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단1:8~16. 95, 528장. 230507. 항도교회
이학권
https://cafe.daum.net/rnjstlgur/9oZC/434 권시혁
미국 뉴저지, 하나님 교회를 담임하시고, 콜롬비아 대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시고, 꿈에도 한번 가보고 싶은 하버드 대학 신학 석사로, 프린스톤 최고의 목회자들이 공부하고 싶어 하는 석사 과정을 마치시고, 만나 성경.
유튜브로 한국 목회자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계시는 귀하신 목사님이십니다. 우리가 교독한 말씀을 통해서 아주 좋은 주제예요. 선택이라는 제목하에 말씀 증거하실 때 평소보다 아멘을 세게 하셔서.
따라서 합시다. '아멘' 하면 1.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2. 주의 종이 힘을 얻고
3. 하는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
이제 목사님 나오실 때 할렐루야로 환영하고 큰 은혜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감사하고 반갑습니다. 저는 미국에 이민 가서 45년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아버지 고향은 병곡이고, 어머니 고향은 영덕이고 저희가 3남 1녀인데 3남 1녀는 다 대구에서 태어났습니다.
포항에 오니까 감회가 새롭고, 또한 한국에 오니까 포항이 한국에 예루살렘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귀한 곳에 보내주셔서 아주 감사함을 드립니다.
오늘은 다니엘서 1장과 4장을 나누게 되는데 제목을 선택이라고 잡았어요. 모세 오경의 총 결론이 “선택하라 ”입니다. 생명을 택하라. 신30:19절에 choose Life 츄즈 라이프. 생명을 택하라.
생명을 택하라는 그 말은? 이 세상 대부분 사람은 생명을 택하지 않고 생존을 택합니다. 생존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돈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돈 가진 사람이 힘 가진 사람이에요. 그래서 똑같은 말도 제가 하면 잘 안 듣는데 재벌이 하면 다 들어요. 이건 생존의 세계입니다.
생명의 세계는 달라요. 예수님께서 사시고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그런 세계입니다. 그 세계를 택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니엘서는 끝나는 12장 2절에 보면
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티끌은 dust 더스트-흙이에요. 그러니까 죽어서 땅에 묻힌 자가 되었을 때 나뉘어요. 어떻게 나누어지느냐?
사람 | 살다-죽은 후 | 깨어서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다. |
이것이 다니엘서의 결론입니다. 한평생을 살고 나서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워하는 자도 있다. 영원히 부끄러워하는 자를 예수님은 한 알 그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씨앗, 어떻게 표현하셔도 다 똑같아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어요.
예수님에게는 퍼스트 클라스 라이프. 일등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는 서드 클라스 생명을 주신 게 아니고, 모두가 똑같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어요. 아멘.
이것만 분명히 의식해도 삶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은 잠깐 지나는 광야의 순례인데 이 생명을 모르면 그냥 그 지나가는 동안 조금 더 챙기고, 조금 더 이익 보고, 거기에 광야 과정이 다 낭비되어 버릴 수도 있어요.
광야는 불편하고 어려운 곳이지요. 그 어렵고 불편한 곳에서 생명을 피우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려울수록 의지력이 강해지고, 힘들수록 조건보다 생명으로 싸워나가는 생명을 택하라. choose Life 츄즈 라이프. 이것이 모세 오경의 결론이다.
그래서 그렇게 나눠지는데 나눠질 때 영생을 받은 사람은 그다음 절에 나와요.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히 빛나리라.
예수님은 이 생명은 사람들에 빛이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생명은 빛입니다.
생명을 산 사람은 내 생애를 통해서 빛이 피어나는 거예요. 욕심으로 사는 사람은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남들은 10$짜리 음식을 먹을 때 자기는 만$짜리 음식을 먹었어도 거기에는 빛이 없어요. 어둠밖에 없어요.
이게 물 뚜껑인데 물질이에요. 이 물질을 불에 태우면, 불에 타기 시작하면 빛으로 변해요. 왜냐하면 에너지화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에너지는 빛이에요. 우리 육신은 물질이지요. 이 물질을 태우면 빛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육신을 살지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면 우리 육신을 벗어나요. 육신은 다 태운 거예요. 일생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빛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뭘 더 가졌느냐? 덜 가졌느냐? 높으냐 낮으냐? 이건 현상이 만든 인간 게임이에요.
내가 대통령입니다. 나무 앞에 가서 딱 섰어요. 그럼 나무가 대통령 왔다고 고개 숙여 인사할까요? 나무는 그대로예요. 그 나무 앞에 가서 제가 섰어요. 대통령이냐? 청소부냐? 이건 인간 게임이에요. 항상 기억하세요.
자칫 잘못하면 평생을 인간 게임하다 보내요. 이런 인간 게임이 왜 있는지 그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지도 보지도 못한 채. 그냥 사람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 보내고 말지요.
그래서 생명을 산 사람은 궁창의 빛과 같이 별과 같이 빛나고 영원토록 빛나는 생명이 됩니다.
다니엘서는 묵시록입니다. ἀποκάλυψις ἀπο, 1249
묵시라고 하는 것은 강대상에 꽃이 보이시지요? 안 보이세요? 보입니다. 보이는 건 현상이요. 현상을 보고 계세요. 그런데 이런 꽃이 있는 것은 보이지는 않지만, 꽃에 생명이 이 안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묵시록이라고 하는 것은? 묵시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현상 속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여주는 것을 묵시라고 한다. 그래서 이 본질을 보는 사람은 세상 인습적 논리에 결정타를 먹여 버려요.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다 그렇게 살아요. 더 잘 살아야 해요. 더 잘 나야 해. 더 높아져야 해. 더 많이 가져야 해. 그게 나쁜 거는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은 살아가는 인간 게임의 한 방식이에요. 축구 경기를 했는데 질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어요. 지기만 하는 것도 저주예요. 이기기만 하는 것도 저주예요. 축구 경기를 정말로 즐길 수 있으려면 져본 아픔도 알 수 있어야 하고, 이긴 기쁨도 누릴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때로는 지게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이기게 할 때도 있어요. 질 때는 지는 것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게 하는 것이 있어요. 이길 때는 이기는 것을 통해서.
그래서 상황과 조건이 어떤 것을 통해서 오던지 내게 오는 상황과 조건을 선악간에 좋다 나쁘다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받는 사람에게는 이기고 지는 것을 통한, 모든 것을 통하여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참된 복입니다. 항도교회 성도님들은 이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 게임에 길들여져 있어요. 그래서 사실 하나님의 복을! 하나님은 선과 의와 사랑이세요. 하나님에게서는 악과 저주가 없어요.
가령 내가 살아 있는 평생동안 하나님을 저주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나를 저주할까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내가 평생 작정하고 죄를 지어도 그 지은 모든 죄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억만 배가 더 많으세요.
도리어 우리가 그럴수록 하나님은 이놈이 얼마나 아프면, 이놈이 얼마나 절망스러우면, 저렇게 몸부림칠까? 더 깊이 품어 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믿고 받으면 되는 거예요. 내가 뭘 잘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나에게 달려있지 않아요. 물론 잘하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가 내 행위에 달려있지 않아요. 믿고 바라는 자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아멘.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이 세상에 길들여진 의식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는 전부 조건들 뿐이에요. 자기가 뭐가 되고, 높아져야 되고, 남들에게 지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가난한 것은 비참한 일이고, 이렇게 누가 가르친 적이 없어요. 세상 사람은 이렇게 길들여지는 것이지요. 그렇게 길들여진 의식과 가치와 방식과 이론이 본질을 만나면 산산이 부서져 나갑니다.
그때 우리는 현상에서 자유해지고, 본질에 뿌리가 되는 하나님을 누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묵시를 만나는 심령은 복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늘 묵시에 1장과 4장을 나누니까 갑절로 받으시기를 바라요.
이 길들여진 세계에 우리는 자유하지 못해요. 옷은 입으면 되는 것이지, 남들이 10만 원짜리 입을 때 나는 백만 원짜리를 입어야 된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에요. 백만원 짜리를 즐길 수도 있고, 즐길 때도 있어요. 그러나 백만원 짜리 옷 입었다고 내가 잘 나지는 것은 아니에요.
사람이 참 웃겨요. 참 옷이 예쁘네요. 그러면 참 좋아해요. 옷이 예쁘다 그랬잖아요. 구분을 못 해요. 현상과 본질을. 당신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건 기뻐할 일이지요. 옷이 아름답다는데 자기가 왜 좋아해?
그러니 묵시를 만나면 질문이 막히는 거지요. 이 묵시를 만날 때까지 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벌고 많이 가질 수 있나? 그것은 인간 게임 안에서 깡통 채우기예요. 남의 깡통의 것을 어떻게 하면 내 깡통으로 채우나? 이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깡통 채우기입니다.
그런데 묵시를 만나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왜 이 자리에 있으며 하나님께서 이 모습으로 이 시간에 보내셨을까? 하나님은 선과 의와 사랑이라고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모든 선과 의와 사랑으로 창조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일 원하는 것은 이학권이를 창조할 때 하나님이 그 속에 심으신 하나님의 선과 의와 사랑이 피어나는 것을 보고 싶어 해요. 그리고 내가 그것을 피워내고 싶은 소원을 가질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모든 것 정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던지시는, 나를 위해서 하나님 자신을 던지시는 그런 하나님이세요. 그래서 그 삶을 살 때는 보람과 가치를 느껴요. 나는 너보다 잘났다. 부자다. 나는 너보다 성공했다. 그런 것이 아니고요. 내 속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던, 하나님이 심으신 선과 의와 사랑이 피어나면서 내가 나 자신에게 놀라기 시작해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진실은요. 자기를 만나는 나요. 가장 두려운 것이 나 자신을 보는 것이에요. 왜냐 그러면 나 자신을 만나면 뜨악해져요. 아무리 성공한 사람도, 아무리 잘난 사람도 뜨악해져요. 나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이유는 간단해요. 껍질로 살기 때문이에요. 내 안에 진실을 가꾸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게 예수님의 인간론이에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이 산상수훈인데 그 중심이 6장이에요. 6장에서 이렇게 시작해요.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의라는 것은 종교가 아니에요.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잘난 것이 의예요.
저는 학교를 좀 어려운 데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뭐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는 제가 찾는 것이 있어서. 그 찾는 스승을 쫓아다니다 보니까 그렇게 했어요. 그럼 제 학력이 저에게 의가 되는 거지요. 그게 의예요. 좋은 것이지요. 나쁜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내가 그걸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용하면 그 의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통해서 내 내면의 진실을 가꾸어야지. 내면에는 욕심과 거짓이 가득하면서 그저 사람에게 보이기, 예수님이 인간에게 경고하신 것은 딱 한 가지예요. 보이기 하지 말아라.
자, 다니엘서 1장으로 들어갑니다. 이때까지 서론이었어요. 목사님이 5분 전에 해 주셨는데도 제시간에 끝날지? 심히? 하나님만 아실 일이지요.
다니엘서 1장은 포로수용소예요. 포로로 잡혀간 자리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예요. 이 포로로 잡혀간 자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를 지키시는 거예요.
포로로 잡혀가면 빨리 먹을 것 확보해야 되고 조금이라도 잘 배워야 편한 자리에서 할 수 있고, 또 일해도 편한 일을 배당받고 하니까 나는 잃어버린 채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조건과 상황을 만드느냐? 어떻게 하면 평안하고 안락하고 성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정작 나를 잊어버릴 수 있는 자리가 포로수용소, 포로로 잡혀간 자리에요.
포로로 잡히면 어디에 잡혀갔어요? 2252 제국에 잡혀갔어요. 제국에. 지금 우리는 제국에 살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제국은 시장 제국이라고 불러요. Market Empire
그래서 우리의 관심이 전부 이거예요. 주식만 올라가면 시장만 잘 돌아가면, 나는 정치도 가만 보면 다른 가치는 다 잃어버리고, 그저 $만 벌어오면 된다. 그런 식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달러를 벌어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그 가치밖에 없으면 사람 사는 게 힘들어지지요. 왜냐하면 달러가 모든 것이니까. 달러 없으면 천대받고 무시 받고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 됨은 잊어버리고 이 제국의 평안과 안락과 성공. 그것을 해서 만드는 가치는 소비 가치 밖에 없어요.
지금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하고 출세해서 무슨 가치를 만드느냐? 대부분은 소비 가치밖에 못 만들어요. 소비 가치. 소비 가치는 참 역설적이에요. 소비 가치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필요한 것을 사면 소비 가치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필요 없는 걸 사야 소비 가치가 생기는 거요.
이해가 안 가지요. 이런 거예요. 차는 타고 내가 원하는 장소까지 이동할 수 있으면 돼요. 그러면 한국에서 차 한 대 얼마 합니까? 삼천만 원. 삼천만 원짜리 차면 충분해요. 어디든지 갈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런 차를 사면 소비 가치가 아니에요.
제가 서울에서 묵고 있는 호텔 앞쪽에는 좋은 차는 주차장에 넣지 않고 앞에 대기시키더라고요. 한 20대 대고 있는데 세상에 비싼 차는 거기서 다 봤어요. 롤스 로이스 벤틀리 람보기니. 내 차는 없어요.
나는 3천만 원짜리 차를 타고 여기서 저기까지 이동할 수 있으면 충분한 거예요. 그런 가치는 소비 가치가 아니에요. 그렇게 삼천만 원 짜리 차를 두고 삼천만$ 짜리 차를 사면 내가 얼마나 힘이 있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어요. 소비 가치가 돼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것을 사는 것이다.
꼭 그런 경우만이 아니에요. 아내 생일입니다. 아내 생일이어서 꼭 필요한 칼 세트를 사 줬어요. 그럼 어떻게 될까요? 저처럼 맞아요. 전혀 필요 없는 다이아몬드라든지 이런 걸 사 줘야 돼요. 다이아몬드를 어디다 써요? 딱딱하니까 긁을 때 써요? 여러분 웃지요!
아니 그게 꼭 나쁘다는 게 아니요. 그게 인간 게임입니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걸 아셔야 해요. 그러니 무슨 다이아몬드를 가져야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비싼 차를 타야 내가 무슨 가치 있는 것을 느끼시면 세상에 세뇌되어 있는 거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 됨은 흙탕물처럼 떠내려가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제부터 나는 헛된 소비 가치로 살지 않는다. 그게 될 것 같아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급류 속에 떠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러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만난 사람은 그 급류 속에서, 흙탕물 속에서 반짝이는 빛이 되는 거지요. 그런 얘기를 들을 때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기 시작하지요. 체증이 조금 내려가지요. 우리 속에서.
다니엘 얘기를 읽으면 10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요. 제국에서 성공해야 되고, 왕관 써야 되고, 이러는데 다니엘의 이야기는 그걸 다 즐기지만, 그거하고 아무 상관 없어요.
제일 끝에 보시면 나를 최고의 총리로 세우는 것? 그냥 왕이나 하십시오. 이래 되는 거지요. 그래서 현상뿐인 세계, 현상은 인간 게임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세계 본질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 안에 생명이 불러일으켜지고 피어나기 시작해요.
그래서 그때가 십자가의 사랑을 만난 때요. 하나님이 나를 자신의 선과 의와 사랑으로 모든 신실하심으로 나를 창조하시고 내게서 그것이 피어날 때 하나님이 가장 기뻐해요. 그러지 않나요?
부모가 자식을 보면 자식에게 좋은 것이 좀 있어요. 달란트가 좀 있어요. 참신한 게 있어요. 그게 피어날 때 부모는 그게 기쁘고 행복하고, 그걸 위해서 자기 전체를 드려도 좋잖아요. 아니 신경질 나요?
좋지요. 아멘. 표정은 신경질 내고 계시네요. 그런데 그건 괜찮고 하나님도 나에게서 그런 것이 피어날 때 하나님은 자기 전체를 드려도 좋으신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만난 사람은 사랑받은 고귀함 신뢰받는, 부름 받은 나. 이때 내 속에서 생명 에너지요. 에너지가 생수의 강으로 솟아나는 거지요. 그래서 회복이 일어나지요. 인간 게임의 부속품으로 전락된 내가 회복이 일어나요. 가능성이 비춰져서 꿈을 잃어버린 이 세상 살면서 대부분이 정말로 하고 싶은 얘기는 한 번도 못 해 봐요.
심지어 부부 사이조차. 아픈데 아프다 소리를 못 해요. 왜냐? 아프다 그러면 무시받기 시작해요. 내가 너무 절망적이어서 죽고 싶은데 죽고 싶다는 소리를 못 해요. 자살하는 사람은 죽고 싶다는 소리를 못 해서 자살하는 거예요. 죽고 싶을 때 나 죽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면 결코 자살하지 않아요. 우리의 진정한 소원은 다 억눌려 있어요.
그런데 본질 세계를 만나면 되지요. 본질 세계 하나님이 나를 만드시고, 나를 자기 생명인 나를 피워내기 위해서 자기 전체를 던져버린 그 사랑을 만날 때 비로소 나는 의미 없이 있는 게 아니요. 어쩌다 보니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뜻과 계획안에서 오늘 나는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부르심이 일깨워지고 가슴에 열정이, 열정이 피어나기 시작해요. 가장 행복한 삶은 열정이 피어나는 삶입니다. 고생해도 열정이 피어나는 삶은 행복해요. 아무리 편해도 열정이 없는 삶은 우울증이 와요.
자, 이제 1장의 얘기로 들어가겠습니다. 얘기는 항상 발단 전개 절정 대단원 그렇게 되지요.
발단은 포로지에서 일어나요. 포로지는 신앙이 확인되는 유일한 자리예요. 왜요? 바벨론에 잡혀 왔어요. 바벨론에 잡혀 오면 바벨론이 모든 것이에요. 바벨론에는 하나님이라는 변수가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이 포로로 거기 던져 넣었어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보이세요? 자꾸 좋은 것이 나타나요. 하나님을 꿈에서 봤다. 어디서 봤다. 그러는데 좋은 일이지만 그걸로는 사실 택도 없어요. 본질이 보여야 해요.
현상에 하나님이 보여요? 하나님은 현상이 아니신데 현상이 보이지요. 그러나 내가 현상밖에 보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기 시작하는 사람은 모든 것 속에 모---든 실제와 사건 속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바벨론이 모든 것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이라는 변수가 숨겨지면 세상은 돈이 모든 것이지요. 돈이 만능이에요. 제가 목회를 해 보니까 목회도 돈이에요. 돈.
돈 많이 들어온 교회는 성공한 교회요. 우리 교회는 반 성공한 교회고, 그게 뭐요? 돈이 만능인 교회에서 돈을 넘어선 실제를 만날 수 있는 사람.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지자입니다.
두 번이나 말해요.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은 진실로,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셔야 해요.
하나님은 나타나면 안 되는 거요. 오늘 포항 상공에 하나님이 30초 나타나셔서 얘들아, 나 여기 있다. 그러고 가시면 안 믿을 사람이 없어요. 그건 신앙이 아니지요. 실제가 아닌 그 세계, 숨은 변수, 숨어 있는 본질. 하나님의 실제를 모든 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신앙의 사람이고, 영적 세계의 사람이고, 생존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을 피우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바벨론과 느브갓네살은 이 변수를 모르지요. 그런데 다니엘과 세 친구와 우리는 그 변수를 압니다. 하나님은 안 보이시지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을 선택하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을 선택하시면 당장에 어려움이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 이 얘기의 전개는 3~7절이에요. 제국에서 선택. 제국의 미혹은 강압적이지 않아요. 우리 태어났을 때 누가 목에다 칼을 대고 너 욕심으로 살아야 돼. 그리고 너는 말이야 선하고 의로울 가능성이 있지만, 언제든지 이익을 챙기고 계산을 빨리하고 천박하게 살아라. 그러지 않아도 천박하게 사는 세상이에요. 우리가 세상을 만나면 뜨악해져요.
왜냐하면 우리는 육체로 인간 게임에 들어왔기 때문에 인간 게임이 전부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국의 미혹은 삼 년간 최상의 대우를 해 주고, 3년간 최고의 교육을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하버드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정도가 아니에요. 왕이 직접 만든 학교에서 모든 것을 제공해줘요. 자격은 아무나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제국에서 귀족으로 부응하고 용모가 단정하고 지식이 있고 학문에 통달한 그런 자들을 모아서 교육시켜요.
우리도 보면 sky지 그것은 학문을 가지고 하는지 알 수 없지만, 교육에 일류가 어디 있고, 이류가 어디 있고, 삼류가 어디 있어요. 교육은 배우면 돼요. 사람에게 제일 재미있는 것이 배움이에요. 3548
배움이 없으면 못 살아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뭔가는 하루하루 배우기 때문에 살맛이 나지 매일 일어나면 똑같다. 새로 배울 것이 없다. 그러면 못 살아요.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 교육인데 교육받고 지옥 간다잖아요. 왜요? 교육을 교육으로 보지 않고 인간 게임에 도구화시켰어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교육에 대항해서 교육의 본질을 회복시키는 것. 이런 것을 믿음이라도 하는 거요.
종교 생활 하는 게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시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이건 출발점이에요. 그러나 교회만 다닌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교회를 나오고,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만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이 세상의 거짓, 그 거짓은 모두 사람을 억누르고 사람을 천대받게 하는 모든 차별과 구분을 폐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선과 의와 사랑으로 창조된 귀한 존재요. 생명인 것을 회복하는 하나님의 일, 그 하나와 그 일에 쓰임 받는 삶이 되는 것. 그것이 신앙이다.
우리 항도 교회가 한국의 예루살렘인 포항에 신앙의 불을 밝히는 촛대가 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대우를 해 주고 교육을 시켜주는 이유는 딱 한 가지요. 왕궁에 쓸만한 인재를 만들기 위해서요.
나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한국에서도 서울대 고대 포항공대니. 지난주에는 제가 카이스트에 가서 집회했는데 카이스트는 다 우수한 대학이지요. 제 눈에는 학생들이 불쌍해요.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되는지 알아요? 그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열정과 노력으로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만나면 무한 가능성이 피어나는데 그렇게 공부해서 나는 너보다 조금 잘나야 된다. 나는 너보다 조금 더 좋은 직장 들어가야 된다. 이건 복을 저주로 바꾼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한 나, 그 모든 교육으로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으로 나를 창조했는지 하나님은 나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를 걸고 있는지? 하나님은 나에게서 누구를 피워내려고 하고 있는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제 보다 월급 좀 더 받아야 돼. 그냥 제 보다 조금 비싼 차 타야 돼. 왕국의 생활은 내가 누구냐와 상관없어요. 내가 누구냐를 피워주는 것이 아니라, 이 제국의 고급 부품이 되는 것이지요.
자! 그렇게 얘기는 시작되어 전개되어서 이제는 절정으로 들어갑니다. 시간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어요. 절정은 봄이요. 아까 그랬지요. 본질은 현상에 숨겨진 변수라고. 그래서 신약에 제자도 핵심이 봄이에요.
신약의 예수님 중간이 제자도인에 제자도는 베세다의 소경이 눈뜨는 것으로 시작해서. 벳세다의 소경 기억나세요? 예수님이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마을에서 안수해 주면 되잖아요.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요. 그리고 한 번 안수했더니 희미하게 보여서 다시 안수했더니 제대로 보인다. 기억나시지요. 그다음에 뭐라 그랬어요? 마을에 들어가지 말라 하시지요.
그리고 마감은 바디메오 소경이 눈 뜨는 거예요. 바디메오 소경이 눈뜨는 본문에는 길이라는 단어가 두 번 나와요. 길에 앉았다가. 눈 뜨임을 받고 길에서 저를 쫓으니라.
그러니까 마을에 안주하려는 사람,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인간 게임에 안주하려는 사람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알 수 없어요. 그 자리에 앉아서 제 보다는 내가 잘 나야 돼. 그런 인생이 되면 안 된단 말이지요. 어디에? 길에
우리는 광야 여정을 지나가고 있어요. 무엇을 위해서? 이 여정 동안에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명을 피움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별과 같이 빛나는 빛의 생명이 되기 위하여.
그래서 봄이, 본질을 보는 봄이 열려야 해요. 그래서 시작되는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기도는 본질을 보는 것이기에 제국과 다른 선택을 합니다. 보는지 안 보는지? 그거는 알 수 없잖아요. 어떻게 알 수 있어요? 본질을 보는 사람은 반드시 세상과 다른 선택을 해요. 나 됨을 선택해요.
제국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한 번도 제국 속에서는 있지도 안 하고, 있을 수도 없었던 새로운 이야기. 나의 이야기를 피워내요. 그것이 어떻게 시작돼요?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왕의 음식과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니라.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도덕적인 더러움이 아니지요. 아이구, 음식을 못 먹는다고 더러워지는 게 아니지요. 존재적인 더러움이에요. 그래서 지금이나 다니엘 때나 똑같아요.
우리는 새 이름을 갖고 새 음식을 받으면 새로운 내가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밸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 이렇게 새 이름을 받았잖아요.
그다음에 왕의 음식을 먹는 거지요. 지난번 한국 들어왔을 때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여기 들어오신 분이 한국에서는 제일가는 기업에 상무 이사가 되셨어요. 상무 이사가 되셨는데 저 왔다고 식사를 대접한다고 갔어요.
저는 한국에서 식사 대접 받는 것 좋아하지 않아요. 왜냐 그러면 무슨 집이다. 그러면서 한 시간씩 가요. 나는 짜장면 사 달라고 몸부림을 쳐도 안 해줘요. 저는 짜장면 먹고 좀 쉬고 싶어요. 밤낮이 안 바뀌어서 좀 쉬고 싶어요. 시차적응 때문에.
정신이 없어요. 한 시간 데리고 가요. 그리고 한 시간 먹어요. 그리고 한 시간 돌아와요. 그러면 또 말씀 들어갈 시간이에요. 이건 대접이 아니라 고문이지요.
그분이 저를 데리고 간 집에서 정말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네. 그랬지요. 그런데 메뉴판을 보니까 값인 것 같아요. 그런데 메뉴 판에 값으로 안 적어 놨어요. 암호 같아요. 암호 비슷하게 적어놨길래 다 먹고 나서 제가 그랬어요. 너무 값이 비싸니까. 그게 값이지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그래요.
너무하지 않나요. 점심 한 끼가 보통 사람 한 달 월급이에요. 너무하지 않나? 그랬더니 자기는 그게요. 자기가 거기서 대접하고 먹고 싶은 게 아니라, 상무. 이름이 새로워지면 새로운 레벨에서 먹어야 된데요.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안되는 거예요.
말하자면 노는 필드가 달라져야 해요. 필요 없는 걸 선택하게 됩니다. 지금도 똑같아요. 이 세상에서는 새 이름을 가지고 새 음식을 먹으면 자기가 뭐 된 사람 같아요. 그래서 다니엘은 그것을 거부하지요.
그러더니 요기까지는 하나님이 부재였지요. 하나님이 숨어계셔요. 그런데 다니엘이 딱 인간 게임 속에서 뜻을 딱 정했는데 하나님 개입이 나타난 거지요.
저는 우리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개입이 나타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개입이 나타나 버리면 선택이 먼저 돼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게 세례받기 위한 답변이 아니고, 이게 내 삶에 선택이 되어 버린다.
나는 세상 속에 살지만,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변수로 산다는 내 선택이 되어졌을 때, 하나님이 나에게 개입하십니다. 예가 어쩌려고 이러냐? 너 그렇게 살면 고생해. 너 그렇게 살다 가면 정말 너만 힘든 게 아니라, 다수도 힘들게 해.
그래서 하나님이 걱정되어 막 따라다니면서 못 살게 해요. 그런 경험을 좀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기 때문에 10일간에 시험을 했어요. 10일 후에 기름지고 왕궁에 음식, 그 당시 왕궁의 음식이라면 기름지고 당분, 탄수화물 많고 풍성한 마약. 그때는 마약이라고 안 그랬어요. 비싼 기호품. 고급 기호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 것 먹는 사람하고 자기 천명과 자기 존중이 있고, 나 됨으로 당당해서 나는 제국의 포로로 와 있지만, 나는 하나님을 의뢰해서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누구의 얼굴이 빛나겠어요? 누구의 얼굴이 빛나겠어요? 이건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에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얼굴이 더욱더 빛나지요. 제국의 고급품보다도 훨씬 더 복되고 아름다운 삶. 믿음의 싼타지가 제국의 스테이크보다 더 아름다운 움식이 되었어요.
자, 이 하나님과 동행이 드디어 제국 안에서 일어나기 시작해요. 하나님과 동행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해요. 보이지 않지요.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되는데 숨겨진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위해서는 보이는 용기가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예배했지요. 세상 나가면 뭔가 보이는 용기가 그곳에 나타나야 되는 겁니다. 우리 항도 교회 성도님들이 가시는 곳에는 보이지 않지만, 임재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용기의, 용기의 선택이 나타나는,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던져 주시고 하나님으로 피어나는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4715
그래서 다행히 대단원의 마감이 왔어요. 마감이 왔다고 끝나는 건 아닙니다. 그 대단원이 “야다”예요. 실제를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네 소년에게 배움을 주시고, 지식을 깨닫게 하시고 기회를 주셨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여기를 보세요, 하나님이 뭘 주시니까 깨달아 알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뭘 주심으로 말미암아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자꾸자꾸 열려가는 것이지요. 4751
이 소년들에 대한 테스트를 왕이 황제가 직접 확인합니다. 직접 확인하는데 하나님이란 숨어계시는 본질이 실제를 누리는 것이니 당연히 우수하지요. 예, 하나님께서 주셔서 깨닫게 하시는, 다시 말해서 은사입니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은 자기가 자리를 만들기에 미쳐 있어요. 저는 중고등학생 목회 12년 대학 캠퍼스 목회 10년 그렇게 한 20년 했어요.
젊은이들과 보냈기 때문에 젊은이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항상 그 나름대로 꿈과 소망이 가득한데, 이 현상의 조건이라는 잣대로 억눌러 놨어요.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아요. SAT를 딱 봐서 점수가 몇 점 나오면 나는 어떤 대학에 갈 수 있고, 앞으로 연봉 몇만$짜리가 된다는 것을 알아요. 얼마나 비참합니까?
생명이 있는 한 마지막까지도 꿈을 꿀 수 있는 곳이고, 이 세상은 생명에서 피어나는 꿈을 꿀 수가 없어요. 이 세상에서는 고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에 성적 때문에 일단 정해져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성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꿈과 가능성을 가진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요. 이 세상은 인간 게임에서 다 나를 만들기 위해서 다 우울해요. 우울증이라는 병이 많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내가 나를 채찍질해요.
너는 할 수 있어. 그게 아주 좋은 계획인 줄 알아요. 너는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하면 돼. 열심히 하면 돼. 그런데 되지 않아요. 하나님이 임하시면 그렇게 말해요. 괜찮아요. 괜찮아. 너 자신만으로도 충분해. 나는 너를 사랑해. 너가 잘 안되어도 너를 사랑해.
나에겐 너가 귀해. 그렇게 해서 자기가 귀한 줄을 알면 피어나요. 그냥 피어나요. 내가 나를 채찍질해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에 품음 받으면 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느브갓네살은 몰라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우수성을 보고, 제국의 교육이 우수한 줄 알아요. 얘가 서울대를 나와서 잘하는구나. 서울대를 나왔던 울서대를 나왔던 하나님이 창조하셨기 때문이세요.
그래서 다니엘과 세 친구는 제국에 속하지 않은 자유와 하나님의 자녀로 마감되어집니다. 자녀는 자신의 선택을 살아요. 부모는 이것이 성공이다. 저것이 성공이다. 그래도 그렇게 성공하는 사람은 부속품밖에 안 돼요.
내가 알고 싶은 것. 그것을 찾아가는 사람이 이 인류의 많은 사람을 밝게 해 주는 빛을 던지는 거지요. 믿음으로 능력 받고 지혜 총명을 선물 받아요.
내가 노력해서 이루었다는 이 멘탈리티는 당연히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업수이 여겨요. 그런데 내가 잘되었을 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셨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셨구나. 이 사람은 그것으로 많은 사람에게 또 자신이 선물이 되어줌으로 말미암아 귀한 삶이 되지요.
무엇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의 선하신 삶과 복을 주려는 사람이 돼야지요.
그래서 2장의 마지막은 다니엘은 고래스 원년까지 있습니다. 고래스왕은 페르시아 왕이예요. 바벨론 제국이 무너진 자리에도 다니엘은 서 있는 것이에요. 아까 그랬지요. 영원토록 별과 함께 빛나는 것이지요.
진정 좋은 사람은 사람이 좋은 것을 알게 해 줘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이런 삶이 되세요. 작아도 좋으니까 나를 아는 사람은 아,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야. 사람과 함께 하니까 이것이 진정한 신앙의 출발점이에요.
그게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지요. 복이 되리라. 나를 만난 모든 사람에게는 내려놓지요.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는 귀한 것인데 다시 한번 돌아오는, 포로로 그렇게 선포됩니다.
포로로 그렇게 하나님이 내동댕이쳐 버린 이유가 너희가 떡의 사람이냐? 말씀에 사람이냐? 너희가 인간 게임의 사람이냐?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냐? 하는 것을 깨우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는 거요.
이사야 선지자는 포로 귀한 기에 이렇게 외칩니다.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로다.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끝까지 이스라엘로 정말로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정말로 내가 내 존재의 가치를 피워내지 못하는 것을 위해서 자기 자신들을 드리다가 결국은 나라는 망하고 포로로 잡혀요. 내게 듣고 배울지어다.
말씀이 들리는 것, 말씀을 만나는 것보다. 말씀을 만나는 것보다 더 복된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말씀은 현상 세계가 아니라, 본질 세계를 계시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슴에 말씀을 만나는 사람은 현상 속에 살지만, 전혀 새로운 몸을 가지고 있어요. 새로운 삶과 모습을 가지고,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식은 기름진 것으로 새로움을 얻으리로다. 이 말씀이 항도교회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보이지 않는 숨겨진 하나님을 누리는 기이한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 가치에 종속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답고 복된 것을 피우는 하나님의 신기한 생명 역사가 일어나고, 누리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께서 이곳에 항도교회를 세우셨으니 이 항도교회를 통하여 일어나게 하옵소서. 한 사람, 한 사람, 주의 의로운 손으로 붙드시고 안수하시고 축복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많이 바쁘셨을텐데요~~~♡
아멘!!! 네~^^ 목사님!!!
고맙습니다. 날마다 언제나 주님 안에서 승리하시고
행복하셔요. 강건하시기를 성령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소망합니다. 샬롬 샬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