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히 흐르는 안동호를 따하 잠시 달리니 도산 서원이 들어온다
수백년 묵음직한 느티나무가 시립해 머리 조아리며 손을 맞는다
조선 정신문화의 원류인 성리학의 본향에 마침내 도달한 것이다.
장마철 탓인지 안동호는 탁하고 댐건설로 자연스런 옛 맛은 나지 않지만 멀리
시산제가 보이고 주변 야산과 들판이 어우러져 풍광이 수려하다.
이 곳에서 소나무를 시제를 걸고 지방시를 영남유생들에게 지방시를 치룬 곳이라한다
참으로 운치와 풍류가 넘쳐난다.
언동이란 동쪽을 안정시킨다는 의미가 있는 어원이다.
퇴계를 정점으로 기라성 같은 영남 유림의 본산이고 보면 조정에서도 영향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 통일이래 연면히 이어오는 지배세력으로서 헤게모니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선조가 한호를 시켜 하사한 도산서원 현판이 힘차고 오롯하다.
진도문을 넘어 전교당 박약제 완락당 등 건물을 두루 둘러본다.
검벅한 퇴계의 성품을 웅변하 듯 소박하고 단아하다. 고인의 체취가 서린 서당인 박약제와 홍의제 앞에서 잠시 고인의 정신세계를 그려본다.
치열한 구도 정신과 우국안민의 방책으로 후진 양성에 심혈인 기울인 곳임이다.
주리적 상향이 강한 탓에 공리공론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지만 훗날 다산이나 성호등의 실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고, 주변국과의 외교 방책 또한 세웠다하니 후인으로서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한 개인의 영고성쇠 또한 정신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고 보면 나라의 명운 또한 예외는 아닐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지나치게 밖으로만 휘달린 탓에 세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고유의 자산을 너무도 많이 잃어버렸다. 온고이지신과 구방심을 통해 호연지기의 기상을 길러야 할 것이다.
뜨락을 소요하노라면 유독 매화가 자주 띈다.
산비하면 차거운 이성과 추상같은 정신세계만을 상징하는 데 결코 그러하지 않다
도학과 시서를 통해 섭렵하고 두루 풍류를 즐길 줄 안다.
퇴계가 매화를 좋아한 것은 두향과의 애틋한 사연이 있음은 아는 이가 드물다
풍기 군수 시절 두향에게 받은 매화분을 임종시까지 곁에 두고 있었다.
마지막 유언이 저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한 사연이 범상치 않음이다.
그 뜻을 기려 서원 곳곳에 심어둔 것임이다.
사념에 젖어 조선 최고의 선비로 추앙받는 퇴계를 회고하며 숭덕사에서 분향하고 큰 절을 올리며 이육사 문학관으로 발길을 돌린다. 때는 8월 14일 끝여름의 더위가 달아오르는 오시 무렵이다. 이 차제에 도산 서원과 퇴계의 발자취를 홈패이지 등을 통해 주마간산격으로 발췌해 본다.
도산서원은
본문 내용퇴계선생의 가르침이 남아있는 곳,
한국정신문화의 성지 '도산서원'
문화재 : 서원
분류 : 사적 제 170호 (1969. 5. 28)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북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 680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동편 도산서당건물을 ‘박약재(博約齋)’와 서편 건물을 ‘홍의재(弘毅齋)’라 하는데 안마당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중앙의 전교당은 강학공간과 원장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재 뒤편으로는 책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자리하고 있다.
배향공간인 사당 건축물로는 위패를 모셔놓은 상덕사(尙德祠)와 각종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典祀廳)이 있는데 삼문을 경계로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내고 있다. 부속건물로는 서원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상고직사(上庫直舍)가 있으며 이는 홍의재 뒤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 입구 왼쪽에는 1970년 설립된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이 있는데, 퇴계선생이 직접 사용했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69년 본 서원을 중심으로 임야 및 전답 19필 324.945㎡이 사적 170호로 지정되었고, 1970년부터 대통령령으로 보수.증축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정신적 고향으로 성역화 되었다.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가 설치되고 관리운영조례를 제정 공포한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산서원 (陶山書院)
매설쟁춘(梅雪爭春)
3월은 봄이 오는 달이다. 눈은 봄이 오는 길목을 가로막고 시샘한다. 2004년 3월4일과 5일 이틀간 전국에 걸쳐 폭설이 내렸다. 서울지역이 35cm, 문경에는 50cm, 안동지방에도 30cm 내렸다.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3월에 내린 강설량으로는 신기록이라 한다. 얼어붙은 고속도로에 갇혀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고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농가 비닐하우스가 내려 앉은가 하면 오래된 나뭇가지가 불거져 넘어졌다.
춘향(春享)을 올리기 위하여 3월7일(일요일) 도산서원을 갔다. 3월9일은 음력으로 갑신년 2월19일 정해(丁亥)로 새벽2시경 향사(享祀)를 올리는 날이다. 안동시 서북쪽 제비원 미륵불<photo>은 쌓인 눈을 등에 업고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눈덮인 안동댐과 시사단은 <photo> 적막 속에 흰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도산서원 매화원을 뒤덮은 눈이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었다. <photo> 그러나 이미 매화나무 꽃 몇 송이 꽃피기 시작하여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photo>. 매설쟁춘(梅雪爭春). 봄을 앞에 놓고 매화와 눈이 다투는 광경이었다. 매화는 봄을 불러오기 위해 가속 페달을 서서히 밟기 시작한다. 눈은 겨울을 붙잡으려는 제동 페달을 밟으며 봄을 먼저 맞이하려고 시샘한다. 추위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매화의 정신에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이 어쩔줄 모르고 녹아내렸다 <photo>. 눈은 희고 차갑다. 매화나무 꽃은 눈보다 더 차갑고 희다. 퇴계선생은 그 누구보다도 매화를 사랑하셨다.
<Photo> 도산서원 매화원(陶山書院 梅花園). Maehwa(plum blossom, meihua, ume) garden of Tosanseowon.
우리나라에서 매화를 거론하자면 도산서원을 빼놓을 수 없다. 도산서원을 걸으며 매화를 감상하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은은한 향기를 뿜어내며 정결단아하게 피어난 물질세계로서의 매화 뿐 아니라 정신세계로서의 매화가 생활 속에 강한 이미지로 스며든 역사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孤高) 지결(志潔)의 매화 정신은 우리들에게 질과 격이 훨씬 높은 자양분을 불어 넣어 준다.
2003년 4월10일 안동지방의 기온은 최저 섭씨 6도 최고 16도로 중부지방보다 낮았다. 서울의 나의 연구실 뒤뜰에 심어 놓았던 매화는 3월 하순 이미 피었다. 도산서원은 서울보다 남쪽인데도 매화가 뒤늦게 활짝 피었다. 품종이 만생종이서인지 아니면 안동댐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눈속의 매화를 얘기하기엔 이미 철이 지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늦도록 매화 향기에 젖을 수 있음도 또한 행복이 아니랴!
도산서원 주변 공기는 매우 맑고 상쾌하였다. 사실 최고의 향기는 공기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지는 얼마되지 않는다. 공기 없는 곳에서 우리의 숨은 금방 넘어 갈 것이다. 도산에 둘러 쌓여 위치한 서원과 매화원의 분위기는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청풍 명월은 본래 값을 매길 수 없고 가까이 흐르는 물과 먼 산이 모두 뜻이 있다[청풍명월본무가 근수원산개유정(淸風明月 本無價, 近水遠山皆有情)]"는 글귀가 생각 났다. 중국 쑤조우(소주:蘇州, suzhou)의 창랑정(滄浪亭, 창랑팅, Cang lang ting) 기둥에 쓰인 글귀다. 매화향기가 아침 햇살 속에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향기는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후각은 매화향기를 금방 인지하였다. 매화향기는 차갑지만 봄의 희망이 서려 있다. 매화향기는 나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고 정신을 조용하고도 맑게 해 주었다. 살아오면서 쌓인 먼지들을 닦아주는 듯 하였다.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매화향기의 부드러운 힘으로 느껴졌다.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보았다.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보고 또 보면서 매화향기에 젖고 또 젖었다. 매화를 바라보며 도산서원의 매화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중국에서는 답설심매(踏雪尋梅)의 고사로 유명한 맹호연(孟浩然 Menghoyin: Ming Hui, 689─740)과 매처학자(梅妻鶴子)로 지칭되는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967~1028)이 매화의 인물로 천하에 알려져 있다. 이 두 사람 이상으로 매화를 소중히 아끼고 사랑한 우리나라 인물이 바로 퇴계(退溪, 1501~1570)선생이다.
퇴계선생이 매화를 얼마나 애지중지 하였는가는 임종에 관하여 이간재(李艮齋, 휘는 덕홍, 德弘 )공이 기록한 《언행록(言行錄)》의 「고종기(考終記)」에 잘 나타나 있다.
"경오년 ...<중략>... 12월3일에 이질로 설사를 하셨다. 마침 매화의 화분이 곁에 있었는데 선생은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 놓으라고 말하시고는, "매형에 대하여 조촐하지 못하면 내 마음이 미안해서 그렇다[어매형불결 심자미안이(於梅兄不潔 心自未安耳)]"고 하셨다. ...<중략> ... 8일에는 아침에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하셨다. 이날은 개었는데 유시로 들어가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고,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조금 있다가 선생이 자리를 똑바로 하라고 명하므로 부축하여 일으키자, 앉아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개었다."
<Photo> 도산서원 매화. Beautiful maehwa of Tosanseowon.
퇴계선생은 산과 강, 그리고 매화나무, 소나무, 대나무, 국화, 연꽃을 직접 가꾸며 벗하였다. 자연을 직접 체험하면서 인성과 기상을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가꾸는 수행의 길을 스스로 걸었다. 퇴계는 나무들이 어려움을 참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싹이 자라 성장하는 과정을 통하여 인간이 살아가고 자연이 움직이는 원리를 발견하였다. 산수(山水)를 즐기며 심기를 단련하면서 인성을 함양하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수양의 도를 깨우쳐 주었다.
퇴계는 만년에 도산서당 앞마당에 정우당(淨友塘)<photo>이라는 조그만 연못에 연(蓮)을 심었다. 서당밖 동편에 절우사(節友社)를 만들어 소나무와 대나무, 국화를 심어 매화와 더불어 절우(節友), 즉 절개 있는 벗으로 삼았다. 퇴계는 매화를 절군(節君)이라고 불렀다. 시 속에서도 매화를 지칭할 때는 매군(梅君) 또는 매형(梅兄)이라 하여 인격체로 예우하였다.
동양에서는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매화를 세한삼우(歲寒三友, three friends of cold season)라 하여 그 지조와 절개를 본받고자 하였다. 남송시대의 조맹견(趙孟堅 Zhaomengjian, 1199-1264 혹은1295)이 그린 「세한삼우도(歲寒三友圖)」가 타이완의 국립 고궁박물관(台彎國立故宮博物院)에 보관되어 있다. 명(明)나라 영종(英宗, 1427-1464) 순천년간(天順年間) 태액지(太液池) 서남쪽 오룡정(五龍亭) 뒤에 초가 정자를 지어 내부에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송죽매 (松竹梅) 그림을 걸어놓고 세한문(歲寒門)이라 이름하였다. 그 당시 어느 세모에 세 사람이 모여 그림을 그리며 새해를 축하하면서 서로 벗이 될 것을 결의하였다. 십팔공(十八公)은 소나무를 그리고, 공심군자(空心君子)는 대나무를 그리고, 백선춘(白先春)은 매화를 그려 「세한삼우도」라는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자료는 진추계(陳秋桂)의 「세한화삼우(歲寒話三友)」라는 글을 실은 웹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 세한삼우에 관한 유래는 아직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참고: http://www1.twcat.edu.tw/webmaster/ w1magzine/word/18-02.htm )
http://www.npm.gov.tw/dm/album/selection/01/k2a001290n000000006ff.htm http://www.epochtimes.com/b5/3/11/27/n419409.htm )
또한 매난죽국(梅蘭竹菊)을 가리켜 사군자(四君子)라 하여 그 고결, 전아(典雅), 냉초(冷峭), 견정(堅貞)의 품격을 찬상하였다. 송나라 소동파(蘇東坡, 1036~1101)는 "사람이 수척해지면 살찌게 할 수는 있어도 선비가 천속해지면 고칠 수 없다[인수당가비 사속불가의(人瘦當可肥,士俗不可醫)]"고 하였다. 소동파의 자는 자첨(子瞻)이고 이름은 식(軾)이다. 소동파는 "매화는 추워도 빼어나고 대나무는 마르지만 오래산다 [매한이수 죽수이수 (梅寒而秀 竹瘦而壽)]라고하여 매화, 대나무, 돌을 세가지 유익한 벗(삼익지우(三益之友)]로 삼았다. 그러므로 생활 주변에 사군자를 늘 가까이 하였다. 동양인들은 문살조차도 사군자를 조각하여 경각심을 높였다. 사진은 중국 소주의 우원(耦園, ouyuan) 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photo> 2003년 4월1일).
많은 나무 중에 소나무는 장중(莊重)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진한 송진향-테르펜을 피울 뿐 사시사철 늘 푸른 솔잎의 기상은 숭고창창하다. 기암 절벽에 발 붙이고도 쭉쭉 뻗은 소나무의 기상에서 신비가 느껴진다. 하늘로 뻗어 있는 준엄함과 흔들림이 없는 지조! 나이든 노송일수록 장대한 품위는 더욱 고상하게 느껴진다. 노송의 나무 껍질은 험난한 역사의 풍상을 느끼게 한다. 온 세상 바뀌고 또 바뀌어도 소나무는 조용히 성장을 거듭할 뿐이다. 튼튼한 기둥과 대들보 재목으로 자람을 거듭한다. 햇빛이 쏟아지나, 눈이 오나, 비바람이 휘몰아치나 쓰러지지 아니하는 그 무겁고도 무거운 침묵. 소나무는 말이 없다. "자연은 말이 없다"고 노자가 말하였던가?
소나무가 장중하다면 대나무는 선이 가늘면서도 꼳꼳하게 마른 맵시에서 조용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대나무는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녔으면서도 기죽지 아니하는 기백을 지녔다. 추위에도 푸름을 잃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아니하는 지조! 백낙천(白樂天, 772~846, 본명은 백거이:白居易,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또는 향산거사:香山居士)은 다음과 같은 「양죽기(養竹記)」를 통하여 대나무를 어진 사람에 비유하였다.
竹似賢,何哉?竹本固,固以樹德,君子見其本,則思善建不拔者。竹性直,直以立身;君子見其性,則思中立不倚者。竹心空,空似體道;君子見其心,則思應用虛者。竹節貞,貞以立志;君子見其節,則思砥礪名行,夷險一致者。夫如是,故君子人多樹爲庭實焉。貞元十九年春,居易以拔萃選及第,授校書郞,始於長安求假居處,得常樂里故關相國私第之東亭而處之。明日,履及於亭之東南隅,見叢竹於斯,枝葉殄瘁,無聲無色。詢於關氏之老,則曰此相國之手植者。自相國捐館,他人假居,由是筐篚者斬焉,篲帚者刈焉,刑餘之材,長無尋焉,數無百焉。又有凡草木雜生其中,菶茸薈郁,有無竹之心焉。居易惜其嘗經長者之手,而見賤俗人之目,翦棄若是,本性猶存。乃芟蘙薈,除糞壤,疏其間,封其下,不終日而畢。於是日出有淸陰,風來有淸聲。依依然,欣欣然,若有情於感遇也。 嗟乎!竹植物也,於人何有哉?以其有似於賢而人愛惜之,封植之,況其眞賢者乎?然則竹之於草木,猶賢之於衆庶。鳴呼!竹不能自異,唯人異之。賢不能自異,唯用賢者異之。故作 養竹記,書於亭之壁,以貽其後之居斯者,亦欲以聞於今之用賢者云。
죽사현, 하재? 죽본고, 고이수덕, 군자견기본, 즉사선건불발자. 죽성직, 직이입신; 군자견기성, 즉사중립불의자. 죽심공, 공사체도; 군자견기심, 즉사응용허자. 죽절정, 정이입지; 군자견기절, 즉사지려명행, 이험일치자. 부여시, 고군자인다수위정실언. 정원십구년춘, 거이발췌선급제, 수교서랑, 시어장안구가거처, 득상악리고관상국사제이동정이처지. 명일, 리급어정지동남우, 견총죽어사, 지엽진췌, 무성무색. 순어관씨지로, 즉왈차상국수식자. 자상국연관, 타인가거, 유시광비자참언, 수추자예언, 형여지재, 장무심언, 수무백언. 우유범초목잡생기중, 봉용회욱, 유무죽지심언. 거이석기상경장자지수, 이견천속인지목, 전기약시, 본성유존. 내삼예회, 제분양, 소기간, 봉기하, 부종일이필. 어시일출출유청음, 풍래유청성. 의의연, 흔흔연, 약유정어감우야. 차호! 죽식물야, 어인하유재? 이기유사어현이인애석지, 봉식지, 항기진현자호? 연즉죽지어초목, 유현지어중서. 오호! 죽불능자이, 유인이지. 현불능자이, 유용현자이지. 고작 양죽기, 서어정지벽, 이태기후지거사자, 역욕이문어금지용현자운.
<번역>
대나무는 어진 사람과 비슷하니,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 대나무 뿌리는 견고하니, 견고함으로써 덕을 심는다. 군자는 그 뿌리를 보고 잘 세워 뽑히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 대나무 성질은 곧으니, 곧음으로써 몸을 세운다. 군자는 그 곧은 성질을 보고 중립하여 기울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역자 주: 중립불의(中立不倚)는《중용》에 나오는 말). 대나무 속은 비었으니, 비움으로써 도를 실행한다. 군자는 그 댓속을 보고 응용하여 겸허히 받아들일 것을 생각한다. 대나무 마디는 곧으니, 곧음으로써 뜻을 세운다. 군자는 그 마디를 보고 이름과 행실을 갈고 닦아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일치하게 할 것을 생각한다(역자 주:《예기》에 지려절조(砥礪節操)라는 말이 나오고 《노자》에 대도심이(大道甚夷)라는 말이 나온다). 무릇 이러하기 때문에 군자들이 대나무를 많이 심어 뜰에 가득히 한다.
정원 19년 봄에 거이는 발췌로 급제에 뽑혀 교서랑에 제수되어 처음 장안에서 임시 거처를 구하였다. 상악리에 있는 옛 관상국(역자주: 상국은 정승을 가리킴) 사저의 동쪽 정자를 얻어 거처하게 되었다. 다음날에 발걸음이 정자의 동남쪽 구석에 이르러 대나무 무리가 이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지와 잎이 시들고 병들어 소리도 없고 색깔도 없었다(역자주: 《주례》에 진췌(殄瘁)라는 말이 나온다). 관씨의 노인들에게 물어보니, 이것은 관상국께서 손수 심은 것이었다. 상국이 관사를 떠난 후 타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니, 이 때문에 광주리를 만드는 자들이 베어가고 빗자루를 만드는 자들이 베어가서 손상을 받았다. 남은 재목이 길이가 한 길이 되는 것이 없고 수가 백 개도 못된다. 또 온갖 초목들이 그 가운데 섞여 자라서 무성하고 황폐하여 대나무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거이(백거이)는 일찌기 어른의 손을 거쳤으면서도 속인들의 눈에 천대를 받아, 베어지고 버려짐이 이와 같았으나 본성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애석히 여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가리고 우거진 것들을 베어버리고 흙덩이를 제거하였으며, 그 사이를 소통시키고 그 아래를 북돋웠는데, 하루가 못되어 작업이 끝났다. 이에 해가 나오면 시원한 그늘이 있고 바람이 불면 맑은 소리가 있었다. 의의하고 흔흔하여 마치 만남의 정이 있는 듯하였다.
아! 대나무는 식물이니, 인간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마는 어진 사람과 비슷함이 있다하여 사람들이 오히려 애석히 여겨, 북돋아 주고 심으니 하물며 정말로 어진 사람에 있어서랴. 그런고로 초목중의 대나무가 뭇 사람들 중의 어진 사람과 같다. 아! 대나무는 스스로 달라지지 아니하나 오히려 사람들이 달라진다. 어진 사람은 스스로 달라지지 아니하나 오히려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자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나는 양죽기를 지어 정자의 벽에 써붙여서 이후 이 곳에 머무는 자에게 주고, 또한 지금 어진 사람을 등용하는 자에게 알리고싶다.
물위에 피어난 연꽃에 관한 글로는 송나라 주렴계(周濂溪, 1017~1073)가 쓴 「애련설」만큼 명문장을 찾기 어렵다. 주렴계의 이름은 돈이(惇頤, Zhoudoni), 자는 무숙(茂叔)이다. 「애련설」의 전문 120자는 다음과 같다. 주렴계의 초상과 「애련설(愛蓮說)」 사진은<photo> 중국 샤오싱(소흥:紹興)에 있는 주은래(周恩來, Zhou En Lai) 조거(祖居)에서 직접 촬영한 것이다(2003년 2월28일).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予獨愛蓮之出淤泥而不染 濯淸漣而不妖 中通外直 不曼不枝 香遠益淸 亭亭淨植 可遠觀而不可褻玩焉 予謂 菊 花之隱逸者也 牡丹 花之富貴者也 蓮花之君子者也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何人 牡丹之愛 宜乎衆矣
수륙초목지화 가애자심번 진도연명독애국 자이당래 세인심애목단 여독애련지출어니이불염 탁청련아불요 중통외직 불만부지 향원익청 정젖정식 가원관이불가설완언 여위국 화지은일자야 목단 화지부귀자야 연화지군자자야 억 국지애 도후선유문 연지애 동여자하인 목단지애 의호중의
<번역>
물과 육지의 풀과 나무의 꽃으로 사랑스러운 것이 매우 많은데,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오직 좋아하였고 이씨 당나라 이래로 세상사람들이 모란을 매우 좋아하였다. 나는 홀로 연꽃이 진흙탕에서 나와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맑은 물결에 씻기면서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으나 겉 줄기는 곧아 넝쿨 뻗지 않고 가지쳐서 남에게 기대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우뚝히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음을 사랑하노라. 나는 국화가 꽃중의 은자이고, 모란이 꽃중에 부귀한 자이며, 연꽃이 꽃중의 군자라 여긴다. 아!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 들어본 적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자 나와 같은 이가 몇이나 되는가?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당연히 많을 것이다.
퇴계선생은 《근사록(近思錄)》을 비롯한 주자의 저서와 주렴계의 《태극도설(太極圖說)》과 도연명(陶淵明,Tao Yuan Ming 365~427), 소동파의 시를 애독하였기에 그들의 좋은 취향까지도 본받아 심신 수양에 힘썼다고 볼 수 있다. 아쉽게도 퇴계선생 생존 당시의 매화나무 품종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아니하다. 현재 도산서원에 식재된 것은 타 지역에서 옮겨 심은 꽃받침이 붉고 꽃잎이 흰 '옥매' 유사품종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절우사의 옛모습은 안타깝게도 오늘날 거의 남아 있지 아니하니 보수단장의 필요성을 느꼈다.
<Photo> 매화시(梅花詩). "Ode to maehwa".
사진은 도산서원 장판각(藏板閣)<photo>에 보관해온 《매화시첩(梅花詩帖)》목판을 한지에 인쇄한 것이다. 장판각은 서원의 출판소였으며 《매화시첩》목판 이외에 《퇴계 문집》과 유묵을 판각한 목판,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주자서절요》, 《이학통론》, 《계몽전의》, 《언행록》, 《년보》, 친필 《대보잠(大寶箴)》, 《도산급문제현록》, 《교남빈흥록》 등의 판본이 간직되어 있다.
이 《매화시첩》은 우리나라 문학사상 최초의 단일 소재의 자작, 친필로 된 단행본 시집이다. 퇴계선생의 매화시는 72제 107수에 달하며 그 중 62제 91수가 《매화시첩》에 수록되어 있다. 제일 앞 부분에 수록되어 있는 「옥당억매(玉堂憶梅)」시는 퇴계선생이 42세에 홍문관(옥당이라고도 함) 부교리로 재임시 숙직면서 지은 고결단아한 시이다.
一樹庭梅雪滿枝 風塵湖海夢差池
玉堂坐對春宵月 鴻雁聲中有所思
일수정매설만지 풍진호해몽치지
옥당좌대춘소월 홍안성중유소사
<번역>
뜰에 있는 매화나무 한그루 가지에 눈이 가득한데
바람과 먼지가 호수와 바다를 이루어 꿈마져 어지럽구나
옥당에 앉아 봄 밤의 달을 마주하니
기러기 우는 소리에 생각나는 바가 있도다.
어지러운 세상을 멀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조용한 생활을 하고싶다는 희망이 담겨 있는 듯 하다.
<주석> "差"는 "차"로 읽지 아니하고 "치"로 발음함.
《매화시첩》에 실려 있는 「재방도산매십절(再訪陶山梅十節)」이라는 시의 여덟 번째 수(首)는 아래로 늘어져 피는 수향매(垂向梅) 품종을 언급하여 매우 흥미롭다.
一花纔背尙堪猜 胡奈垂垂盡倒開
賴是我從花下看 昴頭一一見心來
第八首一花云云 本誠齋梅花詩 一花無賴背人開而云也 向余得此重葉梅於南州親舊 期著花一開倒垂向地 從傍看望不見花心 必從樹下仰面而看 乃得一一見心團團可愛 杜詩所謂 江邊一樹垂垂發者 疑指此一種梅言也
일화재배상감시 호내수수진도개
뇌시아종화하간 묘두일일견심래
제팔수일화운운 본성재매화시 일화무뢰배인개이운야 향여득차중엽매어남주친구 기저화일개도수향지종방간망불견화심 필종수하앙면이간 내득일일견심단단가애 두보소위 강변일수수수발자 의지차일종매언야
<번역>
한송이 꽃 약간 뒤돌아 피어도 오히려 의심스럽거늘
어찌하여 모두 거꾸로 드리워져 피었는고
그 까닭을 알고자 꽃 아래에서 살펴보니
머리 쳐든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보이네
여덟 번째 수에서 "일화" 운운 한 것은 본래 성재의 매화시에 "한송이 꽃 외로이 사람을 등지고 피었다"고 한 것에 근거한다. 지난날 이 겹꽃잎 매화나무를 남녘 친구로부터 얻었는데 꽃필 때 하나같이 땅쪽을 향해 거꾸로 드리워져 피고 곁에서 살펴보면 꽃심이 보이지 않고 반드시 나무 아래에서 쳐다보는 얼굴로 살펴보아야 비로서 한송이 한송이 꽃심이 동글동글 사랑스러워 보인다. 두보의 시에 이른 바 강변의 한그루 나무 드리워 드리워져 피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매화를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퇴계선생 생존시에 도산서원 주변과 남쪽 지방에는 아래로 늘어져 겹꽃잎으로 피는 수향 매화나무 품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선생의 문인이었던 정문봉(鄭文峰, 휘는 유일, 惟一)공이 찬술한 「언행통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전략>... 선생은 시 짓기를 좋아하여 도연명과 두자미의 시를 즐겨 보았으나 늙어서는 주자의 시를 더욱 좋아하셨다. 그의 시는 처음에는 매우 맑고 화려하였으나, 뒤에 와서는 화려한 것은 깎아 버리고, 오로지 전실하고 장중하며 담박한 데로 돌아가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 또 그의 문장은 육경을 근본으로 하고 옛글을 참고로 하여, 화(華)와 실(實)을 모두 겸하고 문(文)과 질(質)이 모두 알맞아, 웅장하고 크면서 아담하고 맑고 건전하며 화평하였으니, 그 돌아간 곳을 따져 보면 오로지 바른 것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후략>..."
한편, 퇴계선생이 지으신 《매화시첩》에는 임화정(林和靖)처사의 고상한 취향을 언급한 구절이 적지 아니하다. 퇴계선생의 매화시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논문이 있다.
"...<전략>... 그의 매화시는 서호 고산에 은거하였던 송대의 화정처사 임포(林逋)가 보여주는 매화와 일체화된 삶을 본받고자 하고, 표현에서는 소동파와 주자의 매화시에서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독자적 세계를 지닌다고 한다. 퇴계가 읊은 시는 중국의 최고 시인 두보보다 그 양이 많은데(제목을 아는 것만 3560수, 퇴계 문집에 전하는 시는 2000수가 넘음), 제 1회 퇴계학 국제 학술상을 받은 퇴계시 연구의 권위자인 대만의 왕소(王甦) 교수는 「퇴계시학」에서 퇴계시의 연원을 도연명, 두보, 소동파, 주자에 두어 도연명의 감정과 주자의 사상을 지녔으며, 두보의 격율·체제와 소식(소동파)의 문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퇴계의 경우는 일반 시인들과 달리 성리 탐구의 학문정신 때문에 사물을 만나 우러나오는 흥의 표현이 시이고, 그래서 지극한 정취와 오묘한 이치가 시에 담겨 있으며, 표현은 담백하나 맛이 깊고 심오한 이치가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후략>..." (정석태, 「퇴계의 매화시에 대하여」, 퇴계학 연구 5, 1991).
"퇴계선생은 독창적인 매화관을 확립하고 그 미경(美境)을 시로 표현했는데, 매화를 옥과 빙설(氷雪)에 비유하고 소수(疏瘦)한 자태에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여기에서 옥은 청정투명(淸淨透明), 빙설은 결백냉담(潔白冷淡), 소수는 빈한인고(貧寒忍苦)를 의미하는 것이다. 또 퇴계는 매화의 품성을 진(眞), 정(貞), 견(堅), 고(苦)로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서 '진'은 순선무악(純善無惡)한 매화 본연의 성질이며 '정' '견' '고'는 그 본연의 성질인 '진'을 지켜나가기 위한 지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남우진 「화폐속의 우리문화」)
"공맹(孔孟)에서 비롯된 유가(儒家)의 문학관은 문학이 단순한 인간의 감성을 표현하는 문예 작품이 아니라 도문일치(道文一致)를 근본으로 삼는 경전(經典)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많은 유학자들은 이시명도(以詩明道)의 전통(傳統)을 이으면서 시를 통해 인간의 의지와 사상 그리고 윤리를 밝히려 노력하였던 것이다. 북송의 주렴계는 ‘문소이재도야(文所以載道也)’라 했으며 퇴계는 ‘문학가이홀재 학문소이정심야(文學可以忽哉! 學文所以正心也)’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도(道)가 실려있지 않는 시는 적어도 유가의 경우에는 시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 퇴계의 경우는 촉물언이(觸物言理)하여 이명천도(以明天道)하는 그런 면이 있어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사상을 보여준 시가 매우 많다." (이동한: 李東翰 「 以詩明道의 退溪詩」, 퇴계문집 독회 보고서)
매화시를 애호하는 분들이 도산서원 전교당에 모여 《매화시첩》독회를 열고 작성한 연구보고서와 《매화시첩》을 영문으로 번역한 귀중한 연구자료가 있음을 소개해 둔다. 이 연구보고서에는 매화시 91편를 우리말로 해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대 중국어로 번역한 내용도 있다. 자료 제공: 이동구(李東耉) 씨.
1) 퇴계문집 독회 보고서 : 독회 참가자: 具本燮(國文學), 權敬雄(漢學), 權赫和(韓國古典), 金大喜(漢學), 金用煥(韓國漢文), 南斗錫(漢學), 陶玉君(중국인), 白鉉順(古傳), 卞在玉(法學), 袁明軍(중국인), 陸正學(映像), 李東耈(行政學), 李東翰(漢詩), 李明子(漢學), 李章佑(中文學), 李載興(漢學), 李貞和(退溪詩學), 李鍾南(國文學), 李昌京(漢學), 李昌燮(漢詩), 李昌雨(英文學), 田日周(漢文學), 鄭相鎬(漢詩), 黃在甲(數學)
2) 매화시첩 (The Book of Maehwa Poetry): 안동대학교 이창우 교수 번역
<Photo> 매화연(梅花硯). Inkstone decorated with maehwa, Tosanseowon. 도산서원 소장품.
매화를 소중하게 사랑하셨던 퇴계 선생은 문방사우의 하나인 벼루조차도 매화연(梅花硯)을 애용하셨다. 자색의 중국 단계석(端溪石)에 일월 연지(日月硯池)와 매화 및 대나무가 정교하게 조각된 고급 벼루이다. 퇴계 문도였던 김북애(金北厓)공의 봉증품이라 알려져 있다. 벼루를 넣은 나무통인 연갑(硯匣)은 붉은 색 흑단나무로 만들어졌다.
<Photo> 매화등(梅花凳). Porcelain stool decorated with maehwa, Tosanseowon. 도산서원 소장품.
매화등(梅花凳)은 퇴계선생이 사용하셨던 걸상이며 중국식 도자기로 만들어졌다. 밑바닥 지름이 28.5cm, 높이가 47.5 cm이다. 가운데 부분에 꽃 모양을 투각해 넣었고 내부는 비어 있다. 누구로부터 선물받은 것인지 알 수 없고 용도도 명확하지는 않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선생이 쓴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르면 화분 받침대로 쓰였다고 한다.
매화 꽃잎은 다섯 잎인데 이 걸상의 문양은 여섯 잎 연꽃 문양으로 되어 있어 매화등이라기 보다는 연화등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2004년 2월21일 중국 우시(무석, 无錫, Wuxi)의 매원에서 매우 드문 여섯 꽃잎의 매화나무 꽃을 직접 확인하였다. 따라서 여섯 꽃잎의 매화문양조차도 매화등이라 할 수 있고 아마도 퇴계선생 생존 당시에도 여섯 꽃잎의 매화가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터키 이스탄불 톱카피 고궁(Topkapi Palace, Istanbul, Turkey)의 이브라함 파사 고궁 박물관(Former Palace of Ibrahim Pasa: Museum of Turkish and Islamic Arts)에 특별 전시중인 중국 정원등(garden seat) <photo, 2003년 5월24일 현지촬영>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이 중국 정원등도 청자로 만들어졌고 속은 비어 있으며 크기는 매화등보다 조금 작았다. 15세기 명나라때 작품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매화등의 제작년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 정원등과 유사한 점이 많은 것으로 보아 15세기 후반~16세기 중반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Photo> 도산서당 (陶山書堂). Tosanseodang.
나의 선고(先考) 유정부군(柳庭府君, 자는 友文, 휘 원회, 源會, 1920~1981)이 30년전에 편찬하였던 《도산서원요람(陶山書院要覽, 1975년 간행)》을 참고로 하여 도산서원 유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도산 서원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 서당이 있고, 왼쪽에는 농운 정사(隴雲精舍)가 자리하고 있다. 가운데는 매화원이 보이고 그 앞에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가져와 기념식수한 금송(金松)이 높게 자라고 있다. 뒤로는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으로 들어서는 진도문(進道門) 동서로 광명실(光明室) 두채가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명종(明宗) 12년(서기 1557년)에 스님인 법련과 정일로 하여금 이곳에 짓기 시작하여 명종15(1560)년 완공하였다. 서당의 가운데 방은 완락재(玩樂齋) <photo>라 명하여 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구 사색하고 도를 강의하던 방이다. 완락은 주자(朱子)가 지은 <명당실기(名堂實記)>에 나오는 "언제나 배움을 즐기니 여기서 평생을 지내도 싫지 않겠다[완이낙지(玩而樂之)]"라는 글에서 취한 것으로 퇴계의 호학(好學) 정신이 잘 나타나고 있다. 제자를 가르쳤던 마루는 암서헌(巖棲軒) <photo>으로 주자의 운곡시(雲谷詩)에 나오는 "바위에 기대어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바란다[암서기미효(岩栖冀微效)]"는 구절에서 취한 말로, 학문에 대한 겸손의 뜻이 담겨져 있다. 암서헌 마루 옆에 붙어 있는 살 평상(平床)은 문도였던 정한강(鄭寒岡, 휘 述)공이 안동부사로 재임시 선생을 위하여 기증한 것이다.
도산서당은 순조(純祖) 29 (서기1829)년경 수리한 바 있는데 당시 속은(俗隱) 이귀성(李龜星, 자는 은서:恩瑞, 1756~1835, 첨지중추부사 풍기군수)공이 지은 「도산서당중수고유문(陶山書堂重修告由文)」은 다음과 같다. 《속은 문집(俗隱文集)》에서 인용함.
書堂重葺 傾頹是懼 曷敢改觀 茅亟隨補 撤瓴易木 略綽施功 黷焉而換 撓焉而鞏
爰曁東楹 床搹井井 杖几璣盆 位置還整 倕工載訖 掩以幽貞 縫掖交坌 虔告厥成
서당중즙 경퇴시구 갈감개관 모극수보 철영역목 약작시공 독언이환 요언이공
원기동영 상혁정정 장궤기분 위치환정 수공재흘 엄이유정 봉액교분 건고궐성
<번역>
서당이 크게 기울어 무너질까 두려우니 어찌 다시 수리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수리하기로 하고 기와이렁을 걷어내어 나무를 바꾸고 작고 크게 시공하였습니다. 더러운 것은 바꾸고, 굽은 것은 바른 것으로 하고, 동쪽 기둥에 이르기까지마루의 규격을 반듯 반듯하게 하였습니다. 지팡이와 책상 및 화분을 제자리로 가지런히 돌려놓고 어려운 공사를 거의 마무리하였습니다. 유정문 가득히 선비들이 모여서 이제 완성되었음을 삼가 아뢰옵니다.
퇴계선생은 비좁고 조그만 이 서당에서 성리학을 집대성 하였다.흔히 퇴계의 사상을 경(敬)이라 한다. 경이란 사람이 본성에 잠겨 있는 천리(天理)가 순조롭게 발현되도록 마음을 한 곳으로 집중하여 이리 저리 헷갈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근사록》을 보면
"이천 선생이 말하기를 경은 바로 자기를 지키는 도이고 의는 옳고 그른 것을 아는 것이다. 이치에 따라 행하면 의가 된다[경지시지기지도야 의편지유시유비 순리이행 시위의야 (敬只是持己之道也 義便知有是有非 順理而行 是爲義也)]"
라 하였다. 퇴계는 일생을 겸양과 성찰로써 경을 실천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서 많은 제자를 가르쳐 수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도산 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에 등재된 선현은 삼백명이고 그중 상신(相臣)을 지낸 분이 10여명,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준 분이 30여명이라 하니 당대의 명사 대부분이 문도에 속하였을 정도이다.
완락제 서쪽에는 부엌과 작은 골방이 하나 딸려 있다. 이 골방은 서당을 지키고 관리하던 스님의 방이었다고 전해 온다. 서당에 출입하는 유정문(幽貞門)은 자연목을 엮어서 만든 삽짝문이다. 산중에 은거하는 자연미가 잘 나타난 소박한 삽짝이다. 질박 검소하고 외면적 꾸밈과 사치를 떠나 오직 청빈낙도한 도학자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유정문은 《주역》의 "이도탄탄 유인정길(履道坦坦 幽人貞吉)"에서 취한 이름으로 도를 실천하는 길이 탄탄하니 숨은 선비가 곧고 길하리라는 뜻이다. 유정문을 들어서면 서당 앞마당에 정우당(淨友塘)<photo>이 있다. 이 조그마한 연못에 연을 심어 맑은 연꽃을 벗삼았다. 유정문 밖에는 몽천(蒙泉)<photo>이라는 샘이 있다. 몽천이라는 명칭은 《주역》의 "산수몽산하출천왈몽(山水蒙山下出泉曰蒙)"에서 취하였으며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끊임 없는 노력으로 극복해 큰 길로 나가라는 교훈이 담겨 있다.
도산서당 서쪽에 위치한 농운정사(隴雲精舍)<photo>는 도산 서당과 함께 지어졌고 팔간방(八間房)으로 지어 문도들이 공부하며 숙식하던 곳이다. 공부하는 방을 시습재(時習齎), 잠자는 방을 지숙료(止宿寮), 낙동강을 굽어보는 마루는 관란헌(觀欄軒)이라 불렀다. 농운정사의 건물 전체 형태는 공부를 권장하는 뜻에서 "공(工)"자로 지었다고 한다. 농운은 양나라 은거 시인 도홍경(陶弘景)의 시에 나오는 "산속에 무엇이 있는가 농산위에 구름 많이 걸렸네[산중하소유 농상다백운(山中何所有 隴上多白雲)]"에서 취하였다. "시습"은 《논어》 제일 첫 머리 학이(學而)편에 나오는 "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는 글에서 취하였다. "관란"은 《맹자》의 진심편에서 취한 말로, 물을 바라보는 법이 있으니, 흐르는 물의 이치를 살핀다는 뜻이다.
<Photo> 도산서원 전경 (陶山書院 全景). View of Tosanseowon and vicinity.
도산서원은 사적 (史蹟) 제170호 문화재이다.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도산서원 주변의 출입로는 원래의 모습과 달리 많이 바뀌었다. 1969년에 박정희(朴正熙) 전대통령의 중요 문화재 보호정책에 따라 정부에서는 도산서원을 보수하여 성역화하였다.
퇴계선생이 지으신 「도산기(陶山記)」에 따르면 도산서원이 자리한 도산은 영지산(靈芝山)의 한줄기이며 옛날에 옹기굴이 있었기에 도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원래의 도산서원 진입로는 예안에서 송티재[송현(松峴)]를 넘어 부내[분천(汾川)]를 거쳐 애일당(愛日堂)을 지나 굽이진 낙동강변에 늘어선 노송을 따라 비포장길을 가다가 왼쪽편에 있었다. 곡구암(谷口巖)을 중심으로 동쪽 산록인 천연대(天淵臺)와 서쪽 산록인 운영대(雲影臺)가 마주한 산길을 따라 서원을 올라 갔었다. 주변 경치가 자연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웠다. 도산서원에서 청량산(靑凉山)에 이르기까지 산수경관에 대해서는 퇴계선생이 지으신 「도산십이곡」속에 잘 나타나 있다. 옛부터 송티재 안쪽 상계를 중심으로 사방십리를 계산십리(溪山十里)라 불렀다. 온혜를 비롯하여 웃토계(상계), 하계, 양평, 계남, 원촌, 단사, 천사, 의인, 섬마(섬촌), 부포 등 십여 촌락이 있고 진성 이씨들이 대대로 살아왔다.
조선 후기 영조27(서기1751)년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도산도」라는 산수화 <photo>속에 도산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옛 모습을 담아 퇴계선생을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 「도산도」는 가로 138.5㎝, 세로 57.7㎝ 크기의 지본담채(紙本淡彩) 작품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보물 제522호이다.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앞쪽에 탁영담(濯纓潭)·반타석(盤陀石) 등의 정경을 강류(江流)에 그리고, 왼쪽 곡류(曲流) 위 별동(別洞)에 분천서원(汾川書院)·우구당(憂口堂)·분강촌(汾江村) 일곽을 그렸다. 그림 중간을 완만한 대각으로 흐르는 강물을 산 밑에서 돌게 하였다. 여기에 대차적으로 오른쪽 끝의 곡류 중에는 수중산(水中山)을 놓고, 돌아 흐르는 강줄기와 강안지평(江岸地平)을 그렸다. 서원의 건물들은 규격의 대소와 향배(向背)를 실제와 부합되게 고려하여 일일이 당명(堂名)을 옆에 적어 200여 년 전 서원의 양상을 짐작케 한다. 산석초수(山石草樹)는 온유(溫柔)·간명(簡明)하게 구사하여 남화적 분위기를 살렸다. 제발(題拔)은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와병중에 이 도산도를 그리도록 특별히 당부하였음과, 이미 있어온 도산도에 관한 간략한 논의, 자신의 소양, 현지답사 등이 그 내용이고, 끝에 "신미 시월(辛未十月)"의 기필(記筆)을 하였다.
도산서원에는 12채의 건물이 있고 크게 두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서원 앞에는 열정(冽井)<photo>이라는 우물과 300백년 이상된 왕버들 고목<photo>이 있다. 이 마당을 거쳐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있는 도산서당과 왼쪽의 농운정사, 그리고 그 아래 별채인 역락서재, 이 세 건물이 한 구역이다. 이 건물들은 퇴계선생이 생존시에 세운 집들이다. 역락서재(亦樂書齋)는 퇴계선생의 문도였던 정사성(士誠) (이름은 지헌, 芝軒, 1545-1607)공이 어린 나이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그 부친이 퇴계선생을 존경하는 사은의 표시로 기숙사를 지어 드렸다. '역락'(易樂)은 《논어》의 '벗이 있어 스스로 먼길을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易樂乎)]'에서 취하였다. 나머지 구역은 퇴계선생 사후에 세워진 것이다.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 7년(서기1574년, 갑술년)에는 사림의 발기로 서당위에 도산서원을 건립하여 이듬해 을해년에 낙성하였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퇴계가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건립한 도산서당과 퇴계의 제자들이 스승의 학덕을 숭모하기 위해 건립한 서원은 별개의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 난 경사진 길을 계단을 딛고 올라가면 진도문(進道門)이 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인데 진도문을 사이에 두고 동서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광명"은 주자의 시에 나오는 "혜아광명(惠我光明)"에서 취한 것으로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광명은 《주역》의 겸괘(謙卦)에도 나오는 말로 "하늘의 도가 세상에 내려 와서 만물을 낳고 밝고 빛나게 한다 [천도하 제이광명(天道下 濟而光明)]"는 뜻이다. 또한 《시경》에도 "일취월장 학유집희우광명(日就月將學有緝熙于光明)"이라는 말이 있다. 동광명실은 순조 19년(서기 1819년)에 지었고 서광명실은 경오년(서기 1930년)에 증축하였다. 증축시 이류(二柳, 휘 中洙)공이 지은 도산서원 광명실 신구수축 고유문(陶山書院 光明室 新舊修築 告由文)은 다음과 같다 (《이류재문집 : 二柳齋文集》에서 인용함).
伏以光明冊室 曁進道門 歲久砌傾 恒懷禀懼 爰自春季 卜日繕修 又就西偏 刱起一屋 雙峙對立 東制是依 分奉緗書 無俾窄狹 仍摹畵手 施以靑朱 弘博兩齋 一例受采 踰時閱月 今才竣功 多士蹌趍 厥由敢告
복이광명책실 기진도문 세구체경 항회품구 원자춘계 복일선수 우취서편 창기일옥 쌍치대립 동제시의 분봉상서 무비착협 잉모화수 시이청주 홍박양재 일례수채 유시열월 금재준공 다사창추 궐유감고
<번역>
아! 삼가 생각하니 광명책실과 진도문이 세월이 오래되어 섬돌이 기울어 늘 두렵고 송구스럽게 여겼습니다. 드디어 금년 늦은 봄에 날을 잡아 수리하고 또 서편의 새로운 한 채는 두 채가 서로 마주보도록 동제에 따라 지어 오래된 책을 나누어 비좁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색칠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푸른색과 붉은 색을 칠하고 홍의재와 박약재도 함께 채색하여 시일이 되어 이제 준공을 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선비들이 모여 삼가 그 사유를 아룁니다.
광명실에는 퇴계선생이 소장하던 책들과 서간집, 임금이 하사한 책 그리고 문인들의 문집을 포함하여 모두 1,217종류 4,917 권을 이곳에 보관하던 서고였다. 보관된 보물 중에는 퇴계선생의 친필 서간문을 조월천(趙月川)선생이 수집 표구한 《사문수간(師門手簡)》과 정조(正祖)대왕이 사문수간을 열람하고 어제 어필로 지으신 《제선정간첩발(題先正簡帖拔)》같은 진귀본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일본 이세사키 번(伊勢崎 藩, Isesaki)의 유학자 촌사옥수(村士玉水, 스구리교꾸스이, すぐりぎょくすい, 1729~1776)가 편찬한 《퇴계서초(退溪書抄)》10책이 이채롭다. 이것은 선생의 학문이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2003년 4월 14일에 1561년부터 500년 가까이 동서 광명실에서 보관해 온 책과 목판이 도난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서원에서 4 Km 떨어진 국학 진흥원으로 옮겨 위탁 관리하게 되었다.
보물 제210호인 전교당은 유생들이 학문을 논하고 강의를 했던 집회장소였다. 전교당 앞에는 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쪽으로 박약재(博約齋)<photo>와 서쪽으로 홍의재(弘毅齋)<photo>가 마주 보고 있다. 전교당 동쪽에는 퇴계 문집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장판각(藏板閣) <photo>이 있다.
보물 제21호인 상덕사는 전교당 뒤쪽으로 서원의 가장 후면에 한층 높고 그윽한 곳에 위치하고 따로 삼문의 출입문을 두고 별도의 담장이 둘러진 곳 안에 있다. 사당인 상덕사(尙德祠, Sangduksa) <photo>에는 선조 7년(1574년) 퇴계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광해군 7년(서기1615년)에 이르러 사림이 제자인 월천(月川) 조목(趙穆, 1524~1606)공을 함께 종향(從享)하였다. <photo>주향위(主享位)로 정면 중앙 북쪽 벽에서 남향으로 '퇴도 이선생(退陶 李先生)' 위패를 모시고 종향위(從享位)로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월천 조공(月天 趙公)' 위패를 모시고 있다. 상덕사에는 여성의 출입을 일체 금하였으나 2002년 이 규정을 개정하여 여성에게도 알묘(謁廟)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도산서원에서는 상유사(上有司)와 재유사(齋有司) 등 집례자(執禮者)들이 모여 음력 정월 초닷새 아침 해돋이 직전에 정알(正謁)을 드리며 정월을 제외한 매월 초하루와 매월 보름날 아침에도 향알(香謁)을 드린다. 그리고 매년 음력 2월과 8월 각각 중간 정(丁)일 새벽 두시에 향사(享祀)를 올린다. <photo>사진은 2004년 갑신년 2월기사삭(己巳朔) 19일 정해(丁亥) 춘향(春享) 봉향자들의 모습이다. 향사 축문<photo>은 다음과 같다.
維歲次(某甲子某月某甲子朔某日某甲子)某官(無官則幼學)姓名敢昭告于
先師 退陶李先生 伏以 心傳孔孟 道紹閩洛 集成大東 斯文準極 勤以 牲幣粢盛 淸酌庶品 式陳明薦 尙饗
유세차모갑자모월모갑자삭모일모갑자모관(무관즉유학)성명감소고우
선사 퇴도이선생 복이 심전공맹 도소민락 집성대동 사문준극 근이 생폐자성 청작서품 식진명천 상향
<번역>
유세차 어느 해 어느 삭 어느 날 모관(벼슬이 없으면 유학) 성명(아무)가 감히 밝게 고하노니
선사 퇴도 이선생은 삼가 엎드려 생각하니 마음은 공자와 맹자로부터 전해 받았고, 도학은 정자와 주자로부터 이어 받았다. 우리 동방에 와서 모아 이루었으니 사문의 최고 표준이 되었다. 삼가 생폐자성과 청작서품으로 발 게 드리노니 흠향하소서.
월천을 종향한 이후로는 식진명천아래 이월천조공종향(以月川趙公從享) 일곱 글자를 더하고 생폐자성을 시생자성(豕牲粢盛)으로 고쳤다.
상덕사의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총 건평이 49.6 m2이다. 앞칸은 절반을 구분하여 전면을 툇간으로 만들고, 툇간과 주위의 기단 상면에는 벽돌을 깔았으나 건물의 내부에는 마루를 놓았다. 천장은 전교당과 비슷한 가구재를 쓴 연등천장이며, 기둥은 모두 방주이고, 그 위에 공포를 받치지 않은 간략한 굴도리집이다. 처마도 4면 모두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상덕사와 전교당 사이에 난 작은 문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면 전사청(典祀廳)이 있다. 전사청은 향례시 제수를 마련하여 두는 곳으로 주고(酒庫)와 제수고(祭需庫)가 있다. 그 아래로는 서원을 관리하던 사람들의 거처였던 고직사(庫直舍) 2채가 있다. 도산서원은 일반적인 서원의 전형적 구조인 전당후묘(前堂後廟)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1969~1970년 서원을 성역화 하면서 새로 지은 옥진각(玉振閣)에는 선생의 행적과 청려장(靑藜杖) 짝지(지팡이), 매화등(梅花凳), 매화연(梅花硯), 옥서진(玉書鎭), 투호(投壺), 혼천의(渾天儀), 책자등 많은 유물이 진열되어 후학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퇴계 선생은 연산군 7년 신유 (辛酉, 서기1501) 안동 예안 온혜리 노송정(老松亭) 종택(현재 경상북도 민속자료 60호로 지정되어 있음)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 경오(庚午, 서기1570) 음력 12월8일에 작고하셨다.
선생은 스스로 명[自銘]을 지으시고 유명(遺命)으로서 조그마한 돌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쓰라 하셨다. 선생이 쓰신 자명은 이러하다.
나면서부터 어리석기 짝이 없었고, 성장하여서는 병통도 많았구나. 중년엔 어찌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늦게서야 어찌 벼슬을 받았던가? 학문의 길은 갈수록 더욱 더 멀고, 벼슬은 싫다하여도 더욱 더 주어지는구나. 나아가는 길이 험해도 물러나 수양하기는 어렵기도 하구나. 임금의 은혜 망극하고 성현의 말씀 두렵구나. 오직 높고 높은 산이 있고 깊고 깊은 물이 있어 처음 뜻을 쫓아 자연에 물러오니, 모든 빗방울을 떨쳐 버린 듯하구나. 나의 마음 나대로 가졌으니 나의 생각 누가 알아 주리? 내 스스로 옛사람 생각하니 진실로 내 마음 부합되네. 현실도 알지 못하거니, 오는 세상 어찌 알리. 근심속에도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도 근심 있네. 자연 그대로 살다가 돌아가노니 이 세상에서 다시금 무엇을 구하리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昇) 선생이 지으신 퇴계선생의 「묘갈명(墓碣銘)」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융경사년(隆慶은 明나라 穆宗황제의 연호이며 융경4년은 경오년인데 서기 1570년으로 선조 3년임)......12월 8일 신축(辛丑)에 선생이 돌아가심에 임금 (선조대왕)께서 부고를 듣고 슬퍼하며 영의정을 증직하고 영의정의 예로써 장례를 치룰 것을 명령하셨으며 ......
선생의 성은 이(李)씨요, 휘(諱)는 황(滉)이며 자는 경호(景浩)이시다. 일찌기 퇴계에 터를 잡아 살았으며, 이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퇴계라 하시고 그 후에 도산서당을 짓고 또 호를 도수라고도 하였다. ......
선생은 태어나신 후, 한돐이 못 되어 부친이 돌아 가시므로 숙부인 송재공(松齋公)께 수학하였고 성장하여서는 뜻을 가다듬어 글 읽기에 힘을 써서 더욱 각고면려하셨다. 가정 무자 (嘉靖은 明나라 세종황제의 연호이며 戊子는 서기 1528년으로 중종 23년임)년에 진사가 되었고, 갑오(서기 1534년, 중종 2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시었다가 다시 박사에 승진, 성균관전적, 호조좌랑으로 옮기시었다. ......무신(서기1548년, 명종3년)에 단양군수로 나아가 풍기군수로 바뀌었다가......무진(서기 1568년, 선조1년) 정월에 우찬성을 제수하매 역시 소를 올려 극력으로 배수할 수 없다는 뜻을 올렸더니 ...... 다시 판중추를 제수하므로 ...... 선조대왕으로부터 대제학 이조판서 우찬성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배수하지 않으셨다....... "
수 없이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우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우리 나라 교육 및 사상의 사표가 되었다. 사후 4년 만인 선조7년 (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photo>을 하사하였다.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한석봉이 도(陶)자를 마지막에 쓰면서 도사서원에 내리는 사액임을 알고 감격하여 마지막 획이 흘림체가 되었다고 하나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선조대왕 9년 병자년 겨울에 문순(文純)이라는 증시호를 내렸다. "문"은 도덕이 높으고 학문을 널리 들음[도덕박문(道德博聞)]을 뜻하고 "순"은 중용되게 바르고 정치하고 순수함[중정정수(中正精粹)]을 뜻한다.
선생의 주요 저서로는 《성학십도》, 《주자서절요》, 《계몽전의》, 《심경후론》, 《도산십이곡》, 《매화시첩》, 《활인심방》, 《자성록》, 《예안항약》등이 있다. 선생의 윤리와 도의는 공자, 주자의 이념에서 그 이학과 철학은 《역경》과 《심경》에서 얻은 바 많고 동방의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므로 "동방주자"라 불리우고 도산을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 전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이 모두 선생에 연유하였고 역대 유학자들은 그 학풍을 이어받아 수신치국의 법을 삼았고 임금은 선생이 엮은 성학십도로서 나라를 다스리는 이념을 삼았다. 그 맑고 바르며 크고 높은 정신과 학풍은 전국에 퍼졌다. 1610년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들에 이어 퇴계선생이 문묘와 종묘에 배향되어 동방 오현(東方五賢)으로 존경을 받아오고 있다.
김하서(金河西, 휘는 麟厚)공은 퇴계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바쳤다.
夫子嶺之秀 李杜文章 王趙筆
부자영지수 이두문장 왕조필
<번역>
부자(선생을 더욱 높인 말)께선 영남의 빼어난 유학자로
이백과 두보의 문장과 왕희지와 조맹부의 필체를 가지셨다.
근세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인 양계초(梁啓超, 량치차오, 1873~1930)는 퇴계선생을 "이부자(李夫子)"로 존칭하였다. 그리고 《성학십도》가 성리학의 요점이라 평가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嶷 嶷 李 夫 子 繼 開 一 古 今
十 圖 傳 理 訣 百 世 詔 人 心
雲 谷 琴 書 潤 濂 溪 風 月 深
聲 敎 三 百 載 萬 國 乃 同 欽
억 억 이 부 자 계 개 일 고 금
십 도 전 이 결 백 세 조 인 심
운 곡 금 서 윤 염 계 풍 월 심
성 교 삼 백 재 만 국 내 동 흠
<번역>
높고 거룩하신 이(李)부자
옛것을 오늘에 이어 미래를 열었네
성학십도에 성리학의 요점을 담아
오랜 세월 사람들을 가르치셨네
운곡(주자)의 금서(학문과 예술)를 더욱 빛내었고
주렴계의 풍월(사상)에 깊이를 더하였네
덕망과 교화가 삼백년 흘렀어도
온세상 사람들 모두다 흠모하네
하버드대학교 두웨이밍(杜維明)교수는 퇴계의 학문하는 방법과 자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주자와 마찬가지로 퇴계도 비판적 분석법이 학문하는 바른 방법이라 믿고 실천하고 또 그렇게 주장하였다. 어떠한 것도 학설을 당연시 해서는 안되며, 미숙한 종합은 피해야하고, 간단한 용어나 작은 주석 한부분이라도 철저하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는 원문일지라도 이해와 적절한 활용을 위해서는 문헌학적, 의미론적 탐구가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퇴계사상은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메이지(明治)시대 사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에는 중국과 일본은 물론이요 서구의 학자에 이르기까지 선생을 숭앙하고 그 학문을 연구하고 있으며 세계학회도 개최되고 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도산서원은 제외되었거니와 전국 각지에 퇴계 선생을 봉안하는 서원이 30여개소에 이른다 하니 후학들의 퇴계에 대한 존경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도산서원에서는 퇴계국제학술상 시상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참배하는 한국 고유의 성지로서 한 몫을 담당하고 있으며 또한 한국 전통 문화활동과 교육의 중심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Photo> 도산서원 진도문과 전교당 (陶山書院 進道門, 典敎堂). Chunkyodang (Treasure No. 210)
도산서원 정문인 진도문(進道門)은 도(道)에 나아가서는 물러서면 안 된다 [진도약퇴(進道若退)] 라는 뜻으로, 주자가 지은 《근사록(近思錄)》에서 취하였다. 진도문 처마 아래에는 작은 북<photo>을 매달고 있다. 서원에는 서원의 입학 자격과 유생의 생활 규칙을 정한 원규(院規)가 있었고 이를 어기는 유생 또는 잡배(雜輩)가 있으면, 먼저 발견한 유생이 북을 치며, 유생 모두 힘을 합하여 문 밖으로 물리쳤다. 《논어》선진편에는, 이제 우리 무리가 아니다. 너희는 북을 치며 공격해도 좋다 [비오도야 소자명고이공지가야(非吾徒也 小子鳴鼓而功之可也)]라는 내용을 따르고 있다.
보물 210호인 전교당은 진도문 안쪽 정면에 위치하며 도산서원의 중심되는 건물로 선조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각종 행사시 강당으로 사용되던 곳으로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사물잠(四勿箴), 경재잠(敬齋箴), 국기안(國忌案), 정조왕의 사제문(賜祭文) 등의 현판이 게시되어 있다. 정면 <photo>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은 선조 임금이 사액한 것으로 글씨는 명필 한석봉(韓石峯)이 어전에서 쓴 친필이다. 전교당은 팔작 홑처마 굴도리집으로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총 건평이 49.6㎡이다.
전교당의 한존재(閑存齋)는 원장의 거실 온돌방으로 원무를 보던 곳이다. 한존 (閑存)은 《주역》 건괘 (乾卦)에 나오는 말로서, 그릇됨을 막고 진실을 지킨다[한사존기성(閑邪存其誠)]라는 뜻으로, 언제나 말과 행동은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전면 좌우에는 부속건물로 동재(東齋)인 박약재(博約齋)와 서재(西齋)인 홍의재(弘毅齋)가 있다. "박약"은 《논어》에 나오는 "박학어문 약지이례(博學於文 約之以禮)"라는 귀절에서 취하였다. "홍의"는 "사불가이불홍의(士不可以不弘毅)"에서 취하였다.
<Photo> 시사단(試司壇). Sisadan
도산서원에서 내려다 보이는 낙동강에 석축을 쌓아 섬처럼 우뚝 솟아있는 단이 시사단이다. 정조대왕은 퇴계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정조 16(서기 1792)년에 내각검교직각(內閣檢校直閣)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도산별시(陶山別試)라는 특별 과거시험을 어명에 따라서 실시하였다. 이 때에 천주교가 전국으로 널리 전파되어 고유의 미풍예속에 어긋남이 적지 아니하였으나 유독 교남인사들만 흔들리지도 않고 물들지 아니하였으므로 이는 선정의 덕화라 하여 임금은 친히 제문을 지어 이만수로 하여금 3월24일 사당에 치제하였다. 치제문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 천인성명의 진리와 공맹정주의 학문을 밝혀서 먹줄과 자로 삼아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바로 잡았었다. 타고난 자질이 혼혼하였고 꾸준한 공부는 전진만 하였다. 도학이 끊어지지 아니함은 진실로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릉(선조대왕 능호임)을 뫼신 자리에서 영특한 지혜를 밝게 펼쳤다. 시골에서는 포백같은 빛이되고 조정에서는 경학의 주장이 되셨다. 각건을 쓰고 영남으로 내려 갔으니 개석처럼 정길하였다. 오로지 여기 도산에 머물러서 길이 수양의 자리로 삼았었다. 기국을 심어 반찬으로 삼고 손으로 서적을 펼쳤다. 학문의 조예가 너무도 깊었으니 사칠의 학설을 세밀히 분석하였다. 모든 사람이 태산처럼 우러르고 한 지방에 샘물처럼 흘러 젖었다. 선비들은 법도를 배웠고 길삼하는 여인들도 사양하는 예절을 알 게 되었다. ...... 그러므로 추로지향이라 일러옴은 과연 누구의 공로였던가? ...<후략>...
이 치제 식전에 참여한 선비가 7,228명이었다. 처음에는 서원 안에서 과거를 치르려고 하였지만, 너무 많은 응시자들이 몰려와 서원 안에서 과거 시험을 치르기에는 너무 비좁았다. 그래서 강 건너 들로 옮겨서 3월25일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과거 시험 총 응시자 중 답안을 제출한 유생은 모두 3632 명으로, 그 가운데에서 합격자는 모두 11명이었다. 급제자는 2명, 진사가 2명, 향시 초시 7명 합격자를 선발하고 상을 하사하였다.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하여 정조 20년에 시험관이 자리 잡았던 곳에 단을 쌓고, 기념비각을 세우고 시사단이라 불렀다. 비문은 영의정을 지낸 채번암(蔡樊巖, 휘는 濟恭)공이 지었는데 비명은 다음과 같다.
陶水洋洋 其上也壇 壇有階級 水有淵源 登壇臨水 觸類而伸 先正之化 聖主之恩
도수양양 기상야단 단유계급 수유연원 등단임수 촉류이신 선정지화 성주지은
<번역>
도산 물 양양히 흘러 그 위에 단이로다. 단에 계급이 있고 물엔 연원이 있나니 단에 오르고 물에 임함에 류를 따라 뜻을 펴노니 선생의 덕화요 임금님의 은혜로다.
1974년에 안동댐이 만들어지면서, 서원 앞 낙동강과 섬마[섬촌], 부포의 넓은 들 모두가 물에 잠기게 되어 1973년 그 장소에 석축을 높이 쌓아 비각을 옮겨 보수하였다. 문제 제목을 게시하였던 소나무를 "게제송"이라 하였는데 두 그루 중 한 그루가 살아 있었으나 보수하면서 사라지고 없다.
퇴계선생이 관찰한 가송리(佳松里)의 현학(玄鶴, 먹황새). Crane and black stork
도산서원에서 동북쪽으로 하계, 원촌, 천사를 지나 낙동강을 건너 산을 오르면 청량산 줄기 아래 낙동강 상류가 굽이쳐 흐르는 절경이 내려다 보인다. 오른 쪽으로 에원싼 산자락 앞에 가송리(佳松里: 속칭 가사리) 마을이 있다. 마을 가운데 고산정(孤山亭)이 있고 낙동강 물줄기 따라 서남쪽에 학소대(鶴巢臺) 암벽이 있고 강 건너 약 30 m 높이의 나즈막한 고산이 서있다. 고산정은 금문원(琴聞遠, 1530~1570)이 세운 정자이다. 문원은 자이고 휘는 난수(蘭秀), 호는 성재(惺齋)이며 퇴계선생의 문도였다. 1564년 늦은 봄 64세의 퇴계는 당시 35세의 성재와 가송리의 풍광을 감상하며 시를 주고 받으며 보낸 적이 있다. 그때 지은 퇴계선생의 시는 다음과 같고 이 시를 각한 편액이 지금도 고산정에 걸려 있다.
次 琴聞遠 孤山韻 차 금문원 고산운
君非出仕故無歸 占斷煙霞自不違
境絶更饒田墾闢 山孤唯稱鶴栖飛
四時來往雙茫屩 萬事榮枯一薜衣
日月佳名吾所愛 尋君時復翫餘輝
聞遠有田在孤山日洞月潭皆勝也
군비출사고무귀 점단연하자불위
경절갱요전간벽 산고유칭학서비
사시내왕쌍망갹 만사영고일벽의
일월가명오소애 심군시부완여휘
문원유전재고산 일동월담개승야
<번역>
금문원의 고산 시의 운에 따라서
자네는 벼슬하지 않았으니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필요도 없네
안개와 저녁 노을 산수경치를 혼자 차지한 것과 다를 바 없네
빼어난 경치에 넉넉한 밭을 개간하였고
산은 외로우나 학이 깃들고 날아든다 할만하네
사계절 오갈 때 신는 한 짝 짚신조차도
만사 일어나고 이지러짐이 한낱 풀옷에 지나지 않지만
일동과 월담 그리고 가송 이름은 내가 좋아하는 바이니
다시 자네를 찾아올 때 나머지 경치를 즐겨보세
문원은 고산에 밭을 갖고 있고 그곳에 있는 일동과 월담은 모두 경치가 좋은 곳이다.
당시에 퇴계는 중국 항조우 서호(西湖, 시후)의 신선인 임화정(林和靖, Lin He Jing, 본명은 임포, 林逋, Lin Bu, 967~1028)처사가 벼슬하지 아니하고 매화나무를 심고 학을 길렀다는 고상한 취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 시에 나오는 가송리 고산과 서호의 고산이 우연히 연결되고 있는 가운데 학이 등장하였다. 서호의 고산에 비하여 가송리 고산이 훨씬 더 고요한 벽지 산골이다. 벼슬을 버리고 돌아올 필요도 없다는 구절도 벼슬하지 않은 임화정 처사와 일맥 상통한다.
퇴계 11대손인 용산(龍山, 자는 군택:君宅, 휘는 晩寅, 1834~1897)도 이 시의 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은 "고산정차판상운(孤山亭次板上韻)"이라는 시를 지었다.
孤山梅盡鶴不歸 剛恨吾行盛時違
古人影子蒼厓見 閒者心機白鷺飛
繞枕灘聲頻倚欖 拍囱嵐翠濕生衣
階前頑石渠猶幸 雨露先天帶德輝
고산매진학불귀 강한오행성시위
고인영자창애현 한자심기백로비
요침탄성번기람 박창남취습생의
계전완석거유행 우로선천대덕휘
<번역>
고산에 매화는 지고 학은 돌아오지 아니하고
아쉽게도 내가 갔을 때는 제철이 아니었네
옛 사람 그림자는 푸른 하늘가에 비추이고
조용한 마음 속으로 백로가 날아가네
벼개머리 개울 물소리에 자주 나무에 기대보니
천정을 두들기는 저녁 물총새는 젖은 나래옷 입었네
계단 앞 굵은 돌은 개울 건너기에 더 좋고
이슬비 나리는 앞쪽 하늘에 덕이 빛나네
이 시에도 고산, 매화, 학이 등장하여 역시 임화정 신선과 묘하게 연결됨을 느낄 수 있다. 이 두편의 시에 나오는 학은 목과 날개 끝이 검고 목이 길며 머리 정수리가 빨간 단정학(丹頂鶴)<photo: 두루미, 배성환 지음/ 다른 세상>이었는지 아니면 먹황새(玄鶴)였는지는 불확실하다. 「차 금문원 고산운」이라는 시는 퇴계가 학을 직접 관찰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조류학자 원병오(元炳旿) 교수는 「신박물기(新博物記)」130 -131(조선일보 1974년 8월21일자)에서 "가송동의 먹황새" 그리고 "퇴계와 현학의 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산고유칭학서비"라고 한 구절의 학은 곧 안동군 도산면 가송동의 현학-바로 먹황새였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조사된 한국 유일의 먹황새 번식지를 일찌기 읊은 위대한 도학자의 시였다.
그리고 1937년 안동농림학교의 교사였던 고바야시(小林)를 통해 먹황새 둥지가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경성대학의 모리(森爲三)교수가 1938년 3월 현지 답사결과를 보고하였다고 한다. 다음해인 1939년 "천연기념물 제72호: 안동군 도산면의 오학(烏鶴) 번식지"로 지정되었다고 소개하였다. 모리교수가 만난 가송리 사람들은 먹황새가 오래전부터 그곳에 깃들이고 살아왔다고 말해주었단다. 날씨가 따스한 해면 먹황새는 1년 내내 그곳 학소대 둥우리를 떠나지 않고 실았다. 원체 추운 해면 겨울동안은 남쪽으로 날아가 겨울을 나고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나는 1964년 고등학생 시절 여름방학에 고종형과 함께 청량산을 등산하느라 이곳을 지나며 아름다운 절경을 구경한 적이 있다. 그 당시 비를 맞으며 가송리에서 배를 타고 고산으로 건너 가 먹황새를 우연히 보기도 하였다. 그때 이미 이 지역은 먹황새 서식지로 이름이 나 있었다. 나는 더 어릴 때 안동시 용상동 마뜰 낙동강변에서 학을 본 적도 있었다. 요즘처럼 환경오염으로 찌든 우리나라 산하에서 학을 발견하기란 매우 어렵다. 그러면 여기서 학과 두루미, 먹황새에 대해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원병오 교수의 《한국의 조류목록》에 따르면 두루미목(Gruiformes)의 두루미과(Gruidae)의 우리나라 새들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Grus leucogeranus Pallas 시베리아흰두루미 Siberian Crane
Grus vipio Pallas 재두루미 White-napped Crane
Grus canadensis (Linnaeus) 카나다두루미 Sandhill Crane
Grus virgo (Linnaeus) 쇠재두루미 Demoselle Crane
Grus grus Linnaeus 검은목두루미 Common Crane
Grus monacha Temminck 흑두루미 Hooded Crane
Grus japonensis (P.L.S. Muller) 두루미 Red Crowned Crane
그리고 황새목(Ciconiformes) 황새과(Ciconidae)에는 다음 두 종류가 소개되어 있다.
Ciconia nigra (Linnaeus) 먹황새 Black Stork
Ciconia boyciana Swinhoe 황새 Oriental Stork
해방후 한참 지나서 1968년 5월30일 먹황새를 천연기념물 200호로 지정하였다. 먹황새와 두루미(학) 그리고 재두루미의 차이는 문화재청의 소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천연기념물 200호 황새 <photo>(1968년 5월30일 지정)는 유럽에서 시베리아 남부를 거쳐 이란, 아무르, 우수리, 바이칼 지역, 중국 동북지방 북부, 한국, 일본,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 분포한다.
전장(全長) 96㎝, 머리와 목, 윗가슴과 등은 광택있는 검은색이고 배는 흰색이다. 부리와 다리는 붉은색이며 눈 주위의 나출(裸出)된 피부는 붉은색이다. 둥지는 암벽이 움푹 들어간 곳에 틀며, 매년 같은 둥지를 보수하여 이용하거나 장소를 옮겨가기도 한다. 흰색의 알을 3-5개 낳는다. 내륙의 평야와 논, 간혹 산악의 아주 작은 골짜기에서 서식(棲息)하며 ‘휘유-, 오-’또는‘호이-, 오-’소리를 낸다.
한반도의 지난날의 번식집단(평남 덕천에서도 6.25전까지 한 쌍이 번식하였다고 함. 정종열, 1987)은 사라졌으나 1983-1984년에는 함북 무산군에서 전번식기 내에 한 쌍이 발견되어(둥우리는 아직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곳에서 새로이 번식하리라 예측하고 있다. 그러나 남한지역에서는 불규칙적으로 겨울철 한 마리씩 모습을 드러내는 매우 희귀한 겨울새이다.
한국에서 지금까지 10마리의 채집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서 8마리는 함북, 경기, 충북 등지에서 9-10월 남하 이동시에 채집되었고 2마리는 경상도에서 월동기인 1-2월에 채집된 예가 있다. 이 외에도 전후에 미지수의 먹황새가 월동중에 밀렵되었다. 모리(삼:森)가 1938년 3월 경북 안동군 도산면 가송리에서 유일한 번식지를 보고한 이래 1968년까지 그곳에서 계속 번식하여 왔었다. 1965년 6월 가송리 천마산 절벽바위에서 부화한 새끼 2마리를 확인한 예가 있다. 그러나 마지막 둥지마저 사람의 피해를 입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979년 1월 19일 대성동 자유의 마을에서 북한지역을 왕래하는 한 마리의 먹황새를 관찰한 것을 비롯해서 겨울철에 불규칙적으로 해에 따라서는 한 마리씩 한반도(제주도까지)에 나타나고 있다.
천연기념물 202호 두루미 <photo> (1968년 5월30일 지정)는 중국 동부 지방(만주), 시베리아의 아무르, 우수리 지방, 일본 북해도 동북부의 구시로 지방과 한국, 몽고 등지에서 분포한다.
전장(全長) 136㎝, 몸의 대부분은 흰색이다. 눈앞과 목의 앞부분은 검은색이다. 검은색의 둘째날개깃은 앉아 있을 때 꼬리를 덮고 늘어져 있어 꼬리로 착각하기 쉽지만 날 때에는 뚜렷하게 보인다. 붉은색 이마는 아주 근거리에서 볼 수 있다. 개활지(開豁地)에 갈대 등을 모아 둥지를 만든다. 엷은 황갈색 바탕에 회적갈색(灰赤褐色) 반점이 산재한 알을 2개 낳는다. 포란(抱卵)은 암수가 공동으로 한다.
개활지, 논, 소택지(沼澤地), 하구(河口), 갯벌, 초습지에서 서식(棲息)한다. 러시아 칸카 호반(블라디보스톡 북방 288㎞)에서 약 20마리씩 분산된 다섯 무리의 약 100마리 집단, 만주 동북부 흑룡강성 자롱(찰룡(札龍))에서 약 1,100마리(원병오, 1980), 그리고 일본 북해도 동북부 천로(釧路)의 습지와 기타 지역에서 모두 500마리 등 약 1,600여 마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두루미류의 전부이다.
한국의 주요 도래지는 강화군 화도면 여차리에서 길상면 선두리에 이르는 해안 갯벌(17-23마리), 파주군 군내면 대성동 자유의 마을과 판문점 부근(40-50마리), 철원군 동송읍 삽술리 및 철원읍 대마리 지역(272-275마리 내외)의 3개 지역이며 월동집단은 모두 350마리 내외이다.
최근 일본 출수(出水)월동지에서 발신기를 수개체의 등에 부착 방조한 결과 한강 하구와 철원 분지를 중계지로 일시 기착하였다가 북상함이 확인되었다.
천연기념물 203호 재두루미 <photo> (1968년 5월30일 지정)는 중국 동북 지방(만주)의 서북부와 중앙부, 우수리 계곡, 한카호 분지, 몽고, 한국, 일본 규슈 등지에 분포한다.
전장(全長) 119㎝, 머리와 목은 흰색이며 몸은 회색(灰色)이다. 몸의 회색부분(灰色部分)은 목으로 올라가면서 점점 좁아져 눈 바로 아래에서는 가는 줄로 되어 있다. 눈앞의 나출(裸出)된 피부는 붉은 색이며 부리는 황록색이다. 습지(濕地)의 작은 섬에 둥지를 튼다. 산란기(産卵期)는 4월경이며 엷은 갈색 바탕에 암갈색(暗褐色)의 얼룩무늬와 반점이 있는 알을 2개 낳는다. 개활지(開豁地), 논, 소택지(沼澤地), 하구(河口), 갯벌, 초습지에서 서식(棲息)한다. 울음소리는 과시 행동을 할 때‘큐웃, 큐루루루루, 코로로, 코로로, 코로로, 코로로, 키로로’ 또는 ‘쿠쿠쿠쿠쿠쿠쿠루루-, 쿠쿠-,쿠루루’하고 울며 일제히 울 때는 ‘가-오우, 가-오우’하고 시끄럽게 운다.
한강 하류와 하구의 개발로 지난날의 주도래지였던 김포군 하성면과 파주군 교하면의 한강 하구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추었으나 한강 하구와 임진강 하류가 교차되는 지점 일원, 한강 하구에서 일산까지의 일원에서는 150-200마리가 월동하며, 특히 춘추의 이동시기에는 820마리(1992년 11월 2-7일과 1993년 3월 16일)가 약 한달간 기착한다. 또한 강원도 철원 분지에서는 약 200마리의 월동군과 춘추의 이동 시기에는 832마리(1992년 11월 10일과 1993년 3월 8일)까지 관찰되었다. 파주군 군내면 일원의 비무장 지대에서 200마리 미만의 집단이 취식 월동하며 그 밖의 부근에서 100마리 미만의 적은 무리가 함께 월동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월동하는 재두루미는 약 300마리 미만의 적은 집단이다. 이 외에도 5-10마리 내외의 적은 무리는 남단지역에 분산되어 월동한다(부산 낙동강 하구, 경남 창원군 주남 저수지 등지). 나머지 도래군은 제주도나 해상을 지나 일본 구주(九州) 녹아도(鹿兒島)의 남부 출수(出水)지역으로 건너가 월동하고 이듬해 봄 다시 북상하여 한반도를 거쳐 번식지로 향하게 된다.
한국의 한강 하구와 대성동 등지의 월동군이 1976년의 1,500마리에서 300마리 미만으로 감소한 반면, 일본 출수(出水)의 월동군은 1975년의 781마리에서 1978에는 1,448마리로 증가되었다. 전세계 생존집단은 약 3,000마리 내외로 추산한다.
천연기념물 200호인 먹황새는 남제주군 안덕면 대평리 해안 포구에 날아와 월동중인 것으로 확인됐다는 보도가 있었다(중앙일보 2000년 12월 16일 토요일). 또한 2003년에도 전남 함평군 대동면 대동댐에 먹황새 3마리가 첫 목격된 이후 7마리와 9마리가 한꺼번에 발견됐다는 보도가 있었다(연합뉴스 2003년 2월14일). 나는 2003년 12월23일 제주도 중문에서 꼬리가 잿빛인 왜가리를 관찰하고 처음에는 학이라고 착각하였다.
환경오염에 찌든 오늘날 우리는 두루미(=학)나 황새를 구경하기 어렵다. 멸종 위기의 희귀새를 살려야만 한다.
부록(Appendix) 1 <Photo> 터키에서 관찰한 황새. Oriental Stork observed at a countryside near by the samll villege of Basmakci at altitudes of up to 1600m and Burdur lake of Isparta in Turkey. May 22, 2003
도산서원과 중국 매화 탐험에서는 학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는 탐조가는 아니지만 중국 방학정의 무학부를 보고나서부터 학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금년 초여름 터키 남부 항구도시 안탈랴(Antalya)로부터 북쪽으로 140km 떨어진 이스파타(Isparta)와 부두르(Burdur)를 지나 해발 1600미터에 위치한 산간오지 바스막지(Basmakci) 마을로 터키 장미(Rosa damascina) 탐험을 갔다. 부두르 호수(Burdur golu lake)가에 있는 케메르(Kemer)라는 조그만 농촌에서 우연히 관찰하게 된 황새는 농가 굴뚝에 둥지를 트고 새끼들을 돌보며 한쌍이 한가로이 쉬고 있었다. 너무나 평화로워 보였다. 높은 산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지만 초여름의 태양이 내려 쪼이고 공기는 더 없이 맑았다. 황새를 발견한 순간 나는 학인줄 착각하고 정말로 신선이 된 기분으로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학은 이런 곳에 사는구나 하면서 행운을 고마워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이 새는 황새였다. 2003년 5월 22일 터키 현지촬영.
부록(Appendix) 2 <Photo> 프랑스에서 관찰한 황새. Stork observed at a countryside near by La Camarque of Provence in France. May 29, 2003
프랑스 아로마 탐험길에 나서서 프로방스 아를(Arles) 남쪽에 위치한 카마르그 (La Camarque) 자연공원 주변에서 홍학 <photo>을 보았다. 호수와 바닷가와 늪지에 노니는 매우 많은 무리의 홍학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를로 돌아오는 570번 도로변에서 전신주 위에 둥지를 트고 있는 황새를 보고 나는 다시 한 번 신선이 되었다. 처음에는 학(=두루미)인줄 알았다. 프로방스 지중해 연안의 평원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부터 뜨거운 태양이 쏟아지고 있었다. 곳곳에 피어난 라벤더 꽃은 하루 하루 보라빛을 더해 가며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내가 도로변 갓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황새를 촬영 또 촬영을 하니까 주행하던 차량들이 모두 차를 세우고 내따라 사진들을 찍어 댔다. 그리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워 "메르시!" 사인을 나에게 보낸다. 프랑스 사람들도 새들을 너무나 좋아하는가부다. 그러나 프랑스의 그 유명한 화가들은 왜 학이나 황새를 그리지 않았을까? 2003년 5월29일 프랑스 현지 촬영.
부록(Appendix) 3 <Photo> 카나다에서 관찰한 두루미. Sandhill crane observed at the Whiffit Spit Park of Sook Harbour near Victoria, BC, Canada. July 15, 2003.
캐나다 장미 탐험길에 나서서 빅토리아(Victoria) 서남쪽 수크해안 휘피트 스피트 공원(Whiffit Spit Park of Sook Harbour)에서 학을 정말로 만났다. 오전 11시가 지났는데도 안개가 자욱한 바닷가에 노니는 두루미(=학)는 정말로 하늘나라에서 구름타고 금방 내려온 것 같았다. 금년에 세 번이나 황새와 학을 보았으니 삼선(三仙)?이 된 기분으로 잠시나마 맑은 공기 속에 세상 티끌에 시달린 넋을 씻을 수 있었다.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순간, 학을 볼 수 있는 행복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학이라는 신선의 새를 만나고 있을 뿐이라고 자문자답하였다. 부질없는 야욕이 사라지고 다른 모든 잡념을 잊었다. 2003년 7월15일 캐나다 현지촬영.
<Photo> 퇴계선생 유묵 유정(柳庭) 이원회(李源會) 편저 《진이 오가세록(眞李 吾家世錄)》과 《오가세묵(吾家世墨)》에서 인용함
이 유묵(遺墨)은 퇴계선생의 친필로서 선생의 조고(祖考) 노송정(老松亭)공의 묘비 전면 큰 글씨이다.
퇴계선생은 서필에도 일가를 이루었는데 문인이었던 정문봉(鄭文峰, 휘는 惟一)공이 찬술한 「언행통술」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그 필법에 있어서는 처음에는 진나라 법을 본받다가, 뒤에는 또 여러 가지 체를 취하였다. 그러나 대개는 굳세고 건실하며 방정하고 엄한 것을 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글씨 한자만 얻어도 마치 많은 금을 얻은 듯 보배롭게 여겼다. 그의 시문의 아름다움과 서법의 묘함은 온 세상이 모두 스승으로 본받았으니 여기에서 "덕이 있으면 반드시 말이 있고, 통한 재주는 능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따위는 선생에 있어서는 여력으로 한 것이니, 그것이 어찌 선생의 인격의 경중에 관계되겠는가? "
활인심방(活人心方)
《활인심방》은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아들이었던 주권( 朱權, 현주도인 함허자:玄洲道人 涵虛子, 구선:臞仙, 1378-1448)이 지은 《활인심(活人心)》상하 두권 중 상권의 내용을 퇴계선생이 친필로 복사하여 펴낸 것이다. 본문의 내용은 활인심서(活人心序), 활인심, 중화탕(中和湯), 화기환(和氣丸), 양생지법(養生之法), 치심(治心), 도인법(導引法), 거병연수육자결(去病延壽六字訣), 사계양생가(四季養生歌), 보양정신(保養精神), 보양음식(保養飮食) 등으로 나뉘어져 있다. 사람이 병드는 것을 예방하고 질병의 고통으로 부터 구하거나 살리어 활기찬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의술을 " 활인"이라 부른다. "신성(神聖)의 의사는 병들기 전에 다스리고 뒤떨어진 의원은 병이 난 후에 고친다"고 구선(臞仙)이 말하였다. 병을 다스리는 법은 이와 같이 두 가지이나 병의 근원은 모두가 마음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이 책은 특히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修養)에 역점을 두었다.
《활인심방(活人心方)》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의 하나인 「도인법」은 바로 퇴계선생이 즐겨하셨던 맨손 체조에 관한 것이다. 활인심방의 서문(序文)을 보면 양생도인법(養生導引法)이란 아주 먼 태고 적부터 있어 왔으며, 고대 중국의 전설적 임금인 태호(太昊)씨 때부터 양생법이 보급되었고,그 이후 고대시절 정착생활을 가르쳤던 유소(有巢)씨가 기혈을 고르게 하는 약이지설(藥餌之說)을 내 놓았으며, 상고시대의 인물로 알려진 음강(陰康)씨 때에 이르러 기혈도인법(氣血導引法)이 비로소 창시된 것이라 풀이하고 있다. 도인법이란 우리 몸안에 새로운 기를 이끌어 들이고 낡은 기를 내뱉어서 인체를 단련하는 운동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켜듯 온몸을 쭉 늘이면서 숨을 크게 쉬는 동작을 체계적으로 행하는 것이 바로 도인법이라 할 수 있다. 퇴계선생이 남기신 그림이 거의 없는데 이 책에는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운동방법과 운동횟수 등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어 특기할 만 하다. 이 운동을 하루에 세 번 정도씩 오래 하면 거의 모든 병들이 사라지고 몸이 가쁜해진다고 한다. 나는 어릴 때 조부께서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서 곧바로 이 《활인심방(活人心方)》도인법 체조를 매일같이 규칙적으로 하시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운동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고치집신(叩齒集神) : 양다리를 책상다리로 꼬고 앉아서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정신을 집중하여 아래윗니를 딱딱 부딪치기를 36회 반복한다.
두손을 목덜미 뒤로 깍지끼고 조용히 숨소리가 들리지 않게 아홉번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그런 다음 두 팔꿈치를 앞으로 하여 천천히 당겨 팔목이 턱에 닿게 한 다음 두 손으로 양쪽 귀를 덮고 집게 손가락을 가운데 손가락에 겹쳤다가 미끄러뜨리며 뒤통수를 탁탁 퉁기는데 좌우 각각 24회씩 반복한다.
2) 수악천주(手握天柱): 왼 손으로 오른쪽 손목 안쪽에 있는 천주혈을 잡고 고개는 왼쪽 방향으로 돌리고 오른팔과 어깨를 24회 흔든다. 오른 손으로 같은 동작을 스물 네 번씩 한다.
3) 설교행화(舌攪行火) : 입안에서 혀를 골고루 휘저어 이의 구석 구석을 닥아내듯 36번 돌리서 생긴 침을 세 번에 나누어 삼킨다. 침(액)은 용(龍)이고 기(氣)는 호(虎)이다.
이어서 코로 맑은 기를 들이마신후 호흡을 잠시 쉬었다가 두 손으로 콧등과 얼굴을 문질러 따뜻하게 하고 천천히 기를 내보낸다. 양손을 주먹쥐고 위로 뻗쳐 올렸다 굽혀 내렸다를 반복한다.
4) 마신당(摩腎堂) : 두 손을 돌려 허리 뒤의 신장 부위를 서른 여섯 번 문질러 준다. 손을 모아 앞 가슴의 심장주변을 마찰한다. 두 손을 모아 붙잡고 숨을 한번 들이마신후 입과 코의 호흡을 멈추고 심장의 따뜻한 기운을 배꼽아래 단전(丹田)쪽으로 내려 보낸다. 반복하여 따뜻해지면 코로 숨을 천천히 마셔 새로운 기를 받아들여서 한참 멈춘 후 기를 단전에 보낸다
5) 단관록노전 (單關轆轤轉) : 자리에 앉아 머리를 앞으로 숙이고 한 손을 주먹쥐어 허리 뒤에 대고 어깨를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36번 회전한다. 팔을 바꾸어 다시 36번 한 뒤 코로 숨을 들이 마셔 잠시 멈추고 단전에 기를 보낸다.
6) 쌍관록노전 (雙關轆轤轉) : 두 손을 모두 주먹쥐어 허리 뒤에 대고 어깨를 36번 회전시키고 단전으로부터 기가 척추를 거쳐 머리에 오르게 한다. 맑은 공기를 들이 마셔 잠시 멈춘후 내보내고 두 다리를 쭉 뻗는다.
7) 양수탁정 (兩手托頂) : 두 손을 깍지끼고 손바닥이 하늘을 향하게 하여 밀어 올린다. 3회 내지 9회 반복한다.
8) 저두반족 (低頭攀足) : 자리에 앉아 두 다리를 뻗치고 두 손으로 발바닥 중심부를 감싸듯이 잡고 숨을 들여 마시면서 발을 잡아당기며 머리와 가슴을 앞으로 굽힌다. 허리를 펴면서 숨을 내쉰다. 이 동작을 13번 한다. 다리를 굽혀모우고 단정히 앉는다. 끝으로 입을 다문채 혀를 저어 침을 만든 뒤 세 번에 나누어 천천히 삼켜 마무리 한다.
「중화탕(中和湯)」이라는 처방은 다음의 30가지 약재의 맛을 씹고 씹어 마음의 불 1근과 콩팥의 물 두대접으로 끓여서 5번에 나누어 때를 가리지 않고 따뜻하게 복용하면 의사가 고치기 어려운 모든 병도 고칠 수 있다고 하였다. 매일 비타민을 복용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행동강령을 잊지 말고 끈기있게 실천하라는 처방이다. 그러면 원기를 유지하고 사특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여 만병이 발생하기 어려우며 오래도록 평안하게 장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사무사(思無邪) : 생각함에 사특한 것이 없도록 할 것
행호사(行好事) : 좋은 일을 행할 것
막기심(莫欺心) : 마음을 속이지 말 것
행방편(行方便) : 해결 방법을 잘 선택할 것
수본분(守本分) : 본분을 지킬 것
막질투(莫嫉妬) : 시기하거나 샘내지 말 것
제교사(除狡詐) : 교활하거나 거짓됨을 없앨 것
무성실(務誠實) : 성실히 일할 것
순천도(順天道) : 하늘의 이치에 따를 것
지명한(知命限) : 타고 난 목숨에는 한계가 있음을 알 것
청심(淸心) : 마음을 맑고 깨끗이 할 것
과욕(寡慾) : 욕심을 줄일 것
인내(忍耐) : 잘 참고 견딜 것
유순(柔順) : 부드럽고 순할 것
겸화(謙和) : 겸손하고 화목할 것
지족(知足) :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줄 알 것
염근(廉謹) : 청렴하고 삼가 조심할 것
존인(存仁) : 마음이 항상 어질 것
절검(節儉) : 절약하고 검소할 것
처중(處中) : 한쪽에 치우치지 말고 중용을 지킬 것
계살(戒殺) : 살생을 경계할 것
계노(戒怒) : 성냄을 경계할 것
계폭(戒暴) : 거친 행동을 경계할 것
계탐(戒貪) : 탐욕을 경계할 것
신독(愼篤) : 삼가고 독실할 것
지기(知機) : 일의 기틀을 알 것
보애(保愛) : 사랑을 유지할 것
염퇴(忄舌退) : 물러서야 할 때 조용히 담담이 물러날 것
수정(守靜) : 고요함을 지킬 것
음즐(陰騭) : 숨은 덕이나 은혜를 쌓을 것
또한 「화기환(和氣丸)」이라는 처방약은 참을 '인(忍)'자이다. 성화가 나서 몹시 참기 어렵거나 화급을 다툴 때 먹는 알약이다. 말이 필요없고 입을 꾹다물고 침으로 '인(忍)'자를 녹여 천천히 삼키면 즉효가 있어 병을 낫게 한다고 하였다. "마음위에 칼이 놓였어도 군자는 용서하여 덕을 이루나 냇물 밑에 불이 있어도 소인배는 분노하여 몸을 손상시킨다 [심상유도 군자 이함용성덕 천하유화 소인 이분노손신(心上有刀 君子 以含容成德 川下有火 小人 以忿怒損身)]"는 것이다. 화가 치밀어 급할수록 「화기환」을 한 알 입안에 넣고 입을 다물고 침으로 녹여 천천히 씹어 삼켜 보면, 분하고, 노하고, 탐하던 마음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잘 참아내는 것이 마음과 몸을 상하지 않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는데 매우 좋다.
「양생지법 (養生之法)」에는 다음과 같이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생활 내용을 담고 있다.
비장(脾藏)은 음악을 좋아하며 저녁 식사를 많이하면 비장이 소화작용을 제대로 할 수 없다.《주례(周禮)》에 의하면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식사한다고 하였다. 그러면 비장의 소화작용에 좋으며 밤이 짧은 여름철에는 저녁을 적게 먹고 소화가 잘 안되는 것은 피하도록 해야한다.
술을 바르게 마시면 성정(性情)이 즐거워지고 혈맥을 잘 통하게 하는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과하면 몸에 풍(風)을 일으키고 신장(腎臟)을 상하게 하고 장(腸)의 기능을 나쁘게 한다. 특히 배불리 먹은 뒤의 음주는 피해야 하고 술을 급하게 많이 먹으면 폐(肺)를 상하게 할 우려가 있다. 술 마시고 덜 깬 상태에서 갈증이 심할 때 물이나 차를 많이 마시면 술을 신장으로 끌어들여 독한 물이 정체하여 허리와 다리가 무거워 지고 방광에 냉통을 겸한 수종과 소갈증(당뇨병)을 가져오게 한다. 차는 언제든지 많이 마셔서는 안되는 물질이며 하초(下焦)를 허(虛)하고 냉(冷)하게 한다. 포식후 한, 두잔 마시는 것이 좋고 공복시에는 피해야 한다.
앉은 자리나 누운 자리에 바람이 통하는 것을 느끼면 신속하게 피해야 하고 그냥 참고 견디면 아니된다. 특히 노인들은 몸이 약하고 속이 허해서 풍사(風邪)가 들기 쉬우며 처음에는 못 느끼나 결국 몸을 해치게 되니 덥다하여 바람맞이에서 몸을 식히거나 부채질은 좋지 않다
오미(五味)를 적게 쓰면 심신(心神)이 상쾌하게 되며 많이 쓰면 각 장부에 해가 있다. 신 맛이 지나치면 비장을 상하고, 매운 맛이 지나치면 간을 상하게 되고, 짠맛이 지나치면 심을 상하게 되고, 쓴 맛이 지나치면 폐를 상하게 되고, 단 맛이 지나치면 신을 상하게 된다. 맛이 지나쳐 생기는 것을 처음에는 잘 못 느끼나 오래 되면 큰 병을 얻게 된다.
어느 한가지를 오래 쳐다보고 있으면 심을 상하고 혈을 손(損)한다. 그러므로 어느 한 가지에 정신을 오래 쏟거나 몸을 고정시키지 말고 변화를 주어야 한다. 사람이 나태해지고 몸이 나른해지는 것도 오래되면 병이 된다. 항상 힘을 적당히 써서 생기가 잘 소통하고 혈맥이 조창(調暢)토록 해야 하는 것이니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누워 잘 때의 좋은 자세는 몸을 옆으로 하고 무릎을 굽히는 것인데 그렇게 하여야 심기가 평안하다. 몸을 쭉펴서 자면 악귀를 불러 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잠을 잘 때 말하는 것이 좋지 않고 불을 켜놓고 자면 정신을 불안하게 한다.
머리는 자주 빗되 목욕은 가끔하라. 머리를 많이 빗으면 풍(風)을 예방할 수 있고 눈이 밝아진다. 목욕을 자주하면 심복(心腹))을 손상시켜 권태로움을 느끼게 된다.
여름에도 노소를 불문하고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가을에 토사곽란에 걸리지 않는다. 뱃속은 따뜻해야 좋은데 그러면 배의 병이 생기지 않으며 혈기가 장성해진다.
한여름 더운 때라 하여 찬물로 세수하면 오장(五藏)이 메마르고 진액(津液)이 줄어든다. 찬 것을 많이 먹으면 시력을 상하며 냉(冷)한 채소는 기(氣)를 다스리기는 하나 눈이나 귀의 기능을 떨어뜨린다.
혀밑에는 옥천(玉泉)이라는 두 개의 구멍이 있어 신(腎)과 통하였으니 혀를 입천장에 대고 잠깐 있으면 진액이 저절로 나와 입 안에 가득할 것이니 천천히 삼키면 오장으로 들어가게 되고 기(氣)로 변하여 단전으로 들어가게 된다. 머리는 자주 빗어야 하고, 손으로는 얼굴을 문지르고 치아를 자주 마주쳐야 하고, 침은 항상 삼켜야 하고, 기(氣)는 마땅히 정련(精鍊)하여야 한다.
「치심 (治心)」편에는 구선이 말하기를 "마음은 신명(神明)의 집이니 속은 비었고 지름이 한마디에 불과하나 신명이 여기에 깃들어 사물을 다스린다. 난분(亂棼)을 가려내는 것 같고 급한 물을 건너는 것도 같아 두려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하여 하루에도 수시로 바뀐다. 그러므로 신이 머물지 않으면 좀먹고 밝지 못하면 소모되어 버린다. 도(道)는 깨우치려 해도 스스로 깨치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 누가 말하기를 "선(善)을 항상 행하더라도 한번 욕심이 동하면 곧 선하지 못한 것이다." 하였으니 얼른 착함으로 되돌려 분하고 원통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적으로 알라. 내가 선한 마음으로 분한 마음을 다루면 풀릴 것이나 풀리지 않으면 삶을 해칠 것이니라. 무릇 칠정(七情)과 육욕(六慾)이 모두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니 마음을 고요히 하면 신명에 통하여 미리 앞일을 내다 볼 수 있으며 집밖을 나가지 않아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고 하늘의 이치를 절로 알 게 된다. 대게 마음은 물과 같아서 흔들리지 않으면 자연히 맑아져서 그 밑바닥까지 환히 보이는 것이니 이를 영명(靈明)이라 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원기(元氣)를 키우면 모든 병을 물리쳐 오래 살 수 있다. 신(神)은 밖으로 들고 기(氣)는 몸안으로 흩어지고 피도 이를 따라 생기가 혼란스러워져 백 가지 병이 생겨난다. 이는 모두 마음에서 비롯하여 생기며 무릇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케 하여 질병이 나타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마음 다스리는 법(法)이다.
《거병연수육자결(去病延壽六字訣)》편에서는 간단한 여섯 글자를 소리냄으로서 병을 치료하고 오래 살 수 있는 건강법을 소개하였다. 간(肝)이 허(虛)하면 눈이 흐려지고, 폐(肺)가 약해지면 숨소리가 거칠게 나고, 심(心)이 약해지면 기지개를 자주 켜개 된다. 신(腎)이 약해지면 무릎을 감싸고 웅크려 앉기를 잘하고, 비(脾)에 병이 생기면 입이 마르고 오므라들고, 삼초(三焦)에 열이 있으면 누워서 잘 앓게 된다.
취신기(吹腎氣) : "취"소리 하면 신장의 기운을 키운다. 신장의 병은 물 기운으로 인하니 신장은 생문(生門)의 주(主)가 되며 병이 들면 파리해 지고 기색(氣色)이 검어지고 눈썹이 성기고 귀가 울게 된다. "취"하면 사기(邪氣)를 내 보내 장수할 수 있다.
가심기(呵心氣) : "훠"소리 하면 심장의 기운을 돕는다. 마음이 산란하거나 초로하면 빠르게 "훠" 하면 신통한 효험을 볼 수 있으며 목이나 입에 염증이 생기며 열이 나고 아픈 데에도 "훠"를 하면 좋다.
허간기(噓肝氣) : "휴"소리 하면 간의 기운을 돕는다. 간은 병이 들면 시거나 쓴 맛을 좋아하는데 눈도 붉어지고 눈물도 많이 난다. 그럴 때 "휴"를 해주면 잘 낫는다.
사폐기(四肺氣) : "스"하면 폐의 기운을 돕는다. 폐에 이상이 있어 숨쉴 때 "스스" 소리가 나는 사람은 침이나 가래가 많다. 가슴이 답답하고 번거러움도 상초(上焦)에 가래가 많은 때문이니 날마다 "스", "스" 하면 매일 매일 좋아진다.
호비기(呼脾氣) : "후"소리 하면 비의 기운을 돕는다. 비장은 토(土)에 속하며 태창(太倉) 이라고도 부르는데 병이 들면 그 처방이 쉽지 않다. 설사하고 장이 끓고 물을 토하면 "후" 하여 속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좋다.
희삼초(嘻三焦) : "히"소리 하면 삼초(三焦)의 기(氣)를 돕는다. 삼초에 이상이 생기면 "히" 해주면 좋다. 옛 성인이 "이것이 가장 좋은 의원이다"라 하였다. 막힘을 통하게 하려 할 때 이법을 안쓰고 어디서 다시 구할 것인가.
따라서 「사계양생가(四季養生歌)」라고 사계절로 건강노래를 불렀다. 봄철에 "휴" 하면 눈이 밝아지고 간이 좋아지며 여름에 "훠" 하면 마음의 불이 절로 가라 앉는다. 가을에 "스"하면 기를 거두어 들이기 때문에 폐기능이 좋아지고 겨울에 "취"하면 평안하다. 삼초가 약할 때 "히-" 하면 헐떡거림을 없애고 사계절에 항상 "후"하면 비장 기능이 좋아 지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보다 더 좋다.
"취", "훠", "휴", "스", "후", "히" 모음을 길게내는 발성은 신체에 산소를 공급하고 깊은 호흡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혈액순환과 에너지 흐름을 활발하게 만들고 긴장을 풀어주게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Photo: ppt file> 퇴계선생의 가계연원. Family root of Toegye. 소류(素柳) 이원오(李源五) 편저 《오가근체세록(吾家根棣世錄)》에서 인용함.
퇴계선생의 팔고조(八高祖)의 가계연원을 요약한 것이다. 팔고조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외할아버지를 가리킨다.
퇴계의 선부군인 찬성공(휘 埴)의 초취는 의성 김씨고(슬라이드 첫째 페이지) 계취는 춘천 박씨이다(슬라이드 둘째 페이지). 정경부인 의성 김씨는 2남1녀를 두셨고 정경부인 춘천 박씨는 5남을 두셨다. 퇴계는 춘천 박씨 소생으로 7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나셨다.
나는 매화향기를 따라 조상의 빛나는 자취를 공부할 수 있는 분복을 누리게 되었다. 도산서원 매화 탐험을 계기로 《퇴계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각종 논문과 자료들, 그리고 나의 선고(先考)께서 1960년대부터 이십여년간 심혈을 기울려 편집하셨던 《오가세록》과 《오가세묵》그리고 《도산서원요람》등을 다시 한번 열람하고 퇴계선생의 훌륭한 자취를 알아 보면서 망극한 마음이 절로 일어났다.
<Photo> 온혜 노송정(老松亭) 종택과 퇴계선생 태실( 경상북도 민속자료 60호)
[준비중]
<Photo> 퇴계선생 종택과 매원
[준비중]
MBC-TV에서 제작하여 방영한 2부작 [한국의 종가] 씨리즈 중 제1부(2/17/03)에서 다루어진 퇴계종택의 영상 클립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자료실 Link http://www.anthropology.or.kr/database/LMW/vd_content.asp?gubun=1%20&idx=285
<Photo> 퇴계선생 묘소
[준비중]
원촌 (遠村)
<Photo> 매화사 곡 금치삼(梅花詞 哭琴稺三) 이중수(李中洙) 지음《이류재문집(二柳齊文集)》 Poem of Maehwasa by Joong-Soo Lee whose pen-name was Yi-Ryu
도산서원에서 동북방으로 퇴계종택을 거쳐 약 3km 상류에 원촌(遠村)이라는 산명수려한 마을이 있다. 원촌이라는 지명은 원래 말을 매어 두던 곳이라는 "말먼데[마계촌(馬繫村)]"가 차차 변하여 "멀먼대"가 되었다. 이것을 한자로 표기하여 "원원대(遠遠坮)"가 되고 원촌이 되었다고 전해온다. 이 마을은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거유(巨儒) 문한(文翰)과 판서, 참판, 판의금, 대사간, 감역, 첨추, 교리, 응교, 현감, 진사 등 사환(仕宦)과 항일 의사(義士)들을 포함하여 걸출한 인사들이 많이 배출된 영남의 대표적 반촌의 하나다.
나의 증조부이신 이류부군은 진성이씨(眞城李氏)로 휘(諱)가 중수(中洙)이고 자(字)는 달원(達源)이며 호를 이류재(二柳齋)라 하였다. 퇴계선생의 12대손으로 서기 1863년 원촌에서 태어나 1946년 작고하셨다. 용산(龍山, 휘는 晩寅)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유가전범(儒家典範)을 이어받아 덕행 학문으로 사림의 장석(丈席)으로 추앙을 받았으며 《이류재문집(二柳齋文集)》이 있다.
매화 향기에 관심이 깊어 《이류재문집》을 펼쳐 「매화사(梅花詞)」라는 훌륭한 시를 나의 중숙부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공부하였다. 고시(古詩)로 지어진 이 한시는 이류(二柳)부군이 금치삼(琴稺三)의 영전에 애도하면서 바친 글이다. 치삼은 자이고 휘는 용하(鏞夏), 호는 학산(鶴山)이다. 이 시에는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탄식하며 맥수지탄(麥秀之嘆)을 상징적으로 토로한 학산의 일생과 곧은 절개가 잘 묘사되어 있다. 나라 잃은 슬픔이 학산의 영전(靈前)에서 더욱 애절함을 "의희칠분영 기총월흔흔(依俙七分影 綺牎月痕痕)"이라는 절묘한 마지막 구절로 통곡하고 있다.
梅花詞 哭琴稺三 <二柳齋 李中洙 作>
百年梅村宅 孫枝五葉春 第一直上幹 淸瘦不染塵
生長羅浮下 宛是澹粧人 明時違鼎實 天涯流落身
何陰世己邈 知己鮮見倫 西湖仙不返 孤鶴獨翩翩
我有宅邊柳 軟質輸爭旛 巡簷時共索 欣然一笑溫
山亭淸艶景 澗齊活發源 幽香拍拍襲 妙韻細細論
一夕風雨盪 江國怱淫昏 群芳皆就荒 姱節紛獨存
十年苦守株 春光不漏盆 芳心自消盡 何山托枯根
依俙七分影 綺牎月痕痕
매화사 곡금치삼 <이류재 이중수 작>
백년매촌댁 손지오엽춘 제일직상간 청수불염진
생장나부하 완시담장인 명시위정실 천애유락신
하음세기막 지기선견륜 서호선불반 고학독편편
아유댁변류 연질수쟁번 순첨시공색 흔연일소온
산정청염경 간제활발원 유향박박습 묘운세세론
일석풍우탕 강국총음혼 군방개취황 과절분독존
십년고수주 춘광불루분 방심자소진 하산탁고근
의희칠분영 기창월흔흔
(번역)
매화사 금치삼을 곡함 <주1> <이류재 이중수 지음>
오랜 세월 이어온 매촌 집안 <주2>
자손 가지 벌어 다섯 잎 봄을 맞았었네 <주3>
제일 똑바로 올라간 줄기 <주4>
맑고 여리나 세상 티끌에 물들지 않았었네
나부에서 태어나 자랐고 <주5>
어여쁘기 단정하게 다듬은 사람이었네
밝음을 솥에 담을 수 없는 때에
하늘가에서 흘러 떨어진 몸이었네
음덕을 받은 세대가 아득히 멀어
지기라도 그의 윤리를 알아보는 이 드물었네
서호의 신선은 돌아오지 아니하나 <주6>
외로운 학은 홀로 훨훨 나는구나 <주7>
우리 집 가에 있는 버드나무에 <주8>
연질을 날라와 깃발을 다투었네
처마를 둘러볼 땐 함께 찾으며
기꺼이 함께 웃으며 기뻐했었네 <주9>
산의 정자 맑은 경치
개울과 집은 활발하였네
그윽한 향기 듬뿍 입어
오묘한 운율을 세밀히 논하였네
하루 저녁에 비바람 몰아쳐 <주10>
나라 강산이 온통 어지럽고 어두워지니
어진 선비들이 모두 황폐해졌으나
아름다운 절개 홀로 우뚝 빼어났었네
십여 년 어렵게 지킨 뿌리
봄빛이 그릇을 스며 나오지 못하였구나
아름다운 마음 스스로 불태웠으니
마른 뿌리 어느 산에 의탁할고?
고희의 칠순 그림자 <주11>
창가에 어른거리는 달빛조차 상처뿐이로구나
<주석>
주1> 금치삼은 봉화(奉化)인으로 휘(諱, 본명)는 용하(鏞夏)이고 호는 학산(鶴山)이며 치삼(稺三)은 자(字)이다. 퇴계 문도였던 성재(惺齊) 금난수(琴蘭秀)의 후손으로 철종11년 경신년(서기1860년)에 태어나 기사년(서기1929년)에 작고할 때 까지 예안 부포에 살았다. 학산문집이 남아 있다.
주2> 매촌은 학산의 증조부로서 휘는 시술(詩述)이다. 문과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으며 문집이 있다.
주3> 학산은 오형제였는데 매화 꽃잎이 다섯 잎이라는 것에 비유한 표현이다.
주4> 학산이 맏아들임을 비유한 표현이다.
주5> 소동파의 매화시에 표현된 <나부산하매화촌 옥설위골빙위혼(羅浮山下梅花村,玉雪爲骨冰爲魂)>의 나부산하 매화촌을 떠올리게 하는 절묘한 문장이다. 나부(羅浮)는 예안 부포(浮浦)를 가리키며 매촌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나부(羅浮, 뤄푸)는 매화를 상징하는 지명으로서 중국 광조우(廣州)에 있는 산이름이다.
주6> 서호의 신선은 화정(和靖, Hejing) 임포(林逋, Lin Bu) 처사를 가리킨다.
주7> 외로운 학은 학산을 가리키며 임화정(林和靖, Lin Hejing: 林逋, Lin Bu)이 은둔하여 살았던 서호 고산(西湖 孤山)의 학에 비유한 표현이다.
주8> 이 시를 지은 이류(二柳)부군(府君)의 집을 비유한 표현이다.
주9> 학산은 원촌으로 출입한 문객이며 이류부군과 평소 학문을 교류하였음을 비유한 표현이다.
주10> 경술국치(庚戌國恥, 왜인들은 한일 합방 또는 병합이라 표현)를 비유한 표현이다. 융희4년(서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학산은 부친 상중에 쓰다 벗었던 <photo>패랭이(상주가 쓰는 대오리로 얽어 만든 갓의 일종)를 꺼내 쓰고 통곡하면서 십여년간 두문불출하였다고 한다. 한편 학산의 사돈인 류선원(柳鮮原)은 완산류씨(完山柳氏)로 휘가 이형(耳亨)이고 안동 무실[수곡(水谷)]에 살았는데 국치소식을 듣고 <photo>갈모(비오는 날 갓위에 쓰는 유지로 만든 비모자)를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도 쓰고 다녔다고 한다. 애국 지사 <금학산>과 <류선원>의 우국충정에 관한 이 실화를 나의 조고이신 류포(柳圃, 휘는 珏鎬)부군으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바 있다. 생각컨데 망국의 비애는 부모의 상고보다 더더욱 죄스럽고 애통하며 망국의 하늘에 어찌 태양이 빛나고 있을까보냐!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이 지은 《야언(野言)》에는
동천년노항장곡 매일생한불매향(桐千年老恒藏曲 梅一生寒不賣香)
이라는 유명한 글귀가 있다.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아니한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은 이러한 매화의 아치고절(雅致高節)의 기품을 닮으려고 노력하였다.
주11> 학산은 서기 1860년에 태어나 1929년에 작고하였으니 70 향수를 하였음을 비유한 표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