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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챙기기 백성호의 예수뎐2
내 십자가는 필요 없단 그들…예수의 일침 “제자 아니다”
카드 발행 일시2023.08.05
에디터
백성호
백성호의 예수뎐2
관심
(45) 예수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
사람들은 말한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해진다.”
거기에는 대전제가 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내가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처럼 못 박히는 ‘나의 십자가 죽음’을 내가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그래야 예수와 내가 하나가 되고, 나와 예수가 하나가 된다.
예수는 몸소 보여주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짊어지고, 어떻게 하늘에 맡기고, 어떻게 되살아나는지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예수의 십자가는 필요하지만, 나의 십자가는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십자가만으로 족하다고 믿는다. 백성호 기자
우리에게는 이 과정이 종종 생략된다. 예수만 죽고 나는 산다. 예수가 죽었으니 나는 굳이 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에게만 십자가가 필요하고, 내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문제가 이미 해결됐다고 말한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이들은 나의 제자가 아니다.”
십자가 위에서 여섯 시간을 버티던 예수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과 땅이 흔들렸다. 성경에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로마 병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의 죽음을 확인했다. 예수 양옆에 매달린 죄수들의 다리를 부러뜨렸다. 예수가 이미 숨진 것을 확인한 병사는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 대신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에 있는 성묘 교회 안. 순례객들이 엎드려 기도하는 돌판이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뉘었다는 돌이다. 백성호 기자
예루살렘 성묘 교회의 바닥에는 붉은 돌판이 하나 놓여 있었다. 순례객들이 무릎을 꿇고 그 돌에 손을 얹은 채 기도를 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눕혔던 돌이다. 2000년 전 바로 이 돌 위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예수의 주검이 놓였다고 한다.
나는 순례객들 틈에 끼어서 무릎을 꿇었다. 그 돌에 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숨이 끓어진 예수의 육신도 이처럼 차가웠을까. 그렇게 차가워진 예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마리아는 또 한 번 눈물을 흘렸을까.
예수 당시 유대인의 장례 풍습에는 일종의 ‘상여’가 있었다. 시신을 들것 위에 노출된 채로 놓거나 관에 넣어 뚜껑을 연 채로 운반했다. 여인들이 상여 행렬의 맨 앞에 섰다. 유대인들은 선악과를 먹은 하와(이브)가 이 세상에 죽음을 처음으로 끌어들였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례 행렬의 선두에도 여자들이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상여 메는 일을 큰 덕을 쌓는 것이라 여겼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상여를 멜 수 있도록 자주 교체했다. 하지만 예수의 죽음에는 그런 상여도 없었다. 신을 모독한 죄수의 죽음이기에 더욱 그랬다.
예수의 제자 중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있었다. 그는 부유했다. 그가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달라고 청한 뒤 허락을 받았다. 제자들은 시신을 아마포로 감싼 뒤 바위 동굴 무덤으로 옮겼다. 무덤 입구를 큰 바위로 막았다.
성묘 교회 안에 그려져 있는 성화. 십자가에서 내린 예수의 주검을 동굴 무덤으로 옮기고 있다. 백성호 기자
성전 경비병들이 그 앞을 지켰다. 생전에 “내가 죽은 후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겠다”고 장담했던 예수의 말 때문이었다. 유대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내고서 되살아났다고 기만할 수 있다”면서 무덤을 지키게 했다.
나는 그 무덤을 찾아갔다. 성묘 교회 안에 그 무덤이 있었다. 무덤 앞에는 순례객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무덤 안은 대체 어떤 곳일까.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 어마어마한 사건이 발생한 물리적 공간. 그 안은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예수 부활에 담긴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앞에 늘어선 줄이 줄어들 때마다 내 가슴도 덩달아 두근거렸다.
짧은 생각
예수는
왜 우리에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했을까요.
예수의
십자가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굳이 우리까지
십자가를 짊어질
필요는 없을 텐데
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에게
예수의 십자가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의 십자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셨으니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르라.
그렇지 않은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어찌 보면
참 냉정합니다.
나의 제자가 아니다는
단호한 선언 말입니다.
예수는 왜
이처럼
차갑고 냉혹하게
말했을까요.
저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아버지 나라에 갈 수 있음을
예수는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가
자신의 십자가를
몸소 통과했듯이,
우리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직접 통과해야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음을
너무나 명확하게
알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니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
나를 따르는 자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고
말했겠지요.
저는
그 단호한 선언에서
오히려
예수의 연민을 읽습니다.
저마다
자기 십자가를
통과해서
나에게 오라는
예수의 깊은 사랑을
읽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읽고 있을까요.
고통,
희생,
아픔,
손해,
굳이 내게는 필요 없음.
이런 식으로
읽고 있진 않나요.
그런데
예수는 다르게
읽고 있습니다.
내려놓음,
무너뜨림,
받아들임,
죽음을 통한 부활,
하나 됨,
내게 가장 절실한 것.
이런 식으로
읽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가 건네는
자기 십자가의 의미를
오독(誤讀)하고 있진
않을까요.
거기에 담긴
본질적 맥락과 의미를
못 본 채
엉뚱하게 해석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나의 십자가를
자꾸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예수의 십자가는
좋지만.
나의 십자가는
싫다면서 말입니다.
에디터
백성호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82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