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광성의 수필을 읽다-
바다를 연주하는 트럼펫
이향아
1. 대답하고야 말았다
이런 글을 쓰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면서도 못이기는 척 대답하고야 맡았다. 나의 내면에는 ‘No'라는 말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 패배적 선입견이 가로막고 있나 보다. 그것이 사양해야 할 때에도 사양하지 못하도록 훼방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없다‘, ’아니다‘ 혹은 ’싫다‘는 부정의 말들은 지는 꽃잎처럼 떠내려갈 것이라고, 떠내려간 것들은 가버리면 그뿐, 다시는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은 다만 시간을 죽이는 일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 일을 하다가 죽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Yes'라고 한다. 참으로 미련한 짓이다. 나는 이번에도 ‘Yes’라 대답하고 말았다. 우리 문단에는 기라성 같은 평론가들, 그중에서도 오로지 수필평론에만 주력하는 명장들이 상당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이미 ‘손광성’이라는 이름 앞에서 오래오래 시선을 멈추고 현란한 필치로 평가를 완료한 상태다. 그런데 지금 다시 내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설령 보탤 수 있다 해도 작가 손광성에게는 물론, 내게도 별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손광성의 명성에 어울리지 않은 내 둔탁한 필치, 얄팍한 견문과 아둔한 분별력 때문이라는 걸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더구나 나는 시인으로 등단하였다. 수필이 좋아서 겁 없이 여기저기 발표하고는 있지만 전문적 수필가들 중에서는 혹시, “저 사람이 누군가? 수필로 등단한 적이 없잖아?” 의문을 제기하기도 할 텐데 나는 그 의문에 시원스레 답변할 자신이 없다. 그러므로 수필가들이 모인 자리에 서면 나는 마치 공공의 허락을 받지 않고 숨어 사는 연인, 절차도 밟지 않고 눈이 맞아서 호적에 올리지도 못할 아이들이나 줄줄이 낳은 여자처럼 은근히 눈치를 보곤 한다. 그런데 오늘은 더구나 수필평론이다. 게다가 대상이 손광성이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스스로 하나의 탈출구를 마련하였다. -평론이라고 하지 말고 Essay라고 하자. Essay 형식으로 손광성과 그의 작품에 대한 독후감을 쓰자. 결국은 그게 그것 아니냐고, Impersonal Essay가 평론 혹은 논설이고, 논설이 Impersonal Essay 아니냐고 반박하더라도, Essay라고 하는 쪽이 책임도 무겁지 않고 여차하면 도망칠 구멍도 마련할 수 있다고.-
2. 빈들의 바람소리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수필과 비평>의 표지화에서였다. 그 표지화들은 모두 꽃이었다. 꽃들은 마치 일상의 흔한 소재가 아니라는 듯이 청량한 색채와 고아한 품격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가의 이름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손광성이라는 사람인데 수필가’라고 하였다. 나는 그와의 첫대면에서부터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가 어려웠다. 어렵다는 것은 두렵다는 말과 다르다. 그러나 쉽지 않다면 자연히 두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어려움의 요인은 그가 독특한 심미안을 가진 작가라는 것, 그리고 동양화를 정식으로 수업한 화가라는 점이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내게는 오래 전부터 화폭과 색채에 대한 멈출 수 없는 꿈이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의 크기에 비례하는 경외심으로 화가를 우러르는 습성이 있었다. 그의 작품 몇 편 찾아 읽은 후 나는 그를 수필가나 화가로 부르기보다 심미주의 예술가로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정확하였다. 그의 통찰력은 예리하다고 할 만큼 깊이가 있고, 세상과 사람과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따뜻하였다.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비슷한 연배로서 그리고 똑같이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손광성이라는 이름은 나를 긴장하게 하였다. 아니,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그는 나를 주눅 들게 하였다. 그는 철저하고 완벽하였다. 나는 가끔 그의 수필을 소리 내어 읽었다. 처음부터 소리를 내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 고조되어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저절로 소리가 터져 나오곤 하였다. 노래를 부르듯이 정조를 모아 멋을 내어 그의 글을 읊었다. 읊어가는 동안 가끔 울컥할 때도 있다. 때로는 소리를 내어 읽다가 편도선 부근이 울음을 참고 있을 때처럼 부어오르기도 한다. 아름답다는 것은 슬픈 것인가? 내가 만일 이때 무리하게 소리 내어 읽기를 계속한다면 빈들의 바람소리처럼 흐느끼게 될 것이다. 나는 내 글을 쓸 때에도 마지막 수정을 하면서 소리를 내어 읽곤 한다. 가락이 맞는가, 마찰은 없는가, 흐름이 자연스럽고 유려한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낭송이 잘되면 안심해도 좋다. 아름다운 내재율로 넘치는 손광성의 글은 낭송해야 더 가까이 이해할 수 있다.
문간방에 사는 사람은 추운 날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오래도록 대문 밖에 세워 두지 않아도 된다. ‘똑똑’ 창문만 두어 번 두드리면 그것이 친구인 줄 알고 얼른 나가 맞아들일 수 있어 좋다. 출근할 때는 주인보다 한 발 늦게 출발해도 늘 한 발 앞에 서게 마련이니 버스를 놓칠 염려가 그만큼 적고, 좀 얌체짓 같지만 신문 구독료 같은 것은 내지 않아도 된다. 대문간에 떨어지는 신문 소리를 먼저 듣는 것은 문간방에 사는 사람이다. 게다가 들창 밑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숨은 이야기를,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듣는 것도 전혀 재미없는 일만은 아니다. 고해 신부가 된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떤 비밀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우리의 굳게 다문 입가에 미소를 번지게 할 때도 있으니까. (중략) 그러나 간혹 이런 슬픈 대사가 자막처럼 나의 뇌리를 스쳐갈 때도 있다. “그때 나가지 않은 건 싫어서가 아니었어요.……입고 나갈 옷이 없었어요.” 이런 대사를 듣고 있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목이 아파 온다. 지금 저 고백을 듣고 있는 남자는 그녀의 남편일까? 아니면 그 때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 해서 그 후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이처럼 만나게 된 그 남자일까? 대사와 함께 눈물이 글썽한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되어 온다. 그리고 이런 노래가 배음으로 깔린다.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그러나 그런 슬픈 대사도 잠시뿐, 어느덧 하루해도 저물고 나면 문간방은 깊은 어둠에 파묻히고 만다. 그리고 문간방 사람들도 일상의 고달픔에서 풀려나 꿈속으로 조용히 잠겨든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꿈마저 가난한 것은 아니다. 꿈속에서 그는 가 끔 왕이 된다. -<문간방 사람> 중에서
손광성의 수필이 낭송하기 좋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써 예문을 찾을 필요는 없다. 수많은 그의 작품 어느 부분에서 문득 끌어다가 놓아도 노래 부르듯이 낭송하기에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여기서 굳이 <문간방 사람>을 예문으로 선정한 것은 손광성의 작품을 알게 된 것이 <문간방 사람>을 읽음으로써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간방 사람>은 그 소재 자체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의 이야기여서 독자들의 마음에 이미 마련되어 있는 유대감과 친근감을 자극할 수가 있다. 그러나 어찌 소재가 좋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올 수 있겠는가? 똑같은 밀가루 반죽으로도 열 사람은 모두 달리 요리한다. <문간방 사람>의 작자 손광성은 이미 ‘문간방 사람’이 되어서 그들보다 먼저, 그들보다 절실하게 애로와 수모와 괴로움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다. “비록 전주 이씨 충녕군파의 종손”으로서 버젓한 이름을 가졌을지라도 문간방에 살고 있는 한 ‘문간방 사람’으로 통할 수밖에 없는 문간방 사람, 자기 아이가 주인집 아이와 싸우다가 맞고 상처가 날지언정 절대로 주인집 아이에게 이기지 않기를 바라야 하는 문간방 사람, 도둑들도 우습게 여기고 들창으로 손을 뻗어 옷가지를 훔쳐가도 어쩔 수 없이 참고 견뎌야 하는 문간방 사람. 그러나 작가는 문간방 사람도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늘 슬프고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고 변호하면서 가난하지만 꿈까지 가난하지는 않다고, 문간방 사람으로서의 체면을 추스른다. 수필 <문간방 사람>은 체념과 극복이라는 이중적 틀 속에서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한 아이러니를 내면적 리듬으로 깔고 있다. 리듬이란 3.4조니 7.5조니 하는 율격처럼 단순한 음절의 수로 결정되지 않고, 소리의 질과 의미로 결정된다. 즉 소리의 청탁과 뉘앙스, 어휘들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의 경중, 이들이 어우러진 문장의 흐름이 좌우하는 것이다. <문간방 사람들>을 관통하는 리듬은 넉넉한 여유와 아량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바로 길가로 난 들창 밑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가의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은 아름다운 상상의 막을 올린다. “눈물이 글썽한 여인의 창백한 얼굴이 화면 가득히 클로즈업 되”고, “눈물을 닦아요. 그리고 날 봐요.” 배음이 깔리면서 어느덧 하루해도 저물고 깊은 어둠에 파묻히는 무대 위의 문간방. 문간방은 고달픔에서 풀려나 꿈속으로 잠겨들고, 깊고도 편안한 기류가 여타의 다른 것들을 압도하는 드라마의 대단원. 그가 연출하는 한 어떤 대단원도 초라하거나 슬퍼서는 안 된다. 갸륵하고 어여쁜 꿈을 예고하면서 아름다운 리듬을 타고 라스트 신을 내놓아야 한다. 종결에서 보이는 광명의 예시는 작자 손광성의 희망인 동시에 독자들의 희망일 것이다.
3. 청록의 바다
손광성의 작품에 색을 칠한다면 밝아오는 새벽의 청록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손광성 스스로 청록색을 언급한 적은 없다. 그의 작품에는 오히려 해맑은 아침햇살이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그는 “봄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은 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것”이라면서 봄날의 햇빛을 사랑한다, 창을 열면 신선한 아침 공기와 함께 햇빛에 반짝이는 앳된 웃음이 있는 생활, “3.1절 특사로 풀려나온 사람들의 이마에 비추는 창백한 햇빛”(<서울의 봄>)을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하는 시력, 장독대 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항아리 위에 햇빛이 부서지고, 빨래를 널고 있는 여인의 맑은 이마 위에 잠시(<지붕을 고치며>) 머무는 봄빛의 의미를 아는 작가다. 그가 좋아하는 색깔은 청록색과 다른 보라색임에 틀림없다. 오뉴월의 귀여운 싸리꽃(<싸리꽃과 회초리>)이나 꽃밭에서 제일 먼저 피는 제비꽃(<아내의 꽃밭>)도 보라색이며, 가회동 고가의 담장 밑을 지나갈 때 툭하고 떨어지던(<오동나무>) 오동꽃도 보라색이며, 학생들에게는 책을 읽으라 하고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담임선생님의 치마색깔도 도라지꽃 같은 보라색이었다. 비밀이라도 간직한 듯 신비로운 제비꽃(<제비꽃과 나폴레옹>)도, 자욱한 물안개 속에 수줍게 피어있던 비비추도 보라색이다.(<비오는 날의 산책>) 누나의 수틀 속에서 피어났다가 뜯기고 다시 피어났다가 뜯기곤 하던 붓꽃은(<누나의 붓꽃>) 청보라색이고, 비를 맞으며 참 아쉬운 듯이 피어 있는(<비오는 날의 산책>) 달개비꽃도 청보라색이다. 그러므로 나는 굳이 손광성의 색깔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지 않다. 그런데 문득 떠오르는 청록의 이미지는 어디서 온 것일까? 청록색은 사파이어처럼 맑지만 따뜻하지는 않다. 깊고 그윽하지만 쓸쓸하다싶을 만큼 차가운 기운도 있다. 아마도 나는 그의 바다 이미지에 몰두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좁은 지면에 수많은 바다들을 모두 불러올 수는 없다. 지극히 한정된 부분만 옮기게 되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우리 집에서 북으로 반 마장쯤 떨어진 곳에 큰 내가 하나 있었다. 냇물은 언제나 맑고 깊었다. 그 물은 흘러서 삼십 리 떨어진 전진 앞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큰 빨래를 할 때는 어머니는 늘 그리로 가시곤 했다. (중략) 수면 위에 떠 있는 미루나무들, 푸른 산 그림자, 아득히 떠가는 하얀 구름 그리고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칠월 정오의 정적 그 정적의 저편 언덕에서 어머니가 앉아 빨래를 하고 계셨다. -<나의 어머니> 중에서
바다는 물들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품안에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중략)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바다는 시작한다. 바다는 또 다른 세계를 향한 길이요 가능성이다.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태초의 말씀이요, 얼굴을 가린 종교이다. 그의 깊고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눈물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가를 안다.-<바다> 중에서
모든 생물이 다 그러하듯 달팽이의 고향도 바다였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먼 조상들 중 호기심이 많은 한 마리가 어느 날 처음 뭍으로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물달팽이가 육지달팽이로 바뀌는 기구한 역사가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달팽이> 중에서
멀리 항구를 떠나는 연락선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린다. 나도 한때 뱃사람이 되고 싶었는데……하지만 나는 꿈을 다 포기한 것은 아니다. 바다는 저기 저렇게 누워서 나를 손짓하고 있다. (중략) 내가 이렇게 혼자 도취하여 있는 동안에 아내는 몇 장의 낡은 지폐로 살아 있는 바다를 사서 담는다. 아내의 흰 손가락에 감겨오는 바다. 도미란 놈은 아직도 헐떡거리고 게는 신나게 거품집을 짓는다 -<어물전에서> 중에서
만일 자기 세계에 안주하고 말았더라면 그는 바다 밖의 세계는 알지 못한 채 그의 짧은 생을 마쳤을 것이다. 그러나 감히 모험을 했고 그 모험은 그에게 바다보다 더 넓고 더 아름답고 더 찬란한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바다로 추락할 것이다.(중략) 작지만 용기 있는 저 한 마리의 도미처럼, 나도 날고 싶다. 모든 허망의 바다로부터, 몸을 휘감은 잡다한 일상의 해초로부터 벗어나고 싶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건, 저 도미의 삶은 작지만 얼마나 눈부신가. -<작지만 얼마나 눈부신가> 중에서
여덟 살 때 최초로 본 바다는 그에게 경이였고 스무 살 때 바다는 ‘늘 함께 하고 싶은 갈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 노년의 고갯마루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그의 젊음으로 내 나이를 지우고 그의 커다란 눈물 속에 나의 작은 눈물을 받아”들이고 있다. 손광성은 바다에 순복하여 바다의 품안에 존재를 맡겨 아예 바다로 동화되기에 이른다. 손광성의 이미지로 문득 청록색을 유추하게 된 것은 엄청난 바다의 크기, 인간의 눈물이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바다의 “깊고 푸른 눈동자”, 그 위력 때문일 것이다. 어렸을 적 그는 냇가에 살았고 빨래하러 가는 어머니를 따라가곤 했다. 어머니가 빨래를 하는 동안 혼자서 놀아야 했지만 어머니 곁이라면 조금도 심심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빨래터의 풍경은 ‘언제나 맑고 깊은’ 냇물, ‘수면 위에 떠 있는 미루나무, 푸른 산 그림자, 아득히 떠가는 하얀 구름, 그리고 풀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칠월 정오의 정적’이었고 그 정적의 저편에서 빨래를 하는 어머니이다. 이들은 완벽하게 구성된 한 장의 그림으로서 그의 뇌리 깊이 각인되어 있다. 손광성의 대표작으로 더러는 <달팽이>를 꼽기도 하고 <아름다운 소리들>을 꼽기도 한다. 그리고 더러는 <문간방 사람>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여과 없이 노정된 작품으로 망설이지 않고 <바다>를 추켜들겠다. 수필 <바다>를 이어가는 작자의 호흡은 그 어느 작품에서보다도 격정적이다. 바다는 도도하여 그 무엇에도 물들지도 굳지도 풍화하지도 않는다. 어부들이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고기만 넘겨 줄 뿐 바다는 언제나 그물 밖에 광활한 모습으로 서 있다.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상어를 키우면서 자기 마음에 없는 꽃은 한 송이도 허락하지 않는 고집과 절제. 그 무엇에 의해서도 구속되지 않으며 어떤 형태로도 억압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바다, 길들이기를 거부하는 야성의 바다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바다. 그에게 바다는 또 다른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는 출입문인 동시에 새롭게 타개하며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기록되기를 거부하는 태초의 말씀이요 얼굴을 가린 종교”인 바다는 손광성의 내면을 흘러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면서 작은 조개껍데기와 함께 “바다를 보내고 싶었습니다.”라는 단 한 줄의 편지를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써 보냈다. (<사랑은 은밀한 기도처럼>) 손광성은 모든 생물의 고향을 바다라고 생각한다.(<달팽이>) “달팽이의 고향도 바다였던 때가 있었”지만 어느 조상 중 하나가 호기심으로 뭍에 올라왔다가 그만 길을 잃고 머무르게 되었다고, 그렇게 바뀐 것은 기구한 운명, 역사의 바뀜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손광성에게 내재된 ‘낙원 상실’의 잠재의식은 바다를 떠나는 일로 상징되곤 한다. “멀리 항구를 떠나는 연락선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리면 “나도 한때 뱃사람이 되고 싶었는데……”라며 잃어버린 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바다가 저기 저렇게 누워서 나를 손짓하고 있다”며 결코 꿈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떠나온 고향인 바다가 누워서 그에게 끊임없이 손짓을 하고 있다. 바다는 그를 존재하게 하는 그리움인 동시에 배경이며 아바타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바다를 그리워하면서도 그에 못지않게 날개를 펼치고 바다로부터 멀리 벗어나려고 한다. 바다 속에만 안주한다면 바다 밖의 세계를 알지 못한 채 짧은 생을 마칠 것이라고, 바다를 떠나온 한 마리의 도미처럼 그는 일상으로부터 도약하고 비상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그의 추진력은 귀향의 의지와 병행하는 비상의 의지이며 이 두 축의 접합점은 ‘꿈’ 과 ‘이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전자를 복락원의 꿈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창조와 개척의 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손광성이 향하고 있는 곳이 잃어버린 낙원이든, 새로운 창조와 도전의 세계든, 어느 쪽이든지 간에 그에게는 분명 감격과 전율을 간직한 날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깃털을 섣불리 자랑하지 않는다.
4. 이름을 알고 있는가
손광성은 사물의 이름을 많이 알고 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존재를 알고 있다는 것이며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유심(有心)하다는 증거이며 유심은 곧 유정(有情)을 측정할 수 있는 바로메타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아는 것으로부터 사물 사랑하기가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손광성이 사물의 이름을 부를 때면 그의 남다른 오감과 관찰력, 인지능력을 통하여 새로운 창조물이 태어나듯이 태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있었던 사물이 아니라, 유정한 그의 시선을 만나서 비로소 새 생명의 광채를 인정받은 것들이다. 그가 지목한 사물들은 특별하지 않다. 들판에 흐드러진 씀바귀, 개망초, 메꽃과 민들레와 엉겅퀴, 강아지풀, 괭이풀꽃, 마타리꽃 같은 것이며, 보통사람들은 눈여겨보지 않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별꽃, 개별꽃, 금강초롱꽃, 뱀딸기꽃, 고들빼기꽃, 누운아기별꽃들이다. 그것이 피어있는 곳이 어디든, 시골이든 서울이든 러시아의 초원이든, 추억 속의 고향이든 상관없다.
쌈은 마루에서 먹어야 제 맛이다. (중략) 쌈을 싸는 밥은 찬밥이어야 한다. 그러나 질어서는 못쓴다. 더운밥은 찬 상추와 궁합이 맞지 않고 진밥은 질척거려서 개운한 맛이 덜하다. 차라리 된 편이 낫다. 흰 쌀밥이라고 아니 될 것은 없지만 삼할 정도는 보리가 섞인 것이 구수하다. 장은 고추장보다 된장에 참기름이며 갖은 양념을 다 섞은 쌈장이 최고다. (중략) 상추쌈의 풍미는 어디까지나 초여름과 초가을이다. 가을 상추는 문을 잠그고 먹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겨울에는 섬뜩해서 손이 가지 않고 장마철에는 풀냄새가 나서 맛이 덜하다. -<상추쌈> 중에서
작자는 지금 단순히 쌈을 싸서 밥을 먹고 있지 않다. “상추쌈”이라는 제목의 종합예술을 시연하고 있는 것이다. 무대는 마루다. 거기 등장하는 배우들의 액션과 소도구와 조명에 이르기까지 상세하게 파악하고 있는 작자는 연출의 대가이다. 상추쌈은 크게 싸야 하고 그것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우적우적 먹어 들어’갈 것을 지시한다. ‘다 먹을 때까지 쌈에서 입을 떼어서는 안 되고’ 상추쌈을 먹은 후 ‘뜨거운 아욱국’으로 마무리하듯 종결을 지어야 한다는 지극히 전문적인 비법도 알고 있다. 뛰어난 연출 능력은 상추쌈에서만이 아니다. <장작 패기>에서는, 도끼날이 나무토막에 닿은 순간 힘을 하나의 접점에 모으라고, 그러나 너무 긴장하여 어깨에 무리한 힘을 주면 안 되며, 도끼의 높이가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때 도낏자루를 잡은 손에서 힘을 빼야 한다고 경험자로서의 이론을 펼친다. 하기야 우리 삶에서 경직된 어깨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손광성은 6.25 직후 겨울이면 날마다 두 시간씩 장작을 패어 몇 트럭의 통나무가 장작이 되어 나갔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지만 도끼가 나무에 닿아 통나무가 쪼개지는 원리 이상으로 손광성이 사물의 본질을 관철하고 분석해 내는 능력은 놀랍다. 그는 또 지붕을 고치기에 적절한 시기는 한식 전후의 청명한 봄날이며, 지붕 위에서는 고자세를 취하지 말고 엉금엉금 기어서 깨진 기왓장을 조심하여 모셔낸 후 여벌의 기왓장으로 아귀를 맞추되 억지힘을 써서는 안 된다(<지붕을 고치며>)고 경고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얼핏 손광성을 지극히 서민적인 작가로 인식하게 된다. 산야에 아무렇게나 피어있는 풀꽃들의 이름을 알고 있는 소박한 사람, 상추쌈은 마루에서 찬밥으 로 싸야 제 맛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수더분한 사람, 장작을 어떻게 패야만 제대로 잘 쪼갤 수 있는가 역학적인 힘의 배분을 파악하고 있는 심상치 않은 이력의 사람, 갓 켜놓은 목재의 송진 냄새와 바다의 찝찔한 소금 냄새를 그리워하는 사람(<냄새와 향수>). 그의 취향은 우리들의 원초적 그리움을 흔들고도 남을 만큼 진솔하고도 근원적인 체취를 풍긴다. 거기에는 어떠한 가식도 허위도 없다. 그러나 그를 서민 취향의 작가로 분리하기에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음식의 맛을 감별할 줄 알고 그 맛을 즐기는 최적의 시간을 안다는 것, 그리고 맛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에 능통했다는 것은 취향의 고급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소박함이나 수수함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의 감각은 지극히 탐미적이다. 그는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추적하는 그의 시력은 밝음과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색깔까지도 찾아낼 수 있을 만큼 밝다. 결혼기념일에 냉전 중인 아내에게 서른 한 송이의 노란 장미꽃을 사들고 들어가는 섬세한 남편, 비오는 날에는 불루스카이를 마시자고 권유하는, 11월의 버버리코트가 어울리는 멋진 남자 손광성. 선택이 까다롭고 감각이 세련되었으며 고아한 취향을 가진 그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내를 따라 시장에 간 날, 어물전의 꿈틀대는 생선들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먼 옛날 떠나온 바다로 되돌아가기를 꿈꾸는 소년 같은 사람,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 그러나 그를 굳이 귀족으로 분류하고 싶지 않은 것은 보통의 우리와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돌려세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5. 뒷모습
손광성의 작품을 읽어가는 동안 ‘단아하다’는 어휘가 나왔다하면 나는 반사적으로 급브레이크를 밟곤 하였다. 그가 ‘단아하다’는 형용사를 과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을 체계화하려고 처음부터 다시 밑줄을 그어가던 나는 적잖이 실망하였다. 어휘 사용의 높은 빈도를 근거로 하여 모종의 결론을 이끌어 내려했던 의도가 무참히 꺾여 버렸 기 때문이다. 나는 왜 손광성이 ‘단아하다’는 어휘를 많이 쓰고 있다고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그의 작품을 읽는 동안 혹시 나는 어떤 ’단아함‘에 붙들려 있었을까. 그래서 ‘단아하다’는 어휘와 손광성을 연관 짓고 싶었을까. 단아하다는 말은 단정하고 아담하다는 말이다. 시끄럽거나 어수선하지 않고 정리되어 깨끗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단아하다는 것은 화려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소박함을 의미한다고는 할 수 없다. 단아하다는 말에서 나는 70%쯤 물을 채운 하얀 사기 컵, 거기 꽂혀 있는 한 송이 아이보리색 장미봉오리를 생각한다. 그나저나 그가 ‘단아하다’고 정의한 대상들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손광성은 <한 송이 수련 위에 부는 바람처럼>에서 곱게 피었다가 아름답게 지는 수련의 모습을 단아하다고 하였다. 그가 “수련을 가꾼 지 여나믄 해” 수련은 아침 여명과 함께 피었다가 저녁놀과 함께 잠들곤 하였다. 수련은 “사흘 동안을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다가 나흘째쯤 되는 날 저녁”, “서른도 더 되는 꽃잎을 하나씩 치마폭을 여미듯 접고는, 피기 전 봉오리였을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곤 했다. 세상에는 수련보다 곱고 화려한 꽃들이 많지만 살았을 적 아무리 곱고 화려했어도 죽을 때는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거나 시들어 떨어지거나 시나브로 흩날려 버린다. 그런데 수련의 마지막 모습은 필 때처럼 아름답다. 흐트러짐이 없이 정숙하게 살다가 가는 여인의 임종처럼 단아하고 우아하게 지는 것이다. 손광성은 지고 있는 수련을 보면서 자신이 겨우 피와 살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에 지나지 않음이 스스로 부끄러울 때가 있다고 술회하였다. 그도 떠날 때는 수련처럼 아름답게 지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므로 지는 수련의 모습을 형용한 ‘단아하다’는 최고의 어휘라고 하겠다. <돌절구>에서는 돌절구의 소박하고 무구함을 단아하다고 하였다. ‘잘 빠진 안성 유기 술잔처럼 오붓하고, 반만 핀 튤립같이 우아한 돌절구. 돌절구의 선은 부드럽지만 고려자기처럼 애조를 띠지 않고, 이조자기처럼 튼실하고 절제된 것이다. 마치 사람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것 같다. 가락으로 치면 중모리나 중중모리쯤 될 것 같고, ’소박한 듯 단아하고 단아하면서도 속이 따뜻한 여인 같아서 무구하고 편안한 마음을 준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채의 미학>에서는 선면의 아담한 형태 속에 얌전하게 길들여진 한 폭의 그림을 단아하다는 말로 표현하였다. 욕심을 부려 채우려하지 않고 허허롭게 여백을 비워두기 때문이다. 그는 또 <도라지꽃>을 일러 “다 피어도 되바라진 데가 없는 단아하고 오긋한 꽃”이며, 깔끔한 꽃이라고 하였다. 그는 도라지꽃을 요란하거나 강렬하지 않은 꽃, “동양의 꽃 가운데서도 가장 한국적인 꽃”이라 여기고 있다. 단아한 것으로 뽑힌 위의 사물들, 수련과 돌절구, 선면화와 도라지꽃의 공통점은 조용하고 정숙한 자리, 가지런하고 속이 깊은 심성, 그리고 편안하고 깨끗한 모습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시련도 도전도 지나가고 완급의 속도를 초월한 상태, 안온한 바람의 촉감이 정서를 관장하고 있는 상태. 내가 설령 손광성의 작품에서 ‘단아함’을 발견했을지라도 그의 글의 특성을 ‘단아함’으로 묶어 정의하고 싶지는 않다. 손광성은 문학에 발을 딛기 전부터 시를 즐겨 썼다고 한다. 과연 그의 문장은 시를 무색하게 할 만큼 뛰어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그가 채용한 어휘들은 독특한 문맥 가운데서 수채화 물감처럼 번지기도 하고 노도 같은 격정으로 출렁거리기도 하면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손광성의 작품을 단아하다고 정의하는 대신 그의 뒷모습을 단아하다고 해석하고 싶다. 뒷모습은 이를테면 떠난 자리에 남는 향기와 같은 것이다. 그가 참신한 비유로 시를 능가하는 표현을 했거나, 한 해 겨울 몇 트럭의 통장작을 쪼개는 기운으로 포효했거나, 내가 그의 글을 따라가다가 빈들의 바람소리처럼 흐느끼게 될 때에도 그의 뒷모습은 가을 물가에 서 있는 두루미처럼 단아한 여운과 향기를 남기기 때문이다. 그는 왜 하필 새인가? 왜 많고 많은 새 중에서 백조도 아니고 해오라기도 아닌, 황새도 아니고 왜가리도 아닌 두루미인가? 거기 대해서는 다시 날짜를 잡아 차분하게 얘기해야 할 것 같다.
2014년『수필과 비평 』10월호
|
첫댓글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손광성 선생님의 수필도 선생님의 평론도 용호상박입니다. 진지하게 한 가지 여쭤볼게 있습니다. 이런 평론을 한편 쓰자면 시간을 얼마나 필요로 합니까? 매우 궁급합니다.
늦게야 대답합니다. 좋은 글은 아주 빨리, 써집니다. 그 글이 나를 끌고 달립니다.
두 분의 글을 읽다가 벌떡 일어나
손뼉을 쳤습니다~~~!!!
아마 밤을 세우셨을 것입니다~~~!!!
오아시스님, 요즘 뜸하셔서 걱정을 했습니다. 건강하시지요? 글때문에 밤을 새는 일은 없습니다.
@이향아
교수님의 글이 너무 좋아서요~~~!!!
이만하려면 저는 며칠 밤을 꼬박이어도
어림 없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흥미 진진한 평론이라 자꾸 읽어보고 싶습니다.
전해주씨 수필집 내셔야지요. 유화전시회도 하셔야지요. 무척 바쁘실 것 같아요.
@이향아 선생님,
수필 잘 쓰는 사람들의 글을 보고
잘 그린 작 품들을 보면
저는 감히 주눅이 들어 계속 미루고 포기하곤 합니다.
더 배우고 끊임없이 노력해야 될 것 같습니다 .
겸손하신 말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