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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멍모삼천지교 덕분에 한글을 깨치고>
교장 선생님댁에서 뵙기로 했던 계획은 도중에 변경되어 전주 시내의 어떤 식당에서 우리부부와 아이는 교장선생님을 만났다.
"왜 장소를 변경하지? 혹시 사기꾼 아냐?"
신랑은 투정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슨? 말같지도 않은 소리야?......"
만나기로 한 장소가 변경돼서 내심 불편한 점은 있었지만, 막상 신랑이 그렇게 표현을 하니 내 심사는 극도로 틀려 거의 도착지에 오기까지 옥신각신했다.
교장선생님은 미안해서인지 묻지도 않은 말씀을 하셨다.
"우리 집 사람이 내가 이런 일 하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아. 공연히 고생을 사서 한다고... 편안히 전주에서 교장선생님 하면 좋을 텐데, 정읍까지 날마다 위험하게 고속도로 타고다니며 출근한다고... 게다가 전화비도 많이 든다나... 허허허!
"아! 그러셨군요"
"사모님 입장에선 당연히 그러실 수 있지요. 편안한 노후를 부부가 정답게 보내고 싶은데, 교장선생님은 안 하셔도 되는 일을 사서 하시니 속상할 만도 하지요.“
"소영 엄마 생각도 그런감?"
"그렇지요, 저야 제 자식 일이니까 그렇지만, 사모님 입장에선 특수학교 교장선생님도 아닌 일반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서 장애인 일을 하시니 당연 의아할 수 있지요"
"그도 그렇긴 하네. 응! 근디 그럴만한 이유가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가 왜 이 일을 하게 됐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애당초 나는 영어에 더 큰 관심이 있었당게."
이웃집 아저씨같은 웃음을 지으시며 교장선생님께서는 교대 졸업후 초임발령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셨다.
"처음 학교에 부임해서, 5학년을 담임 했는데,, 한글을 모르는 학생이 하나 있었지. 김장로라고..
열심히 가르친다는 게 닥달을 했던 모양인가 ..그냥 학교를 안 나오더니 자퇴를 하는 게 아닌감! ......"
그때의 당혹감과 충격이 되살아나서인지 착잡한 표정을 지으시던 교장선생님께서는 잠시 말문을 닫으셨다
“... ...”.
"지금은 카페의 회원이 제법 많아져서 그만둘 수도 없당게"
"그 덕분에 저희가 이렇게 뵐 수 있게 됐잖아요."
"하하! 호호!"
“... ...”.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반신반의하던 남편의 의혹도 자연 풀리게 되었다. 신랑은 이 험한 시대에 그런 고매한 정신으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 드문 일이어서, 보호자 입장에서 엄마와 아이가 전학을 갈 수 있는 안전한 곳인지 살펴보기 위해 사전 답사를 탐색 나온 격이었다.
무장해제 된 우리는 본론으로 들어가서 딸아이가 한글을 제대로 아는 게 몇 자나 되는지
간단한 테스트를 통해 살펴보았다. 아이가 아는 듯한 한글 낱자는 예닐곱에 불과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단 마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각오를 하고 집이 구하여지는 대로 한글 유학을 위한 전학을 작정하고 부푼 마음으로 다시 고속도로를 타고 인천 집을 향해 갔다.
'아이가 한글을 다 익히면 어떻게 될까? 일단 내가 편해지겠지? 내가 편하자고 아이에게 한글을 익히게 하려는 걸까?‘‘
기대에 부푼 나는 엄마인 내 자신의 마음을 샅샅이 훑어보게 되었다.
아이에게 글자를 익히게 하는 것은 살아있는 정신을 접하게 하는 것이니 아이가 더 생동감있게 살아갈 테고, 무엇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다보니 아이에게 허락된 반경 안에서 행복감을 조금이라도 더 누리게 하는 데 한글 익힘이 일조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IQ 30밖에 안되는 장애인일지라도 인간인 이상 언어를 피해 살 수는 없는 것이기에 조금이라도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언어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통풍구 마련이 시급한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이 아파온 터라 세상을 마음껏 구가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이런 아이에게 세속의 찬란한 노래보다는 찬송가의 잔잔한 리듬을 통해 세상에서 받지 못하는 영적 행복감을 맛보게 해 주고 싶단 소망이 싹텄다.
드디어 집이 구해지게 되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여기저기 알아보시다가 당신이 근무하시는 학교 행정실 직원의 오라버니댁을 소개하였다. 내장산 자락에 있는 멋진 한옥이었다. 상평동 학교와 거리는 꽤 있지만 등교할 때는 교장선생님 학교 직원의 오라버니 되는 분의 차를 타고 등교하고, 하교시에는 몇몇 아이들을 실어나르는 교장선생님 차를 타고 가기로 하였다. 조그만 시골학교다보니 전 직원의 차를 이용하여 인근 아이들의 하교를 도와주고 있었다. 참 정겹고 훈훈한 정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모든 게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싶었다.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 보이지 않는 손의 도우심이 분명 개재된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오라버니가 일하시는 호남고등학교에서 방학 특강 강사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한글유학비조차 조달받을 수 있는 방안까지 마련된 것이니 일말의 경제적 갈등조차 해결된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씁쓸한 것은 엄마의 목표였던 국문학 교수의 꿈은 점차 내게서 멀어져 가고 있단 것뿐이다.
'엄마를 위한 선택을 한 건가? 아이를 위한 선택을 한 건가?....'
따지고 보면 국문학 교수가 되겠다는 꿈도 아이를 위해 설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아이와 멀어지는 길이기에 이런저런 모양으로 방해수들이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의 이 선택에서는 주변 사람들이 앞장서서 디딤돌을 놔주고 있지 않은가? 교회에서 얼핏 들은 말이 생각났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
그렇다면 강의 스케줄을 다 취소케 하고, 정읍 시골구석으로 나를 이동시킨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늘의 기획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뭔가가 내 마음 속에 벌어질 것 같은 짙은 예감이 ‘이 시대의 바울’이라는 말과 함께 바람처럼 스쳤다.
하필 한글 싸이트가 장로님인 교장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거고, 교장선생님 성함이 김영생인데다 교장선생님은 기운이 그리스도의 향기와 비슷한 면이 있는 걸 보면 하늘은 엄마인 나로 하여금 한글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자식을 앞세워 믿음의 순례길을 걷도록 준비시킨 것 같았다. 착잡해진 마음에 무거운 구름이 얹혀진 느낌이었다. 지금까지 걷지 아니한, 아니 걷고 싶지 않았던 길을 걸어야하는 데서 오는 의연함과 오롯함이 요구되는 촘촘한 순간 같았다. 기꺼운 마음의 동의는 쉽지 않았지만, 모든 준비는 떠밀리다시피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부평산곡남초등학교에서 정읍서신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학을 했지만, 아이는 5학년 교실이 아닌 교장실로 엄마와 함께 날마다 등교하고 교장실에서 하교를 하였다. 난생 처음으로 교장실에서 하루하루 일과를 보내게 되는 특권을 누린 것이다. 어떤 때는 내가 교장선생님이된 느낌도 들었다.
내가 다니던 예전의 초등학교 교장실을 떠올려보았다. 가지런한 소파가 놓여있는 곳에 우리는 어쩌다 기웃거리며 졸업 전까지 한두 번 들어갈까 말까했던 교장실 풍경인데-지금도 여느 다른 학교들의 교장실 풍경은 크게 달라진 게 없잖은가-그런데 이곳 서신초교 교장실은 늘 문이 열려있고, 몇 명 안 되는 전교생들 중에 특히 공부 못하는 아이들, 개중에 한글이 안 되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주로 자기네 집처럼 들락거리며 교장선생님께 사탕을 타먹는 풍경을 보고 낯선 기쁨을 느껴볼 수 있었다.
'교장선생님이야말로 특별한 사람이구나. 이 분을 통해 내가 깨닫고 배워야 할 것이 많겠구나'하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소영아! 엄마랑 한글 공부하니까 재밌지? 이제 그만 혀고 놀아. 운동장 가서 자전거도 타고..."
아이와 나의 일과는 학교에 등교하면 한글 낱자 한두 번 읽히고, 교장선생님의 공무가 없을 때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의 종착점은 결국 믿음과 관련된 결론으로 도출되곤 하였다. 한마디로 아이의 한글을 빙자하여 엄마가 영적 훈련의 광야 학교에 입학한 것 같았다.
배산임수라 했던가? 교정 앞에는 큰 개천이 흐르고, 뒤에는 야트막한 산이 봉긋하고 푸른 잔디가 쫙 깔린 명당 중의 명당에 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꼭 한글이 아니어도 이런 학교에서 아이가 졸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영광 중의 영광이었다.
교장선생님은 날마다 기뻐하라 하시는데, 이런 곳에서 아이와 둘만 지내는 기쁨은 범상한 기쁨을 넘어서는 희락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날마다 교장실에서 엄마와 함께 잠시 한글공부 하다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운동장에서 보내며 노는 데 집중하다보니 본말이 전도된 느낌도 없지 않아 때로는 불평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교장선생님은 태연히 말씀하셨다.
"염려를 말거라고... 그냥 시간만 보내면 되여. 한글은 저절로 되는 것이여. 아이를 열 받게 하지만 않으면 한글은 다 된 거나 마찬가지라니까. 성공사례 쓸 준비만 하더라고..."
무슨 믿음으로 호언장담하는 줄 모르겠지만 교장선생님은 아이에게 학습부담을 절대 주지말고 공부가 재밌는 놀이라는 생각을 심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착잡한 마음을 가라앉히느라고 영국의 써머힐 학교를 떠올려보았다. 아이들의 자유로움을 한껏 인정해주는 교육방식이 물론 나름대로 일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러기 가족처럼 지내는 우리 입장에서는 교장선생님의 느긋함 앞에서 초조함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몇 차례의 설전이 오고가다가 결국은 교장선생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로마가면 로마법을 따르랬다고, 내가 보따리 싸서 이곳으로 왔으니, 교장선생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자 맘먹었다면 철저히 순종해보아야 하는 이치와 흡사한 것 같았다.
우리는 또 한 번의 이사를 해야 했다. 집주인인 호남고 선생님께서 건강의 적신호가 나타나 조용한 환경을 원하였다. 교통편도 불편해서 나름대로 갈등도 없진 않았는데 이참에 우린 집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어디로 이사를 갈거나?'
시골에서 집구하는 문제가 쉽지 않아 좀 걱정은 됐지만 뭔지 모르게 믿는 구석이 생긴 것처럼 마음은 편했다. 오히려 주변에서 더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어쩌면 좋아요? 마땅한 집이 없으니...알아보고는 있는데 쉽지 않네요."
어수선하게 왔다갔다하는 장애아를 데리고 방한 칸 구하는 문제는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은 오히려 또 한 번의 기대로 설레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어떤 집을 예비해 놓으셨을까? 나는 되어지는 일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으면 되는, 뭔지 모르는 든든한 빽이 나를 챙겨줄 것 같다고나 할까'
이런 터무니없는 믿음으로 느긋해 있는데 오히려 주변의 장애아 엄마들이 앞장서서 집을 알아봐 주었다.
"형아 엄마네 집을 쓰면 어떨까요? 지금 현재는 비어있는 집인데 조만간 지역아동센터로 쓸 공간이에요. 아이들은 오후에 와서 몇 시간 공부하다가 저녁이면 갈 거니까, 오히려 집 지킴이 역할 하면서 그 집의 세 방 중에 한 방을 쓰며 지내면 좋을 것 같은데..."
자폐증 아들을 키우는 장애인부모회 엄마 덕분에, 우리 딸과 내가 지내기에 딱 안성맞춤인 공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우리 딸도 심심치 않고, 나 또한 깨끗한 집에서 저렴하게 방을 이용하면서 다양한 아이들을 접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내장산 자락의 멋진 한옥 못지않게 괜찮은 조건이었다. 내심 마음에는 배짱도 생겼다.
"하나님이 모든 걸 기획했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구려'
완전 똥배짱을 내세웠지만 기이하게도 이 똥배짱을 다 감당해주는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나는 기도 가운데 "이 시대의 바울이 되라."는 환상과 비전을 보았다. 바울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내게 이런 사명을 받은들 그리 심각하게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이럴 때면 내 안에서 마치 하나님을 테스트라도 해보고 싶은 반항인지 관망 인지 모르는 얄궂은 심리가 작용하였다.
'되어지는 것을 보자. 하나님을 믿을만한 가치가 있는 건지 어디 지켜보자'
이런 맘이 들었다. 마치 한판 힘겨루기를 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노력은 좀 하지만 그냥 되어지는 대로 흘러가 보자는 심산 이었다. 우리 모녀는 결국 그 집에서 살게 되었다. 때로는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때로는 집주인의 차를 타고, 때로는 걸어서 등등 여러 가지 수단을 골고루 이용하면서 다시 서신 학교의 한글유학이 재개되었다.
‘찬송을 좋아하는 딸아이를 위해 찬송가 정도의 글씨는 읽게 해주고 싶은 소망으로 시작한 한글공부!’
하나님은 이 마음을 기특하게 생각하신 걸까?! 여기저기 돕는 손길 덕분에 재미있고 즐겁게 정읍의 생활을 해 나간 결과 아이의 한글 공부에도 꽤 진전이 있었다.
"힘들지 않은 감?"
교장선생님께서는 이따금 툭툭 한마디 던지시지만 힘들기보다는 공기 좋고 맑은 동네로 휴양 온 느낌이어서 별로 크게 불편한 게 없었다. 역마살이 있는진 몰라도 나는 어딜 가나 내 집처럼 잘 지내는 편이다.
아이도 다그침이 없는 환경 속에서 기죽지 않고 맘껏 활개치고 지내니 교장선생님께서 예상하던 진도가 착착 진행되었다. 아무리 장애인일지라도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이곳의 수업과정을 통해 절감했다.
나에 대한 믿음!, 너에 대한 믿음! 상호 신뢰의 믿음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는 것 같다. 하나님이 어린 양들에게 바라는 마음이 이런 걸까 생각해 본다.
어느덧 여름이 무르익어갔다. 우리는 또 한 차례 집을 옮겨야 했다. 아니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하려고 또 다른 공간으로 우리 모녀를 이전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던 것처럼 우리는 마지막 한 달가량을 바로 학교 앞 교회의 작은 방을 쓰면서 정읍 서신초등학교 생활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바로 학교와 붙어 있는 집이어서 굳이 내가 데리고 등교하지 않아도 되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고 할까? 소영이가 혼자 등교할 수 있는 시간이 처음으로 주어졌다. 이제 한글의 완성인 <콩쥐팥쥐>책도 읽게 되니까 한층 발걸음에 자신감이 묻어났나보다. 엄마인 나는 아이가 등교하는 모습을 창밖으로 지켜보며 아이의 한글 유학의 파노라마를 펼쳐 본다.
‘맹모삼천지교’는 못되도 ‘멍모삼천지교’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멍청한 엄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모든 걸 내려놓고 결단한 덕분에 지적장애 1급인 딸아이는 문자에 대한 눈이 열리고, 지적 교만 1급 엄마인 나는 믿음의 눈이 열리게 되고...
한마디로 <자음카드 한글학습> 카페가 별난 노하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학습법과는 달리 부모와 자녀의 영혼을 치유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마음 안에서만 완성될 수 있는 프로그램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교장선생님은 늘 말씀하셨다.
"이 일은 내가 하는 것이 아녀. 하나님이 하시는 거여. God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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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읽으며 한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모두 제 얘기인듯 하며 가슴이 찡하고 감동이 되며..소망과 힘이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