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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유래
득성유래(得姓由來) :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안동권씨는 본래 신라(新羅)의 종성(宗姓), 즉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근자에 신라김씨(新羅金氏)로도 칭하는 경주김씨는 금궤(金櫃)에서 태어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대보공 '알지'는 신라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때 서라벌(徐羅伐)의 시림(始林)에 강림한 난생(卵生)의 설화로 탄생하였는데 이때 닭이 울어 이를 알렸다고 해서 시림은 계림(鷄林)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알지'를 왕이 궁중에서 길러 사위를 삼고 왕위도 물려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보에 그쳤는데 그 6대손이 13대 미추왕(味鄒王)으로 즉위하여 신라의 56왕 가운데 김씨가 35왕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국호(國號)가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가 지나 국운이 쇠퇴하여 민심이 이반(離叛)하고 각처에서 도적(盜賊)이 일어나더니 사방의 고을에서 모반(謀叛)과 부용(附庸)을 일삼으며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게 되었습니다.
상주(尙州) 출신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 군대에 들어가 장수가 되자 무리를 키워 완산(完山)에서 도읍해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옛 백제의 원수를 갚는다고 내세우며 끊임없이 산맥을 넘어 가까운 영토를 침공하고 북쪽에서는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서 버림받은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서 도읍해 옛 고구려를 회복한다면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우고 신라를 원수로 하며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북의 너른 영토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로 포악한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축출되고 고려(高麗)가 송악(松嶽)에 도읍하여 이를 대신하자 신라와 고려는 서로 교빙(交聘)하고 이윽고는 일종의 동맹을 맺어 견훤이 침공해 오면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려가 1만 병력을 보내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 궁예와 많이 싸운 견훤은 왕건의 고려가 서자 신라보다 먼저 교호(交好)코자 하여 선물을 보내고 서로 볼모도 교환했는데 이는 신흥 고려와 화친해 먼저 신라를 멸한 뒤에 고려를 쳐 후삼국을 통일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신라와 동맹하여 오히려 신라를 구하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니 격분한 견훤이 경애왕(景哀王) 4년, 927년에 왕도(王都) 경주(慶州)로 대군을 몰고 쳐들어가 잔인무도하게 유린하였습니다.
경애왕은 후비(后妃)와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중이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이궁(離宮)으로 피신했고 견훤은 궁궐에 들어가 군사를 시켜 약탈과 능욕을 자행케 하고 임금 내외를 찾아내서는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등으로 눈앞에서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몸소 능욕하였으니 이는 유례가 없이 무도한 만행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의 표제(表弟)(외사촌 아우)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를 다음 임금으로 세우고 그 아우를 볼모로 삼아 데려갔는데 이때 백관(百官) 가운데 많은 고관과 귀족 자제·부녀자와 온갖 보화는 물론 병장기 등 재물을 모두 털어내 가지고 회군하였습니다.
이에 급보를 받은 고려의 태조(太祖)왕건이 5천 정병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으나 분탕을 끝낸 견훤군은 퇴각한 뒤였으므로 대구(大邱) 동남쪽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맞아 회전(會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또 고려군이 견훤군에게 대패하여 고려태조는 가까스로 탈신(脫身)하여 나오고 명장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왕을 살리고 전사했습니다. 무기와 군마(軍馬)가 충족하고 힘이 더욱 강해진 견훤의 후백제군은 이르는 곳에 적이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 이태 뒤인 경순왕 3년, 929년 12월에 견훤은 영남(嶺南)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하에 있는 고창군(古昌郡)(안동)을 공략하여 신라와 고려의 연결을 끊고 영남지역에서 고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나왔습니다.
이때 신라 고유의 영토인 영남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개의 고을이 그 성주(城主)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다만 고려에 항복하거나 후백제에 점령되기를 반복할 뿐 신라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북 영남의 중심인 고창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적군이 함부로 넘보지 못했는데 이곳을 공략하면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견훤이 이를 노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해서는 조만간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여 이를 저지코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창 고을을 놓고 후백제와 고려는 자웅을 겨루는 대회전을 다시 벌이게 되었습니다. 고창의 성주는 김선평(金宣平)(김태사로서 안동김씨의 시조)인데 이때 이곳의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는 신라의 종실(宗室)(왕실 종친)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김행(金幸)'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인 장길(張吉)(장태사로서 안동장씨의 시조이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로서 3인이 그 지주(支柱)가 되고 있었습니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구원병을 거느리고 온 고려 태조는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2년 전에 공산(公山)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한데다 만약 여기에서 패하면 죽령(竹嶺)의 산맥이 막혀 퇴로(退路)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창의 신라군은 의병(義兵)이 많아 정병(精兵)이 아니므로 외로운 항전으로 오래 부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려군이 싸움에 밀려 퇴각할 경우는 이미 죽령을 넘는 길이 백제군에 차단되어 넘어갈 수가 없어 사잇길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같은 형세를 보고 '김행(金幸)'공이 분연히 일어나 '훤(萱)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병력이 적은지라 힘으로 능히 보복할 수가 없는데다 또한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즉 종당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쾌히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하고 모두를 설득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부(歸附)해 고려군을 맞아들였습니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決死抗戰)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 태조는 의기가 치솟아 후백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전을 벌였습니다.
고려군은 고창 북쪽 10리쯤의 병산(甁山)에 친치고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쳤는데 거리가 5백보였습니다.
드디어 격전이 벌어졌는데 종일을 싸운 결과 고창의 신라 의병과 연합한 고려군이 크게 이기고 견훤은 대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히고 죽은 자가 8천에 이르러 그 시체로 냇물이 막혀 거꾸로 흘렀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모두 고려의 것으로 되면서 대세가 후백제의 승세에서 고려의 것으로 기울었습니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고려태조는 '김행'공을 보고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歸順)하였으니 권도(權道)(형편에 따라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일을 행하는 도리)의 적절함에 통달(通達)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권씨(權氏)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습니다.
이렇게 임금이 성을 내려주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달리 성을 얻는다는 뜻의 득성(得姓)이라고도 합니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봉공수작9封功授爵)(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내림)할 때에 공에게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삼공의 으뜸)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그 식읍(食邑)(조세를 공신이 받아 쓰도록 한 고을)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새로운 성명이 '권행(權幸)'으로 된 공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安東權氏), 즉 안동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권씨의 시조(始祖)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領主)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世襲)하게 되었습니다.
권씨(權氏)는 단일본(單一本)인가?
한국의 권씨는 모두 본관(本貫)이 하나라고 합니다. 본관이란 본디 성씨가 발상한 고향입니다. 그곳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이라서 안동권씨(安東權氏)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안동권씨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꼭 안동권씨 하나의 명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영가(永嘉)나 화산(花山) 등으로 권씨의 본관을 일컫는 수가 있습니다.
영가와 화산은 다 안동의 옛이름이니 안동의 이칭(異稱)이 될 뿐이지 그렇게 부른다고 본관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성(開城)을송도(松都)나 개경(開京)·송경(松京)·송악(松嶽) 등으로 불러도 다 개성을 일컫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천권씨(醴泉權氏)는 이와 다릅니다. 경북 예천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예천권씨의 조상은 성이 흔(昕)씨였습니다.
그런데 고려(高麗) 29대 충목왕(忠穆王)의 이름이 흔(昕)으로서 즉위하니 국휘(國諱)가 되어 이를 쓸 수 없게 되었으므로 왕명(王命)에 따라 그 외가(外家)의 성 권씨로 바꾸게 되고 본관은 그대로 예천으로 하니 예천권씨가 되었습니다.
그 시조(始祖) 권섬(權暹)은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10세외손(世外孫)이 되는데 그 어머니가 권씨일 뿐만 아니라 증조모(曾祖母)와 5대조모도 권씨였습니다.
이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동성이본(同姓異本)이자 내외손(內外孫) 관계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통혼(通婚)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천권씨가 주로 경북의 예천지역에서만 세거(世居)하여 왔고 인구도 안동권씨의 약 3백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게 알려지지를 않은 것입니다. 또 양주권씨(楊州權氏)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른 이름은 안동권씨의 정승공파(政丞公派)인데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세자 시절의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귀화한 중국인 학사 권상재(權尙載)가 안동권씨 태사공의 14세손인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의 사위가 되면서 왕상좌(王上佐)로 임금에게서 사성명(賜姓名)을 받으니 그 후손을 왕상좌파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조(朝鮮朝) 개국 후에 정헌공 왕후의 손자대에서 고려의 국성(國姓)인 왕씨에서 본디의 안동권씨로 복성(復姓)하였는데 왕상좌파도 고려의 충목왕이 권상재를 총애하여 왕씨로 사성하고 왕후의 사위만이 아닌 아들이 되게 한 뜻에 따라 정헌공의 본손(本孫)이 되니 예천권씨와 달리 안동권씨의 외손이 아닌 본손으로 입적(入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양주권씨라 세칭(世稱)한다고 해서 양주가 정승공파의 세거지이지 본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정승공파와는 우리 모두가 다 계촌(計寸)이 되고 통혼을 하는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이상과 같이 예천권씨와 정승공파는 비슷한 시기에 왕명(王命)에 따라 탄생하였고 안동권씨의 외손인 것도 같은데 전자는 동성이본으로 그 독립성을 유지했고 후자는 정승공 왕상좌가 고려인으로 귀화한 것처럼 그 후손도 권씨의 외손에서 본손으로 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예천권씨가 이처럼 엄연히 있으니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득성유래(得姓由來) :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어떻게 하여 생겼는가?
안동권씨는 본래 신라(新羅)의 종성(宗姓), 즉 왕실 성씨인 경주김씨(慶州金氏)이고, 근자에 신라김씨(新羅金氏)로도 칭하는 경주김씨는 금궤(金櫃)에서 태어난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대보공 '알지'는 신라 4대 석탈해왕(昔脫解王) 때 서라벌(徐羅伐)의 시림(始林)에 강림한 난생(卵生)의 설화로 탄생하였는데 이때 닭이 울어 이를 알렸다고 해서 시림은 계림(鷄林)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알지'를 왕이 궁중에서 길러 사위를 삼고 왕위도 물려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대보에 그쳤는데 그 6대손이 13대 미추왕(味鄒王)으로 즉위하여 신라의 56왕 가운데 김씨가 35왕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라의 국호(國號)가 서라벌에서 계림으로 바뀌기도 하였습니다. 통일신라의 전성기가 지나 국운이 쇠퇴하여 민심이 이반(離叛)하고 각처에서 도적(盜賊)이 일어나더니 사방의 고을에서 모반(謀叛)과 부용(附庸)을 일삼으며 군웅(群雄)이 할거(割據)하게 되었습니다.
상주(尙州) 출신 농민의 아들 견훤(甄萱)이 군대에 들어가 장수가 되자 무리를 키워 완산(完山)에서 도읍해 후백제(後百濟)를 세우고 옛 백제의 원수를 갚는다고 내세우며 끊임없이 산맥을 넘어 가까운 영토를 침공하고 북쪽에서는 신라 왕실의 서자(庶子)로서 버림받은 궁예(弓裔)가 철원(鐵原)에서 도읍해 옛 고구려를 회복한다면서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세우고 신라를 원수로 하며 소백산맥(小白山脈) 이북의 너른 영토를 석권하였습니다.
이후로 포악한 궁예가 왕건(王建)에게 축출되고 고려(高麗)가 송악(松嶽)에 도읍하여 이를 대신하자 신라와 고려는 서로 교빙(交聘)하고 이윽고는 일종의 동맹을 맺어 견훤이 침공해 오면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려가 1만 병력을 보내 구원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 궁예와 많이 싸운 견훤은 왕건의 고려가 서자 신라보다 먼저 교호(交好)코자 하여 선물을 보내고 서로 볼모도 교환했는데 이는 신흥 고려와 화친해 먼저 신라를 멸한 뒤에 고려를 쳐 후삼국을 통일하려는 계략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가 신라와 동맹하여 오히려 신라를 구하고 후백제군을 정벌하니 격분한 견훤이 경애왕(景哀王) 4년, 927년에 왕도(王都) 경주(慶州)로 대군을 몰고 쳐들어가 잔인무도하게 유린하였습니다.
경애왕은 후비(后妃)와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중이었는데 불의의 습격을 받고 이궁(離宮)으로 피신했고 견훤은 궁궐에 들어가 군사를 시켜 약탈과 능욕을 자행케 하고 임금 내외를 찾아내서는 자기를 아버지라고 부르라는 등으로 눈앞에서 핍박하여 자결케 하고 왕비를 몸소 능욕하였으니 이는 유례가 없이 무도한 만행이었습니다.
그런 다음 왕의 표제(表弟)(외사촌 아우)인 경순왕(敬順王) 김부(金傅)를 다음 임금으로 세우고 그 아우를 볼모로 삼아 데려갔는데 이때 백관(百官) 가운데 많은 고관과 귀족 자제·부녀자와 온갖 보화는 물론 병장기 등 재물을 모두 털어내 가지고 회군하였습니다.
이에 급보를 받은 고려의 태조(太祖)왕건이 5천 정병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왔으나 분탕을 끝낸 견훤군은 퇴각한 뒤였으므로 대구(大邱) 동남쪽 공산(公山)의 동수(桐藪)에서 맞아 회전(會戰)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또 고려군이 견훤군에게 대패하여 고려태조는 가까스로 탈신(脫身)하여 나오고 명장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이 왕을 살리고 전사했습니다. 무기와 군마(軍馬)가 충족하고 힘이 더욱 강해진 견훤의 후백제군은 이르는 곳에 적이 없는 형세가 되었습니다.
그 이태 뒤인 경순왕 3년, 929년 12월에 견훤은 영남(嶺南) 동북의 요충지로서 주변 여러 고을이 모두 고려의 영향하에 있는 고창군(古昌郡)(안동)을 공략하여 신라와 고려의 연결을 끊고 영남지역에서 고려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대군을 휘몰아 나왔습니다.
이때 신라 고유의 영토인 영남지역은 왕도(王都) 서라벌 일대를 제외하고는 거개의 고을이 그 성주(城主)의 향배에 따라 고려나 후백제에 항복 또는 부용(附庸)하여 각기 그 지배나 영향을 받고 있으면서 다만 고려에 항복하거나 후백제에 점령되기를 반복할 뿐 신라의 영향력은 거의 미치지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북 영남의 중심인 고창고을만은 요지부동으로 신라 종국(宗國)에 충성하면서 3천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으니 적군이 함부로 넘보지 못했는데 이곳을 공략하면 일대가 평정될 것이므로 견훤이 이를 노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을 견훤에게 함락당해서는 조만간 신라 전체가 후백제에 병탄되고 후백제가 더 막강해질 것이므로 급히 대군을 거느리고 구원하여 이를 저지코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고창 고을을 놓고 후백제와 고려는 자웅을 겨루는 대회전을 다시 벌이게 되었습니다. 고창의 성주는 김선평(金宣平)(김태사로서 안동김씨의 시조)인데 이때 이곳의 병마(兵馬)를 기르면서 함께 수호하는 이는 신라의 종실(宗室)(왕실 종친)로서 군사를 지휘하는 '김행(金幸)'과 또 한 사람 고을의 명망있는 존장인 장길(張吉)(장태사로서 안동장씨의 시조이며 정필(貞弼)이라고도 함)로서 3인이 그 지주(支柱)가 되고 있었습니다.
견훤의 대군은 고창을 에워싸고 있고 구원병을 거느리고 온 고려 태조는 예안진(禮安鎭)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싸움에서 불리할 경우의 회군 대책을 의논했습니다.
2년 전에 공산(公山) 싸움에서 참패했는데 이번에도 후백제군이 강성한데다 만약 여기에서 패하면 죽령(竹嶺)의 산맥이 막혀 퇴로(退路)도 여의치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창의 신라군은 의병(義兵)이 많아 정병(精兵)이 아니므로 외로운 항전으로 오래 부지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고려군이 싸움에 밀려 퇴각할 경우는 이미 죽령을 넘는 길이 백제군에 차단되어 넘어갈 수가 없어 사잇길을 마련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이같은 형세를 보고 '김행(金幸)'공이 분연히 일어나 '훤(萱)의 부도(不道)함은 의리로 보아 우리가 더불어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는 바인데 지금 우리는 병력이 적은지라 힘으로 능히 보복할 수가 없는데다 또한 필쟁지지(必爭之地)에 근거하고 있은즉 종당에는 어육(魚肉)이 되고 말 것이니 어찌 왕공(王公)(고려 태조)에게 투귀(投歸)하여 저 역적 견훤을 섬멸하여 위로는 군부君父의 치욕을 씻고 아래로 민명(民命)을 살려 우리의 통분을 쾌히 씻지 않으리오' 하고는 마침내 김선평 성주와 장길을 설득하고 모두를 설득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부(歸附)해 고려군을 맞아들였습니다.
고창의 요충에서 결사항전(決死抗戰)하던 신라군을 얻게 된 고려 태조는 의기가 치솟아 후백제군과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회전을 벌였습니다.
고려군은 고창 북쪽 10리쯤의 병산(甁山)에 친치고 후백제군은 석산(石山)에 진쳤는데 거리가 5백보였습니다.
드디어 격전이 벌어졌는데 종일을 싸운 결과 고창의 신라 의병과 연합한 고려군이 크게 이기고 견훤은 대패하여 시랑(侍郞) 김악(金渥)이 사로잡히고 죽은 자가 8천에 이르러 그 시체로 냇물이 막혀 거꾸로 흘렀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대의 30여 고을이 모두 고려의 것으로 되면서 대세가 후백제의 승세에서 고려의 것으로 기울었습니다.
공적을 의논하고 포상을 행하면서 고려태조는 '김행'공을 보고 '행(幸)은 능히 기미(幾微)를 밝혀 귀순(歸順)하였으니 권도(權道)(형편에 따라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일을 행하는 도리)의 적절함에 통달(通達)한지라 권도가 있다 할 것이다' 하고 권씨(權氏)로 성을 내리고 고창군을 승격시켜 안동부(安東府)(동쪽을 안정시킨다는 뜻)로 하며 벼슬을 주어 대상(大相)(고려 초기 재상급 벼슬의 넷째 등급)을 삼았습니다.
이렇게 임금이 성을 내려주는 것을 사성(賜姓)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예사롭지 않은 일이며 달리 성을 얻는다는 뜻의 득성(得姓)이라고도 합니다. 뒤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여 봉공수작9封功授爵)(공신을 책봉하고 작위를 내림)할 때에 공에게 삼한벽상 삼중대광 아부공신(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의 호를 내리고 작위를 태사(太師)(삼공의 으뜸)로 승차하였으며 안동고을을 그 식읍(食邑)(조세를 공신이 받아 쓰도록 한 고을)으로 삼게 하였습니다.
이에 새로운 성명이 '권행(權幸)'으로 된 공은 태사의 벼슬을 받아 태사공(太師公)으로 불리게 되었고 안동권씨(安東權氏), 즉 안동을 본관(本貫)으로 하는 권씨의 시조(始祖)가 되면서 안동 고을의 실제 영주(領主)가 되어 이를 그 자손이 세습(世襲)하게 되었습니다.
권씨(權氏)는 단일본(單一本)인가?
한국의 권씨는 모두 본관(本貫)이 하나라고 합니다. 본관이란 본디 성씨가 발상한 고향입니다. 그곳이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安東)이라서 안동권씨(安東權氏)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면 우리나라에는 안동권씨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 꼭 안동권씨 하나의 명칭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선 영가(永嘉)나 화산(花山) 등으로 권씨의 본관을 일컫는 수가 있습니다.
영가와 화산은 다 안동의 옛이름이니 안동의 이칭(異稱)이 될 뿐이지 그렇게 부른다고 본관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개성(開城)을송도(松都)나 개경(開京)·송경(松京)·송악(松嶽) 등으로 불러도 다 개성을 일컫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천권씨(醴泉權氏)는 이와 다릅니다. 경북 예천을 본관으로 하는 권씨이기 때문입니다. 본디 예천권씨의 조상은 성이 흔(昕)씨였습니다.
그런데 고려(高麗) 29대 충목왕(忠穆王)의 이름이 흔(昕)으로서 즉위하니 국휘(國諱)가 되어 이를 쓸 수 없게 되었으므로 왕명(王命)에 따라 그 외가(外家)의 성 권씨로 바꾸게 되고 본관은 그대로 예천으로 하니 예천권씨가 되었습니다.
그 시조(始祖) 권섬(權暹)은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의 10세외손(世外孫)이 되는데 그 어머니가 권씨일 뿐만 아니라 증조모(曾祖母)와 5대조모도 권씨였습니다.
이 예천권씨와 안동권씨는 동성이본(同姓異本)이자 내외손(內外孫) 관계에 있으므로 지금까지 통혼(通婚)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예천권씨가 주로 경북의 예천지역에서만 세거(世居)하여 왔고 인구도 안동권씨의 약 3백분의 1밖에 되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게 알려지지를 않은 것입니다. 또 양주권씨(楊州權氏)가 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바른 이름은 안동권씨의 정승공파(政丞公派)인데 고려 충정왕(忠定王) 때 세자 시절의 공민왕(恭愍王)을 따라 귀화한 중국인 학사 권상재(權尙載)가 안동권씨 태사공의 14세손인 정헌공(正獻公) 왕후(王煦)의 사위가 되면서 왕상좌(王上佐)로 임금에게서 사성명(賜姓名)을 받으니 그 후손을 왕상좌파라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조(朝鮮朝) 개국 후에 정헌공 왕후의 손자대에서 고려의 국성(國姓)인 왕씨에서 본디의 안동권씨로 복성(復姓)하였는데 왕상좌파도 고려의 충목왕이 권상재를 총애하여 왕씨로 사성하고 왕후의 사위만이 아닌 아들이 되게 한 뜻에 따라 정헌공의 본손(本孫)이 되니 예천권씨와 달리 안동권씨의 외손이 아닌 본손으로 입적(入籍)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양주권씨라 세칭(世稱)한다고 해서 양주가 정승공파의 세거지이지 본관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정승공파와는 우리 모두가 다 계촌(計寸)이 되고 통혼을 하는 따위는 상상도 못하는 일입니다. 이상과 같이 예천권씨와 정승공파는 비슷한 시기에 왕명(王命)에 따라 탄생하였고 안동권씨의 외손인 것도 같은데 전자는 동성이본으로 그 독립성을 유지했고 후자는 정승공 왕상좌가 고려인으로 귀화한 것처럼 그 후손도 권씨의 외손에서 본손으로 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예천권씨가 이처럼 엄연히 있으니 모든 권씨가 단일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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