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보증과
바람의 이력으로
시고 떫었던 시절을 견딘
꽃들의 나머지는 둥글게 환산되었다
공이 쏟아진다
바닥나는 살굿빛 통장
벌건 대낮의 털이
오후 가득
살구나무
눈물이 새큼하다
부러진 잔가지와 흩어진 잎 잎
생채기 가득한
마이너스에서 시작하면
하루, 하루가
플러스라며
나무는 허리띠를 졸라맨다
이팝나무, 그곳에서
초록 잎 사이로
하얀 꽃 무진장 피워 올리자
한 무리의 아이들 그 아래 서서
헐벗은 마음
글썽이던 눈가를 훔쳐도 닿을 수 없는
수북한 고봉밥 그린다
뜸 들이는 것이 헛것이어도 좋았다
가을 열매 익어
겨울까지 가면서도 놓지 않으려 했던
뜨뜻한 가지의 온기
식지 않은 꿈속에서
어머니의 발걸음이 나를 부르고 있다
질경이
중산간에서 길 잃어 헤매다
너를 발견하고 무턱대고 따라가니
섬 속의 조그만 마을
여러 채의 지붕이 보이고
줄기가 없어도
뿌리만으로 잎을 드러내
자잘한 꽃을 피울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열매를 생각한다
수없이 밟혀도 죽을 수 없었던
끈질긴 생애
한번즘 무심히 밟았을 내 신발
온몸이 부끄러워
붉은 노을을 마주할 수가 없다
뜨거운 철근
새벽밥을 먹고 나온 사람들이
나를 만지고 있다
무엇엔가 짓눌려 잘려나가고
어느 부분에선 맞물리다가 붙여지고
그러는 사이 달아오르면
몸속에도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이 느낌
간혹, 나는
슬픈 동물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보말寶襪 ㅡ 버선코, 천상으로
신神이 바람을 몰고 왔다
어깨가 흐느적거리는 저고리
사부작사부작 치맛자락이 문지방을 넘어오는데
둥둥 북소리 이승을 깨우고
보일락 말락 한 버선코
뒤축이 물결을 밀고 나오자
부드럽게 앞꿈치를 세워 중심을 잡는다
흐느끼는 맨발의 저 곡선
송두리째 온몸을 흔들어대는 징소리는
알 수 없는 생사를 불러들이고
그녀는 조용히 숨죽여 날갯짓을 펼친다
동쪽 바다로 작은 배 떠나갈 때
오래 인연을 맺어온 넋들이 떠오르는데
사랑의 그림자가 나지막이 노랠 읇조리며
가엾게 손짓을 해대고 있다
연잎 위에 서 있는 듯
작고 고운 버선코, 얼마나 외롭게 버텼을까
족적을 감출 수가 없다
한순간 함께 보냈던 눈물의 시절,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처럼 아끼고 싶다
양대영
제주 출생
2020년 <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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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나무를 털다
83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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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3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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