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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09291.html
이쯤에서 근안이횽 근황은?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다!
이근안 전도사 간증
남영동의 두 남자
참고로 근안이횽 약력을 소개하면
1970년 순경으로 경찰 입문
1979년 남민전사건 피의자 고문
1981년 전노련사건 피의자 고문
1985년 납북어부 김성학씨 간첩조작사건 피의자 고문
1986년 반제동맹사건 피의자 고문
1988년 김근태 의원 고문
1988년 도주 및 잠적
1989년 전국에 지명수배
1999년 10월 자수
2000년 재판 거쳐 징역 7년 선고받고 복역
2006년 11월 출소
2008년 목사되다.
안수 동영상은 여기
[실록민주화운동] 제4부 58. 김근태 고문사건
1985년 9월4일 새벽 5시30분.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김근태는 의경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 2년여 동안 그는 집회가 끝난 뒤엔 늘 유언비어 유포 등의 어처구니 없는 혐의로 즉심에 넘겨지곤 했다. 그는 이번에도 민청련 총회와 관련해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는데, 이날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홀가분하게 유치장을 나섰다. 앞선 민청련 총회에서 의장직은 다른 사람이 맡기로 이미 결정된 터였다.
수사과를 지나 막 복도로 나서는 순간, 7명의 정사복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일순 스산한 한기가 전신을 덮쳤다. 마당에 나서니 시동을 켠 포니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30여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분실에 닿았다.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갔다.
이곳 515호실에서 그 ‘짐승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가 끌려간 것은 아니었다. 고문자들은 김근태에게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무릎•허벅지•배•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고문용으로 제작된 칠성판 위에 내팽개쳐졌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은 열흘 이상 지속됐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고문의 강도를 계속 높여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들어 김근태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처음 사흘동안 그는 한 숨의 잠도, 한 숟갈의 밥도 제공받지 못했다. 사흘이 지나면서부터 고문은 더욱 포악해지고 격렬해졌다. 그는 제2의 광주사태가 진행되고 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국도 투쟁 과정에서 일정하게 존재를 인정해주던 민청련 의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일곱번째의 고문이 진행되던 중 김근태는 마침내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혐의사실을 시인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자주 만났다는 등등.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그는 제발 고통 없이 죽여 줄 것을 애원했다. 고문자들은 말했다. “다른 사람은 다 말할테니 살려달라고 하는데 너는 죽여달라고? 그래, 끝까지 반항하는 놈 깨끗이 죽여주마.”
고문자들은 포획한 먹이감을 들여다보고 시시덕거리는 승냥이들이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조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김근태는 9월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9월20일 마지막 고문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관순•윤동주나 광주의 영령들처럼. 그는 처참한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혼자 신음해야 했다. 기댈 언덕도, 부여잡을 풀포기도 하나 없는 황야에 버려진 것이다. 그곳은 바깥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아수라 지옥이었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는 아내 인재근을 만났다. 만남의 시간은 찰나였다. 스쳐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발과 발꿈치에 난 찢긴 상처, 시꺼먼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인재근은 미처 경악하고 분노할 틈도 없었다. 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모두 담아두었다.
사실 둘은 70년대 이후 줄곧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한 동지 사이였다. 남편이 구류 마지막날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라진 뒤 행방이 묘연하자 인재근은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음모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재근은 수사기관이란 기관을 다 찾아다녔지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비밀에 부쳐졌다(한참 지난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다). 인재근은 김근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여러날째 잠복하고 있다가 이날 남편을 만난 것이다.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학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유인물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모두 경악했다. 그러나 그때도 모든 국내 언론은 침묵했다.
김근태는 서대문구치소 병사에 수용됐으나 변호사 접견은 물론 가족 면회도 할 수 없었다. 이돈명•홍성우•황인철 등이 변호인 접견을 신청하면 어김없이 검찰이 김근태를 불러갔다. 1차 공판 1주일 전인 12월12일에야 처음으로 공식 접견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김근태가 공개적인 육성으로 세상에 고문 사실을 알린 것은 12월19일의 첫공판 모두(冒頭)진술을 통해서였다.
이‘짐승의 시간’이 만들어낸 소설같은 이야기 중 하나는 민청련의 지도이념인 ‘민족적 민주주의’가 반국가단체인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민청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했고 상임부의장 이을호를 비롯해 김희상•김종복•최민화•권형택 등 간부들을 구속 또는 수배했다. 아울러 학생운동조직인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역시 민청련의 배후조종을 받는 단체로 규정했다. 2•12총선의 결과로 전두환 체제가 동요하면서 저항의 분위기가 대중적으로 고조되는 즈음에 당국은 가장 강력한 전위조직인 민청련을 맨 먼저 정치적 제물로 삼았던 것이다.
변호인들은 12월30일 후일 ‘고문기술자’ 이근안으로 밝혀진 ‘김전무’(자신들의 신분을 숨기기 위해 부르는 가명)를 비롯해 고문에 가담한 경찰관 8명을 고발했다. 그러나 검찰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런 검찰을 향해 대한변협은 86년 8월6일 회장 김은호의 명의로 조속한 사건 처리를 촉구하는 공문을 발송했으나 검찰은 고발내용에 대해 무혐의 처분하는 후안무치한 결정을 내렸다.
김근태 고문사건은 그동안 아무런 연결통로 없이 각자 반독재투쟁을 벌이던 재야와 야당을 하나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이 즈음 개헌투쟁의 방향과 방법을 두고 야당과 재야는 대여협상론과 전면투쟁론으로 심각한 이견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재야와 야당은 이 사건을 계기로 ‘고문 및 용공조작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리는데 의견을 모았다. 공대위는 11월8일 혜화동성당에서 보고대회를 갖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 작전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가택연금됐으며 혜화동성당과 종로 일대에는 전투지역을 방불케 하는 경찰력이 배치됐다.
하지만 공대위는 야당을 회유하고 재야세력을 분쇄해버리는 작전을 구사하던 전두환 정권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기구는 이듬해인 86년 3월 ‘민주화를 위한 국민연락기구’를 구성해 개헌투쟁 연대틀을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신민당이 재야의 반미반핵 논리를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천명하면서 이 기구는 와해됐지만,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 더욱 확대발전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라는 큰 사령탑을 형성하는 모태가 됐다.
김근태. 그는 1947년 경기 부천에서 출생해 경기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78년부터 5년여간 생존의 벼랑에서 신음하는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가장 평범하고 낮은 곳에서 일했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상담역이 그의 직업이었다. 재학중에 유신 장기집권 반대운동을 했지만 잡히지 않고 7년 동안의 수배생활을 했기에 조영래•장기표•심재권 등 민주화운동 동료들의 공소장에는 항시 ‘공소외 김근태’라는 표현이 들어 있어 그의 별명은 한동안 ‘공소외’였다. 또한 너무 진지해서 ‘김진지’라고도 불린다.
군사정권 하에서 헤아릴 수조차 없는 많은 고문이 있었지만 이 사건이 민주세력의 단결을 불러온 것은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하는 잔혹한 고문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고문 내용을 기록하다시피 머릿속 깊이 담아낸 김근태 자신의 집요함, 이를 외부세계에 정확하게 전파한 아내 인재근의 민첩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경향신문 펌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405301849081&code=210010
김근태 저서 ‘남영동’ 중
인간도살장 남영동,그곳에서 있었던 한맺힌 내력 4부
델시 상표의 사무용 가방을 들고 건장한 사내가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운동화를 꺼내 신고서 뭔가 삐딱하니 꼬나보더군요. 거리 어느 구석에 있을 깡패, 젼형적인 어깨타입의 풍모였습니다. 눈은 불안정하고 뻐기면서 걷는 인간 백정 같았습니다. 몸무게는 거의 90kg에 육박할 것 같고 키는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습니다. '잃어버린 전설'에 나오는, 뒤뜰에서 식칼을 가는 그 누구일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그래도 빛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눈동자에 어리는 장난기같은 그림자, 그것뿐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금방 알겠더군요. 그런 곳에는 반드시 있을 인간이지요. 말할 것도 없이 고문담당 기술자, 전담자인 것이지요. "우리 형님은 훨씬 더 무서운데 지금 안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라. 그동안 장의사가 한가 했었는데 일감이 풍족하게 생겨서 살맛난다"고도 하고 "작업을 차근차근 해 나갈 터이니까 단단히 각오하라"고 협박을 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저녁 8시 반부터 9월 6일 새벽 1시경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내가 '전기고문'이라고 하니까 고문담당자는 이것은 전기고문이 아니라 '배터리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뭐라해도 전기고문임이 틀림없지요.
5일 저녁 8시반경, 고문하기 전에 뭔가 자기들끼리 수군수군대더니 조용해졌습니다. 최상남은 본인에게 "잠을 전혀 못 자서 피곤할 것이다. 이 방의 불을 끌 수는 없고 대신 눈에 반창고를 붙여 줄 테니까 의자에 앉아서 잠을 자두라"고 하면서 양쪽 눈에 엑스(X)자로 모두 반창고를 붙였습니다. 이런 고마울 데가... 나는 콧등이 시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잠을 청해 볼 양으로 막 의자에 기대는 순간 고문자들이 떼거리로 몰려 들어오면서 소리를 버럭 질러댔습니다. 기습과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작전인 것처럼 인간 파괴의 수치심없는 작전인 것입니다. 전기고문 장치를 보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기도 했구요. 완전히 발가벗겨졌습니다. 팬티도 남김없이 날아가 버리고요. 이곳에서 무슨 수치심 그런 것을 여밀 계제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팬티조차 벗겨지고 보니까 더욱 당황케 되면서 이제 모두 빼앗겨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아직 남은 것이 있고 소극적 저항의 표시물인 것처럼 느껴졌던 팬티마저 빼앗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칠성대 위에 또다시 꽁꽁 묶여진 다음에 고문자들은 발바닥과 발등에 붕대 같은 것을 여러 겹 감았습니다. 새끼발가락과 그 다음 발가락 사이에 전기 접촉면을 끼우고, 그것이 움직이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것 같았고, 이 붕대도 전기담요처럼 전기가 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다음 발에, 사타구니에, 배에, 가슴에, 목에, 그리고 주전자로 머리에 물을 들어부었습니다. 그 때 물의 선뜩함은 귀기가 살갗에 달라붙는 바로 그것이었지요. 고문 기술자는 뭔가 쉴 새 없이 떠들고 겁주고 협박을 했습니다. 이제 전기가 통하면 회음부가 터져 피가 흐를 것이라고 하면서 그래서 팬티를 벗겼다고 했습니다.
우선 물고문부터 시작했습니다. 다만 그 강도는 물고문만 할 때보다 못했지만 공포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은 더욱 깊어만 갔습니다. 소스라쳐 놀라게 되고 머리를 힘껏 움직이게 되지요. 어느 정도 물고문이 진행되어 몸에 땀이 나게 되면 그때부터 전기고문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짧고 약하게, 그러다가 점점 길고 강하게, 강력하게 전류의 세기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다시 약해지고, 가끔씩은 발등에 전기를 순간적으로 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희미한 자국으로 남아 있지만, 그래서 발등의 살가죽이 꺼멓게 타 버리게 되었습니다. 김수현과 백남은은 지켜보고 고문기술자가 직접 전기고문을 하고 물고문의 집행을 김영두에게 지시했습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한마디로 불고문이었습니다. 외상을 남기지 않으면서 치명적으로 내상을 입히고 극도의 고통과 공포를 수반하는 고문입니다. 물고문과 불고문의 조화라고나 할까요. 그 상승효과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고문이 밑바닥에 닿지 않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질식해가는 것이라면 전기고문, 즉 불고문은 단근질해서 뜨거운 불 인두로 지져서 바싹 말라 바스러뜨리고 돌돌 말려서 불에 튀기는 그런 것입니다.
전기고문, 그것은 핏줄을 뒤틀어 놓고 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겨 마침내 마디마디 끊어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빠개질 듯한 통증이 오고 그 몰려오는 공포라니,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와 파고드는 것처럼 아른거렸습니다. 온 몸이 저리고 칙칙해져서 끈적끈적한 외마리들 계속 질러대게 되더군요.
전기가 발을 통해서 머리끝까지 쑤셔댈 때마다 어두운 비명을 토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의 각 부분은 해체되어 나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오직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비명뿐이었습니다. 몸 전체에 시퍼렇게 핏줄이 솟고, '헉헉' '꺼이꺼이' 목은 쉬어 가는데 이것은 멱이 따진 돼지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를 지른다고 강하게 전류를 통하고 소리가,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혀를 이빨로 꽉 물었다고 혀를 빼라고 강하고도 긴 전류를 흘려보내고, 끙끙대면서 참는다고 또 그러고..... 이들의 목표는 총체적인 혼란, 착란 상태로 돌입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미친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온통 휘감고 그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내 눈 속으로 파고 들어오는 환상이 공포와 광란의 소용돌이로 닥쳐왔습니다. 이것은 슬픔이라든지 외로움이라든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잔인한 파괴, 그 자체였습니다.
담요는 땀에 흥건하게 젖는데 물을 쏟아 부었던 몸의 각 부분은 금방 말라버리고, 특히 머리털은 곧 말라서 물고문을 또 수시로 해야 됐습니다. 이 고문기술자가 내 가슴에 올라타고 쿵쿵 굴리는데도 전혀 무게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운동화 발바닥으로 얼굴을 슥슥 문대면서 경멸적으로 걷어차도 그것은 별 문제가 되지도 않고 심리적 거부감이 일어날 여지가 전혀 없었습니다. 완전히 지쳐 늘어지기 시작할 때, 이날의 주제가 제기되고 추궁됐습니다. 이을호씨의 시민민주혁명, 민족민주혁명, 민중민주혁명의 인정, 그것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서 거부란 거의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요. 나는 처음에는 저항을 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고문을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제 정말로 위험해지는 것 같아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는 전기고문의 전류에 흔들리더니 여지없이 무너져 갔습니다. 또한 이을호씨의 병력이 떠오르고, 본인이 계속 부인할 때 증거확보를 하기 위해 체포 범위를 비이성적으로 확대하는 이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이을호씨의 자백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반증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당시에는 은밀히 자신만만한 확신이 있어 결국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기본적으로는 고문에 밀려서 쓰러진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것이구요.
인간으로서 저항할 수 없는 잔인한 강제에 굴복해 가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합리화시켜야했던 것입니다. 아니 합리화라기보다 생명을 방어하기 위해 남은 단 하나의 길이었습니다. 고문대 위에 묶여 고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고문자들의 요구명령은 귀에 왕스피커를 들이대고 틀어대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에 아주 깊이 새겨집니다. 영원히 낫지 않는 상처를 입히면서 새겨지는 것입니다. 소름끼치는 공포와 고통을 수반하면서 각인되는 이 고문자들의 요구에는 엄청난 심리적 에너지가 충전된 채 기억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언제 어디서고 이들의 요구 지시를 거부하고자 할 때는 그 충전된 에너지의 저항과 동요에 부딪치게 되며, 고문시의 공포와 그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무리하고 무모한 요구, 황당무계한 강제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등 모든 수단을 강행케 되는 것입니다.
아! 그 라디오, 박살내 버릴 그 라디오를 펼쳐 내고, 그리고 무슨 노래도 있었습니다. 고문기술자가 라디오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으며 직접 다이얼을 맞추고 조정했습니다. 이들의 고문은 그냥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상당히 치밀하게 고안된 것이었습니다. 아마 끊임없이 경험을 통해서 배울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고문기술을 외국에서 도입했을 것입니다. 이날 본인이 고문대에서 미워하게 된 그 라디오, 그것도 일종의 심리적 고문이었습니다.
'섬마을 세상' 블로그 펌
http://blog.daum.net/sumteacher/12672838
화해와 용서라... 씨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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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듣다 듣다 못 참겠네요. 무슨 고문을 무용담처럼 나불거리고 옆에서 웃는 저x들...
김근태님의 빠른 쾌유를 빕니다. 오래 사셔야 합니다. 저 새끼들 뒤지는 거 반드시 보셔야 합니다!
화납니다. 신께서는 이런 놈을 가만히 두다니 씨바
쿨 tv 가 궁굼해서 찾아봤더니만
쑤리기....
삭제된 댓글 입니다.
좋은 화면 캡추ㅕ 감사 합니다
대부분 종교를 잘못 이해하고 계서서..종교(宗敎) 마루종 가르칠교 근본이 되는 가르침. 사람답게 살려면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해라. 그러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다. 역사속의 성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것이 종교입니다. 무슨 신을 믿고 복을 받고...지옥에 가고 천국에 가고 이런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가름침을 공부해 따르라는 것이지 가르친 사람(예수,부처)을 천국 보내주는 신, 복주는 신으로 믿으라는게 종교가 아닙니다. 캡춰에 종교=유신론 이처럼 보일 수가 있는것 같아서 주제넘게 지적했네요;
저같이 그 시대의 아픔을 직접 느껴보지 못한 세대들도 이런 진실과 마주하게 하면 할수록..가슴에 응어리가 담처럼 쌓이는데... 그 시대를 겪어온 분들은 어떠셨을지 상상도 못하겠네요..변하고 변해서 그 방식도 변하여..지금 이 정권을 보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미래가 그래도 있다는 것이 다행으로 여겨질 따름입니다..
저놈은 사람이 아니다.
목사가 너무쉬운 직업이네요 나도 목사나 하까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 글귀가 갑자기 생각난다~~! 그리고 신도림역에서 피켓들고~~! 전철에서 혼자 막 떠들고 뎅기는 노인들~~! 이근안 목사 천당가겠구나~~! 또다른 글귀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가령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면 죄를 졌다고 하면 일단 예수를 믿고 죄는 지옥 보내고 사람(영혼)은 천당가는 것인가~!
뭐 죽어본 사람이 없으니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죠. 분명한건 무거운 돌은 물에 가라앉기 마련이고 아무리 떠오르라고
기도해 봤자 떠오를리 없습니다.
저런 자의 간증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 립니다,,,,교회 교회....
저런 고문 기술자가 목사가 되다니 말도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
이근안 잡아다 고문 당한 사람들이 똑같이 본인 말대로 고상하게 예술놀이 좀 해줬으면 속이 시원하겠네요..
인간같지 않는 것들이 왜그리 설치는지..
하느님은 저런 인간 데려다 지옥에 왜 안 쳐 넣은지..
하느님이 있기나 합니까?
전대가리와 더불어 반드시 응징해야할 늠, 방치하는 나나 여기서 씨부리는 새끼들 다 비열한 늠일뿐야, 죽일눔
죽어 귀신이 되고 싶다```
개독교 목사?
널 걍~
어느 교단인지 한심하긴 해요....유영철이도 목사가 될수 있다는건지??........-.-
쓰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