게 전해져 온다.
베로수스의 홍수 이야기는 성경 이야기로부터 취해진 것으로 일반적으로 믿어진다.
그러나 1873년 영국 박물관의 조지 스미스가 "갈대아의 홍수 이야기"를 발견 출판함으써 바빌로니아 이야기가 히브리
이야기보다 현저하게 오래 되었다는 것 그리고 히브리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훨씬 전인 주전 2천년기 초 무렵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결정적으로 입증되었다.
스미스에 의하여 출판된 문서들은 아슈르바니팔(주전 668-626?년)의 도서관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아슈르바니팔은
니느웨에 있는 그의 궁전에서 메소포타미아 문학의 위대한 저작들의 필사본을 수집하였다.
스미스에 의하여 확인된 토판들은 길가메쉬 서사시의 단편들로(모두 12 토판들이 있따) 그 중에서 홍수 이야기는 3백행으로 된 단일 일화를 구성하며 토판 XI에 기록되어 있다.
(1) 길가메쉬 서사시: 자기 친구 엔키두의 죽음으로 상심에 빠지고 또한 점증적으로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 갈가메쉬는 영원한 삶의 비밀을 배우기 위하여 바빌로니아의 노아라고 할 그의 조상 우트나피쉬팀(아트라하시스의 이명; 고바빌로니아어로는 우트나피쉬팀; 수메르어로는 지우수드라; 희랍어로는 크시수트로스)을 찾아 가기로 결심한다.
많은 어려움과 곤경을 겪은 후 길가메쉬는 우트나피쉬팀을 찾아낸다.
그는 길사메쉬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내가 홍수에서 살아남음으로 불사를 획득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그 세부 사실들을 생생하게 말해준다.
신들이 세상을 멸하기로 결심하였을 때 신 에아는 엔-릴의계획에 반대하여 꿈 속에서 슈루파크(현대의 파라)에서 살고 있는 우트나피쉬팀에게 그의 집을 해체하고 각면이 60미터가 되는 정확한 입방체 모양의 배를 지을 것을 명령하고 거기서 그와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씨"가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우트나피쉬팀은 그의 동료 시민들에게 그의 행동의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그들이 그에게 어디로 가려느냐고 물을 때는 다만 애매하게 그저 신들을 방문하려 하노라고 답변하였다.
이 말이 그들에게는 번영에 대한 기약으로 들렸을 것이나 우트나피쉬팀에게는 급박한 홍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우트나피쉬팀은 아침에 일어나서 배를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였고 5일만에"그 골격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배는 6갑판(다시 말해 7층)이었고 각층은 9구획으로 구분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63개의 칸을 지닌 배가 만들어졌다.
배에 역청을 칠하고 기름을 바른 후 제7일에 그는 배를 전수시킬 준비를 완료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배에 은과 금, "그가 소유한 모든 살아있는 것들", 그의 모든 가족과 친척, 들의 짐승과 야생 생물들,
"모든 장인들", 뱃사람들을 싣거나 태웠다.
우트나피쉬팀 자신이 배에 들어가 문을 닫은 후에 하늘은 구름으로 검게 되고 천둥이 치며 번개가 번쩍이고 강물이
일어나며 둑과 제방이 터지고 사나운 비바람이 땅을 휩쓸었다.
너무나도 어두워서 사람이 서로를 알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홍수가 이처럼 흑심하여 신들조차도 "개들처럼 움추리고 (또한) 바깥 벽에 웅크리고 있었다."
6일의 낮과 밤에 바람이 불었고, 한편 폭우, 폭풍, 홍수가 땅을 휩쓸었다.
"칠일이 되자 홍수(를 몰아온) 남쪽의 폭풍이 가라앉고...바다는 조용해지고 비바람은 잠잠해지고 홍수는 멈추었다."
우트나피쉬팀은 바다를 내다 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있었고 모든 인류는 흙으로 돌아갔다."
구체적으로 명기되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에 배는 니시르 산(현대의 피르오마르 구드룬, 키르쿡의 북동쪽에 위치함)에
머물게 되었고 거기서 6일간을 꼼짝없이 정박하고 있었다. 제7일에 우트나피쉬팀은 비둘기를 내어 보냈다.
비둘기는 쉴 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배로 돌아왔다. 다음에 그는 제비를 날려 보냈다. 그것도 또한 돌아왔다.
마침내 그는 까마귀를 날려 보냈다. 그것은"날아 다니다가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서 먹이를 먹고 선회를 하고 까악거리고
울고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 모습을 보고서 그는 배의 문을 열고 모든 생물을 내어 보냈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다.
신들은 "달콤한 향기를 흠향하고 희생제물 주변으로 파리떼처럼 몰려들었다."
엔-릴이 와서 홍수를 피한 사람이 있음을 발견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나 그는 홍수가 너무 가혹하였다는 에아의 책망에 승복하고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에게 불사로 보상하였다.
성화의 말을 인용해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우트나피쉬팀은 인간에 불과했다.
지금부터 우트나피쉬팀과 그의 아내는 우리와 같은 신이 될 것이다. 우트나피쉬팀은 멀리 강들의 어귀에서 살도록 하라!"
(2) 설형문자 토판들: 홍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사는 닙푸르에서 발견된 수메르 판이다.
그것은 한 토서판에 6단으로 기록되었는데 아래의 3분의 1만이 보존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지우수드라는 "인류의 씨를 멸하기 위하여"홍수를 보내자는 신들이 결심을 알게 된다.
이 이야기에 본래 포함되어 있음에 틀림없는 지우수드라에 대한 교훈들은 유실되었다.
왜냐하면 본문은 이 부분이 파손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의 남은 부분에 이르게 되면 홍수가 이미 7주야를 땅을 휩쓸었고 "거대한 보트는 거대한 물 위에서 폭풍에 의하여
이리 저리 밀렸다." 다음에 태양신 우트가 임하였고 지우수드라는 그와 나머지 다른 신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다.
마침내 "아누(그리고) 엔-릴은 지우수드라를 사랑하였고 신(의 그것과) 같은 생명을 그에게 주었으며 신(의 그것과) 같은
영생의 숨을 그에게 넣어 주었다. 그 다음, 왕인 지우수드라를...그들은 태양이 솟아 오르는 곳인 딜문 땅에 거하게 하였다."
수메르 서판에 더하여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된 홍수 이야기의 두 번째 단편이 닙푸르에서 발굴되었다.
오직 서판의 몇 행만이 남아 있다. 이 본문은 홍수로 땅을 멸하겠다는 신의 결심에 결부되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의 보존자"라는 이름을 지니 큰 배가 세워진다. 단단한 지붕이 축조되고 배 안으로는들의 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들어간다.홍수 설화를 간직한 아트라하시스(고대 바빌로니아어로는 "아트람하시스")서사시는 본래 세개의 토판들로부터
떨어져 나온 4개의 작은 단편들로부터만이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이 세 토판은 모두 1,245행을 포함하고 있다.
두 개의 단편들은 고대 바빌로니아 토판들로부터 나온 것이다. 다른 두 단편들은 아시리아 토판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아시리아 토판들은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견되었고, 한편 바빌로니아 토판은 약 1천년이나 더 오랜 것으로 왕
암미자두가(바빌로니아 제1왕조) 시대에로 소급된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홍수에 선행하여 혹심한 전염병들이 생겼다.
이는 "인류의 억압적이고...포악한 모습을"억누르기 위하여 엔-릴이 보낸 것이었으나 허사였다.
다른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나자 엔-릴은 홍수를 일으키려고 결심하였다.
에아는 길가메쉬 이야기의 어투와 거의 같은 어조로, 아트라하시스의 꿈에 나타나 경고하였고 아트라하시스는 에아가
제시한 설계에 따라 그의 배를 축조하였다. 홍수가 물러간 후 땅에는 "열네 자궁들"로부터 배출된 인간들이 재번식하였다. 땅의 재번식 설화는 비록 아시리아판 아트라하시스 신화의 끝에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본래 창조 이야기의 일부였고
홍수 기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설형문자 문학에 홍수에 대한 다른 언급들이 존재하나 현재까지는 더 이상 확충된 이야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A. 예레미아스).
(3) 베로수스의 기사: 알려져 있는 가장 후대의 바빌로니아 홍수 설화는 베로수스의 설화이다.
이 설화로부터의 발췌는 밀레도의 알렉산더 폴리히스트로(주후 2,3세기)에 의하여 그리고 자신의 연대기에서
유세비우스(주후 260?-340?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불행하게도 단편들로만 존재하는 유세비우스의 연대기는 자신의 [Chronography]에서 게오르기우스 신켈루스
(810년 이후에 사망)에 의하여 창조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까지의 사건들에 대하여 길게 인용되어 있고 또한
완벽한 아르메니아 교정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세비우스 저작들에 대한 제롬의 번역에는 다만 연대기의 중요 요점들만이 제시되어 있다.
베로수스의 기사에 따르면 크시수트로스 또는 시시트로스(지우수드라와 동일)의 통치 중에 홍수가 발생하였다.
크로노스(에아에 해당됨)는 세상이 홍수에 의하여 곧 파멸될 것을 꿈 속에서 그에게 계시해 주었고 그에게 역사를 기록하여 그것을 십파르에 묻고 배를 축조하여 양식을 싣고 모든 종의 동물들을 취하여 들이고 항해를 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항해를 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신들을 향하여, 그들에게 인류의 복을 빌려고" 라고 답변하였다.
크시수트로스는 명령에 복종하였고 홍수를 견뎌내고 생존하였다.
폭풍우가 잠잠해지자 크시수트로스는 "몇 마리의 새들"을 날려 보냈다. 그것들은 배로 돌아왔다.
몇 일 후에 그는 새들을 다시 날려 보냈다. 그랬더니 그것들은 발에 흙을 묻히고 돌아왔다.
하지만 세번째 날려 보냈을 때 새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크시수트로스는 배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배가 산기슭에 정박한 한을 보고는 그의 가족과 선원과 함께 배에서 내렸다.
그가 신들에게 희생제사를 드렸을 때 그와 그와 더불어 하선하였던 사람들은 사라졌다. 그
다음 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이 크시수트로스를 찾으려고 밖으로 나왔다. 그
러나 그들은 다만 그의 목소리만을 듣게 되었다. 그 목소리는 신들을 찬양할 것, 바벨론으로 돌아가 십파르에 은닉된
기록들을 발굴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알리라는 것이었다.
끝으로 그 목소리는 그들이 현재 아르메니아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바벨론으로 돌아가 바벨론을 재건하였다. 그러나 배는 아르메 니아의 산들에 남아 있었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사람들은 당시에도 부적을 삼기 위하여 그 배로부터 역청을 뜯어냈다고 한다.
(4) 의존성의 문제: 히브리 홍수 이야기와 메소포타미아 홍수 이야기 사이의 접촉점은 무수하다.
두 전승 모두에서 주인공은 임박한 천재지변에 대하여 신의 경고를 받고, 신에 대한 그의 경외심 때문에 파멸에서 구원을
받은 경건한 사람이다. 두 전승 모두에서 배의 규격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가 주어진다.
또한 양자 모두 땅의 재번식에 대하여 배려를 한다. 왜냐하면 두 홍수 모두 엄청난 물의 양과 결부된 전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창 7:19에서 물은 산위로 15규빗이나 불어 오른다). 폭풍우의 기간은 다양하게 주어진다.
홍수의 결과는 전체적인 파멸이다. 배는 산 위에 머물게 된다.
주인공은 물의 감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기 위하여 새들을 날려 보낸다(성경의 순서-까마귀 다음에비둘기-가 바빌로니아의 순서보다 더 상식적이다. 왜냐하면 까마귀는 표류하는 썩은 고기 위에 앉아서도 살 수 있으나 비둘기는 골짜기에서
자라나는 나무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배로 돌아오지 않은 것은 우트나피쉬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는 바가 없는 한편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노아에게 그가 구하던 정보를 제공하였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야 하선하였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주인공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배를 떠났다.
두 전승들 모두 주인공이 홍수에서 살아난 후 취한 몇 가지 예배 활동들을 말한다.
그리고 두 전승들 모두 생존자들에 대한 신의 축복을 말한다. 이와 더불어 유사한 천재지변적 홍수가 결코 다시는 있지
않으이라는 것이 (길가메쉬에서는)시사되고 (창세기에서는) 약속된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우트나피쉬팀은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
성경 이야기는 6:9 하반절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노아에 대한 유사한 설명에서 이같은 언급을 보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언급의 가능성은 5: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있지 아니하였더라"
(J)는 내용에 의하여 제시된다. 이 내용이 아마도 P에 의하여 오해되어 5:22에서 "에녹은 무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나타난 것 같다.
만일 이 가정이 옳다면 바빌로니아 전승에 대한 히브리 전승의 의존, 히브리인들에 대한 바빌로니아 전승의 재조명,
재작업이 보다 분명하게 된다. 바빌로니아 이야기에 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창 11:2, "이에 사람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였다"는 내용에서 발견될 수있다.
논리적으로 11:1을 따르지 않는 이 구절은 홍수 설화(J)에 연결되어 고려될 때 의미를 지닌다.
이 설화는 방주가 바벨론 서쪽 지점에 정착한 것으로 가정한다.
홍수 설화에 대한 이러한 결론부는 베로수스에 의하여 제시된 홍수 설화의 결론부를 생각나게 한다.
더 나아가 베로수스의 설화에서 홍수 생존자 들에게는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 제시된다.
고향을 "상실한" 상태에 대한 유사한 언급은 아마도 창 11:2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실제 성경의 홍수 이야기와 메소포타미아 홍수 이야기 사이의 역사적 관계는 정확하게 결정지을 수 없다.
히브리 기사의 주된 개요는 분명히 바빌로니아의 홍수 전승으로부터 파생되었다.
히브리 이야기가 바빌로니아 이야기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세부 내용 및 정신에 있어서
두 설화들 사이의 차이는 대단하여서 바빌로니아 전승에 대한 성경 전승의 축어적인 의존성은 입증될 수 없고 사실상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바빌로니아 홍수 전승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히브리 전승에로 직접적으로 번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모리 사람들과 고대 아람 사람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전달되었고 히브리인들이 이 이야기를 취하여 그들의
신학적 전제들에 맞추었다. 서로 거짓말을하고,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인류에 대하여 속이고 기만하며, 홍수와 폭풍 앞에
두려워 움추리고, 홍수 후 희생제물에 파리떼처럼 모여드는 바빌로니아 신들 대신에 우리는 성경 기사에서 의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한다(출 15:11). 창세기에서 홍수는 틀림없이 부패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되고 그 이야기는 훌륭하게 진술되므로 그것은 오늘날에 있어서조차 양심을 일깨우는 동일한 능력을 소유한다.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성경 기자들은 이 이야기를 말하였다.
4. 홍수의 역사성: 창세기에서 홍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에도 병합된다.
그리하여 당시 땅의 모든 알려져 있는 민족들이 노아의 세 아들들과 가나안의 후손들이라는 것이 말해진다.
이러한 것은 홍수를 그들의 역사에 병합시키려고한 보다 초기의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시도와 일치한다
(참조. ANET 264의 수메르왕 명단). 홍수를 역사화하는 이러한 시도들은 자연히 홍수의 역사성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근동 홍수 전승의 역사적 핵심을 형성하는 실제적인 홍수가 있었는가?
전지구를 뒤 덮고, 방주에 보존된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든 인간들과 동물들을 멸절시킨 홍수에 대한 신앙은 대체로
대체되어 왔다. 세계의 홍수 신화들에 존재하는, 단일한 역사적 사건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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