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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스크랩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죠?”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milkyway 추천 0 조회 71 19.02.10 02: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죠?”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학생은 왜 내 얼굴만 빤히 쳐다 보죠?”선생님이 물었다. 학교 또는 학원에서 선생의 미모에 반하여 얼굴만 쳐다 보고 있을 때 선생이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어 올까?

 

마음은 한순간에 두 가지 일을 못한다고 하였다. 동시에 보고 듣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한 순간에 한가지 일 밖에 못하므로 별개로 보고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선생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기만 했다면 선생이 무슨 말을 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종종 TV나 영화를 볼 때 좋아 하는 배우가 나온다. 배우의 미모와 모습에 반하다 보면 배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 분명히 배우는 화면에서 무언가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 또는 짝사랑 하는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 있으면 그저 보기만 해도 좋다. 그가 또는 그녀가 어떤 말을 해도 상관없다. 말은 귀에 들어 오지 않고 오로지 앞에 있는 그 또는 그녀의 모습만 보아도 행복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32상에 반한 박깔리

 

어느 법우님은 스님을 끔직하게 존경한다. 스님이 법문을 하면 맨 앞에 앉아 열심히 쳐다 본다. 스님이 말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어떤 말을 해도 모두 오케이(OK)이다. 스님이 세간에 비난 받는 행위를 해도 난 스님만 믿고 따를거야라며 말한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현상이 있었다.

 

박깔리는 부처님의 32상에 반하였다. 법회를 하면 제일 앞에 앉아 부처님만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Ala? vakkali. Ki? te imin? p?tik?yena di??hena,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

 

[세존]

박깔리여,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Vakkali sutta-박깔리의 경, 상윳따니까야 S22.87, 전제성님역)

 

 

Vakkali

 

 

수행승 박깔리가 병에 걸려 괴로워하자 부처님은 병문안 갔다. 가서는 박깔리여, 그대는 참아낼 만한가?”라며 물어 보았다. 이에 박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참아 낼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박깔리는 중병에 걸렸던 것이다.

 

부처님과 박깔리는 대화하였다. 대화중에 부처님은 박깔리에게 그만두어라(Ala?)”라고 하였다. 무엇을 그만 두라는 것일까?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 주석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상상할 수 있다.

 

가책이나 후회할 만한 일은?

 

부처님은 박깔리에게 박깔리여, 어떠한 가책이 될 만한 일이라도 한 적이 있는가? 어떠한 후회가 될 만한 일이라도 한적이 있는가?”(S22.87) 라고 물어 보았다. 여기서 가책이나 후회할만한 일은 무엇일까? 경이나 주석에서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추론으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박깔리에게 박깔리여, 그대가 계행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욕되게 한 적이 없는가?”라며 물어 본다. 이에 박깔리는 세존이시여, 저는 계행을 실천하는데 자신을 욕되게 한적이 없습니다.”라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책이나 후회할 만한 일은 계행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대체 가책이나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계행을 잘 지키는 박깔리에게 가책이나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스리랑카 아상가 교수는 선생과 학생의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학생이 선생의 미모에 반하여 빤히 얼굴만 쳐다 보고 있는 식으로 설명한 것이다.

 

박깔리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귀를 기울이지 않고 얼굴만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바로 이것이 가책이나 후회할만한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일까 부처님은 그만두어라.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 (Ala? vakkali. Ki? te imin? p?tik?yena di??hena)” (S22.87) 라고 하였을 것이다.

 

부처님의 육체는 매력적

 

부처님의 육체는 매력적이다. 이는 디가니까야 위대한 사람의 특징의 경(D30)’에서 잘 표현 되어 있다. 부처님의 32가지 특징을 보면 인간을 초월한다. 신의 형상이라 볼 수 있다.

 

특징 중에 열한 번째를 보면 황금빛을 띤 황금과 같은 피부의 특징이 있다고 하였다. 열 다섯 번째을 보면 균형잡인 몸이라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송출자는 나무와 같은 균형잡힌 몸을 지니게 되었다.”고 게송으로 노래 하고 있다.

 

스물 아홉 번째와 서른 번째를 보면 깊고 푸른 눈과 황소의 것과 같은 속눈썹의 특징이라 하였다. 이외에도 부처님은 마흔 개의 치아와 평평하고 가지런한 치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천상의 목소리는 어떤 특징을

 

부처님은 목소리도 좋았다. 스물 일곱 번째와 스물 여덟 번째를 보면 넒고 긴 혀와 청정한 목소리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송출자는 그의 혀는 넓고 광대하여 설득력 있는 말을 하였다.”라 하였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받아 들이니. 많은 자들이 많은 설해진 것을 송출하리.”라 허였다. 부처님의 목소리가 매력적 이었음에 틀림 없다. 누구라도 한번 그 소리를 들으면 반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목소리는 다름 아닌 천상의 목소리이었다.

 

그렇다면 천상의 목소리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그 목소리는 여덟 가지 특징 곧, 유창하고, 지적이고, 달콤하고, 또렷하고, 낭랑하고, 분명하고, 심오하고, 공명하는 특징을 갖추었습니다.”(D18) 라 하였다. 이는 야차가 범천 싸낭꾸라마의 목소리에 대하여 설명한 것이다.

 

여기서 유창하다는 것은 잘 통해서 장애가 없는 것을 말한다. 지적인 목소리는 의미를 분명히 한다는 뜻이다. 달콤한 목소리는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또렷한 목소리는 듣기에 알맞고 귀에 즐겁다는 뜻이다. 낭랑한 목소리는 일체가 되어 흩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명한 목소리는 명료하여 혼란이 없다는 뜻이다. 심오한 목소리는 단전으로부터 깊이 일으킨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공명하는 목소리는 큰 비구름의 북소리처럼 크게 울린다는 뜻이다. 부처님은의 목소리도 아마 이러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을 하면 설득력 있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부처님의 32상은 인간을 뛰어 넘는 것이다. 다름 아닌 천상의 사람 모습이다. 형상과 음성 모두 보통 인간들에게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그래서 열 다섯 번째를 보면 하느님처럼 단정한 몸매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송출자는 몸은 하느님처럼 곧고 단정하다.”라고 하였다.

 

박깔리는 하느님(Brahma:梵天)처럼 단정한 몸매와 하느님처럼 청정한 음성을 지닌 부처님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설법을 하면 형상과 음성에 반하여 빤히 쳐다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나의 부서져 가는 몸을 보아서 무엇하느냐?”며 나무란다. 그러면서 박깔리여,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 (yo kho vakkali, dhamma? passati so ma? passati)” (S22.87)  라고 훈계한다.

 

박깔리는 설법중에 부처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 보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은 박깔리여, 참으로 진리를 보면 나를 보고 나를 보면 진리를 본다. (dhamma? hi vakkali, passanto ma? passati. Ma? passanto dhamma? passati.)”(S22.87) 라 하였다. 이와 같은 말은 이띠붓따까에서도 보인다.

 

쌍가띠 옷의 자락을 붙잡고 따라 다니며

 

이띠붓따까에서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만약 수행승이 쌍가띠 옷의 자락을 붙잡고 따라 다니며 자신의 발로 나의 발자취를 밟더라도”(It91) 로 시작 되는 가르침이 있다. 여기서 상가띠는 웃옷 가사를 말한다. 어떤 수행승이 부처님에게 반하여 부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따라 다니거나 가는 길 마다 따라 다닌다고 하여 가르침을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은 형상에만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래서 그가 탐욕스럽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타락하고, 새김이 마비되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올바로 집중하지 못하고, 마음이 산란해지고, 감각능력이 통제되지 못하면, 나는 그에게서 멀고 그는 나에게 멀다.” (It91)  라 하였다.

 

수행승이 비록 계행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의 겉모습에만 매혹 되어 따라 갈 때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Yojanasate ce pi so bhikkhave bhikkhu vihareyya so ca hoti anabhijjh?l? k?mesu na tibbas?r?go aby?pannacitto appadu??hamanasa?kappo upa??hitasati sampaj?no sam?hito ekaggacitto sa?vutindriyo, atha kho so santike va mayha?, aha? ca tassa. Ta? kissa hetu? Dhamma? hi so bhikkhave bhikkhu passati dhamma? passanto ma? passat?

 

[세존]

수행승들이여, 만일 그 수행승이 일백 요자나 떨어져 살더라도, 그가 탐욕스럽지 않고,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자극되지 않고, 마음에 분노가 넘치지 않고, 정신적으로 사유가 타락하지 않고, 새김이 마비되지 않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올바로 집중하고, 마음이 통일되고, 감각능력이 통제되면, 나는 그에게서 가깝고 그는 나에게 가깝다. 그것은 무슨 까닭이냐?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진리를 보기 때문이다. 진리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다.”

 

(Sa?gh??ika??asutta -쌍가띠 옷의 자락의 경, 이띠붓따까 It91,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일백 요자나 떨어져 살더라도 가르침을 잘 실천한다면 부처님이 바로 옆에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서 가깝고 그는 나에게 가깝다. (atha kho so santike va mayha?, aha? ca tassa)”라 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부처님이 계시지 않지만 부처님이 설하신 가르침이 실려 있는 경전을 가까이 한다면 부처님이 바로 앞에 계시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다.(dhamma? passanto ma? passat?)라 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수행자 고따마의 아들이다

 

상윳따니까야와 이띠붓따까에 실려 있는 진리를 보면, 나를 보는 것이다. (dhamma? passanto ma? passat?)라는 말은 매우 유명하다. 후대 법신사상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이띠붓따까 주석에 따르면 육체적인 눈으로 여래를 보고 물질적 몸으로 여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앎의 눈(???acakkhu)으로 여래를 보고 진리의 몸(法身:dhammak?ya)으로 여래를 보는 것”(It.II.115) 이라 하였다. 그래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dhamma? passati so ma? passati, yo ma? passati so dhamma? passati)”라고 한 것이다.

 

법신사상의 토대가 되는 말은 디가니까야에서도 보인다. 디가니까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D27)’에 따르면 진리의 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관련 구절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bhagavato'mhi putto oraso mukhato j?to dhammajo dhammanimmito dhammad?y?do'ti. Ta? kissa hetu? Tath?gatassa heta? v?se??h?, adhivacana? dhammak?yo itipi, brahmak?yo itipi, dhammabhuto iti pi, brahmabhuto iti pi.

 

그에게는 ‘나는 세존의 아들, 그의 적자, 그의 입에서 태어난 자, 진리에서 생겨난 자, 진리에서 만들어진 자, 진리의 상속자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울린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쎗타여, 여래에게는 ‘진리의 몸’이라든가 ‘하느님의 몸’이라든가 ‘진리의 존재’라든가 ‘하느님의 존재’라든가 하는 명칭이 있기 때문이다

 

(Agga??asutta- 세계의 기원에 대한 경, 디가니까야 D27, 전재성님역)

 

 

부처님이 바라문 바셋타에게 네 가지 계급의 평등에 관한 설명에서 나온 말이다. 네 가지 계급에서 출가한 자들에 대하여 누군가 그대들은 누구인가?”라고 물었을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우리는 수행자 고따마의 아들이다.”라고 대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나는 세존의 아들, 그의 적자, 그의 입에서 태어난 자, 진리에서 생겨난 자, 진리에서 만들어진 자, 진리의 상속자이다.”라고 말해야 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세존의 아들(bhagavato'mhi putta)’이라 하였다. 불자가 된다면 모두 부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불자(佛子)’라 하였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세존의 아들이라는 것은 세존에 의해서 성스런 경지에 태어난 것”(Smv.865) 이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거듭태어남을 말한다. 누군가 출가하여 머리를 깍고 가사를 입었다면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이전의 나는 죽고 부처님 아들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부처님의 적자라는 것은 그의 가슴에 사는 자를 뜻한다고 한다. 입에서 태어난 자는 입에서 나온 가르침의 소리에 의해서 길과 경지를 확립한 자를 뜻한다고 하였다. 진리에서 생겨난 자 또는 진리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는 고귀한 가르침에 의해 생겨나고 고귀한 가르침에 의해 창조된 자라는 뜻이라 한다. 진리의 상속자라는 것은 아홉 가지 출세간의 원리의 상속자라 하였다.

 

진리의 몸(法身 : dhammak?ya)에 대하여

 

부처님은 진리의 몸(dhammak?ya)’‘하느님의 몸(brahmak?ya)’‘진리의 존재(dhammabhuta)’‘하느님의 존재(brahmabhuta)’라는 명칭이 있다고 하였다. 이를 한역으로 법신(法身), 범신(梵身), 법성(法性), 범성(梵性)이라 한다. 여기서 진리의 몸가르침이 여래의 몸이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몸진리의 몸이 바로 하느님의 몸이라는 뜻인데, 이는 진리가 최상의 의미에서 하느님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설하신 진리 그 자체가 부처님의 몸이고 하느님의 몸과 같다는 뜻이다.

 

진리의 존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 주석에 따르면 가르침을 자성으로 하는 자라 하였다. 하느님의 존재는 진리의 존재가 바로 하느님의 존재인데, 진리아 최상의 의미에서 하느님이라 하였다.

 

대승불교에 불성(佛性)’이 있다. 이를 영어로 붓다네이쳐(Buddha nature)’라 한다. 부처의 성품을 말한다. 부처가 될 성품이 내재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부처인 것을 안다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내가 부처인 것을 확인하는 작업이 수행이라 한다. 하지만 부처님 가르침에 불성에 대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불성은 참나와 같은 개념이다. 본래불, 본래면목, 진여 등도 같은 개념이다. 모두 여래장사상을 근거로 한다.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잉태 되어 있음을 말한다. 언제 될지 알 수 없지만 누구나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불교, 선종에서는 불성이라 하여 이 생에서도 가능하다고 한다. 부처의 성품만 보아 버리면 단박에 깨달아서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초기경전 그 어디에도 불성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의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 하신 진리를 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법신사상이다.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는 스승

 

부처님은 진리의 몸을 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대승에서의 삼신중의 하나인 바이로차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승에서 말하는 바이로차나는 법신으로서 진리 그 자체를 말하지만 부처님아 말씀 하신 진리의 몸과 같은 개념이라 보기 힘들다. 오히려 힌두교와 가깝다. 힌두교에서 비쉬누, 시바, 브라흐마로 대표 되는 삼신이 불교에서 법신, 보신, 화신이라는 삼신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의 몸을 말하였다. 그렇다고 힌두교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는 무식을 스스로 폭로 하는 말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힌두교가 없었다. 불교는 브라만교를 비판하고 성립하였기 때문이다.

 

힌두교는 불교가 크게 세력을 떨치고 난 이후 발생된 것이다. 브라만교가 토속신앙을 수용하여 환골탈태한 것이 힌두교이다. 대력 B.C 2세기 이후의 일이다. 부처님 당시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교가 힌두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개구즉착의 스승은 스스로 무식을 폭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이 현전한 듯한 빠알리니까야

 

박깔리는 부처님을 육체적인 아름다움으로만 보았다. 이에 부처님은 박깔리에게 병문안을 가서 박깔리여,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로 시작 되는 문답식 가르침을 주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초불연 각주를 보면 부처님이 체득하신 무상--무아의 법을 봐서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을 성취하여 깨달음을 실현해야 진정으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초불연 상윳따3, 306번 각주) 라 하였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진실로 부처님을 보는 것이고, 이는 바로 부처님의 몸, 진리의 몸, 법신(dhammak?ya)을 말한다.

 

부처님은 진리의 몸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부처님의 32상에 매료 되어 빤히 쳐다 보는 박깔리에게 부서져 가는 몸을 쳐다보면 무엇하느냐며 나무라며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지는 진리를 본다.”라며 법신을 말씀하셨다. 그런 진리의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백 요자나의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가르침을 실천하여 오염원을 떨쳐 버렸다면 부처님을 면전에서 본 것이나 다름 없다. 또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말로 번역된 빠알리니까야만 접해도 진리의 몸, 부처님이 현전한 것이나 다름 없다.

 

 

2015-12-25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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