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1호 : 이덕성초상및관련자료일괄(李德成 肖像 및 關聯資料 一括)
부산박물관, 2006.12.29
이덕성(1655-1704)은 본관이 전주(全州)로 1682년 춘당대시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동래부사, 해주목사, 황해도관찰사, 충청감사 등을 역임한 인물이다. <이덕성 초상>은 높은 오사모에 녹색 단령을 입고 좌안칠분면의 자세로 교의에 앉은 모습이며 배경은 없다. 얼굴은 가는 선묘를 사용했으며 홍조를 표현하고 명암을 살짝 가했다. 육리문은 없으며 수염이 길고 구불거리게 묘사되었다. 단령은 비교적 가늘고 짙지 않은 먹선으로 윤곽과 의습선을 표현하였고 명암을 조금씩 가했다. 쌍학흉배는 밝은 녹색을 바탕으로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하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중요한 사례이다.
이덕성 관련 고문서는 교서 3점, 유서 3점, 교지·교첩 114점, 시권 1점 등 모두 121점으로 백패와 홍패를 비롯하여 관직을 제수받았을 때의 관련교지가 흩어짐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덕성의 이력사항 및 전기자료로서 사료적인 가치가 있으며 인사·행정에 관한 연구자료가 된다. 또한 그의 몇몇 필적도 왕실유물 및 서예사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제1502호 : 전윤효전초상(傳 尹孝全 肖像) 대구 윤용진
윤효전(1563-1619)은 본관이 남원(南原), 자가 영초(永初), 호가 기천(沂川)으로 1605년 문과에 급제하고 1612년 익사공신(翼社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나 인조반정(1623)으로 삭훈되었다.
<전 윤효전 초상>은 바닥에 화려한 채전(彩氈)을 깐 뒤, 단령과 사모를 착용하고 교의(交椅)에 반우향(半右向)으로 앉아서 공수하고 있는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 형식을 보여준다. 그런데 공작흉배에다 서대(犀帶)를 착용하고 있어 익사공신 책록시의 윤효전 품계와 부합되지 않는다. 따라서 1629년 아들 윤휴의 상소로 복관된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한 도상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인 도상이나 화풍, 미감 등이 현재 충북 괴산의 종가에 전하는 보물 제566호 서경(西坰) 유근(柳根, 1549-1627) 71세상으로 알려진 초상화와 매우 흡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제1503호 : 임장초상(任章 肖像) 연세대박물관
임장(1568-1619)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룡(子龍)이다. <임장초상>은 17세기 전반의 전형적인 공신도상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단령을 입고 공수한 뒤 의자에 앉아 좌안7분면을 취하고 있으며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彩氈)을 깔고 두 발은 돗자리를 깐 목제 의답(椅踏) 위에 팔자형으로 벌리고 있다. 이 초상화는 왼쪽 눈꼬리를 위로 치켜 올려 두 눈의 형상을 차이 나게 묘사한 점, 숱은 적지만 때로는 짧게 때로는 약간 길게 올의 방향을 달리하여 수염의 성질을 잘 살린 표현법 등에서 화가가 인물을 앞에 두고 실사한 느낌이 강하다. 흑단령에는 백한흉배(白鷳胸背)가 부착되어 있고 허리에 삽은대를 하고 있다. 단령의 외곽선은 검고 굵은 선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의습처리 역시 검은 선으로 선염이 전혀 없이 선묘로만 대표적인 주름선을 지시했다.
'인조실록'(인조원년 9월 2일) 및 <성시헌익사공신교서(成時憲翼社功臣敎書)>의 내용을 통해 임장이 익사공신 3등에 녹훈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상기의 화풍과 도상을 고려할 때 익사공신 책록 시 받은 공신상으로 추정된다.
제1504호 : 유언호초상(兪彦鎬 肖像)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유언호는 본관이 기계(杞溪), 자는 사경(士京), 호는 칙지헌(則止軒)으로 정조년간의 대표적인 문신이다. <유언호 초상>은 오사모에 흉배가 딸린 단령포 차림의 관복입상 그림으로, 유복이나 평상복 차림의 입상은 없지 않으나 관복정장의 입상 초상화로는 첫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입상이면서 왼팔 소매 끝을 쥔 오른손이 살짝 보이도록 그린 것은 이명기 작 <강세황 71세상>과 비슷하다. 그림 왼편에 “崇禎三丁未 畵官 李命基 寫”란 기록이 있어 1787년에 도화선 화원 이명기가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림 윗부분에 정조의 어평(御平)을 써넣고 있는 점 등에서 유언호가 이 당시 우의정에 오른 기념으로 제작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명기의 다른 초상화들과 마찬가지로 안면 표현의 입체감이 선명하고 옷주름의 음영이 뚜렷하다. 소맷자락 아래로 짙은 농묵표현과 관복의 밑으로 화문석에 떨어진 그림자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또한 “容體長闊 視元身減一半”, 곧 “얼굴과 몸의 길이와 폭은 원래 신장과 비교할 때 절반으로 줄인 것이다”란 글을 기술하고 있어, 유언호의 실제 키와 그림의 키 배율을 계산하여 그린 작품으로 주목된다.
제1505호 : 대구동화사사명당유정진영(大邱 桐華寺 泗溟堂 惟政 眞影)
등받이가 높다란 의자에 우향하여 앉아 있는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의 의좌상(椅坐像)으로 신발을 벗은 채 의자에 발을 올려 결가부좌하고 앉아 손에는 불자(拂子)를 들고 있다. 가는 선으로 윤곽을 짓고 이목구비를 표현하여 백묘법(白描法)을 보여주는 얼굴은 적당히 크고 길죽한 타원형으로 온화한 모습이나, 머리를 뒤로 약간 젖혀 내려보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를 하여 의승병 대장으로서의 기상이 넘쳐난다. 건장한 어깨와 가슴 아래까지 길게 내려온 턱수염은 승병대장 다운 기백을 강조해주는데, 다른 사명당 영정들에 비해 길어진 수염이 특징적이다.
기품 있으면서도 은은한 회백색의 색채와 간결하고 유려한 필선이 사용된 장삼,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를 나타낸 선홍색 가사의 조화는 바르고 단정한 사명당의 승려로서의 품위는 물론 승병대장으로서의 권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하겠다. 좌측 하단의 묵서명에 “가경원년병진(嘉慶元年丙辰)이란 연호가 있어 1610년 입적한 이후 늦어도 1796년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국내에 전해오는 10여점의 사명당 진영 가운데 가장 빼어난 자료이다.
제1506호 : 순천선암사선각국사도선진영(順天 仙巖寺 先覺國師 道詵眞影)
선암사 성보박물관
도선국사(827-898)는 신라말기에 활동한 선승으로, 남쪽지역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 ‘巖’자가 들어가는 세 절인 삼암사(三巖寺)의 하나로 선암사를 중창하였다. 도선국사진영은 두 발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은 의좌상(椅坐像)으로, 오른손에는 주장자를 세워 들고 있다. 옷주름의 표현이 특이한데 녹색장삼은 색의 농·담(濃·淡)으로, 붉은 가사의 옷주름은 먹선과 흰선을 중첩하여 표현하고 있다.
화기에 따르면 1805년에 도일비구(道日比丘)가 선암사 대각국사(보물 제1044호) 진영과 함께 중수한 것으로, 이 두 진영은 유사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현존하는 고승진영 가운데 비교적 조성연대가 올라가는 작품으로, 함께 중수된 대각국사진영(大覺國師眞影)이 보물 제1044호로 지정된 바 있다.
제1507호 :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光州 紫雲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송광사 성보박물관
제1508호 : 이성윤위성공신교서및관련유물(李誠胤 衛聖功臣敎書 및 關聯遺物)
인천 이성구
<이성윤 위성공신교서>는 광해군 5년(1613) 3월에 임진왜란 당시 광해군을 호종하는데 공을 세운 承憲大夫 錦山君 李誠胤에게 내린 衛聖功臣敎書이다. 위성공신은 광해군이 폐위된 후 削勳되었다. 그 결과 구체적인 내용은 실록을 비롯한 모든 기록에서 삭제되었으므로 인적사항 등 자세한 사항이 전하지 않고 대강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는데 본 교서를 통하여 알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지정된 위성공신교서는 보물 제494-2호 정탁, 보물 제1306호 유몽인이 있다. 이 문서는 광해군 때 공신에게 내려진 교서의 형태를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으며 뒷면에는 製進者 및 書寫者가 밝혀져 있어 교서의 양식과 문체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함께 보관된 <교지>는 1669年(현종 10) 8月 24일에 錦山君 李誠胤에게 承憲大夫(정2품)에서 興祿大夫(정1품)로 올려주고 忠貞의 諡號를 내리는 贈諡敎旨이다. 『顯宗實錄』顯宗 10年 8月 24日 甲申條에 “故 錦山君 李誠胤에게 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라 기록되어 있어 贈諡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교서와 교지 외에 이 가문에는 號牌와 牙笏이 전한다. 한 家門의 號牌가 150년(1677-1822)간에 걸친 것이 16개나 남아 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며 호패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인정된다. 牙笏은 하나가 있는데, 李徵龜나 李泰龜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牙笏은 1품에서 4품에 이르는 高位官員이 지니는 것이다.
제1509호 : 허목초상(許穆 肖像) 국립춘천박물관
제1510호 : 최익현초상(崔益鉉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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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11호 : 국조정토록(國朝征討錄)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이 책은 조선 세종에서 중종조에 이르는 동안 대마도, 파저강, 건주위, 이마차, 서북로구, 삼포왜란 등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체재를 보면 목록과 범례에 이어 상권에는 대마도 정벌(征對馬島)·파저강 정벌(征婆猪江)·건주위 정벌(征建州衛)이, 하권에는 건주위 정벌(征建州衛)·이마차 정벌(征尼麻車)·서북로구 정벌(征西北虜寇)·삼포반왜 정벌(征三浦叛倭)이 수록되어 있다.
서술의 체재는 각 전쟁별로 연대에 따라 강목체(綱目體)로 기술되어 있는데, 범례에서 말하고 있듯이 조선의 군사행동은 정(征) 또는 토(討)로 칭하고 적병은 구(寇) 또는 반(叛), 적을 격파한 경우는 참(斬) 또는 로(虜)로 표현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포폄(褒貶)을 행한 통감강목의 서례(序例)를 따르고 있다.
'광해군일기'(태백산사고본) 광해군 6년 7월 29일 기묘조(己卯條)에, 당시까지 사본의 형태로 유포되고 있었던 '국조정토록'은 광해군 6년 이후에 활자로 인출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경사문(經史門)의 기록에서도 활자로 인출된 후에도 구하여 보기 쉽지 않은 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국조정토록'은 아직까지 국내에서는 유일본으로 희소가치가 있으며 조선전기 전쟁사나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제1512호 :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寧國功臣錄勳後)
“이십공신회맹축(영국공신녹훈후)”는 1646년(인조 24) 9월에 영국공신(寧國功臣)을 녹훈(錄勳)한 것을 계기로 국왕이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부터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이르는 20공신과 그 자손들을 거느리고 회맹제(會盟祭)를 행하고 이 때의 회맹문(會盟文)과 참여자의 명단(會盟錄) 등을 적어 권축장(卷軸裝)으로 꾸민 것이다.
회맹문(會盟文)은 국왕, 왕세자, 공신 및 공신자손 등이 모여서 동맹을 서약하고 공신과 그 자손에게 내려준 나라의 은혜를 잊지 말고 협력하여 국은을 갚기에 힘쓸 것과 국왕에게 충성을 다하고 공신자손 간에도 단결하여 협력을 다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세하는 것이다. 이어서 회맹록(會盟錄)에는 김유(金瑬) 등 영국공신과 개국공신 이하 19공신의 공신 및 그 장자, 적장손들의 군호(君號), 공신호(功臣號), 직함(職銜), 성명(姓名)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 녹훈도감(錄勳都監)에서 회맹한 계(啓)를 올리고 불참의 경우에는 신병질(身病秩)·인공재외질(因公在外秩)·재상질(在喪秩)로 구분하여 그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말미(末尾)에 ‘順治三年九月初三日’라는 년기가 있다.
이 “이십공신회맹축”은 왕실이나 충훈부(忠勳府)에서 보관할 목적으로 최고의 재질로 거대하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에 걸쳐 한자 한자에 정성들여 쓴 글씨와 선명한 주사란, 고급 재질, 장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후기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현존하는 완전한 상태의 회맹축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제1513호 :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二十功臣會盟軸-保社功臣錄勳後)
“이십공신회맹축-보사공신녹훈후”는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재집권한 서인이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에 파훈(罷勳)된 5명의 공신을 복훈(復勳)한 것을 계기로 제작된 것이다. 이 회맹축은 먼저 1680년(숙종 6) 8월에 있었던 보사공신회맹(保社功臣會盟) 시의 회맹문(會盟文)을 쓰고 회맹에 참여한 본공신과 자손의 군호, 공신호, 직함, 성명이 기록된 명단을 싣고 있다. 이어서 신병(身病), 재상(在喪), 발병(廢病), 연유(年幼), 변장재외(邊將在外), 피적(被謫) 등 참여하지 못한 명단을 사유별로 수록하고 ‘康熙十九年 八月日’이라 썼다. 마지막으로 1694년(甲戌) 6월 20일의「復勳時告宗廟祭祝文」에 이어 ‘康熙三十三年十月日’이라는 년기를 적고 좌편에 세필(細筆)로 ‘己巳罷勳甲戌复勳’이라 쓴 후 그 위에 「시명지보(施命之寶)」를 날인(捺印)하였다.
이 “이십공신회맹축”은 왕실이나 충훈부(忠勳府)에서 보관할 목적으로 최고의 재질로 거대하게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문에 걸쳐 한자 한자에 정성들여 쓴 글씨와 선명한 주사란, 고급 재질, 장대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조선후기 기록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현존하는 완전한 상태의 회맹축이 희소하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제1514호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상1-1>(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
<卷上 一之一>)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대방광불원각수다라요의경'은 줄여서 '원각경'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우리나라 승려들의 교과과목으로 채택되어 불교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본은 1465년에 간경도감 국역본을 저본(底本)으로 경문 및 주석의 한글 구결 부분만을 편집하여 주자소에서 을유자(乙酉字)로 인출한 금속활자본으로 1책(序, 卷上一之一)의 결본(缺本)이다.
이 책은 1465년 원각사를 준공한 기념으로 세조의 명에 따라 정난종 서체를 자본으로 을유년에 활자를 주조하여 간행된 판본으로 ‘을유자본(乙酉字本)’이라 불린다. 이 활자는 '원각경' 등 주로 불경을 간행할 목적으로 주성(鑄成)되었던 까닭에 당시 유신들의 강한 반대로 사용되지 못하다가 갑진자(甲辰字) 주조 시 이를 녹여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 전래본이 희귀한 실정이며, 조선시대 국어학 및 서지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제1515호 :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권2,10>(大佛頂如來密因修證
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2, 卷10>) 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은 줄여서 “대불정수능엄경” 또는 “능엄경”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부처님의 말씀을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직접 경험하여 얻을 것을 주요사상으로 하고 있다. 능엄경은 전10권으로 되어 있으며, 지금도 우리나라의 일부 선종사찰에서는 이 경의 제7권에 수록된 수능엄다라니를 외우는 것을 매일의 일과로 삼고 있다. '능엄경'은 고려 소자본 능엄경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초기의 대자본, 활자본,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언해본을 비롯하여 다양한 판본이 전래되고 있다. 이 중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본은 1462년(세조 8)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전10권 중 권2와 권10의 2책에 해당된다. 이 책 본문의 일부에는 오자(誤字)를 오려내고 수정자를 배면에 부치는 방식으로 수정되어 있는데, 주로 아난(阿難)의 한글음 ‘아’자에서 나타나고 있다. 자체(字體)는 매우 해정한 해서체로 세조의 친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송설체의 필의가 느껴진다. 한글자체는 당시 활자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과 같이 정방형의 고딕체 소자로 쓰여 있다. 한글에는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 국어의 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이 '능엄경'은 그 판본이 ‘간경도감판(刊經都監版)’으로 국역 을해자본(乙亥字本)의 완성본으로 당시 국역판의 규범이 된 것이며, 한글과 동국정운식 한자음을 적용한 국역서로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
제1516호 : 김제 귀신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金堤 歸信寺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지권인(智拳印)의 비로자나불을 본존으로 하고 좌우에 약사불(向右)과 아미타불(向左)을 배치한 삼불형식으로, 흙으로 제작한 소조상이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에는 대형의 소조불상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이 삼불좌상은 보물 제1360호 법주사 소조삼불좌상(玄眞 作, 1626년), 보물 제1274호 완주 송광사 소조삼불좌상(淸憲 作, 1641년) 등과 더불어 이러한 양상을 입증하여 주는 좋은 예이다. 이 삼불좌상은 규모가 매우 커서 보는 이를 압도하게 하는데, 인자하고 부드러운 얼굴표현과 허리가 긴 장신형(長身形)의 불신(佛身)은 매우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불격을 보여준다. 특히,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 쥐고 왼쪽 검지 끝을 오른쪽 검지 첫째마디 쪽으로 뻗은 지권인의 표현은 명대 비로자나불에서 나타나는 수인(手印)이며 허리가 긴 장신형의 불상비례 역시 명초에 유행하던 표현이어서 명대 조각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삼불좌상은 조선시대 1633년에 작성된 귀신사 나한전낙성문에 1633년 이전에 삼불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자수(子秀) 무경(無竟)의 <전주모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母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 의하면 절의 중건이 1624년이라고 하므로 1624년에서 1633년 사이에 삼불좌상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1517호 : 남원 선국사 건칠아미타여래좌상 및 복장유물
(南原 善國寺 乾漆阿彌陀如來坐像 및 腹藏遺物)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유행한 건칠기법으로 조성된 상으로, 체구가 장대하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감 있게 느껴진다. 상호(相好)는 원만하고 머리는 나발(螺髮)이며 정상계주(頂上髻珠)와 중앙계주(中央髻珠)가 있다. 어깨가 둥글고 가슴부분이 융기되어 있으며 측면 역시 두터워 풍부한 양감이 느껴진다.
착의형식이나 가사의 금구장식, 내의를 묶은 매듭의 표현 등 양식적으로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좌상”(보물 제337호, 1346년 제작) 및 지금은 망실된 “문수사 금동여래좌상”(충남도 유형문화재 제34호, 1346년)과 같은 고려후기 14세기 전반 불상들과 공통된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둥근 얼굴이나 왼쪽 어깨에서 접혀져서 늘어진 옷자락 모습은 1274년에 중수하고 1322년에 개금을 한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1274년 중수, 1322년 개금) 및 “화성 봉림사 목아미타불좌상”(보물 제930호, 1362년 하한)과도 비교가 된다. 재료가 건칠이라는 점은 이 상의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현존하는 건칠상은 그 수가 많지 않으며 대부분이 보살상이다. 따라서, 이 아미타불좌상은 14세기 중반의 조각양식을 잘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드문 고려시대 건칠여래상이란 점에서 보물로 지정할만한 가치가 있다 하겠다.
선국사 건칠아미타불좌상에서는 복장물이 발견되었는데, 일부가 유실되고 현재는 14세기말에서 15세기말의 자료들만이 남아있다. 현존하는 인본다라니는 회화적인 도상이 나니라 범자(梵字)를 원상(圓相)으로 배치한 관념화된 도상이란 점에서 불교사상과 관련하여 인쇄사 및 서지학 분야에서 중요한 자료이므로 불상과 함께 일괄로 지정하고자 한다.
제1518호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권1(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 卷1) 성남 김민영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줄여서 ‘원각경(圓覺經)’이라고도 하며, 우리나라 강원에서 4교과의 하나로 채택된 경전으로 불교 수행의 길잡이 구실을 하는 경전이다.
김민영 소장본은 권말에 이색(李穡)의 발문 및 간행에 참여한 명단과 아울러 ‘庚申四月 開版’ 이란 간기가 있다. 이를 통해 이 경(經)이 고려 우왕 6(1380)에 經書比丘 宗昢,云首 등이 필사에 참여하고 志峯, 覺海의 募緣에 의해서 通憲大夫 判司宰寺事 鄭 □□와 咸石柱, 奉常大夫… 少尹 吳稱吉, 檢校中郞將 李元奇 등의 시주로 志道, 禪指, 志祥, 勝海이 刻手로 참여하여 판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송나라 효종의 주가 달린 원각경으로 이색의 발문이 실려 있는 고려 우왕 때인 1380년에 간행된 희귀한 판본으로 가치가 높다.
제1519호 : 묘법연화경삼매참법 권상(妙法蓮華經三昧懺法 卷上) 성남 김민영
이 책은 천태종(天台宗)의 전교승(傳敎僧) 山亘의 저술이다. 묘법연화경은 묘한 법이 더러운 곳에서도 항상 깨끗하고 아름다운 연꽃과 같다는 뜻인데 이러한 법화경을 독송하면서 일심으로 정진하여 실상(實相) 중도(中道)의 이치를 깨닫는 법화삼매(法華三昧)의 수행법에 관한 책이다. 上·中·下 3권으로 구성(編成)한 것 중 상권(上卷)이다. 이 참법은 묘법연화경 28품 가운데 서품(序品)에서 화성유품(化城喩品)까지 7품을 수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판각간기(板刻刊記)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 정확히 언제 판각했는지 알 수 없으나 전엽(全葉) 30行 19字를 새긴 두루마리형식이고 장차(張次) 표시에 '卜'字를 사용하고 있으며 절첩 형식의 제본형태 등을 보면 고려 말에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묘법연화경삼매참법 연구에 귀중한 책으로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하겠다.
제1520호 : 대불정여래밀인수증다라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권1(大佛頂如來密因修證
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 卷1) 성남 김민영
이 책은 1461년(세조 7)에 주자소에서 을해자(乙亥字) 대·중·소자와 한글활자로 인출한 全 10권 중 권1이다. 대자(大字)는 해정한 해서체로 세조의 친필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중·소자(中·小字)는 강희안의 필적을 바탕으로 주조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등장하는 한글활자는 세조 7년에 이 능엄경 국역본을 찍기 위해 만든 것이다.
이 능엄경 국역본은 세조7년(1461) 5월 효녕대군(孝寧大君)의 청에 의하여, 세조가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한계희(韓繼禧)·김수온(金守溫) 등에게 국역(國譯)과 교정을 명하여 찍어낸 것이다. 이 을해자본 능엄경은 이듬해인 1462년에 그 교정본을 수정하여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을해자본 능엄경의 체제는 한문언해본의 간행 규범이 되었다.
본문에는 주서(朱書)로 교정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어 활자를 조판하여 처음으로 인출하여 수정을 가한 교정본으로 서지적인 가치가 있으며, 또한 한글에 방점(傍點)이 붙어 있어 한글 창제 무렵의 국어특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닐 뿐만아니라 을해자 대·중·소자와 한글활자가 혼용되고 있어 조선초기 활자사 연구에 있어서도 귀중한 판본이라 하겠다.
제1521호: 경국대전(經國大典) 2007.07.13 , 성남 김민명
경국대전은 최항(崔恒)ㆍ노사신(盧思愼)ㆍ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을 받들어 세조 때 편찬에 착수해서 몇 차례의 수정과 증보를 거쳐 1485년(성종 16)에 완성하여 반포한 조선조의 통치체제(統治體制)의 대강을 규정한 기본법전이다.
경국대전은 처음 찬집이 시작된 이래 4차의 편찬과 수정을 거쳐 1485년 을사대전(乙巳大典)으로 완성을 보았으며, 이후부터는 수정과 증보를 가하지 않고 영세불변(永世不變)의 법전으로 준행하도록 하였다. 그 결과 현전(現傳)하는 경국대전은 판본의 차이는 있으나 대부분 을사대전을 모태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1470년(성종 1) 11월에 인반(印頒)하고 1471년 신묘(성종 2) 정월부터 준행된 신묘대전(辛卯大典)을 초주갑인자(初鑄甲寅字)로 인출(印出)한 권3의 예전(禮典)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현존하는 "경국대전"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법제사 연구와 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하겠다.
제1522호: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동아대학교박물관
이 그림은 가로로 7매를 이어 만든 삼베바탕에 주(朱)를 전면에 칠한 후 백색안료와 황토로 각 상의 윤곽과 문양 등 세부를 그린 불화이다. 중앙상단의 본존불이 외형상 하품중생인을 짓고 있어 아미타불로 볼 수 있으나, 하단의 화기에 …靈山會…라는 기록이 남아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영축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영산회상 중의 석가모니불로 여겨진다.
화면구성은 가운데 석가여래가 보단(寶壇) 위에 가부좌하였고 그 좌우에 동수(同數)로 열 구의 보살과 십대제자 그리고 사천왕이 배치되어 있다. 묘법은 백색안료와 황토로 각 상의 윤곽과 문양 등 세부를 표현하였는데 각 존상의 신체부는 황토를 연하게 칠하고 윤곽은 먹선으로 잡았으며 머리카락은 군청을, 눈썹에는 녹청을 사용하였다.
이 불화는 16세기의 선묘불화들이 모두 금선(金線)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비하여 백색 또는 황토를 사용하고 있고 화기(畵記) 역시 먹으로, 그것도 난필(亂筆)로 매우 형식적으로 쓰여 있다. 그러나 1565년 이라는 절대연도를 가지고 있고 국내에 있는 조선전기 불화가 불과 3, 4점(지정은 1점)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규모가 가장 크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또한 이 그림은 백색과 황토선에 의한 현존 最古의 작품이며 궁정관련 인물의 발원에 의하여 제작된 그림과는 또 다른 화풍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당시의 불화화풍의 다양성을 짐작하는데 아주 좋은 자료로 짐작된다.
제1523호: 불국사석조(佛國寺石槽) 2007.09.11
제1524호: 이윤탁 한글영비(李允濯 한글 靈碑) 서울 노원구 하계동
이 비석은 묵재(黙齋) 이문건(李文楗)이 부친인 이윤탁(李允濯)의 묘를 모친인 고령(高靈) 신씨(申氏)의 묘와 합장하면서 1536년에 묘 앞에 세운 묘비이다. 이 묘비에는 앞면과 뒷면에 각각 묘주의 이름과 그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왼쪽과 오른쪽에도 한글과 한문으로 경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의 특징적 가치는 비석 왼쪽 면에 쓰여진 한글 경고문인데, 우리나라 비문으로서는 한글로 쓰인 최초의 묘비문으로 알려져 있어 그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국어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한글영비’는 국어생활사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첫째, 중종 31년(1536) 당시 한글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다. 둘째, ‘한글영비’에 새겨진 한글의 서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직후의 서체, 즉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체와 <용비어천가> 서체의 중간형의 성격을 지닌다. 셋째, 이 비석의 글은 비석의 이름인 ‘영비(靈碑)’를 제외하고는 국한 혼용이 아닌 순 국문으로 쓰여 있다. 본격적으로 한글로만 쓴 문헌은 18세기에나 등장하나 이 ‘한글영비’는 16세기에 이미 순국문으로만 쓰인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넷째, ‘한글영비’는 언해문이 아닌 원 국문 문장이다. 15세기 이후 한문 원문을 번역한 언해문이 한글자료의 주종을 이루었으나 이 ‘한글영비’는 짧은 문장이긴 하나 처음부터 우리말로 쓰인 문장으로, 한글이 한문 번역도구가 아닌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직접 전달하는 도구로 변화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다섯째, ‘한글영비’에 쓰인 국어 현상은 이 당시의 언어를 잘 반영하여 당시 국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1525호: 금장요집경(金藏要集經) 범어사
이 책은 북제(北齊)의 승려 도기(道紀)가 각 경전에서 불교 교화에 도움이 되는 인과응보에 관한 설화를 중심으로 편찬한 7권 가운데 2권(권1~2)이다. 권두서명 다음 행에 간략한 목차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22개 연(緣: 篇에 해당)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전체 내용을 조망해 볼 수 있다. 이 간략 목차 다음에 바로 <사견연제일(邪見緣第一)>의 편제(篇題)가 시작되고 있는데, 편제의 다음에는 각 편의 세부 목차가 기재되어 있다.
각 세부 내용이 시작되는 제목 아래에는 전재해 온 내용의 정확한 출처를 소자쌍행(小字雙行)의 형식으로 밝히고 있다.
판식은 고려 13~14세기 불서에 흔히 보이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으며 판심부의 하단에 ‘현사(玄四)’, ‘문향(文鄕)’, ‘백기(白基)’ 등의 각수명(刻手名)이 새겨져 있다. 이들은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에도 참여했던 인물로 나타나는데 판각의 상태로 보아 고려 말에 새기어 조선전기에 인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책은 권1~2의 2권 1책만이 있는 결본 상태이나 현재 국내외에 전존이 드문 판본이라 희소성이 높으며, 목차에 22개 연기의 이름이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전체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하겠다,
제1526호: 부산 범어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釜山 梵魚寺 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
제1527호: 충주백운암철조여래좌상(忠州白雲庵鐵造如來坐像)
충주시에 소재한 백운암은 1886년 무당의 신분으로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받아 여자 대감이 된 윤씨에 의하여 창건된 사찰로 전해진다. 이 사찰에서 주존불로 봉안하고 있는 이 철불은 원래 이곳에서 전하던 불상은 아닌데, 인근에 고려시대 대규모 사지인 억정사지(億政寺址)가 있어서 아마도 이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충주는 철의 산지로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 이외에도 대원사(大圓寺)의 충주철불좌상(보물 제 98호)과 단호사(丹湖寺)의 철불좌상(보물 제 512호)이 전하고 있어서, 이 세 구의 철불은 충주 지방의 3대 철불로 알려져 있다.
백운암의 철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8세기 석굴암 본존상 이래로 유행한 편단우견(偏袒右肩)의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여래 좌상으로, 규모는 높이 87㎝정도의 크지 않은 상이다. 얼굴은 몸 전체에 비해 작은 편이나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고 근엄한 표정이 잘 표현되어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보이고 어깨가 넓으며 가슴이 융기되었고,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다리의 폭이 넓어서 당당한 자세를 보인다. 몸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양감있게 조각되었고 대의 자락에서 부분적으로 번파식 옷주름을 볼 수 있어서 이 불상이 통일신라 8세기 양식을 반영하고 있는 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감이 8세기 불상만큼 풍부한 것은 아니며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도 전형적인 형식이 아니어서 8세기보다는 시대가 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정도로 추정된다.
제1528호: 초조본사두간진일태자이십팔수경(初雕本 舍頭諫晉日太子二十八宿經)연세대
이 대장경은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가 한역(漢譯)한 것으로, 일명(一名) 호이경(虎耳經)이라는 별칭이 소자(小字)로 되어 있다. 재조대장경에는 ‘사두간태자이십팔수경(舍頭諫太子二十八宿經)’, 일명 ‘호이경(虎耳經)’으로 태자 이름인 ‘진일(晉日)’이 빠져 있어 차이가 있다. 내용은 한 천민 여인의 애욕과 이욕(離欲)에 대한 인연 및 4성 계급의 평등을 자세히 설하고 이어서, 천문·점성·별자리 등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인도의 계급 제도에 대하여 자세히 논하는 내용이 담겨있어 고대 인도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연세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경전은 모두 38장 1축으로 되어 있으며, 장의 크기는 46.3cm이다. 장정은 권축장(卷軸裝) 형태로 되어 있는데, 축봉(軸棒)과 표지(裱紙) 등이 전체적으로 잘 갖추어 있다. 표지는 하단부분이 훼손되어 있는데, 종이는 특별히 염색하지 않은 저지(楮紙)를 이용하여 장정하였으며, 띠(帶)는 발이 굵은 마포를 사용하였다.
자체는 중국의 북송판 또는 재조본과 비교할 때 듬직하고 해정한 해서체로 판각술이 매우 돋보인다. 11세기에 판각한 초조대장경으로 고려대장경 연구 및 불교학·서지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제1529호: 초조본잡아비담심론권제9(初雕本 雜我毘曇心論 卷第九) 연세대도서관
이 경전은 천축국의 법구(法救) 존자가 지은 것을 유송(劉宋) 시대(435)에 승가발마(僧伽跋摩) 등이 번역한 경전을 11세기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초조대장경의 일종으로 전 11권 중 9권이다. 흔히 비담종(毘曇宗)이라 불리는 소승부파(小乘部派)의 하나인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대표적인 논서이다. 전체 내용은 서품(序品), 계품(界品), 행품(行品), 업품(業品), 사품(使品), 현성품(賢聖品), 지품(智品), 정품(定品), 수다라품(修多羅品), 잡품(雜品), 택품(擇品), 논품(論品) 총 12품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9권에 해당하는 잡품에서는 불상응(不相應), 삼무위(三無爲), 구과(九果), 신족(神足) 등에 대하여 논한 것이다.
형태적인 특징과 체제를 보면 권수에 ‘잡아비담심론 권 제9(雜阿毗曇心論 卷第九)’이라는 권수제와 ‘도(都)’ 함차(函次)가 있고 다음 행에는 ‘존자 법구조(尊者法救造)’와 3행에 ‘송천축삼장 승가발마 등역(宋天竺三藏僧伽跋摩 等譯)’의 역자명(譯者名)이 표시되어 있다. 본문은 무계(無界)이고 각 행이 대체로 14자이기 때문에 글자의 크기가 같고 각장의 행수는 판 크기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주로 23행(권수면(卷首面)은 22행)이다. 판식이 권자본의 장정으로 각지(各紙) 장을 이어 붙일 때 바짝 연결하여 판심제인 약서명(略書名)을 확인할 수 없다. 권말에는 양쪽 노출부에 주칠한 길이 30.3cm, 직경 0.8cm의 목축(木軸)이 있다. 표지에는 ‘잡아비담심론권제구 도(雜阿毗曇心論卷第九 都)’라고 필사되어 있고 본문 앞에는 30.9cm의 여백이 있으며 중간부분에 천으로 된 끈이 달린 표죽(表竹)이 남아있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1530호: 초조본수용삼수요행법(初雕本 受用三水要行法) 연세대중앙도서관
이 경전은 당(唐)나라 때 삼장법사(三藏法師) 의정(義淨)이 편찬한 것을 11세기에 대장도감에서 판각한 초조대장경의 일종으로, 승속(僧俗)의 사람들이 물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해 설한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물을 세 종류, 즉 비시수(非時水), 시수(時水), 촉용수(觸用水) 등으로 나누고 그에 합당한 사용법을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그러한 용법을 어기면 그 내용에 따라서 불수용죄(不受用罪), 증촉죄(增觸罪), 숙촉죄(宿觸罪), 악촉죄(惡觸罪), 오수착음식기죄(汚手捉飮食器罪), 부정죄(不淨罪) 등 여섯 가지 죄에 해당하고, 더 나아가서는 15,480가지의 죄에 이른다고 말한다. 이러한 내용은 기본적으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율장에 의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대한민국 보물 51 (제1501호 - 제1530호) |작성자 김영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