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례봉에 관한 몇가지 생각
내가 초례봉(636m)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7-8년 전 쯤 된다. 안심에 살고 있는 분이 자주 오르는 등산로가 초례봉이라고 하였다. 그는 내게 산길의 바닥에 잔 돌과 흙으로 덮여 있는 바위의 사진을 갖고 왔다.
“선생님, 이것이 무엇입니까?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공룡 시대와 관계가 있을까요?”
바위 에는 서너 개의 작은 구멍이 파여 있었다. 자름이 4-5cm 쯤이고, 깊이는 2-3cm 쯤의 작은 구멍(穴)이었다. ‘어, 이건 성혈(性穴)인데’ 성혈이 틀림 없었다. 다음 주 일요일에 나는 그와 함께 초례봉을 답사하였다.
초례봉은 산 밑 마을인 각산동, 신서동에서 바라보면 가장 높은 산 봉우리이다. 초례봉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면 북쪽에는 더 높은 감투봉(811m)이 가로막아 시야가 가리어진다. 그러나 동쪽과 남족, 그리고 서쪽은 가슴이 시원하도록 전망이 확 틔여 있다. 서쪽으로는 율하천이 흘러내려 금호강으로 들어가고, 금호강 너머에는 고산골과 지산동, 수성못까지 보인다. 남쪽은 하양에서 경산에 이르는 너른 들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넓은 평야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이곳은 예사롭지 않는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아득한 옛날의 우리 선조들도 틀림 없이 받았으리라는 생각이다.
1960년 대에 대구시와 경북대학교가 대대적으로 팔공산 지역의 지표조사를 하였다. 문화재를 조사하여 기록하였고, 온갖 전설이며, 민요며, 유적지를 수집하여 기록한 책을 만들어서 1500페이지에 달한 자료집을 만들었다. 팔공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 책을 뒤적여 보았으나 초례봏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동국여지승람(신증)의 하양현 조를 보면 ‘초례산은 하양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과 전투를 하고 이 산에 올라 제사를 올렸기 때문에 초례산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산신제를 올린 곳이라면, 그때는 성소가 틀림 없다. 왕건이 이곳 사람이 아닌 만큼 이 마을 사람들이 산천제사를 올린 성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서 산신제나 제천의례를 행하는 곳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용도를 잊어버렸다는 것이 맞는 말일게다.
2005년에 대구매일신문사에서 팔공산의 여러 지명을 조사한 내용의 ‘八公山河’라는 책을 발간하였다. 팔공산하에서는 마을 사람들은 초례봉을 조리봉으로 부른다고 하였다. 초례봉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좀 더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더붙여 놓았다.
무심코 넘겨버릴 수 없는 전설이 전해 온다. 견우와 직녀가 첫날 밤(初禮)을 치룬 곳이라서 초례봉이라 하였다. 초례라는 말은 성결합을 연상시킨다. 초례봉을 답사하였을 때의 산봉에는 남근석이 별나게 솟아 있는 모습이었다. 남근석이 있는 봉우리에는 바위들이 험하게 모여 있었다. 살펴보니 바위에는 주먹 만한 성혈들이 여러 개가 보였다.
초례봉에 관한 문헌 자료는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기록이 유일하다. 현지를 답사하여 확인한 것과 전설과 문헌 기록을 고찰해 볼 필요갸 있다. 마을 주민이 초례봉 대신에 조리봉이라고 불렀다는 증언도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초례가 조리라는 비슷한 음으로 변혁을 하였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복을 가져다 주는 복조리의 의미로 조리봉이라고 부른다는 마을 주민의 말도 음미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수집한 자료들을 분석하여 가능한 해석을 해보도록 하자.
우선 동국여지승람의 기록부터 따져보자. 왕건은 견훤과 동수대전을 치루면서 목숨을 부지하기가 급급할 정도로 크게 패하였다. 왕건의 패주로가 안심 쪽이었지만 전해오는 전투의 전말로 보아서는 초례봉에서 제사를 올릴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견훤과 전투를 하기 전에 제사를 올렸음이 틀림 없다.
견훤은 경주를 쑥대밭으로 만든 후에 되돌아 가는 길을 하양에 와서 와촌 쪽으로 하여 능선재를 넘어 파군재로 나아갔다. 그 전에 은해사 앞에서 일차로 전투를 가졌다고 하였다. 왕건이 동수 대전을 치룰 때는 파군재에 진을 첬다. 지리적인 지형을 본다면 견훤군이 하양에서 와촌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하양을 지나 반야월을 돌아서 불로동으로 가는 길이 정상이다. 그렇다면 고려군은 길목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안심지역과 파군재에 진을 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것이 이치에 합당하다. 동수 대전에서 왕건이 대패하였을 때 왕건이 도망 간 길은 평창동을 거쳐 안심쪽이었다. 그곳이 자기 군의 주둔지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동수 대전 후가 아니고 안심지역에서 진을 치고 기다릴 때 초례봉에서 산신제를 올렸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해석이 가능해진다.
삼국사기 제사조에 의하면 명산대천에 제사를 올렸다. 명산대천에 올리는 제사는 자연신(천신이나 산신)에게 올린다. 자연신에 올리는 제사는 특정의 제실을 짓지 않고 자연에서 그대로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왕건이 초례정에서 올린 제사도 자연신에 올린 제사로 볼 수 있다.
제사를 올리는 성소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특정 장소가 된다. 말하자면 초례정은 우리 민족이 선사시대부터 제사를 지내던 성소이었을 것이다.
신석기-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과 유물이 고인돌이다. 고인돌은 다 알다시피 무덤이다. 그러나 제사를 지내는 성소로도 알려져 있다.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제사의례 유적은 암각화이다. 암각화가 있는 곳은 고대인들이 제사를 올리던 성소이다. 암각화는 바위를 위시하여 고인돌에 많이 남아 있다. 고인돌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흔한 것이 성혈이다. 여수시 오림동의 고인돌, 김해시 도황리 고인돌, 경주시 내남면 고인들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의 알터(성혈)는 이곳이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이 신앙하던 상징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대구에서는 진천리에 청동기 시대의 무덤 터에서 선돌(立石)과 성혈이 발굴되었다.
그뿐 아니다. 포항의 칠포리, 고령의 양전리, 영천의 보성리 등에 알터 유적이 있다. 모두가 선사시대에 우리 선조들의 신앙지이다. 즉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내가 초례봉을 답사하여 주변을 찾아 보았을 때도 여러 개의 알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터는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일치된 주장을 한다.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며,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곳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여성의 몸에서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땅에서 식물이 자라고, 곡식을 수확하는 것은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프레이져는 이와 같은 고대인의 사유 세계를 유물주술, 감염주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끼리 서로 영향을 준다는 논리이다. 고대인들은 땅에서, 사냥에서 많은 수확을 바라기 위해서 신앙의 대상으로 생산을 하는 여신을 모셨다. 여신을 상징화한 것이 알터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여신 신앙의 흔적을 무수히 많이 만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산신이 여신이었다고 한다. 운제산 신모를 비롯하여 치술령의 망부석도 여신의 상징이다. 고을의 산마다 남아 있는 옥녀봉, 선녀바위도 여신을 모셨던 흔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성혈이 있는 바위들로 이루어져 있는 초례봉은 선사시대에 여신을 신앙했던 성지이다.
초례봉은 신라 시대만 해도 마을 사람들이 제사의례를 올리던 성소이었으므로 전투를 앞 둔 왕건이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견우와 직녀가 초례를 치루었다는 전설과 복을 가져다준다는 복조리 이야기를 토대로 초례봉을 한 번 고찰해 보자. 여자의 몸에서 많은 생산을 바란다는 것은 ‘성결합’을 전제 한다. 견우와 직녀가 치룬 초례는 성결합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여신 신앙에서 배필이 되는 남신이 등장하는 사회 배경을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이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견우의 등장은 남성신의 등장이다. 성기신앙에서도 시회의 변화에 맞추어 여성 성기를 상징하는 성혈에서 남근석이 등장함을 볼 수 있다. 아곳운 풍요와 다산에 여신만이 아닌 남신도 관여한다는 것을 말한다.
남신의 상징은 남근석이다. 흔히 선돌신앙 또는 입석신앙이라고 한다. 진천리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성혈이 새겨져 있는 남근석을 발굴하였다. 초례봉의 정상에는 남근석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신앙을 이야기 할 때 가장 흔히 바위신앙과 선돌신앙을 말한다. 초례봉은 바위와 선돌을 모두 갖추고 있다. 거기에 성혈까지 있다. 후대로 갈수록 남신이 힘을 발휘하지만 무속신앙에서는 지금도 여신이 힘에 세다.
고려말기에 운문사와 동화사를 근거지로 하여 초적과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정부군이 이들 운문적을 토벌하고 나서 팔공산에 산신제를 올린 제문이 있다. 여기서는 남신의 명칭인 대왕(大王)이라고 하였다. 팔공산의 산신이 이미 남신으로 바뀌어서 성혈의 의미가 많이 축소되었으리라 추측한다.
불교가 민간 신앙으로 스며들자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고대의 성지는 불교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였다. 마을 주민들도 토속 신앙터를 떠나서 사찰로 자리를 옮기면서 옛 성지는 점차 잊어진 것이 아닐까? 왕건이 올렸던 대대적인 제사도 이제는 더 이상 올리지 않음으로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초례봉은 점차 잊어져 간 것이 아닐까?
그러나 민속 신앙은 쉽게 잊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무의식 속에서도 남아 있을 것이다. 초례봉을 조리봉으로 바꾸어 부르면서도 복조리라 하여 무의식적으로 기복을 하였을 것이다. 다산과 풍요가 기복신앙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리봉도 고대의 다산과 풍요 신앙과는 일맥 상통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이르면 고대의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던 성기 신앙은 祈子(기자)신앙으로 살아 남는다. 전국의 산에 버티고 남아 있는 남근석들이 그들이다. 상투바위, 촛대바위라 부른다. 좀 더 고상한 이름으로 필봉, 미륵바위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아예 *바위라고 원색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 바위들이 수도 없이 많다. 선돌신앙의 잔재이고 성기신앙의 흔적이다. 민간신앙으로 살아 남아서 지금도 기능을 하는 곳이 많다.
고대 농경신앙에서 기자 신앙과 기우 신앙이 가장 신앙이 깊은 자발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공동체가 복리를 위하여 올리는 의례는 개방적인 장소에서 축제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치룬다고 한다. 풍년제나, 동제, 기우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남자들이 주도하여 축제로 치룬다.
기자 신앙은 조금 다르다. 조선 시대에 접어들면서 남아 선호 사상은 기자 신앙을 더욱 불을 붙였다. 기자 신앙은 여인들에 의하여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다르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신앙이었던 성기 신앙이 조선시대에 기자 신앙으로 바뀌었다. 기자 신앙은 공동체 의례와는 성격이 달랐다. 개인적인 의례일 뿐 아니라 성과 관련이 있으므로 은밀하게 치루었다. 신앙 대상인 성석(性石)은 여근, 남근, 성교합 형상의 자연물이 대상이 된다. 대개의 경우에 여인들이 치성을 올리는 성석은 산 속 깊숙한 곳에 있다. 지금도 성기 신앙은 민간 신앙으로 숨쉬고 있다. 성석의 주변에는 치성을 드린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명산 대천에서 제사를 올렸던 산신기도가 기자신앙으로 바뀌었음을 심청전에서도 볼 수 있다. ‘앞 못 보는 심봉사 마누라도 품팔아 모은 돈을 몽땅 털어 명산 대천에서 굿을 하고, 대찰에 불공을 드려서 심청을 낳았다.’ 라고 하였다.
산천 기도가 단순히 기도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마천의 史記에 의하면 공자(孔子)의 부모가 나이 70이 되어서 공자를 얻는 이야기를 전해 준다. 노나라 구니산에 들어가서 산천 기도를 올린 후에 젊은 여인과 야합을 하여 공자를 낳았다. 고 하였다. 산천기도는 일반적으로 기도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야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야합(野合)이 전재돤다면 기자 신앙의 터가 사람의 인적이 드문 으슥한 곳이라는 것이 이해된다. 민속박물관장이었던 조자룡 선생은 산천기도 후의 야합을 자기 친구의 예를 들어 주었다.
환성산 최고봉을 마을 사람들이 감태기봉(감투봉)이라고 부르는 것도 생각을 해보자. 마을 사람들은 환성산이라는 것도 낯설다고 하였다.(팔공산하에서) 감투봉은 이곳 능선에서는 최고봉(811m)이므로 초례봉(635m)보다 높다. 그렇다면 왜 걈투봉이라고 부를까? 우리나라에 퍼져 있는 성기 신앙에서는 남근이든, 여근이든 간에 서로 상대가 되는 형태의 성기를 상정하는 것이 많다. 남근석이 있으면 주변에 여근이 있고, 여근이 있으면 남근이 있는 경우가 많다.
‘감투거리’라는 발은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의 상위 체위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국어 사전에서) 갓바위 부처도 굴불사 부처님에 대한 숫부처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낮은 산봉이 초례봉이라면 높은 산 봉우리를 감투봉이라고 하는 것에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감투봉은 성기결합이라는 강한 뉴앙스를 품긴다. 성기 결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기 신앙의 형태로 이름을 붙였던 감투봉을 지금은 본래의 뜻은 잃어버리고 습관적으로 부르는 것일게다.
초례봉이 신앙지로서 의미가 조선시대에 와서 잊혀져버린 이유도 성기 신앙의 속성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감투봉과 초례봉은 단순히 이름으로만 붙여진 것이 아닐 것이다.
20여 년 전에 내가 경험하였던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에사 생각해 보면 성기신앙이 민간 신앙 속에서 비의처럼 비밀스레 전수되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남자가 감기를 앓는 아기를 안고 있는 젊은 엄마를 데리고 나의 의원으로 찾아 왔다. 당시만 해도 아빠가 병원에 같이 오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오더라도 어색한 표정을 짓기가 십상이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달랐다. 마치 종을 다루듯이 반말을 하면서 사뭇 명령조였다. 여자는 기가 죽은 표정으로 말도 잘 못 하였다. 이상하여 간호사가 엄마에게 어떤 관계인지를 몰래 물어 보았다.
그 남자는 점쟁이라고 하였다. 남편들이 출근하고 마을 아줌마들이 모여 있는 곳에 이 남자가 찾아왔다. 심심풀이 삼아 점을 보았는데 이 엄마더러 남편이 액운이 끼어 큰 일이 날 듯하니 산천 기도를 올려야 한다 했다. 같이 따라온 할머니도 동행한다 하여 금오산에 기도를 하러 갔다. 폭포수 앞에서 기도를 끝내고 나니 할머니는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서 점쟁이 남자한테 성폭행을 당하였고, 남자는 마치 무당이 굿을 할 때 반말을 하듯이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간호사는 펄쩍 띄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경찰서에 연락을 하였다. 순경이 와서 그 남자를 잡아가 버렸다.
그 다음 날이었다. 낯선 할머니가 내 의원을 찾아와서 간호사에게 악담을 하였다. ‘이 년, 네 년들이 산신령을 노하게 하였으니 절대로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산신령님이 해꼬지를 할 것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할머니가 간 후에 간호사가 한 말은 죽을 죄를 지었다고 빌어도 시원치 않을 할머니가 너무 당당하게 소리를 친다면서, 세상 참 이상하다, 라고 하였다. 그때는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민속신앙을 공부하면서 얼핏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산천기도와 야합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의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조선시대를 지나 오면서 야합은 윤리적인 이유로 걸러졌지만 민속신앙에서 비의처럼 은밀하게 전해져 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고대로부터 신앙하였던 민속신앙들이 지금은 잊어지고, 사라져버렸지만 초례정에서 보듯이 나름대로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으로 연구가 필요하리라 싶다.
2012. 9. 24. 이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