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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설교 | |
성경낭독 : 창 2:15-17; 3:1-7; 마 4:1-11 본문 : 행 17:1-9 제목 : “세상 나라와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 |
세상 나라와 대비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
이제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 주의 수도로 번창하던 상업 중심지였습니다. 1절 말씀에 보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암비볼리가 빌립보에서 남서쪽으로 53km 정도 떨어져 있고, 아볼로니아는 다시 암비볼리에서 남서쪽으로 43km 정도 거리였습니다. 데살로니가가 암비볼리로부터 약 56km 거리에 있었으니 대략 빌립보를 출발하여 데살로니가로 여행하는 데는 150km 정도를 간 셈입니다. 지금 우리로 치자면 부산에서 출발하여 위로는 영덕 정도까지 갔거나, 남해로 따라 갔다면 여수나 광양 정도까지 간 거리입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자신이 불리움 받았다는 것을 잘 알았음에도, 언약의 우선권 때문에 항상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갑니다. 2절을 보니까 유대인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설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말씀을 전할 기회를 ‘어떻게’ 사용했을까요?
데살로니가에서의 복음 전파
1)
3절에 보면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유대인들에게 가르친 말씀을 두 단어로, 곧 “뜻을 풀었다”와 “증언했다”라는 두 말로 설명하고 있는데,
“뜻을 풀었다”(헬. 디아노이고)는 것은 단어 자체의 의미로는 ‘닫혀진 것을 완전히 연다’라는 뜻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낙심하여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난 사건이 나오죠. 거기에서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 설명해주셨을 때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할 때 사용된 말이 이 말입니다. 즉 “뜻을 풀었다”는 것은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써, 거기 회당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밝혀준 것, 이해를 완전히 새롭게 하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친 것을 의미합니다.
“증언했다”(헬. 파라티떼미)는 원래 ‘앞에다 놓다’라는 말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는 ‘위탁하다’, ‘맡겨놓다’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평범하게 사용하자면 ‘물건을 앞에다 놓는 것’에도 쓰는 말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에 사용되면 중요한 뜻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에 이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딤전 1:18 아들 디모에댜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부탁하라
이 말씀에서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 명한다”의 “명한다”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말씀의 위탁’을 의미합니다. 전수받은 말씀을 맡겨두는 것, 곧 말씀을 전수 받아 갖게 되는 것, 위탁받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전서의 말씀을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디모데후서에서도 사용합니다. 단지 차이라면 디모데전서에서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위탁한 것이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디모데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즉 이런 용례들에 기초해 생각해 보면, 바울이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 “증언했다”는 것은 단순히 증명을 했다기보다는, 복음의 무게, 곧 이 말씀이 전해질 때, 거기에는 ‘위탁’과 ‘전수’가 있다는 것,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런 말씀입니다.
2)
바울이 전한 말씀의 내용은 3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장 고전적이면서 명징한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할 것
이것을 다시 어떻게 정리했습니까?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다
그렇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아직 구약성경밖에 없으니 이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구약성경을 들어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이 예수께서 바로 구약성경이 예언하여 온 바로 그분이다! 라는 사실을 말했던 것입니다.
3)
그리고 반응은 바로 그 다음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놀라운 파괴력을 나타냈습니다.
우리말로 읽으면 이 뉘앙스가 잘 살지 않는데, “권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고, “따랐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둘 다 너무 밋밋한 것 같습니다.
“권함을 받았다”(헬. 페이쏘)는 좀 더 극적인 표현을 써보자면 ‘설복을 당했다’라는 의미입니다. 당연히 수동태입니다. 설득을 당했다, 마음이 끌려갔다, 그러니까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완전히 마음이 설득당한 것이죠. 정말로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전해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3일 동안이나 가르쳤으니 내용은 많았겠습니다만, 어쨌든 요지를 말하자면 우리가 앞서 들은 대로 “그리스도께서 해를 받고,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그분이 구약성경이 말하던 그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발칵 뒤집혔습니다! 완전히 설복당했습니다.
그래서 “따랐다”(헬. 프로스클레로오, 하팍스) 역시 너무 밋밋한 번역입니다. 이 역시 좀 더 강력하게 번역하자면 ‘추종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요즘 걸그룹이나 BTS를 좇는 10대 아이들을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듣지도 않는 CD를 수십장씩 사고, 포토카드를 한 장에 몇 만원씩 거래하는 아이들이 요즘은 정말로 많습니다. 이런 광팬들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이런 추종자가 되었다는 것이죠. 말씀을 듣고 완전히 뿅 간 것입니다. 여기다가 생명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을 보니까 이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생겨났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4절에 우리말로 번역한 것만 읽으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는 말은, 단순히 어디를 가는데 따라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그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정도로 보일 뿐이지만, 사실은 이 말은 바울과 실라의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당시 거기에서 모이던 유대교 회당과는 완전히 별개로 ‘새로운 공동체를’ 꾸릴 정도로, 대단한 반향을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그 3일간의 말씀 전파로 거기 새로운 교회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빌립보에서의 복음 전도로 ‘빌립보 교회’가 생겨났듯이, 여기 데살로니가에서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생겨났습니다. 놀라운 복음의 능력입니다.
두 나라의 대립
자,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데살로니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가지고 한 주제에 대해 상고해 보도록 합시다. 복음이 전해지자 데살로니가 사람들 속에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들의 반응을 잘 관찰해 보면, 여기에서 ‘복음이 일으키는 독특한 성격’이 있습니다. 이것을 살피는 것이 오늘 설교의 주된 내용입니다.
1. 유대인들의 반응
바울과 실라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거기 있던 그들에게는 ‘낯선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거기에는 대단한 반향이 있었습니다. 즉시 공동체가 세워질 정도의 ‘강력한 추종자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반대편에는 이에 대항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쉬이 상상하실 대로, 곧 유대인들입니다. 5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
그렇습니다. 4절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들은 하나님의 복음, 곧 “예수가 그리스도다”라는 말씀을 듣고, 커다란 반응을 보였지만,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곧 질투심으로 가득하여 이들을 반대합니다.
심지어 이들은 물리력을 행사합니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했고, “야손의 집에 침입하였다”고 5절에 나오는데, 7절을 보면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한 것으로 보아, 바울과 실라가 머물고 있던 집의 주인입니다. 이 야손의 집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부린 것입니다.
2. 이유가 무엇일까? : 그들의 대응의 방식과 나타나는 점
하지만 여러분, 사도행전이 이 유대인들의 반응을 그릴 때, 어떤 상(象)이 떠오르도록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네 회당에 들어와서 삽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휘젓고, 사로잡아버리고서는,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할 정도의, 큰 무리를 이끌고 다니게 되어 버린 이 사람들을 보고서는 “질투심으로 가득하여” 이들을 향하여 해코지를 하게 되는데, 이들이 행하는 행동 양태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중요한 주제를 하나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순복했어야
물론, 우리가 가장 먼저 전제해야 하는 것은 ‘복음을 들으면 순복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대답은 분명합니다.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믿은 하나님과 바울과 실라가 전한 하나님이 ‘다른 하나님’입니까? 아닙니다. 공통의 하나님입니다.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의 합당한 반응은 “아멘!”, “할렐루야!”여야 합니다. 이런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제가 큰 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부교역자를 한 명 들였습니다. 그런데 설교를 시켰는데 말씀을 잘 전해요. 설교를 듣더니 사람들이 막 말씀으로 회복되고, 또 삶에서 회개가 일어나고, 온 교회가 그 부교역자의 설교 때문에 큰 기쁜의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복음의 진리가 막 사람들을 두들겨깨웁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임목사로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사람의 길’과 ‘제자의 길’이 나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자주 보는 양태는, 이렇게 되면 담임목사가 그 부교역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쫓겨날 수밖에 없도록 여기저기 악행을 행하는 것이죠. 잘 하고 있는 것을 불러서 핀잔을 주고 괴롭히고, 괜히 설교 내용을 갖고 트집을 잡고 하면서 못 살게 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담임목사가 ‘제자로서의 길’, 곧 ‘자기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이것을 오로지 ‘권력 싸움’으로 본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런 사람, 이런 목사, 이런 교회가 정말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저 멀리 있고, 자신은 제자가 아니며, 따라서 교회의 CEO로서 자기의 권력에 위해가 되는 이를 제거해버리려고 하는 것! 이것이 교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일입니다.
저는 이런 예를 생각할 때마다, 잊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실제로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주 이것을 되새깁니다. 저는 외부 강사가 교회 오실 때, 제일 말씀을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합니다. 복음의 주인, 교회의 주인은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우리 교회에서 목사 양성한 분이 있었지요. 노희태 목사님입니다. 저는 노희태 목사님 목사 훈련시킬 때,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 되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밑에 있는 사람이다, 내가 훈련시키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노 목사님이 말씀을 전할 때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듣고 아멘하려고 했습니다. 왜 이런 노력이 필요합니까? 사람은 ‘제자의 길’보다 ‘사람의 길’, ‘권력의 길’로 접어들기가 매우 쉽기 때문입니다.
5절에서 유대인들의 반응을 “시기하여”, 곧 “질투가 가득하여”라고 한 것은 이런 이유입니다. 사실은 유대인들은 ‘유능한 설교자들’이 와서, ‘자신들도 잘 알지 못했던 그리스도의 실체’를 알려주었다면, 거기 있던 “경건한 헬라인들과 귀부인들”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해야 합니다. 자기들 역시 하나님을 전하는 이들이 아닙니까? 심지어 이방 나라입니다. 이방 잡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많은 곳입니다. 거기 야웨 하나님을 잘 전하는 이들이 왔다면 응원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약성경만 배워 알고 있었지만, 이제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면서, 이분들을 극진히 대접하고, 이 복음을 더욱 열심히 듣기 위해 노력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전’보다는 ‘자신들의 권익’에 더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그들에게는 단지 ‘눈엣가시’였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답은 일단 분명합니다.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들은 ‘들었어야’ 합니다.
2) 로마 사람의 방식과 흡사함
자, 그리고 그들의 대응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을 한 번 보십시다. 그들이 어떻게 하는지, 그 방식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주목하면서 보십시오.
먼저 6절을 보겠습니다.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이들은 바울과 실라를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들이 다른 지역에 있었을 때 복음 전한 일이 유대교를 위협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정보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를 지칭하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다”라고 합니다. 바로 앞 도시였던 빌립보에서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한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16:20-21)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은 빌립보의 이 여종의 주인들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말합니다! 분명히 여종의 주인들은 “우리 로마 사람들이”라고 말했는데, 여기 데살로니가의 사람들은 분명히 유대인들인데,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소할 때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이르렀다”라고 합니다. 보는 관점이 돈벌이를 잃어버려 고소하던 빌립보의 로마 사람들과 거의 흡사합니다.
우리는 이 유대인들의 특성이 ‘로마인들의 특성과’ 매우 흡사하다는 데 유의해야 하겠습니다.
3) 가이사를 따라야지!
그리고 계속해서 뭐라고 말하는지 봅시다. 7절을 보겠습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이 말씀은 이들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굉장히 희한하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사실상 아무런 폭동을 일으키지도 않았고, 그저 설교를 했을 뿐인 바울과 실라를 두고, 사회를 전복시키려는 세력이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이 매도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들은 유대인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만’ 섬기는 자들이기 때문에, 로마의 황제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만’ 섬기는 데 위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유대인이든 그리스도인이든, 사실은 로마의 황제를 신처럼 숭배하는 데 있어서는, 반대하는 데 있어 종교적 이해가 일치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유대인들의 고소는, 어쩌면 ‘자기 자신들을 위협하는’, ‘자기 자신들에게도 향할 수 있는’ 위험한 종류의 고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마카비 시대를 보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확보하기 위해’ 혹은 ‘성전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 종교의 이익에’ 조금 반하는 상황이 생기자, 주저없이 ‘가장 충실한 로마 시민으로서의 길’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이 복음 전파자들과의 동질성 속에서, “우리 역시 로마의 황제를 섬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소”라고 말하는 대신에, “나는 매우 성실한 로마의 시민으로서 로마 황제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도구로 삼아서! 이것을 무기로 삼아서 바울과 실라를 모함하여, 반사회적 세력으로 규탄하려고 합니다. 그야말로 종교가, 세속의 칼과 창을 무기로 삼아, 다른 종교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상황! 심지어는 그 충돌하는 두 개 종교가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그렇게 하고 있는 상황!
이것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한국 사회 안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이것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이런 모습은 가장 대표적인 ‘어용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한국 기독교는 일제 강점기에는 앞장서서 일본 비행기 만드는 일을 위하여 밥그릇, 숟가락을 모아 갖다 바치는 선봉장 역할을 했고, 심지어는 ‘미소기바라이’, 곧 목사들이, 일본 측에서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솔선하여 일본 신사까지 가서 일본식 세례를 받았습니다.
군부 독재의 시대에는 어떠했습니까? 정권의 가장 앞잡이에 교회가 서 있었습니다. 독재자를 찬양하고, 탄압받는 민중을 향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역시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노회나 시찰회를 가보면 정치인과 목사들이 얼마나 결탁되어 있는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어용 기독교’, 곧 세속적 힘을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적 적을 죽이기 위해서라면 그 정권의 힘을 주저없이 사용하겠다! 이것이 여기 말씀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점에서는 오늘날에도 기독교가 통일교나 신천지, 혹은 단군을 섬기는 종교 같은 것과 맞서 싸우기 위해 정권과 결탁하는 모습들을 종종 보는데, 이와 유사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이 7절 말씀에서 놀라게 되는 것은,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로마의 황제를 “우리의 왕”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인데, 바울과 실라를 고소할 때 “이들은 로마 황제 말고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를 왕으로 섬기는 이들이다!”라고 고소합니다. 동일한 약점을 가진 이들이 자기 이익을 위하여 같은 약점을 가진 종교적 공동체를 공격하는 모습입니다.
4) 방법론조차
그리고 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사용하는 도구도 보십시오. 5절 말씀을 보면 이 유대인들이 야손의 집에 쳐들어갈 때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니까 매우 점잖게 쓴 것이죠. 쉽게 말하자면 깡패들을 동원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넷플릭스에 ‘수리남’이라는 영화가 인기를 끌었죠. 거기 보면 악역 주인공이 외형적인 직업은 목사입니다. 목사인데, 마약 대부이죠. 여기 보면 이 악역의 황정민은 평소에 “주여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하는 식의 말이 입에 붙어 있는 사람이지만, 마약의 판권을 얻기 위해 중국 갱단들과 싸우거나, 혹은 더 돈이 되는 루트를 얻기 위해서 거리낌없이 사람을 죽이고, 자기 휘하에 총으로 무장한 깡패 집단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바울과 실라로 인하여 동원된 새로운 기독교의 무리들을 처단하기 위하여 사용한 방식도 경악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여러분 중 누구라도, 우리 교회들 중 누군가가, 목사들 중 누군가가, 신천지를 없애버리기 위해서라면 조폭을 동원해도 괜찮다......라고 하면 동의할 사람이 있습니까? 단군상 철거를 위해서는 밤중에 깡패들을 데리고 가서 뒤엎어버려도 괜찮다......라고 하면 동의할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하겠느냐? 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런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정치적 스탠스가 다르면, 예를 들어 보수측에 속한 목사가 진보측에 속한 목사를 향해서, 같은 노회 안에서도 “빨갱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저 사람들은 정말 여차하면 그런 방법론도 쓰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간혹 충분히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대상, 예를 들면 앞서 말씀드린 신천지나 단군상 같은 것을 향해서는, “저건 사탄의 일이니까, 가서 엎어버려도 된다”라는 식의 생각을 가진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이들은 그저 설교자들이었던 바울과 실라를 처단하기 위해서 깡패들을 동원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손의 집에 들어가서 행한 행동들도 보시면 매우 폭력적입니다. 5절과 6절을 읽어보시면 바울과 실라를 끌어내려고 찾았는데 찾지 못하자 그 집 주인이었던 야손과 다른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는 “과연 이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은 많은 이들이 이렇게 합니다. 단지 현대에 와서 사람들이 좀 더 세련되어져서 이런 무자비한 방식으로 하지 않을 뿐, 자신이 속한 종교 집단이 단지 이익단체가 되어버릴 때, 자기의 기득권을 위해서는 무자비한 짓을 마다하지 않는 많은 종교인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이 나라를 통해 보여주려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
자, 이들의 행동을 보고 이제 오늘 말씀의 주제를 정리해 보도록 합시다.
사도행전 17장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사실을 기술하고, 거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대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유대인들의 반응의 양태,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는가에 주목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의 행동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이 이 유대인들의 행동을 ‘이런 방식으로’ 적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우리가 오늘 말씀에서 발견하게 되는 이 유대인들의 가장 강력한 특성은
교회가 세상 나라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이 이 유대인들의 행태를 이런 식으로 적는 이유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대립’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서 이들 유대인들이 ‘기독교’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교’라는 사실은, 실제로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신앙’이 동기인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종교’를 동기로 움직이고는 있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동기로 움직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교회’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한 수단’이지, ‘하나님의 집’ 같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이것이 무서운 점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바른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면서 무서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라는 것은 정말로 이렇게 ‘세상 나라의 성격’과 비슷해도 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둘 다 할 수만 있으면 힘을 사용하고, 세상 권력을 사용하지만, 단지 그 일 이 행해지는 장소가 세상이냐 교회냐의 차이일 뿐이다......이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것인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대립된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대립된다”는 점을 확립합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마 26:53)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정황은 베드로가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쳐서 떨어뜨렸던 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때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한다”(52절)는 말씀도 함께 하셨는데, 단순히 “칼을 든 자가 망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이루시는 나라가 얼마나 세상이 이루려는 나라와 다른지를 말씀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복음의 성격, 복음의 핵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이 “미련한 것”(고전 1장)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천한 육신을 입으시는 것(빌립보서의 ‘케노시스’)은 세상 나라에서는 절대로 하지 않을 방법론입니다. 지고, 빼앗기고, 밟히는 일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세상 나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한 바울가 실라의 무리, 또 이에 대한 데살로니가 교회의 반응과, 그에 대립되는 ‘같은 종교 집단처럼 보이지만’ 매우 세상 나라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을 비교하여 보여줌으로써,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대립된다”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반대 측면에서 살펴보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 1 : 비정상
그리고 구체적으로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취한 방법론이 얼마나 교회와 다른지 말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권세’와 비슷한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로마인들은 “이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이 똑같이 말합니다. 그러면 이때 이들이 말한 “천하를 어지럽히는 것”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세상이 유지되는 방법론’입니다. 수많은 예를 들 수 있습니다. 주식 시장에서 더 많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더 적은 주식을 보유한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더 유능한 인재는 그 그룹 안에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합니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은 아이가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합니다.
이게 이상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입니다. 당시 빌립보나 데살로니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로마의 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제가 방금 말씀드린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합당하고 당연한 법칙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보기에 새로운 복음을 가지고 온 사람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통상적인 삶의 방식’과 너무나 다른 것을 말하기 때문에 ‘위협적인 것’이었습니다.
지난 주중에 직분자 교육에서 우리가 ‘가난’과 ‘부’에 대해 배웠습니다.
요지를 정리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가난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부에게 제일 먼저 요구되는 것은 청지기 정신이다
‘세상이 유지되는 방법론’에 의거하자면, 가난은 ‘악한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도 원하지 않는 무언가’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난하라”고 요구합니다. “가난한 사람이 천국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방법론입니다. 성경이 “가난하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난 공부 시간에,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은 단순히 극복할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배웠습니다. 제가 그때 직분자들에게 설명했는데,
한 아이가 500원씩을 3년을 모아서 산 레고 장난감과
50만원을 갖고 있어서 그냥 쓱 가서 사갖고 온 레고 장난감은
겉으로 보기에는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지만, 후자의 아이는 절대로 전자의 아이가 갖는 기쁨은 갖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후자를 추구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가난’이 얼마나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지는 모르는 채로 살아갑니다. 이것이 소위 ‘통상적인 삶의 방식과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세상에게는 위협이 되는 기독교의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교회가 이런 ‘비정상성’(사회의 눈으로 볼 때)을 가져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반대 측면에서 살펴보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 2 : 폭력적 방법론
이것은 부당한 것, 불법적인 것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폭력적 방법론’을 동원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역시 교회의 모습을 비추어줍니다.
최근에 검찰이 법을 가지고 폭력을 휘두른다는 뉴스 기사가 많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항상 그래왔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권세를 가지면 자기 또한 그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교통 경찰은 교통 신호를 어기고, 검사는 재벌들에게 불법적 향응을 제공받습니다. 타인이 그렇게 하면 법봉으로 심판할 것이지만, 내가 하니까 괜찮습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법에 대한 시각’, ‘세상의 정의나 도덕에 대한 시각’은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이번 주 금요스터디에서 잠깐 말한 대로,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의 시각은 “법을 어기지 않는다면 나는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 안에서, ‘성령님의 지도하심’을 통하여 선악과 가부를 결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법을 어겨도 들키지 않으면 괜찮다”던가, “내가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다면, 아무도 나를 건드릴 사람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식의 생각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법’이 있고, 따라서 교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법 앞에서 신앙의 양심을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들키지 않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식의 방법론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깡패들을 동원함으로써,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어떤 방법론도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교회는 무엇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교회는 세상 나라와 다릅니다. 우리는 혹 법을 어기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신자는 자주 양심에 고통을 받는데,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아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정 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