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설날에 복수초는 피고
복수초는 어른들께 세배 드리러 갈 때, 선물로 가지고 가는 꽃이다. 복수초는 눈 속에 피는 연꽃이라 해서 설연(雪蓮), 또는 얼음새꽃이라고도 한다. 한산도 망산을 올라가는 길에서 눈을 뚫고 나온 한 송이의 복수초를 만났다. 땅에 납작하게 붙어, 키를 낮추어 핀 꽃. 눈 속에 핀 노란 꽃 한 송이가 환한 등불처럼 등산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꽃이 황금색 잔처럼 생겼다고 해서 측금잔화(側金盞花)라고도 불린다. 매화가 반갑듯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남 먼저 피어나는 꽃이 가상하다. 복과 장수를 누리라고 얼음을 뚫고 나와, 혹은 산기슭의 낙엽들을 뚫고 나와 으스스 떨며 입을 여는 꽃이 봄병아리들의 나들이처럼 반갑다.
설날은 차례도 중요하지만 어른들께 세배를 드리는 날이다. 좀 거추장스럽지만 입어보면 오히려 편안하고 넉넉한 한복으로 갈아입고, 먼저 집 어른들께 세배 드리고 차례를 지내고 난 뒤, 온 마을을 돌며 마을 어른들께 세배 드리며 덕담을 듣다 보면 벌써 해는 뉘엿뉘엿 진다. 이 세배길이 요즘은 백화점 선물권이나 커다란 선물 뭉치 택배물로 둔갑해서 전국을 상대로 방문하고 다니는데, 왠지 주고받는 인정의 덕담이 빠져 석연찮다.
다행히 내게는 설날에 다녀올 시댁이 시골이어서, 또 손아래 질부들이 넷이나 있어서, 명절 스트레스보다 일종의 일탈 기분을 가지고 시댁을 간다. 시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네 동서가 만나는 자리고, 커 가는 손자손녀들로 부산스런 자리고, 조카가 사는 산 밑 집에는 축사도 있어, 여러 마리의 소와 송아지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본가에 들르면 아직도 시아버님이 계시던 사랑방은 가마솥이 걸려있고, 한지로 도배한 옛 그대로의 흙벽을 유지하고 있는 구들방이라 피곤한 등을 붙이고 쉬어가기엔 그만이다.
“나무, 불, 돌, 흙을 돌아 지금 내 등에서 타고 있는 열기는 나를 데워 오래 겨울에 살고 있는 내게, 눈물나게시리 봄아지랭이로 너울너울 춤추며 아주 하늘로 올려다 줄 수는 없는지? 아궁이에 활활 타는 장작불이 고래로 고래로 돌면서 불길은 냉돌을 어루만지고 어루만져서 끝내는 내 몸을 자글자글 끓게 하고 온갖 병을 다 태웠다. 창호지문밖에는 새소리가 고와서 방바닥에 누워서도 온갖 꽃 피어나는 봄의 천지를 보았다.”(졸시 인용)
설날은 또 뭐니 뭐니 해도 천 리라도 멀다 않고 달려온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떡국을 끓여먹는 날이다. 아파트에 혼자 앉아 점심 식사를 굶기가 일쑤였던 막내 며느리도, 대처에 나가 공부한다고 몸이 축난 조카도 언 땅에 묻은, 벌건 김장김치를 째며 머리 맞대고 밥이든 떡국이든 가리지 않고 그릇을 비우는 날이다. 여럿이 덩달아 먹다 보면 벌써 바닥이 나버리는 국그릇과 밥그릇. 이런 자리에서 살찐다고 엉덩이를 뒤로 빼는 질녀나 질부가 있다면 정말 밉다. 부지런하며 웃는 얼굴의 건강한 여자를 우리 조상들은 미인으로 쳤다.
명절, 하면 언뜻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 고향이라지만 막상 고향집이 없어지고 나면 정작 고향의 알맹이 자리는 텅 비어 추상적 색채로 남게 된다. 어느 날 내 고향집의 그 많은 꽃들과 나무들과 추억들은 포클레인의 사나운 이빨에 무참히 내려앉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나도 많은 사람들과 똑같이 실향민의 심정이 되었다. 그래, 6년 전에는 여행지 인도에서 새해를 맞았다. 아침 일찍 호텔 로비에 꽃을 싼 보자기를 든 여인이 찾아왔다. 보자기 속에는 꽃맹아리를 따 구슬처럼 꿴 꽃목걸이, 즉 꽃으로 된 묵주와 염주가 가득했다. 주인은 꽃을 사 벽에 걸린 부(富)의 신, 가네쉬신 앞에 걸었다. 식당 문과 버스 안, 골목의 신전마다 꽃으로 울긋불긋했다. 갠지스강 위를 흘러가는 붉은 꽃들, 정말로 인도는 꽃으로 기도하며 살아가는 나라였다.
이제 현대인은 고향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래서 내가 걷고 싶은 제주도 올레길이 고향이 될 수도 있고, 경주의 아득한 무의 공간이 고향이 될 수도 있고, 한 호젓한 산 속 깊은 데의 암자가 고향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 암자와 찾아가는 흙길은 제발 변하지 않은 옛 그대로의 모습이었으면, 두고두고 찾아가겠다. 고향은 어머니처럼 변하지 않는 마음과 옛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설날 풍습도, 우리의 시골 마을도 옛 그대로 오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