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5장 두 사나이 (4)
단 한 번의 싸움에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참패당한 제민왕(齊湣王)은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다.
연(燕)나라가 연합의 주도국이었다는 것이 더욱 그를 분노케 했다.
- 보복하리라!
그는 임치성으로 퇴각하자마자 신하들을 불러 명했다.
"속히 초(楚)나라로 가 구원군을 청해 오라. 대가로 회수(澮水) 이북 땅을 내주겠다고 하라."
다행히 연합군은 더 이상 진격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초나라 군대가 당도하는 대로 북진하여 연(燕)나라를 초토화시키리라 결심했다.
그럴 때 또 다른 급보가 날아들었다.
"연나라 장수 악의(樂毅)가 우리 나라 영토를 유린하고 있습니다."
제민왕(齊湣王)은 눈꼬리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연나라가 감히.........!"
그러나 이번에는 그다지 놀라지도, 서둘지도 않았다.
'연(燕)나라쯤이야,'
제민왕은 아직까지 이런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화(禍)를 불러일으켰다.
제민왕(齊湣王)이 임치성에 들어앉아 연나라 군대를 깔보고 있을 즈음, 악의(樂毅)는 제나라 영토 깊숙이 침입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임치성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燕)나라의 진군 속도는 의외로 빨랐다.
각 성을 지키고 있던 제나라 장수들은 태풍처럼 몰아쳐오는 연나라 군대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다투듯 항복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 연군(燕軍)은 임치성 30리 밖에까지 이르렀다.
제민왕(齊湣王)은 비로소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이유(夷維) 등 측근 심복만을 거느린 채 성문을 빠져나가 위(衛)나라를 향해 달아났다.
이때 위(衛)나라는 제나라 속국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호(公號)도 쓰지 못하고 겨우 군호(君號)를 썼다.
이 무렵 위나라 군주는 위회군이었다.
위회군(衛懷君)은 쫓겨온 제민왕을 맞아 신하의 예로써 영접했다.
궁까지 내주어 제민왕을 머물게 했다.
그런데 제민왕의 태도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패하여 쫓겨온 처지임에도 위회군(衛懷君)과 그 신하들에게 여간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순행(巡行) 나온 천자처럼 행세하며 매일 조례(朝禮)를 강요했다.
이에 분노한 위회군과 신하들은 한밤중에 제나라 치중(輜重)을 훔쳐다 모두 감춰버렸다.
이튿날 아침, 제민왕(齊湣王)은 조반상을 기다렸다.
그런데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아침밥상을 내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복 신하들이 와서 아뢰었다.
"어찌된 일인지 요리 재료가 모두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위(衛)나라 신하들이 훔쳐간 모양입니다."
제민왕(齊湣王)은 분노하여 소리쳤다.
"위회군을 당장 들라 해라."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위회군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저녁 무렵이 되었다.
그때까지도 제민왕(齊湣王)은 밥을 먹지 못했다.
배가 몹시 고팠다.
그제야 겁이 더럭 났다.
'이것들이 나를 잡아다 연(燕)나라에 바칠 작정인가?'
그 날 밤, 제민왕(齊湣王)은 어둠을 틈타 위나라 궁에서 달아났다.
그들 일행은 노(魯)나라를 바라보고 달렸다.
그런데 노나라 임금이 이미 각 관문에 통지를 내린 뒤였다.
- 공연히 연(燕)나라의 미움을 살 필요 없다. 관문을 굳게 달아걸고 결코 제나라 왕을 들여보내지 말라.
제민왕(齊湣王)은 노나라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번에는 추(鄒)나라로 갔다,
마침 추나라는 임금이 죽어 국상 중이었다.
제민왕의 측근 신하인 이유(夷維)가 먼저 추나라 궁으로 들어가 말했다.
"천자께서 특별히 조문(弔問)을 하려 하오. 추나라 세자는 마땅히 천자를 알현하는 예(禮)에 따라 계단 아래로 내려가 북쪽을 향해 곡(哭)을 하시오. 그러면 천자께서 계단 위에 올라 남쪽을 굽어보고 조상하실 것이오."
추나라 신하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리 추(鄒)나라는 조그만 나라요. 너무 황송해서 천자의 조문(弔問)을 받을 수 없소. 그러니 다른 나라로 가시오."
추나라에서도 거절당한 제민왕(齊湣王)은 갈 곳이 막막했다.
"이 넓은 천지에 이 한 몸 갈 곳이 없단 말인가!"
이유(夷維)가 안을 내었다.
"거현(莒縣)은 남쪽에 치우쳐 있어 연나라의 침공을 받을 염려가 없습니다. 또한 초(楚)나라와 가까우니 그리로 가시어 후일을 도모하심이 좋을 듯싶습니다."
거현은 춘추시대에는 거(莒)나라였으나 전국시대 초기에 멸망하여 제나라 영토로 편입되어 거현(莒縣)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결국 제민왕(齊湣王)은 거현으로 내려가 연나라에 대항할 군사를 모으기 시작했다.
- 임치성 포위.
그러나 그 포위는 나흘도 채 가지 않았다.
제민왕(齊湣王)이 도망가고 없는 마당에 임치성 군사들이 기를 쓰고 농성할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齊)나라 군사와 백성들은 성문을 열고 나와 각자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대부분의 임치성 사람들은 동쪽 안평(安平)으로 피난을 갔다.
안평은 지금의 산동성 치박시 동북편 일대다.
악의(樂毅)는 텅 비다시피한 임치성 안으로 들어갔다.
무혈입성(無血入城)이었다.
왕궁에는 많은 보물과 재화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악의는 그것들을 모두 수레에 실어 연나라 도읍인 계성(薊城)으로 보냈다.
- 임치성을 점령했습니다.
악의(樂毅)의 승전 보고에 이어 수십 대의 수레에 실려온 제(齊)나라 재화를 본 연소왕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내 친히 악의(樂毅) 장군의 공을 치하하리라."
그러고는 제수(濟水)가로 나가 악의를 불러냈다.
소와 돼지를 잡아 삼군(三軍)을 배불리 먹이는 한편, 악의에게 군호(君號)를 내렸다.
- 악의를 창국군(昌國君)에 봉하노라.
창국은 제나라 읍으로 산동성 임박시 서남쪽에 위치해 있다.
그 땅을 악의에게 내리고, 그 곳 영주로 봉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악의(樂毅)를 창국군이라 불렀다.
연소왕(燕昭王)은 다시 악의에게 명했다.
"과인은 제나라를 아예 평정하고자 하오. 아직 항복하지 않는 제(齊)나라 성읍을 마저 공격하시오."
악의(樂毅)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군례를 올리고 난 후 즉시 군대를 남쪽으로 돌렸다.
제(齊)나라에 대한 2차 침공이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
|
첫댓글 연재 감사합니다.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