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가파도 동쪽 해안.
조선왕조실록 성종22년(1491년) 5월 16일에는 “전일 제주(濟州) 가파도(加坡島)의 아마(兒馬=길들지 않은 작은 말) 3필을 좋은 준마(駿馬)로 여겨 별도로 길렀으나, 한 마리는 병이 들어서 죽고 두 마리는 간 곳을 알 수가 없으니, ….”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매우 일찍부터 가파도를 방목장으로 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승정원일기 인조5년 정묘(1627) 10월 9일 기사를 보면 〈전생서 제조(典牲署提調)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제향(祭享)에 쓸 흑우(黑牛)를 제주(濟州)에서 내어다 충청도에서 나누어 사육하고 있는데, 기일 전에 기르다가 살이 찌기를 기다린 후에 올려 보내면 본서에서는 또 수개월 동안 특별히 사육한 후에 진배(進排)하는 것이 관례입니다.”〉라고 하여 제주도에서 흑우는 중요한 진상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형상 목사가 쓴 남환박물(1704)의 誌島 條에는 가파도가 盖波島라고 나온다. ‘물길은 30리이고 둘레는 40리이다. 수목은 없고 풀이 많아 무성하여 사마장(私馬場)으로 하였다’라고 설명하였다. 같은 책의 誌馬牛(목장) 條에는 대정현 지역에는 5곳의 자목장이 있다고 하면서도 가파도는 언급하지 않았다. 즉, 예전부터 가파도는 말목장으로 이용되었지만 국영목장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720년을 전후한 시기에 제주인 이지발(李枝發)이란 자가 말을 가져다 풀어 키운 적이 있었고 『제주읍지』에 의하면, 목장의 공간규모가 주위 10리 정도였으며, 방목하는 소는 103두라고 했다. 대정읍지에선 75마리가 사육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李枝發 : 고량부삼성사재단에 보관된 <급제선생안> 서두의 발문(跋文) 말미에 ‘歲在康熙上章困敦 仲夏上浣 戊戌榜 出身 李枝發起’라 하고 있다. 이로 보아 숙종46년(1720) 5월 상순에 이지발(李枝發)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2년 전인 숙종44년(1718)의 무술방 출신, 즉 무과 합격자로서 아직 임관되지 않은 자이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별둔장이란 1751년 목사 정언유(鄭彦儒)가 조정의 제사에 희생으로 이용하는 흑우를 방목하기 위해 대정읍 가파도에 설치한 특별 목장이다. 다만, 별둔장을 설치했다고만 되어 있고 잣담을 쌓았는지의 여부는 기록이 없어서 이 때 잣담을 쌓은 것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가파도 별둔장(加波島 別屯場)에서는 흑우를 방목해 진상에 대비하기 위해서 낮고 평평한 완경사지[용암대지]를 목장으로 이용했다. 가파도는 제주도 남쪽에 위치해 겨울철에도 온화하여 연중 방목이 가능했던 섬이었다.
가파도 별둔장의 최고 책임자인 우감(牛監)은 모슬진 조방장(助防將)이 겸했으며, 찰색사 1명, 군두 〇명, 목자(牧子) 8명에 의해 목장이 운영되었다. 특히 목자는 16세부터 60세까지 평생 동안 역(役)으로 우마생산과 관리를 담당했던 사람들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세습직이었다. 1807년 「호적중초(戶籍中草)」에는 대정읍 하모리에 당시 28세인 강성발(姜成潑)이라는 목자가 등장한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일성록 정조8년 갑진(1784) 11월27일 기사에는 제주 목사 엄사만(嚴思晩)이 진휼을 청한 장계를 회계(回啓)한 데 대해 하교한 말 중에 〈… 내년 추수 때까지 천신(薦新)하는 황과(黃果) 및 제향(祭享)에 쓰는 흑우(黑牛)를 제외하고, 각전(各殿)의 삭선(朔膳)에 들어가는 물선(物膳),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 내국(內局)에 진상하는 약재(藥材), 서울과 지방의 각 영문과 각 아문에 진배(進排)하는 물종(物種), 내사(內司) 및 각 궁방(宮房)이 소관하는 노비의 신공(身貢)을 특별히 탕감(蕩減)하여 진자에 보태도록 하라.〉고 하였다. 다른 것은 탕감하여도 제향에 쓸 흑우는 탕감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그만큼 가파도 별둔장의 흑우 사육은 중요하였을 것이다.
★薦新=새로 농사지은 과일이나 곡식을 먼저 사직이나 조상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드리는 의식을 지칭하는 용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祭享=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朔膳=각 도에서 나는 물건으로 차려서 매달 초하루에 임금께 드리는 수라상을 이르던 말
★物膳=음식을 만드는 재료
★進排=물건을 나라에 바침
★三名日=조선시대에 임금의 탄신일, 정월 초하루, 동지를 이르던 말
★身貢=조선시대에 노비가 몸으로 치르는 노역 대신에 납부하는 공물
승정원일기 순조23년(1823) 3월 21일 기록 〈卽見濟州牧慰諭御使趙庭和別單, 則其一, 大大靜加波島旌義牛島卽牛馬牧養之場, 而牛馬則不合於貢獻之資, 土地則肥沃, 可以作數千頃田疇, 今以牛馬分置於附近各場, 仍爲許民耕食, 三年後執稅, 以爲補公用防民役之地事也. ∼중략∼ 何如? 傳曰, 允.〉(제주목위무어사 조정화의 보고를 보면 ‘대정현 가파도와 정의면 우도는 우마를 기르는 목장입니다. 그러나 우마들이 공헌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하고 토지는 비옥하므로 수천경의 밭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제 우마를 가까운 목장으로 나누어 놓고 백성들에게 경작할 수 있도록 허가해서 3년 후에는 세금을 거두도록 하면 공용을 보충하고 민역을 방지하게 될 것입니다.’ ∼중략∼ 어떠하십니까? 하니 임금께서 윤허하였다.)
이 시기에 가파도 별둔장을 폐지하고 백성들이 밭갈아 먹도록 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임금이 윤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기경이 허가된 것은 1842년이고 사람들이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843년이었다.
헌종6년(1840) 영국 선박 2척이 정박해 흑우를 약탈해 간 사건이 발생함에 따라 목장관리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정현감과 제주목사 구재룡(具載龍)을 파면시켰는데 이에 대한 왕조실록(헌종6년 경자(1840, 도광20) 12월30일)을 보면 다음과 같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지금 전라 감사 이목연(李穆淵)의 장계(狀啓)를 보았더니, 제주 목사 구재룡(具載龍)의 첩정(牒呈)에 이르기를, ‘대정현(大靜縣) 모슬포(墓瑟浦) 가파도(加波島)에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 2척이 와서 정박하여 감히 포를 쏘고 소를 겁탈하는 변까지 있다.’ 하고, 이어서 현감(縣監)을 파출(罷黜)하고 나처(拿處)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랑캐의 배가 바다에 출몰하는 것은 본디 교활한 버릇이니, 오랫동안 해이해진 해졸(海卒) 때문에 어모(禦侮)를 튼튼히 하라고 책망하기 어렵다 하나, 온 섬의 포항(浦港)이 다 사변에 대비하는 중지(重地)에 관계되므로, 경비하는 방도를 본디 충분히 규찰(糾察)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저들은 40여 인에 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먼저 스스로 두려워하여 달아나기에 겨를이 없기까지 하겠습니까? 변정(邊情)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해당 목사 구재룡을 파출하고 나처하소서.”하니, 윤허하였다.
그들은 대포를 쏘며 흑우를 약탈하였다고 했는데 이 때 쏘았던 대포알은 크기가 둥근 박만 하고 무게는 30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후 헌종8년(1842)에는 흑우를 인근 무릉리의 모동장으로 옮기고 1843년에 폐장한 다음 경작을 허용했다.
우마가 밖으로 탈출할 염려가 없는 섬인데도 잣담을 두른 것은 바닷가의 크고작은 돌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돌 사이로 발이 빠지면 다리가 부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가파도의 동쪽 해안에 잣담이 남아 있다. 서쪽은 절벽이어서 처음부터 잣담을 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바닷가의 둥글둥글한 돌을 이용하였다. 폭은 1m 남짓 되는데 바깥쪽은 굵은 돌을 이용하였고 작은 돌로 속채움을 했다. 일부 구간은 이중으로 담을 쌓은 곳도 있다.
★누군가는 이 잣담을 환해장성이라고 하여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우도에도 목장 잣담이 있는데 역시 환해장성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우도에 이주하여 살고 있는 분들이 팀을 이루어 우도를 공부하면서 처음 접한 정보를 바꾸기 힘든가 봅니다.
우도와 가파도는 1842년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입니다. 1843년에야 정부로부터 '기경허가(밭 갈아 농사짓는 것을 허가)'가 된 곳이어서 방어용으로 성담을 쌓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00422 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