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캐나다 출신의 감독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 <아무르>는 뇌졸중으로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간호하는 남편에 대한 얘기다.
노부부는 둘 다 음악가 출신이고,아내는
특별히 명성을 날렸던 피아니스트 출신이다.
추억의 명화 '남과 여'에 나왔던 남자 배우 장 루이 트랑티냥과 '히로시마 내 사랑'에 나왔던 명배우 엠마뉘엘 리바.
두 배우는 실제로 팔순에 접어든 노구로 노부부 역할을 연기했다.
영화 초반에 노부부가 나란히 청중석에 앉아 콘서트를 보는 장면에서 울려퍼지던
슈베르트의 즉흥곡 1번 C단조의 우울한 멜로디는 잊을 수 없다.
아 그 영화에 나오던 그 곡만큼 마음에 절실히 파고들던 슈베르트를 나는 알지 못한다.
뭔가 크낙한 비애를 예고하던 그 우울하고 침통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숙연한 체념을 담은 곡조.
그 영화를 보고나서 밤새워 슈베르트의 즉흥곡을 들었다.
영화에서 어느 날 밥을 먹다가 갑자기 아내가 밥을 입밖으로 흘리며 시작된 뇌졸중은 두 부부의 금슬 좋았던 일상을 파괴한다.
아내는 남편을 늘 '때때로 고약하지만 대체로 좋은 사람'이라고 평해왔다.
남편은 실은 아내를 여자로서, 또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숭배해 왔던 텃수였다.
그들의 행복했던 일상을 파괴한 뇌졸중의 내습.
남편은 아내를 극진히 간호하지만 한계에 부닥친다.
남의 손에 맡길 수도 없는 아내와의 고투가 시작된다.
남편은 외부세계와 일체 단절하고 혼자 아내를 돌본다.
아내는 오직 눈으로만 말하고 식음을 거부하며 죽기를 원한다.
아내에게 강제로 음식을 떠먹이던 남편은 음식을 거부하는 아내의 뺨을 얼결에 때리고
그 서슬에 생각을 바꾸어 마침내 아내를 베개로 눌러죽이고는 그동안 띄엄띄엄 써왔던 병상일기를 남기고
그 자신도 죽음을 택한다.
한 쌍의 고독사.
딸이 경찰을 동반하고 와서야 온통 안으로 봉해진 저택의 문이 열린다.
내가 전에 활동했던 싱글카페에서 나는 가벼운 트래킹 번개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한 회원의 차를 얻어타게 되었다.
거의 나와 비슷한 연배였는데 , 그는
남한산성이 가까워 올 무렵 강을 낀 산책로를 내려다 보는 도로를 달리게 되자
벚꽃이 만개한 그 길다란 산책로를 가리키며
그곳이 아내와 함께 걷던 길이며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고백해 왔다.
아내가 말기암 환자로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을 때도 그 산책로를 무척 걷고 싶어했다고 했다.
난 그 얘기를 듣자 독일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이 떠올라서 그에게 그 얘기를 하는 것으로 그의 흔치 않은 고백에 답했다.
그 영화는 아내가 죽자 아내가 생전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던 ㅡ그러나 끝내 가보지 못하고 죽은 ㅡ일본을 방문하는 남자에 대한 얘기다.
아내 살아 생전 남자는 고리타분한 남편이었다.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도쿄의 공원길을 혼자 걷는 남자.
남자는 아내가 배웠던 일본 전통 가무 부토춤을 춘다.
얼굴을 짙게 화장하고 상반신이 거의 드러나는 벌거벗은 상의를 입고 강가에서 부토춤을 추는 남자에게 아내의 혼령이 그림자처럼 찾아온다.
아내는 마치 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그의 손과 팔을 움직이는 듯하다.
그 회원은 내게 그 부토춤을 추는 남편과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 남편은 오히려 덤덤했다.
그는 어리석기까지 했다.
나는 왜 싱글카페에 나오느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자기가 더 늙어 병들면 간호해줄 사람이 필요해서라고 답했다.
내겐 그 말이 어리석게 들렸다.
아내를 마지막 가는 길까지 산책길에 동행했던 그는 훌륭했던 남편이라 할 수 있겠지만 아마 의무적으로 그렇게 했던 것 같이 미루어 짐작이 갔다.
그 역시 자신을 간호해 줄 아내를 바라다니. 나는 어리석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어 가벼운 진저리를 쳤다.
그런 바램으로 아내를 새로 얻고자 하는 남자에게 약간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나는
남한산성을 타고 지나 지하철 역 부근에서 차를 내렸다.
아내를 구하는 것이 우리 세대에는 그런 바램을 가진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든 늙고 병들어 누군가의 간호를 받아야 할 처지라면 그건 의료종사자가 되어야지 아내는 또는 남편, 자식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또 그러기 위해서 꼭 재혼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같이 살지는 않더라도 진심이 있고 오래 된 사이라면 부부 못지 않게 서로를 돌봐줄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생일을 축하해 주고 스킨십을 나누고 아플 때 찾아봐 주고, 죽음의 곁을 지켜봐 주기 위해 꼭 재혼이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남편이고 아내라는 지위에 너무 예속되어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얼결에 아픈 아내의 뺨을 때리고 남편이 급거 깨달은 것도 그 사실이 아니었을까.
아내가 그토록 바라는 죽음을 자신의 손으로 선사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
아무르. Love를 진정으로 깨닫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ㅡ소소 카페 번개를 마친 귀가길 버스간에서. 지솔^^
첫댓글 번개 미팅 시간에 들은 이야깁니다만
지면으로 한 번 더 읽게되니
또 새로운 느낌이네요.
관습적인 것과
오로지 사랑만을 위한 것
그 행위는 같을지라도
그 진실은 다르다는 것?
중요한게 무엇인가는
개개인 성향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닐는지요~^^
음 나중에 생각났는데
저는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관습을 벗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들은 구태의연하게 가부장제에 길들여져 있으니까요.
여자들도 가부장제릏 내면화한 결과를 여성성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사랑과 가부장제를 구별하는 입장을 선호합니다.
가족이란 것도 보편이라기보다는 특수라고 여기고요
ㅎㅎ
그 가치를 인정 안 하는 건 아니지만
저는 이 세상에 불변하는 건 없다고 여깁니다
철학적으로 '탈영토화'라는 용어가 있지요.
영화 '아무르'에서 식음을 거부하는 아내의 뺨을 때린 남편은 자기가 아내를 가부장으로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알아차렸지요.
그게 사랑인지 그때 의심하게 되었죠.
이게 저의 해석입니다.
@지솔
뇌섹남인 지솔님~ ^^
@세인 남편의 의식이 부지불식간에 '탈영토화'한 순간이 바로 그때였죠^^
그 용어를 발명한 철학자 ㅡ질르 들뢰즈 ㅡ가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지솔님의 고견에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 또 산행 같이 해야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