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울의 손으로 <행 11:27-30 >
사람은 - 자신의 손이 어떤 손인가에 따라서 – 자신의 인생 가치가 결정됩니다. - 성경을 보면 – 절대 권력을 가지녔던 빌라도의 손은 - 책임 회피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은 30에 스승을 팔아넘기 가룟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 -탐욕의 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희생과 용서의 손입니다. -그 용서의 손에 사로잡히 사람의 이야기가 오늘의 내용입니다.
뭔가를 작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작정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작정하는 것만큼 -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작정한 것을 실행하기 전에 -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일은 -너무나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자신들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 교인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작정한 - 안디옥 교회의 크리스천들의 작정 역시 -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습니다.
안디옥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 규모나 제도 면에서 - 안디옥 교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히 큰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흉년을 당해 힘들어하는 예루살렘 교인들을 위해 - 부조하기로 안디옥 크리스천들의 작정을 했습니다.
넉넉지 못했던 그들의 형편을 보면 – 자신들보다 월등히 큰 예루살렘 교회를 도와주기로 작정한 것을 번복되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처음 작정했던 대로 - 힘을 다해 그들의 작정을 실행하였습니다.
그들은 작정 그 자체가 믿음이 아니라 - 작정한 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것부터
믿음이 시작됨을 삶으로 보여준, -진정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일입니다. -본문 30절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의 크리스천들은 -그들이 실행한 부조를 –바나바와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부조금을 전달키 위해, -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480Km나 떨어진 예루살렘을 - 직접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 안디옥교회 목회자로 파송된 사람이었습니다. - 이를테면 그 이전까지 그는 - 예루살렘에서 기거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안디옥에 파송된 이후, -다소에 있던 바울을 불러 -공동목회를 시작한 기간이
1년임을 26절이 밝히고 있음에 비추어, - 바나바로서는 - 이번 예루살렘 여행이
약 1년여 만의 귀환임을 알게 됩니다. - 그러나 바울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이때의 예루살렘 상경이, -그가 예루살렘을 떠난 지 무려 14년만에 이루어진 것임을 - 갈라디아서 2장 1절에서 직접 밝히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바울은 -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 자신을
유대교의 배신자로 간주하여 죽이려하자 -그곳을 피해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홀로 경건의 훈련을 쌓았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을 때 -그곳의 유대교인들 역시 바울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안 예루살렘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을 설득하여 그를 고향 다소로 내려보내었습니다. - 그 이후 지금 14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14년 동안 그가 한 일이란, -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에서 공동목회한 1년의 기간을 제외하곤, - 장장 13년 동안에 걸친 - 고향 다소에서의 칩거였습니다.
그렇기에 그 14년이란, - 바울의 인생에서 -참으로 중요하고도 -의미심장한 기간이었습니다. - 그리고 14년이 지난 지금, - 바울의 예루살렘 상경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14년 전에 예루살렘을 떠났을 때가 - 2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 14년이 지난 지금 그는 - 이미 중년이 되어 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청년시절에 떠났던 예루살렘을, - 그는 지금 원숙한 중년의 모습으로 다시 찾아가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 무려 14년 만에 예루살렘을 새로이 향하는 바울의 감회는 -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 크리스천들의 부조금을 - 예루살렘에 전했다고만 단순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손으로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내었음을, - 즉 손을 애써 강조하고 있습니다.
안디옥 크리스천들이 힘을 다해 거둔 부조금은, - 14년만에 예루살렘을 다시 찾는 바울의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바울은 -유대교지도자가 되려는 청운의 꿈을 품고 - 젊디젊은 나이에 고향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유대교 최고 석학의 문하생이 되었고, -자신에 대한 주위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듯 -유대교가 말살하려던 -기독교 핍박의 선봉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크리스천들을 색출하여 - 가차없이 예루살렘으로 연행하였습니다.
무엇으로 그 일을 한 겁니까? - 바로 그의 두 손으로 한 겁니다. - 젊은이의 손은 얼마나 힘차고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그때 젊은 바울의 손이란 - 욕망과 불의의 추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젊은이로는 반드시 피해야만 할 짓이었으나, - 자신의 야망에 불타던 바울은 -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 당시 그는 그 어떤 보석보다 더 귀한 자신의 젊은 생명을, -바로 자신의 두 손으로 허망하게 갉아먹는 - 백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7년 전 그는 - 예루살렘을 떠나 - 무려 230Km나 떨어진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
그 먼 곳에 있는 크리스천들까지 - 예루살렘으로 잡아들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여전한 욕망의 두 손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그는 주님께 사로잡혔고, 그 순간 그는 - 눈이 멀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 자신의 두 손으로 다메섹의 크리스천들을 잡아내기 위해 - 보무도 당당하게 걷던 그는 -어쩔수 없이 남의 손에 이끌려서야 -겨우 다메섹에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자신있게 휘두르던 바울의 두 손이 -남의 손에 이끌려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은, -그가 주님을 만났다는 것이야말로 -욕망의 도구로서의 백해무익한 두 손을 - 상실하였음을 의미하였습니다. - 이제 그에게는 그같은 손은 없어진 겁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때 -남의 손을 의지하고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바울의 모습은, -그것이 젊디젊은 청년의 모습이기에 - 참으로 암담해 보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천만다행한 일이 없었습니다. -욕망의 두 손을 상실했기에, 그때부터 젊은 나이의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자신의 두 손으로 허망하게 갉아먹는 어리석음만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난 후 – 아라바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을 때, - 그는 더 이상 주님의 대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 손은 -더 이상 추한 욕망의 도구는 아니었지만, - 그렇다고 생명의 도구가 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전에 자신이 대적했던 예수님 -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던 예수님 - 바로 그분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시오 - 삼위일체 하나님 되심을 입으로는 열심히 증거하였지만, - 그러나 그의 손은 - 그때까지 빈손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에 불타는, -누구보다도 뜨거운 크리스천이었지만, - 그러나 그의 손으로 무엇을 해야할지를 - 아직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을 향한 열정은 있었으나 -그의 열정이 구체적인 삶으로 연결되지는 못한 상태였습니다. - 결국 그는 -예전에 자신이 몸담았던 유대교인들의 살해위협을 피해, - 쓸쓸히 고향 다소로 낙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텅 빈손으로 말입니다.
그로부터 장장 14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는 지금, -그는 더 이상 빈손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의 손에는 안디옥 크리스천들의 부조금이 들려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었습니다. - 안디옥 크리스천들의 사랑과 봉사와 믿음의 결정체였습니다. -그 생명의 결정체를 -바울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들고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부조금의 운반 자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손이 사랑과 믿음과 봉사 -즉 생명의 도구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크리스천들의 아름다운 부조금을 -바울이 제아무리 손에 들고 있다한들, - 그의 발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면 - 전해줄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두 손만이 아니라, -바울의 두 발마저도 -생명의 도구가 되었음을
본문이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 욕망의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바울의 지체는 -
어느 듯, - 생명과 진리의 지체로 승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바울의 손, -곧 바울의 지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 그의 지체는 이미 주님의 지체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 생명과 진리의 도구가 된 바울의 지체가 닿는 곳마다 -생명과 사랑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로마서 6장 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분기점을 –먼데, -혹은 추상적인데서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분기점을 - 인간의 지체가 -무슨 도구로 사용되고 있느냐에서 찾았습니다.
즉 한 인간의 손과 발이 -죄와 불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면 -그는 죄의 노예 된 악인이요, - 손과 발이 의와 진리의 병기로 쓰여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주님을 믿는 의인이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5절-17절을 통해 소상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아무리 겉으로 고상해 보인다한들 - 창기와 결합한 자가 있다면, - 그의 지체는 - 창기의 지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렇지 않다면 - 창기와 결합할 까닭이 없고, - 또 결합할 필요가 있다면, - 반드시 창기 짓을 멈추게 한 뒤에야 결합할 것입니다.
창기를 창기인 줄 알면서, - 또 창기 짓을 계속하게 하면서 -창기와 결합하는 자의 지체가 - 어찌 창기의 지체와 구별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사람들은 그와 같은 자를 -기둥서방이라 부르면서 -창기와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습니다. - 똑같은 이치로 주님과 결합한 크리스천이라면, - 그의 지체는 주님의 지체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주님의 지체가 되지 않았다면, - 주님과 자기 자신이 - 아직 완전한 결합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의미할 따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두 손을, -그리고 우리의 두 발을 내려다보십시다. -우리의 지체의
의미는 지금 무엇입니까? - 욕망의 도구입니까, - 진리의 도구입니까? - 죄의 병기
입니까, - 의의 병기입니까? - 창기의 지체입니까, - 주님의 지체입니까?
이제 우리의 지난날도 한번 되돌아보십시다. - 20년 전과 비교하여 우리의 지체는
어떻게 변하여 있습니까? - 1년 전과는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우리의 지체가 무엇을, - 혹은 누구를 위한 지체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 지난 일주일 동안 - 우리가 우리의 지체로 무엇을 움켜쥐고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 그 해답은 절로 얻을 수 있습니다.
지난 이레동안 -우리가 그토록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 대체 무엇이었습니까?
만약 그것이 생명이요 -진리가 아니라면, -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는 지난
한 주간 동안도 -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024년 2월 14일부터 3월 30일까지는 –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 부활절까지의 40일 기간 동안 – 우리 각자 자신의 죄를 회개하여 – 기쁨의 부활을 준비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 금년 부활절주일은 3월 31일입니다.
그리고 부활절을 일주일 남겨놓은 3월 24일을 종려주일 혹은 고난주일이라 합니다. 종려주일이라 함은 -2천년 전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예루살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한 데서 연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왕이나 개선장군을 환영할 때 -경외심의 표현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사람들이 - 주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한 것은, - 곧 주님을 그들의 왕, -메시아로 영접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을 -동시에 고난주일이라 불리는 까닭은, - 그로부터 닷새 후인
금요일에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기에, -우리를 위해 당하신 그 고난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기막힌 것은, -주님을 향해 열광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던 바로
그 예루살렘 사람들이 - 불과 닷새 후에 - 이번에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 주님을 못 박아 죽이라고 함성을 질렀다는 사실입니다. - 똑같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
그들이 - 그토록 말과 행동이 달라졌던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주님께 열광했던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욕망을 이루어주실 것이란 - 자신들의 망상으로 인함이었고, - 닷새만에 주님을 죽이라고 분노했던 것은 - 주님께서 그들의 욕망밖에 계시는 분이심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님을 향해 흔들었던 것은 -실은 종려나무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손이 움켜쥐고 있었던 것은 - 바로 그들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들은 욕망의 손을 흔들며 주님을 환영했다가, - 그들의 욕망이 무산되는 즉시 - 그 욕망의 손으로 -주님을 못 박아 죽이는 공범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이 -그들의 욕망의 손으로 죽인 것은 주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생명을 -스스로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바로 욕망을 움켜쥔 자기자신들의 손으로 말입니다. - 갈라디아서 5장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바울은 주님께서 못 박히신 십자가에서 -주님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못 박힌 -욕망에 사로잡혀, -자신의 지체로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던 - 자신의 옛 사람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은 -못 박히신 주님의 손안에서, - 욕망의 도구로 욕망을 움켜쥐고 있던 - 자신의 두 손이 못 박힌 것을 보았습니다.
못 박히신 주님의 발 안에서 -불의의 병기로 –불의한 자신의 두 발이 못 박힌 것을 보았습니다. - 그처럼 주님 안에서 - 그의 옛 지체가 주님과 함께 못 박혔기에, - 그의 지체는 의의 병기, -주님의 지체로 거듭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통해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릇된 삶을 - 완전 청산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 중에 - '손을 씻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 손이란 몸의 한 지체일 뿐인데, - 왜 손을 씻는다는 것이 - 옛 삶을
송두리째 청산하는 것과 동일시되겠습니까?
한 인간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의 손이 무엇을 움켜쥐고 또 그 손으로 무엇을 행하고 있느냐로 - 판가름되기 때문입니다. - 이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 정말 손을 씻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모두 묵상 한 뒤 – 우리가 살펴볼 사도행전 12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 사도행전 12장1절-2절 -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바울이 더러운 야망과 불의의 손을 씻고서 -주님의 지체가 된 것과는 정반대로, - 당시의 유대 분봉왕이었던 헤롯은 -손을 들어 사도들을 죽이고- 투옥시키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헤롯왕은 겉으로는 화려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일평생 더러운 손을 씻지 못한 사람이었고, -그 더러운 손을 씻지 못한 채 -어이없는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이야말로 -씻지 않은 자신의 더러운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평생토록 갉아먹기만 한, - 대표적인 어리석은 인간이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 그릇된 삶으로부터 - 손을 씻고 - 발을 빼는 사람입니다. -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 우리의 힘, - 우리의 능력으로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의 자신만을 의지한다면 -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영영 불가능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손과 발을 -새로운 피조물로 -회복시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두 손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탐욕의 더러운 도구였던 우리의 두 손도 함께 못 박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두 발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 불의의 무기였던 우리의 두 발을 - 함께 못 박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덧으로부터 우리를 영원히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혈로 -우리의 더러웠던 손과 발을 - 눈보다 더 깨끗하게 이미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사람은 -본문의 바울처럼 -자신의 손과 발을, 자신의 지체를 진리와 생명의 도구로, -의의 무기로, -주님의 지체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국회의원인 시인 도종환 선생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있으랴 - 이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있으랴
젖지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 폭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젖으면서도 -눈부신 꽃망울을 터트리는 데에 -꽃의 참된 의미와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 그 인생에 결코 비바람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 때로는 폭풍이 -우리 인생의 뿌리 채 흔들 수도 있습니다. -비와 눈보라가 - 우리 가슴마저 시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의 손과 발을 진리와 생명의 도구로, -의의 무기로, 주님의 지체로 하나님께 드리십시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 주님을 믿는 자란 - 주님과 함께 욕망의 지체였던 자신의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를 의미하는 까닭에 -참된 믿음은 우리의 손을 씻는 것으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마십시다.
씻은 손이 아니고서는 - 바르게 살 도리마저 없는 것은, - 씻지 않은 손이란 결국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는 흉기 이상이 될 수 없는 탓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며 보혈을 흘리셨습니다. -당신의 그 영원한 생명의 피로, -죄에 얼룩진 우리의 더러운 손을 씻어주시려고 말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진정한 구원자이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3408 - 사명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을 ] ...
================{ 기 도 }
나를 살려주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을 당하신 주님 - 주님께서 흘려주신 그 보혈로 이제 나의 손을 씻습니다. -씻어진 나의 손이 -의의 병기, -진리의 도구, -주님의 지체가 되게 하옵소서. - 씻어진 나의 손이 더 이상 나의 생명을 갉아먹는 흉기가 아닌, - 뭇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생명의 이기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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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하신 사랑과
보혜사 성령님의 감화감동 충만한 역사가
주님께서 흘려주신 그 보혈로 씻어진 나의 손이 -의의 병기, -진리의 도구, -주님의 지체가 되기를 소망하고 다짐하는 - 주님의 백성들과 비전교회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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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순복음 비전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얼짱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