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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벨 - 볼레로(Ravel - Bolero)
헤르만 쉐르헨 / 빈국립오페라극장관현악단
Hermann Scherchen / Vienna State Opra Orchestra / WESTMINSTER WST14302 / 1958년 recording
헤르만 쉐르헨(Hermann Scherchen)의 음악세계
헤르만 쉬르헨(Hermann Scherchen)은 1891년 6월 21일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4살때부터 바이올린 연주하며 독학으로 음악공부을 하고, 비올라를 연주하였다. 1907년부터 Berlin Bluthner Orchestra에서 3년간 비올리스트로 활동하고,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 리하르트 스튜라우스(Richard Strauss) 펠릭스 모틀, 오스카 프라이드등 20세기 초 독일 지휘계의 거장들이 지휘하였던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비올리스트로 활동한다.
1912년 8월 11일 55세로 아버지가 사망한 이후 아놀드 쉔베르크를 만나게 되어 뮌헨에서 11월 5일 쉔베르크의“달에 홀린 피에로(Pierrot Lunaire)을 지휘하여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된다. 일년 후 그는 개인적으로 쉔베르크의 ‘챔버 심포니’를 초연하게 된다.
1914년 Bluthner Orchestra와 함게 말러의 교향곡 5번, 쉔베르크의 챔버 심포니, 브루크너 교향곡 9번)을 지휘하고,1914년 리가 심포니 오케스트라(Riga Symphony Orchestra)의 지휘자로 활동하다가 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러시아 억류당하게 된다.
인민교도소에 있는 동안 그는 현악 4중주곡과 가곡과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한다. 1918년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와 베를린 필하모닉과 2번의 음악회를 개최하고, 이듬해에 ‘신음악협회’를 설립하고, 현대 음악 잡지인 '멜로스(Melos)'를 창간을 주관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이름 딴 ‘세르헨 현악 4중주단(Scherchen String Quartet)’을 결성하여 자신이 작곡한 곡을 초연하게 된다.
1919년 베를린 여성 합창단을 지휘하고 2년 뒤에 라이프찌히에서 말러의 교향곡 3번과 5번 지휘, 그리고 작곡가 Wulf의 손녀인 어거스트 마리아 얀센(Auguste Maria Jansen)과 결혼하게 된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베를린 필하모닉과 함께 쉐르헨은 Krenek의 교향곡 1번 초연을 비롯하여 20회의 연주회를 갖고 1923년 이태리 로마 산타체칠리아 아카데미와 함께 음악회를 개최한다. 또한 그 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스트라빈스키의 “병사의 이야기”를 지휘한다.
1920년 쉐르헨은 베를린 음악 대학의 조수로 일하게 되고, 이듬해에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콘서트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인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의 후임으로 라이프찌히치 콘서트 협회 오케스트라을 이어 받게 된다. 1923년부터 1947년까지 쉐르헨은 정규적으로 Wintherthur Orchestra를 지휘하게 되고, 말러의 ‘대지의 노래’지휘한다. 또한 Winterthur Collegium Musicum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하게 된다. 1923년 국제 현대음악 협회의 창립위원으로 활동하며 지휘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게 된다. 1928년 그는 코니스버그으로 옮겨가서 이스턴 방송국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3년간 활동하다가 1933년부터 상임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쉐르헨은 1929년 라이프찌히 게트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 바덴바덴 방송국 교향악단을 지휘하고, 그 이듬해 코니스버그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그해 런던을 방문하여 베토벤의 ‘장엄미사’를 지휘한다. 1933년 그는 독일 떠나 여러 나라에서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1936년 그는 브뤼셀에서 현대음악의 보급을 위해서 “Ars Viva(Musica Viva)라는 음악잡지를 발간하게 되고, 비엔나, 스위스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된다. 특히 쉐르헨은 1939년 유태인 바이올리스트 브로니슬로브 후베르만이 창설한 팔레스타인 오케스트라(후에 ‘이스라엘 필하모닉으로 개칭)의 초대로 17회의 콘서트를 개최한다. 1942년 스위스 HMV레이블에서 녹음을 시작한다.
1944년부터 1950년까지 쉬르헨은 취리히 방송국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임명되어 자신이 활동하는 동안 오케스트라의 명칭을 Beromunster Radio Orchestra으로 개칭한다. 2차 세계대전이후 그는 다름슈타트와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지휘 마스터클래스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50년 그는 취리히에 Ars Viva 출판사를 설립하고 클래식 음악과 현대 음악 작곡자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출판하게 된다. 1950년 비엔나에 있는 미국 WESTMINSTER 레이블에서 처음으로 바하의 B단조 미사 녹음하여고, Vienna States Opera Orchestra와 함께 매월 이 레이블에서 바로크 시대에서 현대음악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녹음을 남기게 된다. 헤르만 쉐르헨의 음반들이 미국에 소개되자 미국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그를 초대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또한 쉔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유럽에서 초연하게 된다.
그는 전자음악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서 1954년 UNESCO의 지원을 받아 스위스 크라베사노에 있는 자신의 집에 전자음악 스튜디오를 만들게 된다. 1959년부터 1960년까지 그는 북서독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의 종신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쉐르헨은 20세기 음악세계에서 중요한 거장들중에 한명이었다. 그는 오랜 독일 음악의 전통들을 부정하지 않고 새로운 인재들을 발굴하였고, 많은 현대음악가들의 작품들을 초연한 지휘자로서 아놀드 쉔베르크의 챔버 심포니 1번(1911), 알반 베르그의 오페라 ‘보체크의 3개의 단편들(1924) 그리고 바이올린 협주곡(1936), Alois Haba Matka(1930), 하르트만의 ’Miserae'(1934)과 교향곡 서곡들(1947), 베베른 변주곡 30번(1943),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13 목관 앙상블 교향곡, 한스 베르너 한체의 ‘Konig Hirsch'(1956)등 다양한 현대음악들을 소개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음악학자로서 '지휘법 핸드북', '음악의 본질에 대하여'와 같은 저술도 후세에 남겨놓았으며, 수차례에 걸친 미국이 초청에 응하지 않는 소신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50년대 초반부터 미국의 WESTMINSTER 레이블은 직접 독일 비엔나로 찾아가 헤르만 쉐르헨과 Vienna States Opera Orchestra와 함께 거의 매월 바로크 시대 음악에서부터 현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녹음작업을 하였다.
1953년부터 쉐르헨은 이태리 Rapallo에 정착하여 살며 남미와 유럽, 인도등지의 여러 오케스트라들을 객원지휘하며, 지휘자를 위한 마스터클래스와 음악학자로서도 몇 종의 서적을 집필하게 된다. 헤르만 쉐르헨은 1966년 6월 12일 이태리 플로랜스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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