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불효한 이아들이 천지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고 지금껏 멍하고 구차스럽고 모질게 목석처럼 죽지 않고 살았던 것은 소자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얼마나 사무치는 원한을 가졌기에 이토록 격한 감정을 토로했을까? 다름 아닌 정조 임금이다. 아버지 사도제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이 가장 큰 원인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1776년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는 많은 것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끓임 없는 암살 위협과 역무, 왕대비 {정순황후)의 간섭 등으로 ‘왕 노릇’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거기다가 정조가 믿었던 최측근 홍국영까지 배신하였다. 죄인들을 재판하고 유배 보내고 처형하는 날들의 큰 슬픔이 강타한다.
정조는 자식이 없었다. 왕에게 아들이 없음은 ‘레임덕’의 시작이다. 정조의 최측근 홍국영이 딴마음을 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던 정조가 나이 서른한 살인 1782년 원자(문효세자)를 본다. 원자가 태어난 날 전, 현직 대신들을 불러“종실의 번창은 지금부터이며 개인적으로 아버지란 호칭을 듣게 되어 좋다.”며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정조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준 일생일대의 경사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뿐이었다. 1786년 4월 초 전국에 홍역이 들었다. 정조는 약제 처방 등 다양한 구제책을 발표한다. 4월 한 달은 ‘홍역과 전쟁’이었다. 홍역 귀신들은 정조를 비웃기라도 하듯 5월 3일 궁궐 넘어들어 문효세자를 공격한다. 곧바로 정조는 의약청을 설치하고 손수 약을 달여 먹이는 정성으로 홍역을 퇴치한다. 문효세자가 홍역에서 완치되자 5월6일 의약청을 철수시키고 대사면령 등을 발표하여 백성과 기쁨을 함께하였다. 그런데 며칠 후 문효세자가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정조에게 힘든 시간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또 홀로오지 않았다.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가 널 달 후인 9월 14일 갑자기 죽는다. 성씨는 임신 중이었다. 운명은 희미한 희망의 불씨조차 앗아가 버렸다. 또 그해 11월 조카인 ‘상계’ 군이 갑자기 죽는다. 왕실의 위기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불행들이었다.
그 불행의 원인이 어디 있었는지 찾아 나섰다. 의빈 성씨가 죽은 지 보름이 채 안 된 9월27일 정조는 믿고 의지하던 고모부 박명원과 지관 차학모를 대동하여 사도제자의 무덤을 찾는다. 지금의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 삼육의료원 터라고 한다. 지금도 삼육의료원 정문에서 보면 의료원을 감싸 주는 뒷산이 고적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얼핏 보면 주산이 되기에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무덤 터로는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그 터에 뱀이 꼬이고 중랑천 물소리가 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산 아래에 사도제자 무덤을 쓴 것이 화근의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 무덤이 흉지라는 소문을 듣고 있던 터라 직접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현장 답사를 통해 흉지임을 확신한 정조는 천장(遷葬)을 결정한다. 천장 과정은 쉽지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화성 융릉 자리로 최종 결정된다. 그보다 10여 년 전 1659년 남인 윤선도가 최고의 길지로 지목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 말 도선국사가 ‘똬리를 튼 용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형상’의 길지라고 평했던 곳이다. 1789년 천장을 마무리한다.
이 글 첫 인용문은 정조가 천장을 하면서 아버지 사도제자를 위해 쓴 지문 일부이다. 그동안 가슴에 쌓였던 서러운 한들을 아버지에게 격한 감정으로 아뢴 것이다. 천장을 끝내고 점을 친다. ‘자손을 볼 조짐이 있어 나라의 큰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점 풀이였다. 과연 이듬해에 그토록 바라던 왕자가 태어난다. 훗날의 순조 임금이다.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고풍스런 적송과 산세 소리 아름다운 융릉은 그렇게 조성되었다. 왕릉과 그 뒤로 만들어진 숲 속 길은 외국인들에게 ‘조선의 풍수와 정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언까지 길지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해버린다. 측근들은 “풍수설은 공자, 맹자가 말하지 않는바 아니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라고 하자 정조는 그대는 공자 맹자만 알고, 주자 정자는 모르는가?” 라며 이를 지극히 못 마땅해 하며 관직에서 파직시킨다. 그러나 주자, 정자가 생존하였던 11세기에는 이미 하나의 완벽한 사상 틀을 갖추고 있었다. 이때 정자는 ‘장설’을 주장하는 ‘산릉의장’이란 풍수론을 집필하였는데 중국과 조선의 풍수 수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글들이다. 정조의 할아버지 영조는 결국 부인이 잠든 흥릉에 묻히지 못하고 구리시 동구릉의 원릉에 이장된다. 그 자리는 효종이 묻혔다가 이장해 나간 파묘였다고 전해진다.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에 있어 지기와 천기, 그리고 그 내부 공간이 가지고 있는 기의 영향에 따라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분출하는 기(氣)도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심리적으로 불안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게 되고 안절부절 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그 사람에게서 분출되는 기 역시 불안하고 좋은 기를 분출할 수가 없게 되며 집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평온하고 안정적이고 기분이 좋으면 그러한 심리상태의 영향으로 그 사람이 분출하는 기도 좋을 것이며, 이러한 좋은 기는 얼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상대와 이야기하면 그 상대는 좋은 기를 받아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잘 대해 주는 게 기정사실이다.
명당은 풍수지리에서 후손에게 복되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집터나 묘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 풍수지리에 얽매이지 말고 평온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생활하면 된다. 그것이 곧 명당 만들기 있어 우선적일 삶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고은 글향에 머물고 갑니다
즐거운 한주가 되시고
환절기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사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의 즐거움에 머물러 봅니다
2월의 끝자락입니다
행복한 오후 되세요
미경. 선생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이. 있었고 또한 미래의 역사가 될 오늘이 참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2월에 마지막날 건강하세요
벌써 3월이라니 세월의 빠름을 살감나게 하네요.마음도 몸도. 소생하는 3월이 되시기를.
매장문화에서 납골문화로 바뀐 요즘은
풍수지리도 점차 사라지겠지요
문향에 머물다 .갑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이제 정말 봄입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에
산과 들엔 연둣빛으로
곱게 물들고
개나리가 활짝 만개햇습니다
고운님 봄햇살처럼 상큼한
하루이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행운을 빕니다
어깨동무처럼 포근한지라. 남도에서 곧 꽃소식이 전해지겠네요.벌써 개나리가 만개했다고요.저는 아직.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나봐요.에너지 충만한 하루되시길