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가면서 예페스는 점차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게 되었고, 그의 아버지는 두말않고 아들의 학비를 지원해 주었고, 그는 1940년 명문 발렌시아 음악원에 진학하게 되었다.
발렌시아 음악원 재학시절 그는 작곡가 Manuel Palau, 기타리스트 Marco Garcia de la Rosa, 지휘자 Lamonte de Grignon 등에게 작곡법과 기타 연주법 등을 사사받았다.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동음악원의 Vicente Asencio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아센시오 교수는 예페스 앞에서 유창한 피아노의 스케일을 연주하고는 기타로 그 스케일을 연주해 보도록 지시하였다 한다.
빠르고 큰 음량의 피아노 스케일을 기타로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아센시오는 쩔쩔매고 있는 예페스에게 "기타란 악기는 음계 하나도 제대로 연주해 낼 수 없는 악기란 말이다"라는 말을 던졌다고 하며 예페스는 큰 상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페스는 몇번이고 노력하여 음계의 속도와 질감을 높였으며 기타 특유의 주법인 트레몰로를 필사적으로 연마하여 다시 아센시오 교수를 찾아갔다고 한다.
교수의 앞에서 유창하게 스케일을 연주한 예페스는 갈고 닦은 실력으로 트레몰로곡을 연주한 뒤 반문하였다.
"교수님, 피아노로 이 트레몰로를 연주해 보시겠습니까?"
그러자 아센시오 교수는 껄껄 웃으며
"그러고보니 기타란 악기가 영 못쓸 악기는 아닌것 같구만"
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어떻게 보면 아센시오 교수야말로 예페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아니었을까.
이 일화에서 예페스의 굴하지 않는 기타에의 열정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1946년 발렌시아 음악원을 졸업하고 수도 마드리드에 정착하여 음악활동을 준비하던 그는 당시 최고의 비루투오조 중 한 명이었던 레히노 사인즈 데 라 마자에게 헌정된 로드리고의 명작 아란훼즈 협주곡의 마드리드 초연을 지휘자 Ataulfo Argenta에게 제의받게 된다.
연주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예페스라는 기타리스트의 이름은 이를 계기로 스페인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1955년에는 역시 아르헨타의 지휘로 이 곡을 취입하였다.
그는 스페인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넘치는 음악에의 학구열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위스, 이탈리아를 거쳐 빠리로 넘어가 당대 최고의 음악 교육자인 나디아 불랑제 여사와 작곡가 죠르쥬 에네스코, 발터 기제킹 등에게서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음악을 더욱 갈고 닦았다.
그의 국제적인 데뷔 연주회는 Salle Gaveau에서 행해졌으며, 기타가 아직 제대로 소개되지 않던 프랑스에서 당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소르본느 대학에서 계속 공부를 하며 연주활동을 벌이던 1952년 예페스는 영화감독 르네 끌레망의 방문을 받고 그가 만들고 있는 영화의 음악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게 된다.
그 영화는 다름아닌 지금은 고금의 명작으로 전해지는 <금지된 장난(Jeux interdits)>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를 거두었고, 이 명작에서 사용된 예페스 연주의 애잔한 Romace의 선율은 전세계인의 가슴에 큰 감동을 심어 주었다.
세고비아라는 큰 그늘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추구하던 그는 심지어 의학부에도 진학, 인간의 손의 구조를 해부학 실습을 참관하며 탐구하는 등 그야말로 진지하고 아카데믹한 음악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는 병적으로 세고비아류의 루바토와 딱히 음악적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고전물들의 애매한 해석을 참지 못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러한 연구자세를 자신에 대한 반기를 드는 모습이라고 생각한 세고비아는 동향의 후배임에도 예페스를 죽는 날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또한 예페스는 동구를 포함한 유럽 전역의 고악문서를 불원천리하고 수집하여 류트나 비우엘라 등 기타의 조상격이 되는 악기들의 문헌과 악보를 탐독 연구하였으며,
바흐의 류트를 위한 작품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그 자신이 류트를 연주하기도 하였고
또한 현대의 기타로 이를 표현하기에 난점이 많다고 판단, 제작자 파울리노 베르나베에게 의뢰하여 저 유명한 예페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10현 기타 "Decacorde"를 만들게 된다(1964). 이러한 다현기타의 발명은 예페스의 역사적 탐구에 입각한 것으로 실제 19세기까지 많은 다현기타가 제작 연주되었다는 사료를 연구하여 그 전통을 이은 것으로 오늘날 다현기타를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들의 효시가 된 셈이다.
그는 류트로는 아르히브 레이블, 10현 기타로는 그의 소속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 레이블로 바흐 류트곡 전곡집을 각각 세계최초로 녹음 발표하여 또 하나의 기타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이정표를 세웠다.
세고비아의 고집도 대단하여 이런 업적을 세운 동향의 후배를 다음과 같은 말로 일축하였다고 한다.
"기타에 현을 다는 시도를 하는 친구가 요즘 열심히 활동하는 모양인데 나같으면 차라리 기타에 현을 덧붙이느니 손가락을 덧붙였으면 좋겠군...기타는 6현으로 충분하단 말일쎄"
서로를 의식한 때문인지 예페스는 점차 연주스타일에서 의도적으로 세고비아류의 감상적인 면을 배제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예페스의 연주는 상당히 견고하지만 낭만적인 면이 결여된 연주라는 평가를 자주 받아 오게 된 동기가 되었다.
그는 음악으로 스페인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공로로 각종 서훈과 표창을 수없이 받은 마에스트로였지만, 자신의 고향 로르카를 평생 잊지 않았으며 사석에서는 소박한 시골사람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는 항상 연주회장에서 연주를 시작하기전 그윽한 눈길로 관중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모두 한가지 목적, 아름답고 지고한 음악의 세계를 함께 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과 이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할까 합니다"
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고 한다.
만년인 1980년대 그는 한쪽 눈이 거의 실명인 상태에서도 멀리 한국을 방문, 내한공연을 가졌다.
1997년, 그는 멀고도 영광스러웠던 음악인생을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